* 정발본 7권, 연재분 96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A08-63 출발 D-1



    적보다는 가깝고 동료보다는 먼 인도자와의 여정이 바로 내일이었다. 자료실의 모든 정보를 머리에 쑤셔넣을 기세로 두 만점자의 뇌는 사흘간 혹사당하고 있었다. 사실상 지금 출하된다면 하우스 시절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운 물이 올라있을 것이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농담을 던질까 말까 고민하며 새카만 눈동자가 테이블을 향했다. 하지만 농담할 필요도 없이 픽 웃음을 흘릴 만한 광경이 이미 그곳에 있었다.

    엠마. 손등에 닿은 부드러운 노크에 기린은 꿈 밖으로 껑충 달아났다. 안타깝게도 반짝 뜨인 시야에 들어온 짓궂은 미소가 나 안 잤어, 라고 말하는 것보다 빨랐다. 달아오르는 뺨과 함께 엠마는 이죽이는 레이를 흘겨보았다. 어느 틈에 가로채여버린 책이 탁 닫히며 잔소리가 오르골 대신 흘러나왔다.

―― 무리하지 말고 좀 자 두라니까.
―― 레……이야말로.

    그나마도 하품이 섞이는 바람에 5음절 쯤으로 개명된 레……이가 혀를 찼다. 고집하고는. 한여름 녹음을 닮은 눈에서는 여전히 졸음 소나기가 후두둑 쏟아지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눈꺼풀에 성냥이라도 끼울 기세였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다. 성냥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 잊었냐? 난 '수면부족'이라고.

    갑작스러운 기습에 더듬이는 눈을 깜빡이다 웃음을 터뜨렸다. 먼저 생각하던 농담보다 성공적인 수확을 얻은 수면부족은 나름대로 만족했다. 어른스럽지 못한 선배가 붙여준 코드네임은 생각 외로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한 풀 꺾였음을 인정한 더듬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레이 말대로 할게. 음, 한 15분 정도만…….
―― 적당히 알아서 깨울 테니까 그냥 자.
―― ……알겠어.

    생각보다 고분고분했던 데서부터 짐작을 해야 했다. 철이라도 들었나, 기분 좋은 착각과 함께 읽던 책으로 눈을 돌린 레이는 다음 순간 바로 옆에서 털썩 피어오르는 먼지에 눈을 비볐다. 의자에서 일어나나 싶더니 굳이 바닥으로 내려와 제가 앉아있던 책더미 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모양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 ……야, 엠마.
―― 응?
―― 제대로 침실에 가서 자라고, 바보야!
―― 싫어.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건 안 돼.

    그러면 분명 레이는 날 아침까지 놔둘 거잖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벌써 까무룩 도망간 기린을 찾으러 떠나고 있다. 이럴 거면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게 둘 것을, 통탄스러운 기분에 잠긴 레이는 곧 자신이 한 번도 엠마의 싫어, 를 꺾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빠른 포기는 이번만큼은 장점이었다. 그리고 포기보다 빠르게 꺾인 건 엠마의 고개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따뜻한 무게로 짓눌리는 왼쪽 어깨를 곧추세우며 레이가 소리 없이 탄식했다. 순식간에 흰 와이셔츠를 온통 물들인 노을은 끙 소리와 함께 몇 번 고개를 틀며 적당한 각도를 찾더니 금방 제 자리를 찾아 안착했다. 이미 노숙에 익숙해진 머리에게는 훌륭한 침실이었다. 

    엠마의 목이 아프지 않도록 어깨 높이를 조절한 레이는 잠시 후 깊은 한숨과 함께 읽던 책을 던져버렸다. 정말 던졌을 리는 없으니 그의 심정적 표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목덜미에 규칙적으로 스치는 옅은 숨이 간지럽다. 
    4주 뒤 자신이 이 순간을 끔찍하게 그리워할 것이라고는 알지 못하는 귓가가 그저 붉기만 했다. 예지란 독서나 공부와 달리 훈련한다고 가질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으므로.

    다만 관찰력만은 그의 뇌에 잘 스며든 마리네이드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손전등 아래에서 휘갈겨 쓴 밀렵꾼을 보며 레이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구해줘. 수십 번의 처절한 절규를 잇게 될 것은 어느 단어일지, 누구의 펜일지.
    퍼뜩 펜에 생각이 미친 레이의 손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미네르바의 펜이 들어있는 것은 다행히 엠마가 기댄 반대쪽이었다. 문득 그는 같은 펜을 가진 사람을 생각했다. 13년 동안 그 펜으로 빼곡하게 새겨 넣었을 이름 같은 비명을 떠올렸다. 

    이 무게를 기억해라. 살며시 저려오기 시작하는 어깨가 이야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미래만큼의 무게가 거기 숨쉬고 있었다. 그 이름만큼은 결코 적히지 않도록.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를 지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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