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6일 매섭게도 추운 날이었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헷갈리는 계절의 중간선에서 백현은 찬란하게 빛을 내는 예술의 전당을 바라봤다. 손끝은 긴장감으로 딱딱해졌다.


“나보다 늦게 올 거면서 전화는 뭐 그렇게 하냐.”

“그냥.”


찬열은 액정으로 쌓인 부재중 전화를 백현에게 보였다. 온통 백현의 이름이었다. 찬열은 평소 바르지 않던 왁스까지 바르고 온 백현의 머리를 보고 그럼 그렇지, 하는 혼잣말을 가슴 속으로 삼켰다. 열아홉 고등학생 때나 스물아홉 이십대 끝자락에서나, 백현은 경수를 좋아했다. 어두워지는 회장 안에 홀로 나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면 백현은 잠시 숨을 멈췄다. 박수가 멈추고 한가운데 선 그가 음을 맞추며 악보를 다듬었다. 삼층 복도 끝, 버려진 음악실에서 듣던 음악과는 다르게 웅장한 사운드와 처음 듣는 녹턴에 백현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손에는 [ 장애를 극복한 바이올리니스트 도경수. ] 라는 제목의 팸플릿과 함께.




어항 속은 파도치지 않는다

w. 목장




“술 줘.”



백현이 도착한 찬열의 집에서 빈 소주잔을 찬열에게 흔들었다. 혀는 이미 꼬여 있었다. 십 년 만에 들은 연주는 고교시절 들었던 연주보다 더 좋았다. 농축된 실력이 경수를 환하게 만들었다. 귓가를 때리는 시끄러운 북소리도 좋았고 바이올린을 뒷받침하는 베이스 피아노의 선율까지 모두 눈과 귀로 담기 바빴다. 흐르는 태엽이 멈추지 않길 바라는 작은 바람과 함께 말이다.



“변백현 네가 걔 언제부터 좋아했지?”



소주잔이 빙글빙글 돌았다. 때는 고3 초 학급 발표회가 있는 날 사내가 그깟 연주 하나 듣고 울었냐며 나무랄 테지만 그때 백현은 처음 경수의 연주를 듣고 울었었다. 눈은 붉어져서 목메는 연주. 방송부였던 백현은 조명 끄는 것도 까먹은 채 입만 벌리고 그런 경수를 봤더란다. 똑 부러지게 악보를 접어 단상에 미련 없이 나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말했다.



“예쁘다.”



그게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백현 몰래 시작한 첫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때 운 백현의 모습은 방송부원들에게 있어서 암묵적인 소문이었다. 눈치 챈 건 학창시절부터 탁월하게 컸던 찬열이 시초였다. 같은 반은 한 번도 되지 않았지만 학기 초반에 본 그 무대에서의 모습은 잔상처럼 스물아홉의 백현 머릿속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었다. 가시지 않은 여운에 허덕이며 누구나 한번쯤 어떤 단어에 대해 상상을 하면 인상 깊었던 부분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백현에게 도경수 그 세글자는 '첫사랑'



“대학 다 붙은 상태에서 사고 났잖아.”



찬열이 말을 이었다. 오징어 땅콩이 입 안에서 바스라질 때마다 정신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왼손 마비되고 나서 학교도 안 나오고 졸업식 때 얼굴 잠깐 비추고 끝이었잖아.”

“…….”

“너도 참 징한 짝사랑이다.”



탁하는 소리와 일렁이던 소주잔은 멈췄다. 그때 도경수 눈에 바다가 있었어, 바다. 주량을 한참 넘어선 백현은 무너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사고 소식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음악실 옆 교실에 빈 책상에 앉아 앞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이올린 소리, 그걸 듣는 게 백현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게 낙이었는데 폭우처럼 들이닥친 불행이었다. 사고로 왼손을 잃었다는 소문과 나오지 않는 경수. 백현의 첫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찌질하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바보 같은 첫사랑.



“다시 봤으니까 됐어.”



말을 끝마친 백현은 대리를 부르기 위해 폰을 켰다. 자고 가라는 찬열의 말에 그저 고개만 까딱까딱, 가방을 챙기고 나서는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찬열은 온기가 떠난 빈자리를 치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리 기사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던 백현의 두 볼이 차갑게 얼었다. 대리에게 연락이 온 백현은 코트 주머니 안쪽 폰을 만지는 동시에 회장에서 주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발밑으로 굴러들어온 반지 하나가 신발코에 부딪치고 그걸 주운 백현은 밀리는 인파에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꺼내 보인 반지는 가로등 아래서 보면 녹색으로 보였다가도 조금 영역을 벗어나니 푸르게 변했다. 반지의 크기는 약지에 들어갈까 말까한 크기였다.



“대리 부르셨죠?”

“아현동으로 가 주세요.”



반지를 쥔 채 다시 넣으려다 약지 손가락에 끼운 백현은 차에 올라탔다. 차창에 기대어 술에 절은 숨만 색색 뱉던 백현이 적막함에 블루투스로 라디오를 켰다. 핸드폰으로 채널을 맞추고 다시 창에 이마를 문대자 창 틈 사이로 찬바람이 솔솔 이마를 쓸었다.



[ 타임 슬립 영화, ‘ 어바웃 타임 ’을 주제로 신청곡을 틀어드렸는데, 미림 씨는 시간 여행을 한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

[ 저는 처음 데뷔했을 때로 가고 싶어요, 그때 느낀 짜릿함은 최고였죠, 하하. ]

[ 그럼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시간 여행 해볼까요? 미림 씨의 첫 데뷔곡 ‘연애담’ 들으시면서 오늘 하루 마무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십 주년 축하드립니다. 미림 씨! ]



음악은 잔잔하게 퍼졌다. 창밖을 열면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와 함께 퀴퀴한 매연 냄새가 가득했다. 눈을 다시 떴을 무렵은 집에 도착하고 대리 기사가 백현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였다. 피곤했나. 차창에 눌린 머리가 웃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안 바르던 왁스를 발라 생긴 해프닝이었다. 입술로 바람을 부는 백현의 입에서 웃긴 소리가 나왔다. 뭐에 신나서 과음을 한 건가 싶었다. 집에 도착한 백현은 취기에도 모든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섰다. 습한 연기가 올라오고 머리는 이미 샤워기로 왁스를 다 씻어 낸 후였다. 증기가 불투명하게 벽면을 적시고 있을 참 백현은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한다면….”



당시 처음 들었던 녹턴, 두 손 멀쩡하던 고등학생의 도경수를 보고 싶었다. 십 년 만에 나타난 경수의 왼손을 보자 백현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연주 중에도 떨리는 왼손은 흉터가 가득했다. 미운 손은 아니었다. 여전히 예쁜 손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문득 공연이 끝나고 나니 인사 한 번 하지 못하고 온 걸 후회했다. 고교시절에 말이라도 몇 마디 해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에 웅얼거리는 입술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백현은 다시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딱 십 년 전 도경수랑 같이 학교 다닐 때로 가고 싶다고….



/



“백….”



현, 현, 현! 광음에 놀라 고개를 든 백현이 욕조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입에 가득 들어온 목욕물에 허우적거리기도 잠시 칫솔을 물고 있는 백현의 여동생 현정이 소리를 질렀다.



“뭐 해! 학교 안 가?”

“아프냐?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



그때까지만 해도 백현은 꿈인 줄 알았다. 2017년으로 치면 스물다섯이어야 할 현정이 앞에선 교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아닌 짧은 단발을 하고선.



“스물다섯 쳐먹고 교복은 무슨 교복.”

“뭐? 이제 열다섯한테 스물다섯? 너 진짜 미쳤니.”



열다섯, 열다섯? 백현이 물을수록 눈은 더 커졌다. 알몸으로 욕조에 나와 방으로 뛰어가자 현정이 소리친다. 미쳤나 봐! 알몸으로 온 방 구조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 진 구식 핸드폰까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살았던 그 집이었다. 아침마다 늘 다려져 있던 교복이 백현의 의자에 걸려있었다. 꿈인가, 거울 앞에 선 백현의 금발 머리는 어디 가고 흑발의 백현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어린 열아홉 모습 그대로 말이다.



“와, 시발 피부 좋네.”



옆에서는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났다. 자아도취 중이네, 현정의 비꼬는 말투였다. 앞에 보이는 휴지갑을 던지자 잽싸게 피한 현정이 집 안 떠나가라 웃었다. 그냥 긴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백현은 당장 제 눈앞에 보이는 교복을 입었다. 그래 긴 꿈이야 난 지금 꿈을 헤매고 있는 거야. 핸드폰을 마이 주머니에 찔러 넣은 백현은 짐처럼 무거운 가방을 매고 현관을 나섰다.



“웬 아메리카노.”



항상 등교하던 골목길 어귀에서 나타난 찬열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달고 있었다. 고딩이 아메리카노에 샷까지 추가해서 마신다. 그에 백현은 꿈이니까라며 컵홀더만 더 쥐었다. 이걸 마시지 않는다면 그날 하루는 죽어나거든. 옆에 다가온 찬열이 생색을 냈다.



“맨날 오뎅 국물 마시던 게 폼 잡아.”



손에 쥔 컵이 뜨거웠다. 조금은 촌스러운 골목을 걸으며 한 입 마시다가도 우뚝 멈춰 섰다. 뭔 날이냐? 찬열의 말에도 가야 할 대답은 가지 않았다. 찬열은 앞서 걷다 옆에 없는 백현을 찾아 뒤를 돌았다. 멍하니 전광판을 보고 있는 백현의 표정은 꽤 심각했다. 홀린 사람처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미림의 연애담이 나오고 있었다.



“너 어제 쟤 예쁘다며.”

“….”

“닮았다고.”



아메리카노가 바닥으로 툭 볼품없이 떨어졌다. 뜨거운 커피가 백현의 신발을 적셨다. 하지만 백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잽싸게 피하며 발재간을 놀리던 찬열이 진짜 미쳤냐며 백현의 눈앞에 큼지막한 손을 저었다. 너 아파? 뭐 해? 백현이 십 년 전 등굣길에서 봤던 그 전광판에서 막 데뷔했다는 신인 미림이 연애담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작은 글씨로 띄워진 건



2007. 11. 26.


날씨 맑음.



백현은 과거에 있었다.



/



패닉에 가까운 백현은 걷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꿈치고 너무 생생하잖아. 꿈이라면 들쑥날쑥 시간도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러지 않나? 밤중 욕조에 들어서 빌었던 소원이 정말 이루어진 거라면 첫째는 좋았지만 둘째는 아니었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십 년 후의 미래를 다 알면서 다시 긴 시간을 보내는 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얘 오늘 진짜 이상하지.”

“그러게, 아파?”



우선 들어와 앉은 교실에서 입을 싹 닫은 백현을 보며 의아한 친구에게 찬열이 한마디 얹었다. 오늘 아침에 커피 마시더라? 친구 하나가 백현의 이마 위로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찬열과 낄낄거렸다. 백현은 조용히 필통을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책을 바라봤다. 하나둘 백현에게서 멀어졌다. 짧은 앞머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눌렀다. 눌러도 다시 올라왔다. 히터 바람이 백현의 앞머리를 갈랐다. 손가락으로 모으길 두어 번 정도 반복하다 성에 못 이겨 시발하고 소리를 친 그때



“아픈 건 아니네.”



옆자리 짝인 혜선이가 떠온 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



“야 내가 청소당번 할 테니까 넌 집에 가라.”



주번이 들고 있던 걸레 바구니를 뺏어 화장실로 가던 당참도 잠시 세면대에 빨던 백현은 거울 쪽으로 걸레를 던졌다. 물을 먹은 걸레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수도꼭지 위로 떨어졌다. 애초에 당번을 바꾼 게 실수였다. 청소를 다 끝내고 삼층 음악실로 가 봤자 도경수는 없을 게 뻔했다. 차라리 종례가 끝나고 삼층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옆 교실에 들어가서 듣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한 백현이 힘을 잔뜩 줘 걸레를 짰다. 바구니에 담긴 낡은 걸레를 들고 인적이 드문 옥상으로 향했다. 백현의 반은 끝반이고 신관과 연결되는 통로를 가운데로 지고 있는 곳이었는데 백현의 반만 유일하게 쓰는 옥상이었다. 담임이 사놓은 빨랫줄 위에 걸레를 건 백현이 빨갛게 언 손으로 걸레를 쥐며 욕을 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학교에서 진짜.”



히터기에 놓으면 눅눅한 걸레 냄새가 퍼진다는 이유로 담임은 계절에 상관없이 빨랫줄을 고집했다. 맞아, 그랬었지. 백현은 왜 당번을 자초해서 맡았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빨간색에서 물이 빠진 애매한 핑크색 걸레를 마지막으로 걸고 나자 손은 붉다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바구니를 들면 알싸한 담배향이 겉돌았다. 찬바람을 타고 흐르는 연기였다. 백현은 코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쇠계단에 발을 올렸다. 어떤 새끼야, 타고 올라가는 철 계단이 쿵쿵 울렸다. 후배면 머리 한대 깔 생각으로 비장하게 든 바구니는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고 나서야 볼품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바구니는 차가운 날씨에 두 동강 났다. 바닥을 바라보던 백현이 고개를 돌리면 눈이 마주쳤다.



“…안녕.”



백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녕.”



십 년간 그려온 꿈이 말을 했다. 반대편 꼭대기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경수의 입 사이로 연기가 빠져나왔다. 때마침 옥상 꼭대기의 서편 바람이 회전하며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십 년 전으로 돌아온 스물아홉 백현과 당시 열아홉 경수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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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 속의 작은 바다, 백도 이야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파인님의 어항 속은 파도치지 않는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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