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2014. 04. 21

 

 

 내가 유리(流離)란 이름의 여자아이를 만난 것은 작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유리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외모에 매력적인 언사를 가진 사람이었다. 유리가 가진 은은한 아름다움에 이끌린 나는, 비오는 날 우산을 잊고 나온 회사원마냥 푹 젖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우리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얼마 후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유리의 체온이 나에게 전해질 때마다, 그녀는 아기 새가 되어 우짖었다. 유리의 몸을 끌어안을 때마다, 그녀는 암캐가 되어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물어뜯고 바라보고 살결을 비빈 뒤엔, 유리는 항상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발가벗은 입술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고는,

“이걸로 네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마.”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호감을 유도하는 가면, 공작새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산비둘기처럼 은은하게 눈길을 끄는 깃옷. 그 페르소나 아래에 숨겨진 유리의 모습은, 한없이 덧없고 향락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응, 알아.”

하고 나는 대답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유리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미끄러뜨리니, 갑자기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서럽고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며 문득,

‘오늘도 한바탕 쏟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원래 물속에서 살았다고 해.”

몇 번째인가 유리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말했다.

“응, 무슨 뜻이야? 진화론? 종교 이야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냐, 그 얘기가 아니야.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양수 안에서 자라잖아.”

“아, 그런 뜻이었나.”

“응.”

“그래서 얘기하고 싶은 게 뭔데?”

그녀는 눈앞의 컵 안에 담긴 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뇌의 어느 한 부분은 양수 안에서 살던 때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게 왜?”

“난 항상 그런 느낌이야.”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몸은 붕 떠있는 느낌이고, 눈앞은 흐리고, 귀에서 들리는 것들은 모두 다 저 멀리서 나는 소리 같아. 내가 하는 행동들이, 정말로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아. 나는 지금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코멘트도 달 수 없어, 조용히 아침밥을 먹는 데에 열중했다.

“있잖아.”

내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유리는 입을 열었다.

“응.”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너는 행복해?”

유리는 장난스럽게 웃지도,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에게 물었다.

“행복? 잘 모르겠는데.”

“행복의 기준은 뭐라고 생각해?”

“음···, 보편적인 행복의 기준이라면 많겠지만, 나한테는 그냥 만족하고 사는 삶이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구나.”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새벽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어떤 생각?”

“나는 참 행복하게 살았구나.”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고, 또 주변 사람을 있는 대로 상처 입혔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들은 모두 다 가졌고, 하고 싶었던 일들은 모두 다 해버렸어.”

거기서 그녀는 한 모금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도 하나도 즐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기쁘지가 않단 말이야. 무엇이 문제일까?”

유리는 살며시 눈을 감고 혼잣말하듯 낮게 말했다.

“행복하지 않아?”

“행복하지 않아.”

유리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그제야 유리가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이미 음식은 식어버린 후였다. 유리는 미지근해진 미역국을 한 입 마시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있잖아.”

“응.”

유리는 식탁 아래로 두 손 모두를 감추고, 또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돌아갈까 해.”

“어디로?”

“삼십 년 가까이, 하고 싶은 일들과 가지고 싶은 것들을, 나쁜 짓과 나쁜 것 포함해서 모두 가지고 해버렸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해.”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 않아?”

“무엇이?”

“힘들지 않아?”

“어째서?”

“슬프지 않아?”

“왜?”

내 물음에, 그녀는 다시 질문으로 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이기적인 사람이야. 남의 기분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남의 일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아. 내가 가지고 싶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척을 하고, 공감해주는 시늉을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단 말이야.”

“응.”

“난 나를 잘 알아. 내 앞에서 아는 사람이 살해를 당하더라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 사람이야. 왜냐고? 나랑 관계없는 일이니까.”

그녀는 또다시 미역국만을 한 숟가락 떠먹고는 말했다.

“남이 나를 원하는 건 기분 좋지만, 그들이 내 뒤에서 욕을 하건, 험담을 하건 상관없단 말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지.”

“그래서 가려는 거야?”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괜찮겠어?”

“뭐가?”

“네가 죽으면, 네가 상처 입혔던 사람들이 너를 비웃을 테고, 너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가슴아파할 텐데.‘그 여자 나에게 심한 짓을 하더니, 결국 자살했구나.’라거나,‘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는 줄만 알았던 딸아이가 갑자기 죽다니.’라거나.”

내 말에 그녀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웃음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몇 주가 지나도록 유리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북풍은 따듯하게 죽어, 거리는 벚꽃과 개나리로 화장했다. 확실히 봄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전철에 올랐다. 한적한 1호선 끝자락의 전철은 텅 비어있었고, 창가에서 갈라진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감으니, 유리에 대한 생각이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올랐다. 그녀에 대한 소식은 없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없지만, 좋지 않은 소식 또한 없다. 자살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지만,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다시 마음을 되돌린 걸까? 아니면 내가 아는 그녀답게, 아무도 모르게 혼자 어딘가로 떠나서 객사한 것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조금씩 뒤섞이다가 꿈이 되어 물결쳤다.

“있잖아.”

유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죽는다는 것은 뭐라고 생각해?”

또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걸.

“그렇다면, 사는 것은 뭐라고 생각해?”

음, 그건 아마···, 잠시 세상에 스쳐지나가듯 머무르는 게 아닐까?

“그러면 돌아가야겠네.”

머릿속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빙글빙글 선회하다가 멀어졌다.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거야? 유리는, 이미 인간의 언어가 아닌 소리로 대답했다. 무언가를 부수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하고, 때리는 소리 같기도 한 대답. 너는 무엇이 된 거니?

 얼마나 지났을까. 차량 안의 웅성거림 때문에 스르르 눈을 떴다. 유리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창가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분명 잠들기 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던 것 같은데.

“사람이 치였대요.”

차는 멈추어 있었고, 사람들은 문 쪽으로 밀집되어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바로 옆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내려다보려고 애쓰는 아주머니의 어깨를 짚었다.

“저기, 아주머니. 무슨 일이죠?”

“아, 아까 자고 있던 총각이구나.”

아주머니는 혀를 차더니 손바닥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한 여자가 치여 죽었어.”

“네? 여자요?”

내 물음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아이가 밀려서 철로 아래로 떨어졌어. 다들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용감한 여자 하나가 아이를 따라 뛰어내리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를 해머로 맞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 아가씨는 아이를 안아서 애 엄마한테 돌려보내주고, 그대로 달려오는 차에 치여서 그만···.”

빗방울이 천장을 뚫고, 두개골을 뚫고, 내 머리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뇌가 젖기 시작한다. 타인의 사랑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그러나 결코 주목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라 마침표를 찍고 서서히 세상에서 지워질 수 있는 자살의 방식. 나는 조급함에 아주머니에게 거친 표정을 짓고 물었다.

“그 여자, 이름···. 이름이 뭡니까?”

아주머니는 당황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원확인을 한 바로는, 유리···. 유리라는 이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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