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미리 써둔 내용이라 지난 화에 이어 탈퇴멤버가 등장합니다. 해당 회차 이후에는 등장시키지 않을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려요.





강영현X김원필





성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형에게 달려갔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그를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성진은 어딘가 불편한지 비척거리는 제형을 부축해 돌아왔다. 원필은 저도 모르게 둘에게 다가갔다. 제형이 고개를 들어 원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다행이네 제대로 왔구나. 다른 센티넬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자 성진이 안심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임마는 괜찮다. 내 친구다."




내 친구야. 업히라는 말을 한사코 거절한 제형은 끝내 불편한 걸음걸이로 쉼터까지 도달했다. 저녁이 되기 전이라 구석으로 밀어놓은 침대를 하나 끌어와 제형이 쉴만한 공간을 마련했다. 호명되지 않아 쉼터에 머무르던 센티넬 몇몇도 제형과 아는 사이인지 다가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원필은 멀찍이 떨어진 벽에 기대어 손가락으로 벽을 툭툭 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성진과 한창 대화를 나누던 제형과 눈이 마주친다. 원필은 제형의 손짓을 보고 기다렸다는듯 다가간다. 




"쌤."

"둘이 아는사이가?"

"잘 아는 사이지. 내 제자거든."

"여길 알려준것도 제형쌤이에요."

"기막힌 우연이네."




성진은 제형과 원필이 편히 대화를 나누도록 슬쩍 물러섰다. 




"그 날 학교에서 그렇게 도망치고서 쌤 걱정 많이 했어요."

"난 원필씨가 더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여긴 잘 찾아왔네요."

"덕분에요. 쌤은 어떻게 도망친거에요?"

"다행히 원필씨가 논랭크라 S랭커들까지 개입되지는 않아서 어찌저찌...그래도 몸에 꽤나 무리는 갔지만 따돌리는데는 성공했어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훈련 경과를 보고 센터에서 원필씨가 가이딩을 받고 있다는걸 확신했어요. 그래서 포획팀을 꾸렸고 제가 지원하게됐죠."

"지원했다고요?"

"그 때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원필씨도 나도 센터의 손에서 탈출 할 수 있는 기회."




나는 예전부터 쭉 여기를 찾고 있었거든요. 제형이 씨익 웃어보인다. 




"몸은 좀 괜찮아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던데."

"다친건 아니고. 그냥 좀 과부화상태? 쉬다보면 나아요."

"센척하는건 여전하구만."




성진이 불쑥 끼어든다.




"점마 저거는 내상이라 치유 센티넬도 제대로 치료 못하는거를. 니가 맨날 그렇게 별거 아닌 것 처럼 넘기니까 그렇게 여기저기 구르는거다." 

"그럼 심각한거 아니에요?"

"그래. 저렇게 누워가 천천히 나을때까지 기다려야된다."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또, 또 까분다."

"그나저나 소문이 다 사실이었네."

"무슨 소문?"

"진리의 눈이 천리안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말. 오는 길을 살펴보니 와이퍼도 있는 것 같고."

"하이고. 그 촌스런 별명들을 아직도 불러재끼고있나."




뭐. 상상의 나래가 그정도 수준인걸 어쩌겠어. 제형의 말에 둘은 마주보고 키득거린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 할 수는 없었지만 둘의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의 것이라 원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두 사람 다 저렇게 웃을줄도 아는 사람들이구나. 원필의 웃음소리를 들은 둘의 시선이 원필에게 꽂힌다. 




"니 이게 먼 말인지는 알고 웃나."

"그냥 두 분 웃는게 보기 좋아서요."




그나저나 그 유치한 별명들은 다 뭐래요. 원필이 제형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진리의 눈. 이건 내를 말하는거고."

"천리안은 미래를 보는 눈. 예지능력을 가진 센티넬의 별명이에요. 내가 여기 올걸 예상한 것도 그 친구겠지."

"와이퍼는요?"

"말 그대로 흔적을 지우는 센티넬. 그 사람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흔적들을 지우는 통에 센터에서 여지껏 여길 제대로 추적하지 못하는 거에요."




촌스럽긴 하지만 나름 제대로 된 별명들이긴 하네. 




"그나저나 여기도 슬슬 준비를 해야될거야."

"준비라면 항상 하고 있지."

"이번엔 진짜야. 추적자들을 잔뜩 풀고 있다고. S랭커 추적자에게도 임무가 할당됐어."




금세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성진이 원필을 슬쩍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원필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S랭커. 추적자. 그리고 자신을 보며 내쉰 한숨. 영현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추적 임무가 할당 되었다는 의미였다. 외면하고 있던 최악의 상황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기분에 숨이 턱 막혔다.




그날 밤, 원필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원필이 계속해서 이리저리 뒤척이자 결국 옆자리에 잠들어 있던 영현이 눈을 부비며 원필을 불렀다. 




"왜 그래 필아. 잠이 안 와?"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왜 그렇게 뒤척거려. 무슨 일 있어?"




이 순간에도 저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다그쳤다. 어둠 속에서도 영현의 두 눈동자는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빛을 내가 꺼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밝게 빛나는 저 두 눈이 훗날 나 때문에 절망으로 물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잠에서 덜 깨어난 영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슬며시 도로 눈을 감았다. 




"형."

"응, 필아. 듣고있어."

"센터에서 추적자들을 풀었대."

"..."

"쌤이랑 성진이형이 말하는거 들었는데."

"응."

"듣자마자 누구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어."

"그래서 잠 못들고 이러고 있었던거야?"

"우습게 볼 일이 아니잖아. 전쟁이야."




영현이 팔을 뻗어 원필을 감싸안았다. 원필을 달래듯 이마에 입술을 맞댄 채 웅얼거린다. 예상 못했던 거 아니잖아. 저음의 목소리가 이마를 울린다. 덤덤한 척 하지만 조금씩 떨려오는 몸이 그 역시 두려워 하고 있음을 알려온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상황에서 영현이 가족과 대치하게 된다면 과연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원필이 바라는 단 하나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영현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훈련 들어가려구."

"벌써? 더 쉬지 않고."

"그냥. 더는 이렇게 제자리걸음 하고싶지 않아."

"휴식이 필요할 때도 있는거야."

"나 더 강해지고싶어."

"갑자기?"

"만약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때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을 지킬게."

"든든한데."




영현은 반쯤 잠에 취해 눈을 감고 원필의 말에 대꾸한다. 원필이 고개를 들어 영현의 입술과 코에 연신 입을 맞추며 그의 등을 토닥인다. 




"졸리겠다. 얼른 자."

"응..."




등을 토닥이던 영현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춘다. 영현의 느린 숨소리와 규칙적인 심박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다시 훈련 받고싶어요."




다짜고짜 훈련장을 찾아가 성진에게 말했다. 성진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선 원필을 바라본다. 




"내가 분명 충분히 쉬라고 했던것 같은데."

"다 쉬었어요."

"추적자 이야기 때문에 그러나. 조급해하면 될 것도 그르친다."

"이제 하나도 안조급해요."




성진은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원필의 두 눈을 마주본다. 맑은 눈동자는 불안한 마음에 이따금씩 흔들리기는 했지만 나름의 굳은 결심이 선 것 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 눈을 보니 원필의 뜻을 꺾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팀원들한테 가라. 못말리겠다는 한숨을 쉬며 휘휘 손을 젓자 원필이 환하게 웃으며 팀원에게로 달려간다. 하이고 저러다 자빠지지. 




다시 훈련에 돌입한 지 일주일 째, 원필은 처음으로 그럴싸한 결과를 냈다.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이 공간의 메모리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 처음 들었을 때는 터무니 없는 일이라 생각했었지만 팀원들의 조언을 따르다 보니 불가능 할 것 같던 일을 해내고 말았다. 조언이라고 해봐야 '좀 더 이렇게 밖으로 터뜨리듯이!', '이미지를 부풀려서 꺼내는 것처럼!' 하는 추상적인 것들 뿐이었지만. 확실히 같은 계열의 능력이다보니 두루뭉실하게 말해줘도 곧잘 따라하는 것이 가능했다. 




처음으로 팀원들의 입에서 '오, 보이네.' 하는 말이 나왔을 때 원필은 남몰래 눈물을 찔끔 흘렸다. 드디어 한 발 나아간 기분에 심장이 요동친다. 흥분한 탓에 빨라진 심박을 느낀 팀원들이 진정하라며 달래고 영현을 불러오려고 까지 했을 정도면 말 다했다. 센티넬로 발현한 후 처음 느껴보는 고양감이었다. 원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현의 얼굴이었다. 빨리 형한테 자랑하고 싶다. 




성진은 첫 성과를 보인 원필의 훈련을 일찍 끝내고 휴식시간을 주었다. 중간중간 쉬어주어야 과부하를 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원필은 곧장 영현을 찾았다. 영현은 다른 가이드들과 식사를 준비중이었다. 멀찍이 보이는 영현의 뒷모습에 원필의 속도가 빨라진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이 아닌데도 영현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식기를 옮기는 영현의 뒤로 내달려 허리를 꼭 껴안으니 놀란 기색 없이 테이블에 식기를 내려놓고 원필의 손을 토닥인다. 내심 놀라길 바랐는데. 




"형은 놀라지도 않네."

"필이 네 발소리는 멀리서도 알아들을 수 있거든."




영현이 제 허리를 껴안고 있는 팔을 풀고 뒤돌아 원필을 마주본다.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원필의 콧망울을 아프지않게 꼬집으며 장난스레 말한다.




"그건 그렇고 무슨 센티넬이 기척도 숨길 줄 몰라.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거 다 알겠더라."

"와~ 기척 숨기고 다니면 형이 놀랄까봐 배려해준건데 이걸 몰라주네."

"아, 그런거야?"

"그럼! 나도 그런거, 어? 다 할 줄 안다고!"




사실 거짓말이다. 성진을 비롯한 다른 센티넬들이 기척을 잘 숨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도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타고나는게 아니라 배울 수 있는거였어? 이씨, 다음 훈련 할 때 알려달라 해야겠네. 금방 배워서 영현이형 놀라게 해버릴거야. 혼자 조용히 속으로 결심했다 생각했지만 영현은 원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눈 돌아가는 것만 봐도 다 티가 난다니깐. 




”근데 지금 훈련하고 있어야 하는거 아니야?”

”오늘 훈련 잘했다고 쉬는시간 받았지.”

”뭘 얼마나 잘했길래?”

”그거 보여주려고 뛰어왔어.”




원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영현이 옮겨둔 식기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영현의 손을 잡는다. 보니깐 접촉을 해야 더 잘되더라구. 중얼거리며 집중하기 시작하는 원필을 보며 영현은 고개를 갸우뚱 한다. 형 잘 봐봐. 원필이 두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찌푸린다. 아까 했던 것처럼, 내 안의 이미지를 부풀려서 꺼내듯이…맞닿은 영현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지자 원필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슬쩍 눈을 뜨자 영현의 눈동자가 바쁘게 허공을 배회하는 것이 보인다. 대박, 나 또 성공했나봐. 




”필아. 이게, 네가 보여주는거야?”

”응, 형. 나 이제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줄 수 있어. 어때?”

”네가 보는 세상을 나도 함께 보는 것 같아.”




영현의 말에 원필이 웃음을 터뜨린다. 무슨 소리야 그게.




”솔직히 그동안은 종종 필이 너랑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었거든. 네 눈에 보이는걸 나는 볼 수 없으니까.”




영현이 원필의 허리를 감아 당긴다. 이제야 같은 세상을 보는 것 같아. 영현이 원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웅얼거린다. 영현은 평소 스스로를 다소 무감하다고 느꼈지만 이 순간만큼은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원필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함과 동시에 능력을 제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기 전의 원필이 겪었을 고통에 뒤늦게 마음이 아팠다. 지금 이런 것들을 시도때도 없이 의도치 않게 볼 수 밖에 없던 원필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소용돌이 치는 영현의 감정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원필이 영현을 토닥인다. 




“신기하지? 더 훈련해서 이것보다 더 대단한 것들도 할 수 있대.”

”이것보다 대단해지려구?”

”아직 멀었지. 더 열심히 해서 형 지킬정도는 되고싶어.”

”벌써 든든하다.”

”진짜루.”

”든든하다는 것도 진짠데.”




영현이 고개는 그대로 원필의 어깨에 묻은 채로 키득거린다. 영현의 숨이 목 부근을 간지럽히는 기분에 원필도 웃음을 터뜨린다.




“아, 간지러워!”

”오늘따라 예민하네?”

”아! 하지마, 진짜루!”



장난스레 원필의 목에 숨을 불어넣자 기겁하며 밀어낸다. 제 힘이면 영현을 멀리 떼어놓고도 남을텐데 원필은 고작 살짝 밀어내는 것으로 그친다. 혹여나 영현을 다치게 할까봐 신경쓰고 있는 것을 알기에 그 다정함에 애정이 솟아오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와 함께인데 이곳이 전쟁터라 한들 무슨 소용일까. 영현은 도로 원필을 끌어안고 연신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다. 때마침 가이드들의 동태를 살피러 들른 성진이 둘을 발견하고 혀를 찬다. 




하이고, 좀 쉬라고 보내놨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앉았노.






*

센티넬들 능력에 따라서 코드네임 같은걸 만들고 싶었는데 촌스럽고 유치한 이름들만 생각나서 수치심을 견딜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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