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잘못 끊어버린 표를 보며 타누마는 나츠메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시 끊기엔 돈도 문제였지만 마지막 영화인 심야시간이었다. 나츠메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성인등급이 적혀 있는 표를 계속 보았다. 조금 잔인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둘 다 웃어넘겼지만 예상과 달리 영화는 성인용 로맨스 영화였다.

이야기보단 자극적인 장면이 더 비중 높은 영화였다.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한 채 타누마는 조금씩 나츠메를 바라보았다. 혹시 자기가 일부로 이런 영화를 골랐다고 생각해버리는 건 아닐지 고민하면서 동시에 지금 계속 쳐다보는 것도 괜히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모르는 채 타누마는 중간에 있는 팝콘만 계속 보고 있었다. 

시선 둘 곳을 찾고 있는 건 나츠메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격해지는 영화소리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타누마에게 얼굴을 돌리는 것도 괜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서 영화를 보는 중 눈을 감거나 아예 고개를 돌려버릴 수도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상영관에서 나왔다. 한동안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서 화제 거리만 찾고 있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둘 다 제대로 보지 못해 기억나는 것도 거의 없었고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나츠메는 여전히 열기가 남아있는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귀까지 살짝 붉어져있는 나츠메를 보며 귀엽다고 느꼈지만 타누마는 본인도 그런 건 아닐지 괜히 귀나 뺨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상영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은 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정말로 이런 영화일 줄은 몰랐다고 타누마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괜찮다고 몇 번 말했지만 여전히 눈을 마주칠 때면 서로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곤 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평소랑 다른 감각이 느껴져 서로 놀랬다. 예상치 못한 영화 때문에 놀랬던 게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영화관을 나갔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마지막 버스가 떠났을 시간이란 걸 깨달았다. 시간은 새벽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다행히 근처는 번화가였고 묵을 만한 장소도 많았지만 갑자기 단둘이서 모텔까지 가야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타누마는 차가 끊겨 텅 빈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괜히 영화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아 나츠메는 고개를 저었다. 말없이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도로를 걸었다. 어둑한 도로를 걷다보니 드문드문 켜져 있는 건물 조명과 함께 모텔 간판이 몇 개 보였다. 그런 장면 하나하나도 모두 영화 같단 생각이 들어 둘 다 현재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다.

“아까 영화랑 살짝 비슷하네.”

모텔로 들어가던 타누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얼굴을 붉히고선 이상한 뜻은 없었다고 사과했지만 나츠메도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왠지 모르게 모텔 배경마저도 영화랑 비슷해보여서 영화에서 봤던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제대로 보지도 않았던 영화 장면들이 떠올라 나츠메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

생각보다 오래 걸은 탓인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두 사람 다 침대에 앉았다. 침대 근처에 은은하게 켜진 스탠드 때문에 어두우면서도 서로의 얼굴만은 자세히 보였다. 움직이지 않으면 방 안은 너무 조용했고 두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보다가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묘하다고 느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정적이 야릇하게 느껴져 씻고 오겠다고 타누마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그 말에 나츠메가 오히려 당황한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던 영화 같은 상황이 되는 것 같았다. 욕실로 가면서 타누마는 침대 주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바닥에서 잘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어떻게 하든 아침까지 같은 침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나츠메는 침대에 누웠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바로 옆에 있는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게 신경 쓰였다. 단순히 차가 끊겨 왔을 뿐인데도 이유 없이 긴장되었다. 누워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다시 앉았지만 무엇을 하든 묘한 상황이라고 느껴졌다. 급하게 온 탓에 여분 옷도 없어 모텔에 있는 가운만 입고 자야할 상황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타누마가 가운을 입은 채로 침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자꾸 눈이 갔지만 나츠메는 시선을 피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츠메까지 씻고 나오자 어느새 야심한 새벽이 되었다. 피곤해서 간간히 하품은 나왔지만 가운만 입고 앉아 있는 타누마를 볼 때마다 나츠메는 편히 누울 수가 없었다. 타누마 역시 나츠메를 보다가도 자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라고 눕히는 것도, 아무 일도 없을거라고 말을 꺼내기도 어떤 것도 상황을 더 긴장되게 만들 것 같았다. 긴장을 깨고 먼저 침대에 누운 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나츠메였다. 이불을 덮어주며 타누마도 함께 누웠다. 침대는 생각보다 좁아 무조건 서로 몸을 붙여야만 했다.

“불도 끌까?”

침대 옆에 은은히 빛나고 있는 스탠드를 보며 타누마가 물어보았다. 나츠메는 멍하니 조명이 살짝 비치고 있는 타누마의 얼굴을 보았다. 이대로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같이 잔다는 게 긴장되는 것도 있었지만 이대로 얼굴을 계속 보는 게 기분좋기도 했다. 괜찮다고 말하며 이불 속으로 좀 더 파고들자 곧바로 타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몸이 조금 닿아 타누마가 살짝 당황한 게 나츠메에게 바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나츠메가 몸을 웅크리고 눕자 가운 사이로 쇄골이나 가슴팍이 조금씩 보였다. 불빛 때문에 괜히 더 강조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몇 번 시선을 돌리다가 타누마는 이불을 더 덮어주려고 나츠메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뻗는 순간 나츠메가 놀란 얼굴로 타누마를 바라보았고 한동안 아무것도 못한 채 정적이 흘렀다. 이불을 더 덮어주려 했던 거라고 허둥대며 타누마는 나츠메의 어깨 위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둘 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건 똑같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스치는 손가락이나 살갗으로 오늘따라 유독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고개를 돌리거나 그럴 때면 머리카락이 상대방 얼굴에 닿을 수도 있었다. 나츠메는 타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려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조금씩 뒤척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몇 시간 전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 속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상황에서 일이 시작된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쩌면 그것을 원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나츠메는 눈을 감은 채 타누마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그를 껴안았다. 타누마는 피하지 않고 나츠메를 좀 더 껴안았다. 아직 아침이 되기엔 먼 시간이었고 껴안고 있자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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