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맞는 나른한 아침이었다. 주말에 이렇게 한가했던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최근엔 평일 주말 구별할 것 없이 계속해서 바빴다. 부스스 거리며 일어난, 누군가 깨워서 일어난 게 아닌 스스로 눈이 떠진 이 시간은 벌써 햇살이 따갑게 들어오고 있는 점심이 가까워진 때였다. 이렇게 푹 잔 것도 간만이네. 아직 덜 깬 잠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언제나처럼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연락에 답을 하려다가 문득 맞다, 하고 무언가 깨닫고는 멍청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져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나는 남우현과 헤어졌다.

 


 

오래된 연인들의 습관적인 하루들

 


 

 일상에 남우현이 배어있는 순간들은 많았다. 사실 그것도 그런 게, 연애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누군가 들으면 이 나이에 헤어져서 언제 또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겠냐고 묻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애초에 신경 쓰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남자와 연애하는 게 덜컥 겁이 나서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미 이십대에 겪을 건 다 겪었으니. 그러니까, 이 나이까지 먹어서 남우현과 헤어진 건, 따지고 보면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남우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려버렸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남우현이 그렇게 쉽게 알겠다 말 할 줄은, 그렇게 오랜 시간 연애를 했지만 전혀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남우현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나.

 

 

 평소에 성규는, 아니.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의 성규는 주말에 일어나는 건 보통 남우현으로 시작했다. 아침 열시쯤 되면 주방에서 시끄럽게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면 언제 온 건지 남우현이 보였고 그러면 기어 나간 성규는 식탁에 풀썩 주저앉아 물을 마셨다. 또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남우현이 해준 밥을 먹고 다 먹으면 소파에 누워 남우현이 타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남우현과 하루를 보냈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징그럽다.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

 

 

“저 이런 거 너무 피곤해요.”

“뭐가.”

“요즘 주말 아침마다 저 부르시잖아요. 저는 아침에 밥 같은 거 잘 안 챙겨먹는다고요.”

 

 

앞에 앉아 있는 성원은 성규의 팀원 중 한 명인데 처음에는 잘도 나와서 밥을 먹더니 몇 번 아침을 사줬다고 이젠 불만을 토해내기까지 한다. 한 번, 회식을 끝내고 집이 같은 방향인 걸 알게 되었는데 성규는 우현과 헤어지고 나고 성원에게 어차피 아침 먹지 않냐, 사줄 테니 나와라 같은 말들로 이렇게 종종 불러냈다. 성규는 하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성원을 슬쩍 보다 어차피 혼자 살면서 같이 아침 먹으니 얼마나 좋은 거냐는 말을 하며 깍두기를 우적 씹어 먹다 설마, 하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성원을 쳐다봤다. 또 왜요.

 

 

“……너 설마 애인 있냐?”

 

 

성원은 정말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는 듯,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을 하며 나물을 집어 먹었다. 원래 팀장님이랑 일개 사원이 이런 이야기도 하는 사이였던가요? 그런 말도 하며. 그 말을 들으니 또 그건 그렇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인 성규는 밥이나 먹으라는 말을 하고는 밥을 한 숟갈 크게 퍼 입 안으로 넣었다.

 

 

“혼자 사신지 꽤 됐잖아요. 근데 혼자 드시는 건 왜 못 하는 거예요.”

 

 

혼자 산 지 꽤 된 건 사실이지만 남우현과 함께 했을 때가 대부분이라 혼자 밥을 먹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전부 남우현과 함께 했으니. 그리고 우현이 바빠 주말에 혼자 밥을 먹게 될 때가 오더라도 우현이 일하는 식당에 가면 됐으니까.

 

 

“자꾸 쫑알거리면 뺏어 먹는다.”

 

 

팀장님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 데요…. 그런 성원의 말에 대구도 하지 않은 성규는 입 안에 있는 것들을 마저 씹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른한 일상은 오랜만이었고 달갑지는 않았다.

 

 남우현은 성규의 집과 가까운 곳에서 크게 한식집을 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긴 하지만 우현도 꽤나 유명한 요리사라고 알고 있다. 그 집 밥이 참 맛있는데…. 성규는 헤어지고 나니 더 그리워진다며 헛웃음을 뱉어냈다.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걸까. 내가 헤어지자는 말 한 마디 했다고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인 남우현도 잘못인 거 아니야? 아니, 따지고 보면 지도 잘못했잖아. 여자를 만났고, 그걸 나한테 말 안했고. 물론 그 여자가 거래처 상대였다는 건 꿈에도 몰랐지만. 성규는 날이 지날수록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게, 남우현은 워낙 잘생겼고 몸도 좋고, 성격도 좋은데 심지어 잘 살기까지 했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티는 안 냈지만 매사에 불안했나보다. 하필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날은 그 불안함이 터진 날이었던 거 같고. 사실, 안 그래도 그날은 우현의 한식집에서 밥을 먹다가 시도 때도 없이 손님들에게 식사는 잘 하셨냐며 웃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은 날이었는데 하필, 하필! 그 날 우현이 여자를 데려다주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 물론, 우현이 그 여자는 거래처 상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싸우는 와중에 그 말이 내 귀에 꽂힐 리가 없었다. 물론 내가 오해한 건 맞지만, 그냥 그땐 남우현이 너무 미워서.

 

 

“팀장님, 이거 잘못 입력하셨는데요.”

“네?”

“이거요. 안 하던 실수를 하시네요.”

 

 

성원이 잘못된 부분을 가리키더니 일이 늘었어요, 덕분에 저희 야근하게 생겼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거 지금 놀리는 투가 확실한데. 성규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다리를 이마를 짚고 성원을 째렸다. 성원씨, 다시 앉아 봐요. 성원은 팀장실 문고리를 잡았다가 자신을 부르는 성규의 앞에 앉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비꼬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성원씨. 성규는 이 새끼까지 왜 이러는 거지, 하고 속이 끓어오르다가 이어지는 성원의 말을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지금 저희 팀 분위기 최악인거 모르시죠. 근데 그거 팀장님 때문이에요. 요 며칠 계속 컨디션 다운되어 있으니까 일에 차질 생기고 부장님한테도 혼나고 일은 또 늘고, 악순환이잖아요. 그 와중에 우리는 팀장님 눈치 보르나 더 난리고. 그러니까 제발 사적인 일 좀 얼른 해결하세요. 오늘 야근은 저희가 할 테니까.

성규는 욕이라도 퍼부을 듯 성원을 노려보았다. 성원은 성규와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고 성규가 힘들 때 제일 먼저 찾는 상대일 정도로 각별한 사이여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거다.

 

 

“남우현이랑 빨리 해결 보라고요.”

“야, 나가!”

 

 

예,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어요-. 성원이 파일을 들고 한심하다는 얼굴로 성규를 보고는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결국 성규는 팀원들의 애원에 못 이겨 퇴근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제발 일찍 들어가서 해결하고 오시라는 말을 들으니 자신이 그렇게 티를 냈었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시간은 이제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배에서는 밥을 달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규는 지금 가는 곳이,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삼아보았다.

익숙하게 안내를 받은 성규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아, 김치 조금 많이 주세요. 문을 열고 나가는 직원을 보다, 괜히 바깥에서 밥을 먹다 우현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난감하니 방으로 달라고 했는데 큰 방에 혼자 있으려니 조금 허전하기도 한 마음에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려 성규가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는데 생각보다 쿵, 하고 크게 열리는 문소리에 깜짝 놀라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

 

 

남우현이었다. 그래, 어떤 직원이 손님 앞에서 예의 없게 큰 소리가 문을 열까 싶었는데 그게 우현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성규는 곤란해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테이블로 떨어뜨리고 우현이 올려놓고 있는 반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괜히 왔다. 성규는 후딱 밥이나 먹고 가는 게 나을 거 같아 숟가락을 집었다.

 

 

“물 먹고.”

“………”

“먹고 체했다고 항의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자신의 앞에 물 컵을 내려놓고 물을 따라주고 나가는 우현을, 성규는 멍청하게 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우현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곤란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성규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너 때문에 체할 거 같다고 소리라도 치며, 우리 정말 헤어진 거냐고 물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고 나온 성규는 결국 체해 내내 고생을 했고 변기통을 붙잡고 나오지 않는 것들을 쏟아내려고 노력했다.

 

 

 다음 날 성원은 출근하는 성규의 상태를 보고 정말 경악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디선가 약을 하나 들고 와서는 집에 가셔야 되는 게 아니냐며 소란을 떨었다. 밤새 열 때문에 앓기는 했는데 그 정도인가. 그래도 아침에 면도도 하고 머리도 만지고 할 건 다 했는데. 성규는 팀원들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아 밀린 일들을 마저 처리했다. 오늘 하루는 다른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없다.

 

 

 퇴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운전대를 붙잡았다가 잠시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이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성규는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하냐, 김성규. 종일 성원이 하는 잔소리를 들었다가 또 이 한식집을 가는 길로 왔다는 것에 더욱 양심에 찔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리고 성원은 심지어 왜 열이 나는 거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팀장에게 말하는 꼬락서니 보라며 한 소리 해주긴 했지만.

 

 

“………”

 

 

그리고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던 성규가 잘 가고 있던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이유는, 정말 달갑지 못한 일을 보아서였다. 급브레이크에 몸이 앞으로 쏠려 등이 차 시트에 터억, 하고 부딪히고 나서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그러니까, 한식집에서 어떤 여자와 나오는 우현을 보게 되는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장면일 줄 알았는데. 성규는 초조함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직원이겠지, 근데 저런 직원이 있었나?

 

 

“………”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자랑 다니는 거야. 성규는 머릿속이 복잡해져옴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짜증나, 여기로 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은 마음에 성규가 눈에 힘을 꽈악 주고 고개를 들었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시야 안에 있던 우현이 보이지 않아 자연스럽게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어디, 어디로 간 거지.

 

 

“………”

 

 

그리고 옆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성규는 우현이 차 옆에 있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똑똑 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성규가 마주한 우현을 보고 정말 최악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왜 여깄어.”

“……지나가던 중이었어.”

“………”

“진짜야. 길을 잘못 들었어.”

 

변명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이었고 처음부터 이곳에 널 보러 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네가 보고 싶었나봐, 정말 나도 모르게. 성규는 뻔뻔하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련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는 듯 툭툭, 말을 내던졌다. 남우현은 아무렇지 않은 거 같으니까 나도 그렇게 보여야 해. 그리고 성규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가 우현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당장이라도 모든 걸 토해낼 뻔했다.

 

 

“어디 아파?”

“………”

“성규야.”

 

 

그 말에 아프다고, 네가 준 밥을 먹고 체해서 컴플레인이라도 걸고 싶을 정도로 아파 죽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내가 또 여기서 터뜨리고, 같이 있던 여자가 누구냐고 물어버리면 남우현은 이제 나에게 정말로 질려버릴 게 분명했으니.

 

 

“내가 왜 아파.”

“……혼자 아프면 고생이야. 약 꼭 챙겨 먹어.”

“……….”

 

 

혼자 아프면 고생이라는, 우현은 분명 별 뜻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왜 이렇게 꼬인 건지 성규는 우현의 옆에는 꼭 누군가 있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성규는 정말 순간,

 

 

“……근데 너는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하면 안 되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말을 하다 멈춘 나도, 그 말을 들은 우현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진작 빡빡 주어 남았을 것이다.

 

 

“그런 거 아니야….”

“미안, 실수야.”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실수라고.”

“…성규야.”

“실수라고 했잖아!”

 

 

네가 이제 여자를 만나던 안 만나던 나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라고. 우현이 손을 붙잡아왔지만 성규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뿌리쳤다. 씨발, 실수니까 제발, 제발.

 

 

“사실은 너도 헤어지고 싶었던 거 아니야?”

“………”

“그래서 잡지 않고 바로 헤어진 거 아니냐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에 예민한 우현에게 자신이 먼저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을 했고, 또 내가 먼저 여자가 있는 거냐며 계속 의심을 했고. 성규는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 좋게 나가지 못했다.

 질렸겠지. 질렸을 거야.

성규는 그대로 뒤를 돌아 차로 올라탔다. 우현이 싫어하는 것만 하는 자신이 지겨워졌다. 벅벅 눈물을 닦아내며 최대한 빠르게 우현에게로 멀어지려고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려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성규는 홀로 지하주차장에서, 차 시트에 몸을 기대고 아무 소리 없이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 원래 말 예쁘게 못 하는 거 알잖아. 비참하게 그런 거나 알아줬으면 했다.

 

 다음날은 회사에 가지 못했다. 성원에게 못 간다고 말을 하려고 전화를 걸어 성원아, 하고 불렀는데 성원은 바로 아픈 거냐며 대답을 해왔다. 건방진 새끼인 게 분명하다. 팀장이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나 뚝뚝 끊어대고. 그래도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려준 게 고마워 성규는 봐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나고 나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침대에서 다시 이불만 머리끝까지 푹 덮을 뿐이었다.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 일수도.

 

 얼마나 잠을 잔 건진 모르겠지만 눈을 뜬 성규는 자꾸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퇴근을 하고 온 성원이 생각보다 착한 마음씨를 가져서 죽이라도 만드는 줄 알고 성원이의 이름을 부르며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마주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파서 골골거리게 만든 원인인 우현이었다. 성규는 처음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가만히 우현을 보았다가 환영이 아닌 진짜 사람 남우현임을 깨닫고 열었던 문을 쾅 닫아버렸다.

 

 

“……죽 먹을래.”

 

 

그리고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소리에 성규가 손으로 입까지 막고 숨을 죽였다. 이게, 이게 뭐지. 왜 우현이 여기에. 성규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닫기는 했지만 잠그지는 못한 문이 우현에 의해 그대로 열렸다.

 

 

“뭐 좀 먹자.”

 

 

손을 붙잡고 식탁 의자에 성규를 앉힌 우현은 곧 갓 만든 죽과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떠오더니 그 앞에 앉아 숟가락을 내밀었다. 일단 먹어야 할 분위기라 숟가락을 받아 든 성규가 죽을 한 입 떠먹으려는데 우현이 컵을 툭툭 쳤다. 물부터 먹어야지.

 

 

“……또 체하면 어떡해.”

 

 

우현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해왔다. 성원이겠지. 이건 고민하지 않아도 우현에게 줄줄 말을 하는 성원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이성원 그 새끼는 별난 걸 다 너한테 말하네.”

“………”

“새겨듣지 마. 어차피 그냥 하는 소리야.”

 

 

그리고 죽을 한 번 떠먹고, 다시 물로 목을 축이기를 몇 번 반복하다 앞에 앉아있는 우현의 시선이 너무 불편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이성원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여길 와, 오기를. 인상을 구기고 우물우물 입안에 있는 것들을 씹으며 성규는 넘어가지 않는 죽을 겨우 꿀떡 삼키는데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여길 왜 왔을까.”

“………”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닌데.”

 

 

겨우 마음에 꾸욱 눌러 삼키고 있던 것들이 정말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처럼 갑작스레 올라왔다. 아까보다 느리게 입안에 있는 걸 씹고 있는데 우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성원이 말 듣고 나도 모르게 왔어.”

“………”

“근데 지금은 너랑 다시 만날 생각은 없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느새 성규는 가만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앞에 놓여있는 우현이 만들어놓은 죽만 쳐다봤다. 그럼 이건 뭔데. 이렇게 찾아온 건 뭐야. 이건 뭐라고 설명할 거야. 나는 네가 그 어떤 말을 해도 다 변명이라고 생각할 거 같은데.

 

 

“…조금 지쳐서.”

“………”

“지금은 아닌 거 같아, 우리.”

 

 

하지만 지친다는 그 말이,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서. 성규는 결국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우현과 연애를 하며 처음으로 펑펑 울며 소리쳤다.

 

 

“그럼 여긴 왜 왔어, 오질 말았어야지!”

“………”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착각했는데.”

“……미안.”

“………”

“가볼게.”

 

 

누군가 그랬던 거 같은데. 매달리면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게 적용되지 않나보다. 네가 여기에 와서 다시 잘 되는 줄 알았다고 착각했다는 말을 하며 바닥까지 드러냈는데도 우현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가져온 건 없었는지 그대로 일어나 나가는 우현을 또 성규는 무슨 생각으로 붙잡은 건지, 혹시나, 제발 잡혀주길 바라는 마음 그 하나 때문에.

 

 

“……가지마.”

“………”

“우현아….”

“미안. 나 진짜 괜히 왔다.”

 

 

문을 열고 나가는 우현을 결국 붙잡지도 못한 성규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며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았다. 진짜 내가 지친 거였구나, 그래도 내가 알던 너는 잡혀줄 것만 같았는데, 항상 내 옆에 있던 너는 다정해서, 꼭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동안 너를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우현이 가고 난 후 성규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계속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바로 온 건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온 성원은 술이라도 한 잔하자며 눈을 체 뜨지도 못하고 있는 성규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회식을 하는 사람들도, 뒤풀이를 하는 대학생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 곳곳에는 지금의 성규처럼 인생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사람도.

 

 

“짠-. 술 먹고 다 털어버려요.”

“야, 이 개새끼.”

“네네, 저 개새끼 맞고요. 이것도 먹으면서 해요, 술만 먹으면 또 속 버린다.”

“건방지게 어디서 상사한테 말대꾸를 꼬박꼬박! 죽는다, 너.”

 

 

많이 피곤했는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기가 올라온 성규가 성원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풀린 눈으로 앞뒤도 맞지 않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나쁜 새끼, 네가 뭔데 남우현한테 그런 걸 하나하나, 네가 그러고도, 어? 너 일 왕-창할 줄 알아. 내일, 어! 야! 짜증나게….

성규의 앞에 빈 잔에 소주를 따라준 성원이 하아, 큰 한숨을 내쉬고는 잔을 넘겼다. 성규는 뭐가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지 성원에게 계속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다 한순간 말을 뚝 끊고 성원을 쳐다봤다. 야, 너 똑바로 말해.

 

 

“너 오늘 온 것도 남우현이 분 거지.”

“……그럴 리가요.”

“너네 둘이 무슨 얘길 주고받고 있는진 몰라도, 당장 그만 둬라아. 이제 나 남우현이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위협하는 것처럼 젓가락을 테이블에 꽈앙 내려놓고 눈을 한껏 치켜뜨며 말하는 성규를 절레절레 보던 성원이 그 앞에 놓여있던 어묵 국물을 떠먹으며 자신도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이에 낀 나도 지쳐요.”

“뭐? 너 지금 지친다고 했어? 너도 내가 지쳐!”

“그렇게 오래 연애를 했으면서 이렇게 몰라요?”

 

 

모른다는 그 말이 순간 성규에게 확 꽂혀 내내 하던 삿대질도 멈춘 성규가 금방이라도 울 거 같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언제 이렇게 울보가 된 거야…. 성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근처에서 휴지를 가져오더니 성규의 앞에 내려놓고는 잔에 소주를 콸콸 채워놓고는 그대로 목으로 넘겼다.

 

 

“남우현이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

“내가 오늘 남우현한테 형 아프다고 가보라고 한 거 맞아요. 그리고 그동안 남우현한테 계속 형 힘들어한다, 원래 말 그렇게밖에 못하는 사람인 거 알고 있지 않냐고 내가 몇 번이고 말했는데.”

“………”

“근데 이제 모르겠대.”

“………”

“내가 보기엔 정말 끝난 거 같아.”

 

 

그러니까 이제 잊어요. 원래 연애가 다 이런 거야. 성원은 성규의 앞에 놓인 소주병을 자신 쪽으로 가져와 이런 말 하는 나도 힘들다며 말을 하는데 그대로 병을 빼앗아 병째로 콸콸 마시는 성규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형 미쳤어요, 진짜!

 

 

“죽일 거야, 너!”

“형, 잠시만, 형!”

“죽어!”

 

 

으악! 성규의 주먹을 그대로 맞아버린 성원이 바닥에 꼬꾸라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성규는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는 듯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고 성원에게 다시 소리쳤다. 입이면 다 말해도 되는 줄 알아! 나쁜 새끼야! 성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지나쳐가는 성규를 바라보다 울컥함에 소리 질렀다. 그래, 입이면 다 지껄여도 되는 줄 아냐, 김성규야! 그 입 너나 처음부터 조심하지 그랬어!

 

 

 성원의 책상 위에 쌓인 두둑한 파일을 보며 지나가던 팀원들은 대체 뭘 잘못했냐며 물어왔다. 지나가던 한 팀원은 커피를 한 잔 내려놓고 가며 금요일 야근이라니…, 성원씨 수고해요. 하며 말을 해오기도 했다. 망할 김성규. 성원은 팀장실 문을 한껏 째리고는 아직도 막막하게 남아있는 파일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원이 보기에, 성규의 아침은 조금 달랐다. 다른 팀원들은 팀장님이 드디어 돌아온 거냐고 기쁜 얼굴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성원이 보기에는 아니란 말이었다. 성규가 일에 매진을 한 적은 아마, 몇 년 전, 정말 까마득한 예전이었다. 그때의 성규를 잠시 떠올려보자면 완전히 일에 미친 사람처럼 일을 하고, 또 일을 했고 또 일만 했다. 성원은 그런 성규에게 질린다며 말을 했던 때도 있었다. 물론 우현과 연애를 한 후에는 전혀 아니었지만.

우현과의 연애 이후, 성규는 참 많이 바뀌었다. 처음엔 ‘일’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죽어라 일만 했는데 우현을 만나고 적당함을 알게 되었다. 조금 귀찮아하기도 했고, 피곤하다며 쉬기도 했고, 내일 하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그 예전의 성규는 그런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성원은 변한 성규가 신기했다.

연애. 성규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20대 초반의 성규를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절대 아니, 라는 부정의 말이 나왔겠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의 성규를 아는 사람은 어, 그 사람 좀 괜찮던데, 하며 말을 해왔다. 그러니 성규에게 우현은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원씨, 할 만 하죠?”

“예. 그러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저 독종! 성규는 아마 어제 성원의 말에 단단히 화가 난 거였다. 근데 사실 성원도 우현이 이정도까지로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규가 조금 안쓰러웠다. 성원이 요 며칠 우현을 두 번 정도 만났었는데 그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형, 김성규 원래 말 그딴 식으로 하는 거 알잖아요. …알죠?’

‘…모를 리가 있나. 알아요.’

‘근데 왜 이렇게…, 아니. 성규 형 생각보다 힘들어하더라고요. 그건 알아요?’

‘알아요.’

‘……그럼 뭐가 문제예요?’

 

 

그러니까 그때 성원도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이기적이게, 성원은 자신도 모르게 성규의 편을 들고 있었던 거다. 우현의 마음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지쳐서….’

‘네?’

‘지치네요, 이런 관계가 계속 되는 것도.’

 

 

성원은 벙 찐 얼굴로 작게 미소를 짓는 우현을 바라봤다. 정말 지친다는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는데 성원은 그 얼굴을 마주하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성규를 이렇게 변하게 한 만큼 우현이 많은 고생을 했을 거라는 건,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

 

 

 성규는 이 자리가 조금, 아니 사실 많이 불편했다. 일을 하다 온 우현이 어머님의 연락에 놀라기도 했지만 저녁을 할 수 있냐는 물음에 거절할까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연락을 했다는 그 말에 할 수 없이 응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우현이 안 나올 리는 없었고.

 

 

“우현이랑은 잘 지내고 있지? 둘 다 얼굴을 통 안 비춰서 볼 시간이 없어.”

 

 

가시방석에 앉아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성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넘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삼키느라 고생했다. 물도 벌써 몇 번째 들이키는 건지, 이미 없어진 물이 없어진 잔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툭 하니 물통을 내려놓는 우현에 성규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잔에 물을 따랐다. 고맙다고 하는 그 말이, 그 이전에 우현에게 말을 거는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우현의 어머니는 우현과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성규의 앞으로 반찬을 밀어주었다. 성규 어디 아픈 거니? 안색이 안 좋네. 고개를 저어보이며 최대한 환하게 입 꼬리를 올린 성규가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에 스며들었다.

 

 

“성규 다음에 또 봐, 여기로 와서 밥도 자주 먹고!”

 

 

네, 알겠어요. 자주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저녁식사가 끝나고 어머니를 태운 택시가 사라진 후 어색함만 남은 이 자리에서 성규는 먼저 뒤를 돌았다. 우현이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들을 자신이 없었다. 왜 왔냐며 비난을 할 거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말들을 들을 기운도 없었고.

 

 

“차는.”

“………”

“안 가져왔어?”

“신경 꺼주라.”

 

 

우현은 한없이 다정하고 착해서 이런 것들이 습관적이었다. 비가 올 거 같으면 미리 우산을 챙겨주고, 술을 마신 다음엔 항상 숙취해소제와 해장할 것을 해주고, 피곤할 거 같으면 데려다주고.

 

 

“데려다줄게.”

“…우리 이제 아무 사이 아니잖아.”

“………”

“근데 네가 왜 날 데려다줘.”

 

 

아무데서나 그렇게 다정한 것도 나쁜 거야. 성규는 인상을 구기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예전의 우현이라면 자신을 한 번 더 붙잡았을 거 같다는 한심한 생각을 했다. 나 정말 찌질함의 끝을 보여주는 구나.

 

 

 우현이 성원을 마주한 건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우현은 주방으로 들어오는 매니저가 …저, 성규씨랑 항상 같이 다니는 그분 오셨는데요. 하며 말을 하는데 놀라 방금까지 불에 올려져 있던 것을 그대로 손으로 잡는 바람에 손을 데이기까지 했으니.

 

 

“밥 먹으러 왔어요?”

“네. 성규 형은 안 와요.”

 

 

나올까 말까 고민을 하다 결국 나오긴 했는데 괜히 나온 건가 싶은 어색함에 우현이 메뉴판을 살짝 집어 이게 맛있어요, 하고 말을 꺼내었다. 네, 그거 시켰어요. 성규 형이 워낙 그게 맛있다고 해서. 근데 은근하게 자꾸 쏘는 듯한 말투와 자꾸 성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의도된 거 같다고 느낀 우현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그럼 식사 맛있게 해요, 하며 들어가려는데 성원이 입을 열었다.

 

 

“형, 바빠요?”

“네?”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저녁이 조금 지난 시간이어도 사람이 아직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빠진다고 해서 그게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우현이 잠깐 고민을 하다 잠시만요, 하며 안으로 들어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매니저는 우현의 옆에서 왜 그러시냐며 물었고 우현이 눈을 껌뻑이다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미안한데 나 오늘 먼저 들어가 볼게요. 뒤처리 좀 부탁해.”

 

 

성원은 우현과 단 둘이 있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이렇게 불편한 적은 처음이었다. 앞에 놓여있는 계란말이를 한 입 베먹은 성원은 큼, 하며 헛기침을 했다. 형, 한 잔 받으세여. 잔에 채워지고 있는 소주를 가만히 보던 우현은 할 말이 뭐예요, 하며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게…, 형. 전엔 조금 죄송했어요.”

“뭐가요?”

“형 생각은 안 하고 김성규 한 번만 봐달라고 돌려 말했던 거요. 그거 다시 생각해보니까 형 입장에서는 좋게 들리진 않았을 거 같아서요.”

 

 

그런 성원의 말에 우현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성원은 우현의 잘생긴 얼굴, 좋은 성격 다 인정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답답한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 우현은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 같아 보여도 자신의 깊숙한 속마음은 잘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보면 가운데 낀 입장에서 말하자면, 김성규가 형 엄청 좋아해요.”

“…그래요?”

“형 이럴 때 보면 조금 나쁜 거 같기도 해요. 다 알면서 모른 척.”

“정말 몰랐는데.”

“그래요, 그렇다고 쳐요. 그럼 형은 김성규한테 마음 없어요?”

 

 

그렇게 술술 잘도 하던 대답이 딱 끊겼다. 성원은 자신의 잔을 톡톡 치며 술 좀 채워달라며 말을 하니 그제야 우현이 성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형은 정말 마음 없어요? 없으면 나도 이제 성규 형 얘기 안 할게요.

 

 

“어때 보여요?”

“………”

“나 성규한테 마음 있어 보여요?”

 

 

이런 식의 역질문이라니,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성원이 우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우현이 성규에게 당연히 마음이 있겠거니, 아니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았다. 우현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성규의 곁을 지켰기 때문에 당연히 성규만 어떻게 한다면 우현은 다시 성규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으니. 성원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이에요.”

“나도요.”

“………”

“나도 어려워요.”

 

 

우현이 짠을 하자며 잔을 앞으로 내밀었고 성원은 그 소주잔을 바라보다 자신의 잔을 부딪혀주었다. 성원은 오늘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고, 우현이 정말 성규에게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성규에게 그만하라며 진지하게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오늘도 성규는 야근을 하고 10시가 다 돼서야 회사를 나섰다. 피곤한 몸을 겨우 이끌고 온 성규는 집 앞에서 비밀번호도 누르지 못하고 현관문 앞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닥의 온기가 느껴지고 그러고 한참을 있던 성규가 핸드폰을 들었다. 얼마 안 가서 받은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 ………

“술은 안 취했는데 갑자기 전화하고 싶어져서. 나 질리지.”

- ………

“미안, 미안해. 미안해 진짜. 미안.”

 

 

헤어지고 이러면 정말 미련하다고 찌질한 거라고 그러던데 그런 짓은 다 하고 있는 거 같다. 성규가 핸드폰을 붙잡고 천천히 내뱉는 말을 듣고 있을게 분명한 우현은 대답 한 번 해주지 않았다.

 

 


“우현아, 나 있잖아.”

- ………

“너 진짜 많이 좋아했어.”

- ………

“그냥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다, 미안.”

 

 

대답하지 않고 있는 우현이지만 성규는 혼자 허탈하게 웃다, 다시 아…, 하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연락하지 말아야지. 성규가 잠시 말을 멈추자 생기는 정적 사이에서 둘은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또 다시 먼저 입을 연 건 성규였다.

 

 

“우현아, 한 번만 더 잡혀주면 안 돼?”

- ………

“…헛소리야. 미안해.”

 

 

여전히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는 우현이 조금 밉다는 생각까지 한 성규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그때, 우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질린다.

 

 

성규는 들려오는 말에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 전화가 끊기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 눈물을 투둑 떨구었다. 항상 다정하기만 하던 우현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더욱 가시처럼 박혀오는 말에 결국 또 무너졌다. 비밀번호를 겨우 누르고 집에 들어와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 문에 기댄 성규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속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삐삐삐, 하며 빠르게 비밀번호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려 그곳에 기대고 있던 성규가 뒤로 털썩 주저앉으며 본 사람은 방금까지 전화를 한 우현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건지 숨을 가파르게 쉬며 우현은 무언가 화가 난 듯 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있는 성규를 내려다보았다.

 

 

“대단해, 진짜.”

“……왜 여기에.”

“이렇게 지치게만 하는 게 대체 뭐가 좋다고.”

“………”

“난 왜 또 이렇게 여길 달려온 건지.”

 

 

성규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우현을 보고 있던 성규는 방금 우현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여길 온 게, 아, 그니까 지금 남우현이.

 

 

“…안아도 돼?”

“뭐?”

“…키스해도 돼?”

“………”

“…해도 돼?”

 

 

조심스레, 푹 떨군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말을 내뱉는 성규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우현이 뒤를 돌아 성규에게로 걸어왔다. 하아. 크게 한숨이 뱉어지는 소리에 움찔한 성규가 입술을 깨물은 순간에 우현이 성규를 꽈악 안았다.

 

 

“다 해도 돼. 안는 것도, 키스도, 그 이상도, 넌 다 해도 돼.”

“………”

“이렇게 항상 말 해줘, 제발.”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날 좋아하겠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계속해서 연애를 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오기 마련이고 결국 우리는 헤어짐을 맞았지만 진짜 헤어짐이 아닌, 그 헤어짐을 계기로 더욱 성장을 한 우리는 다시 이렇게 인연이 되어 또 다른 연애를 이어간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 여전히 내 곁에 있을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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