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은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편이었다. 영녕을 선택한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결정부터, '황궁에 믿을 수 있는 친한 사람을 만들라' 까지. 세상 천지에서 믿을 수 있는 친한 사람을 만들기에 황궁만큼 어려운 곳도 없을 것이다. 해연은 그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고, 그로부터 일영은 이 과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궁에서 누구와 친할 수 있을까. 지금 영녕이 알고 있는 사람은 소양이나 한 번 만나본 태자 정도인데, 둘 다 친해지기는 어려울 터였다. 비록 소양은 그에게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접근해 왔으나 이는 아무래도 정적을 자기 팔 안으로 두려는 뜻이거나, 그런 뜻이 없다 해도 추후에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믿을 수 있는, 친한… 이라는 인물이 있을까. 영녕의 견해로 신뢰는 시간과 솔직한 마음에서 비롯되니 먼저는 친할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조차도 쉽지는 않았다.


영녕은 속으로 알고 있는 황실 인물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다가 문득 3황녀에서 생각이 멈췄다. '몸이 좋지 않아 궁 안에 주로 머물면서 책 읽고 글 쓰기를 소일한다 하던가.' 태자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리면 3황녀는 한번 만나볼 만도 한 사람 같았다. 취미가 비슷해서라기보다 정치적 입지가 그리 뚜렷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확실히 영녕이 알고 있는 것 가운데서도 3황녀에 대한 이야기는 잘 없었고, 그렇다면 세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인물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황실의 일원으로 황궁에 머물고 있는 황녀라. 


바람 잘 날 없는 황궁에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면서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의 영녕과 그리 다르지 않은 처지라고 생각되었다.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영녕은 3황녀 편으로 사람을 보내 간단히 찾아뵙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며칠이 지나서 돌아온 답은 그러나 기대와도 다른 것이었다. "3황녀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손님을 보지 않으신다 합니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더 높으신 마마님들이 아니시라면 3황녀님의 은완궁(誾婉宮)에는 드실 수가 없고, 따로 예정을 하고 아는 분의 소개장을 가지고 온 분에 한해서 그 분을 만날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면박을 당하고 온 것 같은 심부름꾼은 멋쩍은 표정으로 답을 전했고, 옆에서 유수는 "그게 다 무슨 일이래요!" 하면서 영녕 대신 분한 마음을 내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군주와도 사촌지간이신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할 일인가 말이에요!"

"네 마음 알겠으니 그러려니 하렴, 유수."


서융롱이라면 그치만요, 언니! 했을 대목에 유수는 말대꾸하지 않고 곧장 네, 하고 입을 다물었고, 그럴 만한 사람인 융롱은 옆에서 갸우뚱하고 있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걸까요?" "글쎄, 만약에 나라면……."


영녕은 자신을 대입해서 생각해 보았다. 바람 잘 날 없다지만 또 욕심만 없다면 부족할 것 없는 황궁에서 자신의 궁을 하나 가지고 있는 입장으로 은거를 택한다면…….


"그냥 손님 대하기가 귀찮아서 그런 것 아닐까."


지나치게 솔직한 군주의 예측에는 일동 납득하면서도 너무하다는 반응이었고, 영녕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면 태자에게 가자." 


"태자 전하께요?"

"일찍이 나를 여동생인 3황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고 처음 말을 꺼내신 것이 태자 전하이시니까 말이야."


심부름꾼은 이제 태자궁으로 가게 되었다. 


"기억하기는 하실까요. 그 때에도 그냥 두 분이 비슷하니 떠오른 말처럼 하셨는데, 소개장 같은 번거로운 일을 해 주실지……."

"글쎄다. 하지만 이미 했던 말이 있으니 어떨지 모르지 않느냐. 궁중에 허언은 없으며, 우리가 소개를 부탁할 사람이 달리 더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데 왕부에서 보낸 전령은 그 날 저녁에 바로 돌아왔다. 그는 붉은 끈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내밀며 태자 전하의 소개장을 받아 왔다고 고했다. "혹시 태자 전하께서 무어라 하시더냐?" 의외의 결과에 영녕이 물었다. "3황녀님의 은완궁에 방문하고자 하는데 소개장이 없으면 손님을 들이지 않으신다 하니 전하의 도움이 필요하다 말씀 올렸는데, 별다른 말은 없으시고 그저 크게 웃으시면서 저를 기다리게 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곧장 소개장을 써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기억하시는 모양이군. 잘 되었는걸."


영녕은 이제 소개장을 동봉하여 서신을 써 보냈다. 태자의 소개가 있으니 모쪼록 이 달 중 뵐 수 있는 날이 있겠는가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은완궁에서 도착한 답신은 이번에 그리 멀지 않은 날짜를 지정하고 있어 영녕은 시녀들과 함께 입궐할 준비를 했다. 


바람이 시원한 가을, 하늘이 높고 단풍은 절정을 넘어 지는 낙엽이 달려 있는 낙엽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약속한 오시 초*에 은완궁 앞으로 도착한 영녕의 일행은 황녀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조금 기다리셔야 하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지금 자리를 비우셨다고?"


손님을 맞지 않고 은거하고 있다면서 또 약속한 시간에는 자리를 비우다니 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영녕은 되물었다.


"예, 조금만 기다리시면 뵐 수 있으실 것이니 모쪼록 군주께서 헤아려 주시지요."


아랫사람에게 괜히 화를 낼 것도 없겠다 싶어 영녕은 알았다고 하고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반 시진이 지나도 황녀는 오지 않았다. 말을 전하고 돌아간 궁녀도 이제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아, 은완궁 담장 밖으로는 영녕의 일행만 서 있는 상태였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느냐고."


그들이 있는 곳은 은완궁의 정문 앞이었고, 궁의 주인이 뒷문으로 드나들거나 할 일도 없으니 자리를 비웠다는 3황녀가 돌아오려면 반드시 그들 앞을 지나야 할 것이지만, 그런 일도 없이 은완궁은 안팎이 고요하기만 했다. 별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녕은 말을 전해 보라 시켰다. 이왕 이 일 때문에 입궁한 참에 다시 날을 잡고 준비하여 오기도 번거롭다 여겨 영녕은 웬만해서는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그럼에도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체되는 것은 이상하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은완궁에서 다시 나온 궁녀는 대단히 송구하다는 표정을 하면서 황녀께서 아직 안 계셔서…… 하는 말만 반복했다. 


"어디를 가셨는지, 어떤 일 때문에 약속하시고는 자리를 비우셨는지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유수가 앞으로 나서서 대고 따졌다. 유수는 몇 번 황궁 출입에 따라다니더니 궁녀들을 대하는 데도 적이 자신이 붙은 모양이었다. 본래 성격도 활달하고 거침없는 편이라 왕부의 시녀들 사이에서도 말싸움으로는 지지 않는 편이었으니, 주저앉을 수도 없이 그저 서서 기다리고만 있던 일행들 중에서는 유수가 따지는 것을 제법 반기는 눈치들도 보였다.


"죄송해요, 저, 정말로 언제 오실지는 모르고 있어서……."

"그렇다고 손님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이렇게 밖에 세워 둘 일인가요? 설령 주인께서 안 계시다 해도 이미 예정된 만남이라면 마땅히 손님들을 안으로 들여, 차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영녕도 간만에 종복을 잘 들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 말고, 황녀 전하 행방을 아는 상궁 마마님이시라든가 하는 분이 나와서 설명을 하시란 말이어요!" "무,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모쪼록 화를 가라앉히시고……."


흥 하고 유수가 돌아서면 가마꾼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시녀들도 저들끼리 소곤소곤거렸다. 영녕은 아랫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내버려두고 계속 기다렸다. 예정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에는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갑작스레 3황녀가 실종이라도 된 것이라면 그도 큰일이고, 어느 쪽이건 일이 있는 것은 틀림없으니 만약 오늘 만나지 못해도 그 이유만은 알고 돌아가겠다는 것이 영녕의 생각이었다.


한 시진하고도 꼬박 반이 지났다. 신시가 다 되어서 영녕이 그만 발을 돌릴까 고민하던 차였다. 더 기다린다면 자신의 체면에도 좋지 않은 일이고 아랫사람들에게 할 말도 없었으므로 차라리 돌아가며 황궁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정할 때쯤, 다시 은완궁의 문이 열리더니 이전과 다른 복장을 한 상궁이 나와 그들에게 고했다.


"3황녀께서 영녕군주를 맞으신다 합니다." 

"자리를 비우신 것 아니었던가."

"안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그 무슨 말이지."


영녕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일부러 자리에 없는 척 하고 우리를 속여 궁 밖에서 기다리게 하였다는 말인가?" 먼저 나왔던 궁녀가 아무 설명도 하지 못하고 죄송하다고만 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3황녀는 처음부터 궁 안에 있으면서 자신을 모시는 이들에게 거짓말을 시켰던 것이다. 상궁은 대답하지 않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좋다. 주인을 만나 직접 따지지." 영녕은 가마를 내려놓고 쉬라 명하고, 시녀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항의를 한다면 내가 할 일이고, 화를 낸다 해도 내가 낼 일이다. 지금 너희들이 무어라 말을 꺼내면 오히려 나의 처지가 곤란해져." 


들어선 은완궁은 나즈막하고 호젓한 정취가 있는 곳이었다. 정원은 땅을 넓게 쓰고 군데군데 동백이며 계화 같은 나무들이 한 그루씩 심기며, 수석과 물길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크기에 비해 장식이 많지 않아 어딘가 빈 느낌마저 주었다. 건물도 보통 궁에서 쓰는 단청을 칠한 것은 바깥문뿐이었다. 말없이 그들을 안내하는 상궁을 따라가면 시야를 가리는 나무조차 없어 저 멀리 마루에 앉아 있는 인물의 모습이 벌써 보였다.


3황녀는 물들인 푸른 옷을 겹겹이 입고 연한 회색 머리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일부러 기다리게 한 일이 있었어도 일단은 예를 먼저 갖추어야 할 일. 영녕이 먼저 황녀에게 인사를 하면 3황녀는 그런 영녕군주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궁녀가 말했다.


"제국의 3황녀 현상아(晛祥峨)가 은완궁의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환영한다 하십니다."


황녀는 이어서 궁녀에게 다른 손짓을 해 보였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을 테니 객들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영녕은 다소 놀랐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는데, 설마 3황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영녕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자리에 없다는 핑계를 대어 일부러 손님을 기다리게 하신 것은 3황녀이신데, 어찌 그에 관해 해명치 않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 하십니까."


영녕의 시선을 받고도 3황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다시 궁녀에게 손짓했다.


"설마하니 이 은완궁에 태자 전하의 소개장을 가지고 오는 분들이 계실 줄로는 몰랐다 하십니다."

"태자 전하가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3황녀 현상아는 조용히 파안했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눈끝이 휘었다. "사연을 설명드릴 테니 안으로 드시지요." 궁녀가 다시 수어(手語)를 받아 말했다.




오시 초 : 오후 12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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