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업하면서 수정하긴 했습니다만 트위터 스타일 인칭, 써방 단어 및 오탈자 여전히 많습니다. 





훈은 단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참 이른 저녁에 준비를 마쳤음. 평소보다 신경써서 고른 옷과 신발. 귀찮아서 자연 건조에 맡기던 머리도 드라이를 해서 말렸음. 단이 선물해줬던 향수를 뿌리고 현관 앞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음. 누가 봐도 잘생긴 남자가 거울 속에 서있었음. 계속된 술자리와 수면장애로 피부가 좀 거칠어지긴 했지만 수척해진 턱선과 맞물려 외려 예민미를 더해주었음. 


훈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나섰음. 천천히 계단을 내려 건물 공용 현관을 열었을 때,  


"안녕, 박지훈."


A가 있었음. 놀라서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훈의 팔목을 A가 낚아챘음. 버둥대며 벗어나려는 훈에게 A가 사정하듯 말했음.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얘기 안 하고 싶어." 

"미안해, 미안.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사과?" 


훈의 반항이 조금 잦아들자 A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았음. 미안하다, 수능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너한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이제 시험도 끝났고, 그간 너무 미안해서 사과를 하러 온 거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 훈은 고개를 들어 A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음. 큰 키. 다부진 체격. 서늘한 눈매와 높은 콧대. A 역시 객관적으로 꽤나 잘생긴 외모였음. 언젠가 A를 보며 두근거렸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아무런 호감이 들지 않았음. 반 정도는 두려움, 또 나머지 반 정도는 측은함, 동정심.. 


“우리 그래도, 한때는 친구였잖아.” 


그러게. 한때는 정말 친한 친구였고, 사랑이라 생각했었고, 그래서 더욱 미웠지. 


“예전 생각해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얘기 들어주면 안 될까?” 


훈은 순간 흔들렸음. A가 지금 제 앞에서 매달리는 것처럼, 단에게도 자신이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럼 딱 한 시간만. 나 오늘 약속 있어.” 

“그래. 한 시간이면 충분해.” 


너네 학교 앞이니 너 가고 싶은 데로 가자는 A의 말에 훈이 잠시 망설였음. 예전 과오도 아직 용서받지 못한 상황에서 A를 만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단이 또 실망할 것 같았음. 그래서 발길을 틀었음. 단과 만나기로 했던 정문 앞 카페와는 정반대 방향 — 후문 쪽의 단골 식당으로.  


A는 수능 때문에 금주하느라 힘들었다며 굳이 술을 시켰음. 훈은 술 마실 기분 아니라며 거절했지만 A는 그런 훈에게 잔만이라도 받아두라며 소주 반 잔을 채워주었음. 냄비 속 전골이 끓어오르기도 전에 빈 소주병이 나왔음. 훈의 앞에 놓인 반 잔은 전혀 줄지 않았으니 A 혼자 그렇게 달린 셈이었음. 


“술이 센가 보네.” 

“어, 뭐. 그럭저럭 마시는 정도.” 

“그럭저럭이 얼만데.” 

“서너 병 정도?” 

“그럭저럭이 아닌데?” 

“그런가? 하하.” 


참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생각했음.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첫사랑이 나타나 제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걸 막아줬던 이와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그에게 용서를 빌러 가는 길에 첫사랑이 찾아와 제게 용서를 구하고.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네.” 

“응?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훈은 쓰게 웃었음. A는 그 사이 다 익은 전골 냄비에서 건더기를 덜어 훈에게 건네주었음. 


“아무리 말해도 용서받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미안해. 미안했어.” 

“알겠으니까 이젠 찾아오지 마.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줘.” 

“후... 그래. 니가 그 정도로 화가 났다면 어쩔 수 없지.” 


A가 새 술병을 깠음. 병을 든 채 눈짓으로 잔을 가리키길래 훈은 두 손을 들어 거부했음. 그때 옆 자리 의자에 올려뒀던 훈의 폰이 울렸음. 단의 전화였음. 두 번째 진동이 오기도 전에 폰을 낚아챈 훈이 통화 버튼을 누르며 가게 밖으로 급히 달려나갔음. 


통화 내용은 별 거 없었음. 과외가 좀 늦게 끝나서 지금 지하철을 탄다는 말이었음. 도착하면 아마 한 시간쯤 뒤, 원래 약속시간보다 30분쯤 늦을 거라고. 알겠다는 훈의 대답 뒤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가. 단이 물었음. 


- 지금 집 아닌가 보네. 

“아.. 응, 밖이야.” 

- 어딘데? 

“여기... 후문 쪽.” 

- 아 그럼 후문 근처 카페에서 볼까. 

“아냐 아냐. 괜찮아. 지금 파장하려던 참이야. 원래 계획대로 정문 XX카페에서 봐.” 

- 어.  


지하철이 들어오는지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고 전화가 끊어졌음. 훈은 눈을 감은 채 핸드폰을 가슴에 안았음. 실날처럼 입가에 걸리는 미소. 훈은 어서 빨리 A와 헤어지고 정문 쪽으로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했음. 


자리에 돌아오자 음료수 잔이 앞에 놓여있었음. 훈이 술을 계속 안 마시고 있으니 A가 콜라를 시켜놓은 듯 했음. 


“누구?” 

“아.. 그냥... 친구.”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저 친구라 표현했음. 앞에 놓여있던 콜라를 마시고 젓가락을 집어들었음. 대충 몇 숟가락 하다가 일어날 생각이었음. 


“무슨 친구? 남자친구?” 

“...어?” 


분위기가 쎄하고 머리가 띵했음. 어 이상하다. 술도... 안 마셨는데. 


“친구가 아니라. 강다니엘이겠지.” 

“...네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니 남친 이름을 아냐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혀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음. 아니. 말을 듣지 않는 건 비단 혀뿐만이 아니었음. 훈은 묵직하게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필사의 노력을 했음. 


징징— 진동소리가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음. 신경을 긁는 듯한 쇳소리. 훈은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소음의 진원지를 노려보았음. 양철 테이블 위에 놓인 A의 폰이었음. 


그리고 액정에 뜨는 이름은 

B.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훈은 정신을 잃었음. 


*


시간을 거슬러 하루 전, 목요일 오전. A는 깨질듯한 두통에 괴로워하며 깨어났음. 목 말라... 중얼대며 손을 뻗자 생수병이 툭 던져졌음. 앞뒤 생각 없이 꿀꺽꿀꺽 마시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그제야 생소한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음. 여기가 어디지. 눈을 깜빡대며 주위를 훑어보던 A의 시야에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아담한 체구의 남자가 잡혔음. 


“아, 설마 우리 어제...” 

“응, 맞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는 B. A는 천천히 돌아오는 지난 밤의 기억에 머리를 감싸쥐었음. 


“아 씨발.. 말도 안돼.” 

“뭐가 말도 안돼.” 

“내가 남자랑 잤다니 아 씨발...” 

“뭐래. 병신이. 박지훈이랑 잘 거라고 남자랑 자는 법 가르쳐 달래놓고는.”  


B가 그제야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고 A 쪽을 돌아보았음. B는 그새 다 씻고 선크림까지 발랐는지 얼굴에 하얀 화장기가 감돌고 있었음. 


“그래서, 진짜 할 거야 말 거야?” 

“하... 그게...” 

“어우, 너 결국 못할 줄 알았어. 나도 그냥 하루 날린 셈 칠 테니까 너도 걍 이참에 아다 뗀 걸로 만족해.” 


아마 일부러였을 테지. B는 A의 컴플렉스를 묘하게 긁었고 그 얕은 도발에 A는 쉽게 걸려들었음. 


“나 이제 간다. 점심 약속 있어.” 

“그— 박지훈 애인이랑?” 

“누가 걔 애인이래? 둘이 헤어졌다니까.” 

“아 그랬지. 참.” 

“암튼 곧 체크아웃 시간이니까 너도 빨리 씻고.” 

“어어.” 


B가 문 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A를 돌아보며 웃었음. 


“그 약, 구하느라 힘들었으니까, 잘 써.” 



모텔을 나서는 B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음. 사진을 올리겠다며 협박하긴 했지만 요새 같은 세상에 미쳤어?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인생 말아먹지. 익명 게시판이라고 해도 경찰 조사 들어가면 다 나오는데 말야. 


A는 그 점에서 비장의 카드였음. 제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훈을 결정적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전략적 무기랄까. B는 A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음. 단과 훈이 사는 건물 앞을 누가 봐도 수상하게 어슬렁거리던 남자. 처음엔 정신이상자나 변탠가 싶었지만 B는 곧 알아차렸음. 저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목적임을. 당시 B는 팔을 다친 단을 돕는다는 핑계로 꾸준히 마중배웅 출석도장을 찍고 있던 터라 이 건물 앞에서 단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음. 


남자는 짧은 골목을 왔다갔다 하다가 현관으로 나오는 누군가를 보고 앞 건물 기둥 뒤로 숨었음. 건물에서 나온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훈이었음. 남자는 훈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쭉 지켜보다가, 큰길로 후다닥 따라나갔음. 이 모든 것을 지켜본 B의 머릿속에 잘 짜인 각본이 하나 떠올랐음. 어둡고 사악한, 악마의 시나리오였음. 


다음날, B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음. 훈의 이름을 거론하며 걔 지켜보는 거 맞냐고 물어보자 A는 처음에 펄쩍 뛰어오르며 부정했음. B는 재빨리 말을 이었음. 신고하거나 책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신과 같은 걸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박지훈한테 관심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관심 있는 쪽은 박지훈의 남친 -- 


거기까지 말했을 때 A의 눈빛이 달라졌음. “남친?” B는 들뜨는 마음을 잠재우며 침착하게 대답해주었음. 그쪽도 본 적 있을 텐데. 이 건물 사는 키 크고 다리 길고 얼굴 하얀 남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는데 이 정도 묘사만으로도 A는 고개를 끄덕였음. 


그날 이후 둘은 전략적 제휴 관계가 되었음. A는 수능을 앞둔 재수생이었기 때문에 훈을 스토킹하는 게 쉽지는 않았음. 이러면 안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도 소식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훈의 집 앞으로 향하고 마는, 일종의 정신병 상태였음. 그런 상황에서 B가 알아서 소식을 전해다주고, 가끔은 사진도 전송해주니 A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윈윈 관계였음. 물론 B가 자신을 이용하여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음. A는 B가 그저 단을 차지하기 위해 훈의 존재를 치우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을 뿐.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을 때는 남의 폰을 빌려 훈에게 전화를 걸며 목소리를 듣는 식으로 몇 주를 버텼음. B가 보내준 사진을 독서실 책상 위에 두고 아래로는 수음을 하기도 하고. 지난 4년의 스트레스와 집안의 기대, 폭락한 자존감 등이 맞물려 A는 정말로 미쳐가고 있었음. 원래 정신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남의 탓을 하는 경향이 있음. A 역시 마찬가지였음. A는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스트레스, 우울감이 모조리 훈 때문이라 믿었음. 박지훈이 그때 제게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정체성 혼란을 겪을 일도 없었을 테고. 정상적인 남고생으로서 학업에 집중하여 성적도 계속 좋았을 테고. 그럼 당연히 좋은 대학을 가서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렸을 테고... 


공부만 해도 부족할 시간에 이딴 부정적 감정으로 정신력을 소모했으니, 결과가 좋을리 없었음. 심지어 시험 당일 문제를 푸는 와중에도 A는 훈을 생각했음. 보기 두 개가 헷갈려서. 공식이 떠오르지 않아서. 지문 해석이 잘 되지 않아서. 이젠 이 감정이 증오인지 애정인지 집착인지 경계조차 모호한 상태. 삐뚤어진 악감정이 내면에 똘똘 뭉쳐 구체적인 흉기가 되어가기 시작했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심지에 B가 불을 붙였음. B는 작은 불씨만을 가져다댔을 뿐이었음. 물론 자신이 성냥을 갖다댄 곳이 도화선의 끝임은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시험 잘 쳤어?" 

"......" 

"흠. 못 쳤나 보구나." 

"닥쳐." 

"어떡해... 그래도 우리 학교 올 정도는 나왔지?" 


상대를 띄워주면서도 뭉개는 말. B의 전문 분야였음. 


"하... 씨발 너까지 이럴래." 

"왜... 설마 우리 학교 올 정도도 아닌 거야?" 

"닥치라고 했다." 

"아... 진짜. 박지훈 하나 때매 멀쩡한 헤테로 몇 명을 망치는 거야." 


B는 제가 다 화가 난다는 듯, 투덜거리며 A의 잔을 채워주었음. 오렌지 빛 틴트가 젖은 조명을 받아 축축한 빛을 발했음. 


"씨발... 내 인생 어쩌다 이렇게 말려갖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 

"아 몰라. 걍 눈 딱 감았다 깨어나면 세상이 끝나 있으면 좋겠다. 죽고싶어."


B가 손을 뻗어 A의 눈가를 훔쳤음. A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음. 


"좋은 것도 못 해보고 죽을 셈이야?" 

"좋은 거?" 


B는 A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또다른 질문을 던졌음. 


"복수도 안 하고, 끝낼 셈이냐구." 

"......" 


A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음. 동공의 변화를 눈치챈 B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음. 


"네 경우엔 그 두 개가 똑같은 거잖아. 좋은 건데, 복수이기도 한." 

"그게... 뭔데?" 


B의 혀가 뱀처럼 A의 귓가를 감았음.  


"어차피 망할 인생, 한 번 하고 죽어야지 않겠어?" 

"......" 

"이거면 가능해." 


A는 제 앞으로 쓱 밀려온 작은 지퍼백을 내려다 보았음. 가로 세로 3센티도 안 되는 초소형 비닐 속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약이 있었음. 


*


시간을 다시 이틀 뒤로 돌려 금요일 밤 10시. A는 제 앞자리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훈을 내려다 보았음. 입가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게 얼마만에 느끼는 충만함인지. A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음. 이쪽을 보고있는 시선이 없음을 확인한 후 잔을 들어 훈의 뒷머리 및 옷깃에 남은 소주를 확 끼얹었음. 술냄새가 진동을 하며 피어올랐음.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아주 평범한 광경이었음. 두 동성 친구가 술을 마시다가 한 명이 과음하여 필름이 끊긴 상황. 이 역시 B가 일러준 각본 대로였음. A는 훈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며 짐짓 떠들었음. 


"아휴.. 잘 마시지도 못하는 게 오늘따라 왜 이리..." 


카운터까지 훈을 끌고 간 A가 계산을 끝내고 문을 나서려 할 때였음. 가게 사장님이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음. 


"친구분 여기 단골이셔서 포인트 있는데, 그 번호로 적립해드릴까요?" 


그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을 뿐이었음. 그러나 방금 전까지 사람 좋게 웃고있던 손님에게서 돌아온 뜻밖의 반응에, 선량한 사장님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는지 되짚어 보기까지 했음. 


"왜요? 얘 번호를 여기 왜 남겨요?" 

"아... 적립 안 하실 거면 그냥 가셔도..." 


민망해진 사장님이 애꿎은 단말기를 만지작 거리는 사이 두 남자의 뒷모습이 문 밖 저편으로 사라졌음.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을 잃은 한 남자와, 그를 들쳐업듯 끌고가는 또다른 남자가. 


대학가 장사 어언 20년. 50을 훌쩍 넘긴 김씨 아저씨의 촉이 섰음. 저거 좀 이상한데? 남녀였다면 신고를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남남이었기에 찝찝함을 애써 삼켜버린 순간이었음.  



잠시 후. 과외 알바를 마치고 동네로 돌아온 단이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전화를 걸었음. 신호가 줄기차게 울렸지만 응답은 없었음. 사실 흔한 일이긴 했음. 사귈 때도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는 왕왕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음. 아니, 달라야 했음. 이미 헤어진 사이에서, 훈이 먼저 연락해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음. 


제 옛 연인은 이런 약속에서까지 제멋대로인 건가. 단은 맥이 탁 풀렸음. 내심 기대했는데, 결국은 또.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해주겠다는 기계음과 함께 종료 버튼을 눌렀음. 


그새 역사 계단을 다 올랐음. 여기서 오른쪽으로 틀면 훈과 만나기로 한 카페. 왼쪽으로 가면 집으로 가는 길이었음.  단은 왼쪽으로 발을 딛다 말고, 폰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음. 그래. 잠시 다른 걸 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을 수도 있지. 단은 마지막 인내심을 짜내보기로 했음. 발길을 다시 정문 방향으로 돌리며 통화 버튼을 다시 누르고. 코너를 갑자기 역으로 돌았더니 제 뒤를 걷고있던 행인과 정통으로 부딪쳤음. 씨발. 눈을 뽑아놓고 다니냐? 다짜고짜 욕부터 뱉는 이에게 죄송하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수 차례 숙이며 마무리를 짓느라 단은 이미 연결된 통화를 눈치채지 못했음. 스피커를 통해 몇 차례의 '여보세요'가 나오고 난 뒤에야 폰을 귀에 갖다댄 단이었음. 


- 여보세요? 저기요?


폰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훈의 것이 아니었음. 단은 그 자리에 멈춰서며 말을 잃었음. 그냥... 전화를 꺼버릴까도 싶었음. 이제는 단 역시 지쳐버린 상태였으니까. 하.. 한숨을 흘리는 단은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 수화기 저편의 상대는 일단 연결됐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제 용건을 쏟아내기 시작했음. 


- 아까 안 그래도 정신 없어 보이더니. 이래 폰을 놔두고 가면 어떡해요.


단은 정신이 번쩍 들었음.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멈춰섰던 걸음을 다시 떼고, 


"아. 거기 어딘가요?" 

- 네? 방금까지 계셨던 식당이요.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냐구요." 


폰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만... 글쎄, 기분이 뭔가 쎄했음. 단의 걸음이 빨라졌음. 만나기로 했던 카페 문을 부술듯이 밀어제끼고 들어가는 순간, 통화 상대가 익숙한 상호명을 말했음. 


- 여기 <000>이요.

"...후문에 있는 나베 집 말씀이시죠?" 

- 네네, 맞습니다. 우주대 후문 쪽.

"곧 가겠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그리 넓지 않은 카페에는 레포트를 쓰는 듯 노트북을 펼쳐둔 여학생 세 명이 앉아 있었을 뿐, 훈은 없었음. 단은 건물 공용 화장실까지 다 열어본 후, 후문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음. 


한편, 테이블 정리를 하다 발견한 핸드폰을 들고 난감해 하던 000의 사장님은 때맞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음. 자기들이 잃어버린 주제에 가게 셔터도 다 내린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폰 훔친 거냐며 행패를 부렸던 학생들이 지금껏 한둘이었어야 말이지. 어서 찾아가게 하고, 다리 쭉 뻗고 잠드는 게 나았음.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 미닫이 문이 시끄럽게 열렸음. 이 추운 날 땀에 흠뻑 젖은 남학생 한 명이 시근덕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음. 아! 사장님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뛰어나갔음. 아는 얼굴이었음. 그것도 제법 자주 왔던 단골. 


"아, 학생이었구나. 말을 하지. 안 그래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싶었..." 

"지훈이, 아 아니 폰 주인 걔 어디로 갔어요? 누구랑 있었어요?" 

"아 그게..."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자영업자다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이 젊은 단골 손님은 제 용건부터 쏟아내곤 사장의 답변을 기다리는 눈치였음. 빨리 대답 안 했다간 업장이 뒤집어질 것 같은 다급한 분위기. 


"그... 그럼 이게 학생이랑 자주 같이 오던 그 잘생긴 학생 폰인가?" 

"네. 그러니까 걔 어디 갔냐구요." 

"나가기는 한참 전에 나갔지. 이 폰 학생한테 주면 되나 그럼?" 


단에게 폰을 건네준 사장님은 미련 없이 자세를 틀었음. 치우다 만 테이블로 돌아가려고. 그런 사장님의 옷깃을 잡아 세운 건 단의 핏줄 돋은 손이었음. 


"누구랑 같이 있었어요?" 

"음... 그, 처음 보는 학생이었는데," 


사장님은 눈을 깜빡거리며 단기 기억을 불러왔음. 사실 잊는 게 더 어려운 존재들이었지. 


"그래도 조금만 자세히..." 

"아! 학생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어. 키도 크고 훤칠하고." 

"저랑 비슷하다구요?" 

"그러니까, 전체적인 느낌이..." 


단은 인상을 찌푸렸음. 저와 같은 향수를 썼던, 건물 앞까지 훈을 바래다 준 그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음. 허탈해진 단이 감사하다는 인삿말과 함께 등을 돌릴 때였음. 금요일 밤이라 미칠 듯이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은 왠지 한 마디를 더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음. 아까 느낀 쎄한 기분 때문인지 뭔지. 


"저기 학생." 

"네?" 

"그, 같이 오던 학생 말야." 

"오늘 엄청 취했는지.. 완전 기절한 상태로 업혀나갔거든. 아마 폰 잃어버린지도 모를 텐데.. 학생이 잘 챙겨줘." 


평소라면 정말 주제넘은 오지랖에 불과했을 것임. 하지만 이 순간 우주대 후문 000 나베집 사장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구한 셈이었음. 


단은 가게 앞 길가에서 담배를 태우며 상황을 정리했음. 출발할 때 건 전화에서 훈은 멀쩡했음. 단과의 약속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랬던 훈이 고작 몇 십 분 사이에 인사불성이 되어 폰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업혀 나갈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체격이 비슷하다고 한 남자. 사장님이 본 적이 없다고 한 걸로 봐서 단의 동아리 사람도 아니었음. 


단은 필터를 꾹꾹 씹으며 기억을 더듬었음. 무언가 생각이 날 듯 한데...  


그 순간,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음. 두 폰 중 누구의 것인지 몰라 두 개를 한꺼번에 꺼내었음. 울리는 건 단의 폰이었고, 전화를 건 이는 B였음. 


"여보세요." 

- 아, 형! 지금 모해욤? 알바 이제 끝났져? 

"어.. 끝나긴 했는데," 

- 금요일인데 우리 술이나 한 잔 할래여? 

"아 그게 지금 좀..." 

- 에이, 시험기간도 아닌데. 같이 놀아요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미를 살짝 끌며 비음 섞인 애교를 부리는 B였음. 처음엔 그런 말투인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고, 얼마 전엔 그게 약간 귀엽게도 느껴졌는데. 지금은 마음이 급해서인지 그 찡찡대는 특유의 콧소리에 짜증이 났음. 어쨌든 지금 단에게 가장 급한 건 훈의 행방이었으니까. 


"미안. 오늘은 안 되겠다. 급한 일이 있어서 집에 바로 들어가야 된다." 

- 집.. 이요? 


순간, 단의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았음. B의 목소리 톤이 평소답지 않게 낮았기 때문이었음. 상냥하고 귀여운 목소리가 아니라... 어딘가 싸늘하고 냉랭한 어조였음. 물론 그 목소리는 오래가지 않았음. 평상시라면 단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만큼 사소한 실수였음. 


그러나 지금은 평시가 아니었음. 오감이 바짝 서있는 단에게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신호였음. 


- 에잉, 제가 맛있는 거 쏠게요. 집 가지마요오- 

"왜. 내가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단은 짐짓 웃으며 장난처럼 미끼를 던졌고 놀랍게도 B의 평정심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음. 


- 서, 설마요. 그냥 오늘 금요일이고 하니까.. 

"글나. 근데 나는 금요일이고 나발이고 집에서 쉬고 싶은데." 

- 아하하.. 그럼 저 형 집 놀러 가도 돼요? 

"아니."  


단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확신을 했음. 해답은 집. 집이었음.  


"끊는다." 

- 아, 아니 형! 선배!  


수화기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음. 단은 주머니에 폰을 집어넣고 달리기 시작했음. 고작 2,30분 사이에 만취한 훈. 자신과 덩치가 비슷하다는 신원미상의 남자. 자신을 자꾸 집 밖에 두려는 B. 단으로서는 그 셋 간의 연결고리를 알 리가 없었으나, 한가지는 확실했음. 이 순간 그 무엇보다 훈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 그것 말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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