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주님,

당신 얼굴은 수상한 내용이 적혀 있는 책과 같군요.

세상을 속이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얼굴을 하세요. 

눈동자와 손과 혀 끝에 환영의 뜻을 담으시고, 청순한 꽃처럼 보이게 하시되, 그 속에 뱀을 숨기세요.



'Lady Macbeth'






22.



하얗고 하얀 방. 석진은 오늘도 햇살 찬란한 태형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졸려.'


아직도 잠이 덜 깨 몽롱한 자신에게 태형은 며칠째 같은 것을 시키는 중이었다.


"목소리 나오나 확인해보자. 아, 아, 해봐요."

"……아, 아."

"하아아, 진짜 꿈 아니구나."


태형은 아침마다 석진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그를 틈 없이 꽉 껴안았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세게 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는 몸짓으로. 그리고는 아직도 누워있던 석진의 이마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나서야 안부 인사를 전했다.


"좋은 아침, 석진 씨."

"선배도 좋은 아침이에요."

"누구 목소리가 이렇게 예뻐?"


태형이 석진의 코를 톡톡 치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석진은 아침 햇살이 너무 눈부셔 자꾸만 이불 속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문득. 이불을 조금 걷고 태형을 보며 물었다.


"그보다 선배. 아침마다 아, 아, 하고 시키는 거. 그거 언제까지 시킬 거예요?"

"몰라. 내가 하고 싶을 때까지."

"목소리 나온 지 벌써 엿새에요. 이제 완전히 멀쩡하다구요."

"당연히 알지. 그래도 조금만 봐줘요. 나 얼마나 놀랐는데. 이건 석진 씨가 양보해주기로 해."

"……그런 치사한 말을 하다니."


석진은 태형이 치사하다 말하면서도 웃으며 눈을 부볐다. 사실 태형에겐 핀잔을 주었지만, 아침마다 제 목소리를 확인하는 이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태형이 자신을 늘 신경 써 주는 게 좋았으니까. 눈 뜨자마자 가장 먼저 저를 챙겨준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으니까. 그래서 괜히 양보해주는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목소리가 나온 지 오늘로 엿새.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일이에요." 

"상연일?"

"네. 맞아요."

"그래, 하루 남았어. 왜. 떨려?"


태형은 석진에게 떨리냐고 물으며 한 팔에 들어오는 석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석진은 생각했다.


'떨리냐구?'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석진은 평소보다 좀 더 활기차게 고동 하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이 떨림은 두려운 까닭이 아니다.


'이건…….'


석진은 붉은 윤기가 흐르는 입술을 살짝 열어 말했다.


"맞아요. 조금 떨려요."

"그래?"

"기대가 되어서요. 저, 감히 내일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석진은 내일이 기대되어 떨린다 말하며 고개를 돌려 태형과 시선을 얽었다. 그렇게 마주한 아침 햇살. 태형은 눈을 부드럽게 휘고는 석진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태형이 말했다.


"내일은,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야."

"정말요?"

"응. 머리에 각인된 듯 새겨질 거야. 근데 그거 알아요?"

"뭘요?"

"내일 석진 씨를 보게 될 관객들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거."


마치 머리에 각인된 듯 새겨질 것이다. 무대 위에 선 당신의 모습이. 맥베스 부인의 대사를 울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그녀의 의지를 담은 눈동자를, 손짓을, 몸짓을. 


"내가 석진 씨를 처음 보고 그랬던 것처럼."

"……."

"다들 그럴 거야."


촉. 태형은 그리 말하며 눈을 감고 석진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입술. 그 감촉이 황홀해서 저도 모르게 꽤 오랫동안 빨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결국 참다못한 석진이 태형의 어깨를 밀며 작게 말했으니까.


"이러다 늦겠어요."

"그럼 늦지 뭐."

"내일이 상연인데 주연이 안 오면 다들 불안해한다구요. 안 그래도 다들 맥베스 부인 때문에 불안한데."

"하긴.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랬다. 석진과 태형, 윤기, 가윤을 제외한 모두는 석진이 목소리를 되찾았단 걸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알려주지 않은 거지만. 석진의 목소리가 돌아왔던 그날. 윤기가 말했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

"왜요?"

"내가 저번에……, 그러니까 석진 씨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연락을 받았던 날."


난 그날 맥베스 주요 스태프들에게 연락을 했었어. 어찌 되었든 긴급상황이니까. 그리고 그 다음날. 최대 투자자에게서 연락이 왔지. 그 말인즉슨.


"말이 새어 나가고 있어." 

"……그렇네요."

"이번에 석진 씨가 목소리 나온단 사실이 알려지면, 그……."


윤기는 가윤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가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가 그 뒤를 이어 말했다.


"또 뭔짓을 할 지 모른다, 이 말이죠?"

"정확해요."

"나도 그런 건 싫어요. 난 석진이가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구요. 내가 저 위에 오르는 건, 절대로 사양이에요."

"그러면……."


우리 모두 입을 다물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상연이 시작되는 날, 석진 씨를 무대 위로 올리자. 윤기가 그리 말하자 석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래도 괜찮을까요?"

"뭐가? 오히려 다들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니……. 그러니까……."

"투자자?"

"네."

"내 생각엔,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


윤기는 최대 투자자가 아무 말도 못 할 거라 말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석진에게 한 번 더 확신을 주듯이 다시 말했다.


"아무 말도 못 할 거예요."


확신에 찬 윤기의 말에 석진은 '왜요?'라며 물었다. 하지만 윤기는 알려주지 않았다. 뭐.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거겠지. 그래서 석진은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상연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연일을 하루 앞둔 오늘. 여전히 석진을 껴안고 있던 태형이 말했다.


"석진 씨."

"왜요?"

"우리 오늘 지각할까?"


씨익. 태형의 입술이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지어내는 미소에 맘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 


"……."

"어차피 내일만 지각 안 하면 되잖아."

"……순 엉터리."

"그 엉터리에 흔들리는 것 같은데?"


태형은 그리 말하며 석진을 도로 침대 시트에 눕혔다. 하얀 시트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거기에 하얀 잠옷을 입고 누운 석진은 어쩐지 머리와 입술만이 선명하다. 그건 말하자면 마구 흐트러지게 만들고 싶은 모습. 그래서 태형은 석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톡, 톡 단추를 풀어 내었다. 


"으응……."


목덜미를 빨아들이는 입술의 감촉이 간지러워 석진은 저도 모르게 높은 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태형이 만족스레 웃으며 좀 더 강하게 당긴다.


"……듣기 좋아."

"아……, 뭐가요?"

"석진 씨 목소리."


당신 목소리 말이야. 태형은 단추를 풀며 점점 아래로 입술을 옮겼다.


"……변태."

"까짓것 하지 뭐."

"아아, 우리 할머니가 그랬는데. 능글맞은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고."

"할머님이 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하아……."


석진은 달뜬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래. 할머니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석진은 제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태형을 보며 풀린 눈으로 말했다.


"누가 선배를 싫어하겠어요."


당신만 보면 제정신이 아니게 되니까. 당신만 보면 아찔해지고 온 시야에 당신밖에 담을 수 없으니까. 당신만 보면 온통 당신 생각밖에 할 수 없으니까.

그건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 목소리를 확인하는 마음과 같은 것. 하루의 시작으로 나를 꽉 껴안으며 좋은 아침이란 안부를 전하는 마음과 같은 것. 말하자면 내 세상의 중심. 나는 당신 주위를 달님처럼 돌고 있답니다. 그러는 당신도, 내 주위를 맴도는 달님이신가요?

석진은 새로이 염색한 태형의 금발 머리를 손에 가닥가닥 얽으며 살짝 웃었다. 그래. 푸른 하늘의 태양도 좋고, 어둑한 밤하늘의 달님도 좋다. 그 무엇이든, 당신은 이토록이나 찬란하다는 뜻. 촉, 초옥. 석진은 제게 끊임없이 입 맞추는 태형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선배."

"응? 왜?"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나요?"

"오늘?"


석진이 물은 말에 태형은 조금 웃으며 답했다.


"아니, 아직."


어쩐지. 아침이 허전하더라구요. 석진이 태형의 목에 팔을 감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래. 목소리가 나온 후의 석진은 목소리 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날. 마음을 다 담을 수 없더라도, 어딘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굳이 목소리로 전해달라던 석진의 말은 아주 옳은 것이었다. 그래서 태형도 그를 따라 말해본다.


"사랑해, 석진 씨."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위하는 법을 처음 알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법도 처음 알았다. 애정 어린 목소리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머리가 녹을 듯한 기분도 처음 알았지. 석진은 늘 태형이 자신을 바꾸었다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바뀐 건 태형 자신이었다. 어쩌면 우린 자신을 변화시켜줄 누군가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린 서로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태형은 처음 석진을 만났던 오디션장을 떠올리며 석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곧장 그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울려온다. 


"선배, 간지러워요."


그래, 이 목소리. 그 오디션장에서도 석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에게 꽂혔더랬다. 그야말로 머리에 각인되는 소리. 


"나만 들었으면, 좋겠어."

"뭘요?"

"석진 씨. 목소리."


태형이 꽤 허스키한 목소리를 울리자 석진은 웃었다.


"지금 선배만 듣고 있잖아요."

"……."

"보는 것도 선배만 보는데?"


석진이 태형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어 그의 볼을 쓸며 말했다. 난 선배 생각만 해요. 눈으로는 선배만 보고, 입으로는 선배를 위한 소리를 내요. 게다가 귀로는 선배가 하는 말만 듣는다구요. 석진은 그리 말하며 조금 장난 섞인 눈으로 태형에게 말했다.


"선배."

"응, 듣고 있어."

"너무 지각은 싫어요."

"그야 당연하지."


그리하여 돌아온 건 조금 장난스러운 태형의 대답. 그리고 조금 전보다 좀 더 농밀한 키스.




****




"지금이 몇 시냐?"


윤기가 숨을 헐떡대며 들어온 태형을 향해 잔뜩 눈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내일이 상연일인데 아주 정신이 빠졌지, 그리고……."

"……."

"석진 씨 목에 붙은 저 파스들은 뭐냐."


윤기가 석진의 목에 덕지덕지 붙은 파스들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석진이 크게 움찔했고 태형은 눈을 옆으로 굴리며 말했다.  


"……석진 씨가, 담이 좀 걸려서."

"……지랄하고 자빠졌네."


윤기가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못 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공연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상체를 숙여 석진과 태형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이 공연인데 뭐 하는 거야!"

"……."

"시발, 범인 김태형이지!"

"……응. 미안해, 형."


태형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고 석진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두 손에 묻어 버렸다. 그러더니 이내 눈만 빼꼼 들어 태형을 조금 째렸다. 정말이지 아까는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웬걸. 옷 입을 때 보니 목에 키스마크가 잔뜩이었다. 내일이 상연일인데. 내일이 상연일인데! 그렇게 석진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은 태형이 눈치를 보며 또 사과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럼 네 잘못이지 누구 잘못이냐."

"그래도 메이크업으로 어느 정도 가려지지 않을까……? 의상도 목이 올라와 있는 의상이니까."

"넌 참 오늘도 뻔뻔하구나."


윤기는 이제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어차피 연습은 충분했다. 내일 무대엔 석진이 설 것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애가 타고 있겠지만.'


그래도 뭐. 내일부터는 다들 발 뻗고 자겠지. 윤기가 석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귀 끝까지 붉은 석진은 공연홀에선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물론 오늘까지지만.


"석진 씨."


 끄덕끄덕.


"오늘까지만 참아줘요."


끄덕끄덕.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올린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만.'


목소리를 잃은 척하는 건 정말 오늘까지만이다. 내일의 레이디 맥베스를 위해서 난 오늘까지만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맥베스 부인의 말이 맞는 것이다. 


'세상을 속이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얼굴을 하세요. 눈동자와 손과 혀끝에 환영의 뜻을 담으시고, 청순한 꽃처럼 보이게 하시되, 그 속에 뱀을 숨기세요.'


그래서 지금 자신은 청순한 꽃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눈동자와 손과 혀끝에 환영의 뜻을 담는 것쯤,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래서 석진은 입술로만 웃으며 평소와 같이 눈을 깜빡였다. 그건 태형도 마찬가지. 석진은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아. 당신도 지금 청순한 꽃처럼 보이네요.


'물론 선배는 언제나 꽃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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