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벌레주의

*입덕부정기 친구가 써내라 협박해서... 후딱 쪄온 동혁이 단편이에요 


-아 오늘 왜이렇게 피곤하냐. 내일 쉬는 날이라 그런가.



썩은 동태눈을 하고 휴대폰 화면 위로 뭉툭한 엄지를 토톡거렸다. 곧 1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답장이 온다. 아 존나 피곤해 왜 아직도 네시야. 마찬가지로 앵간히 졸려하고 있을 마케팅팀 김매니저가 앓는 소리와 함께 불만을 토로한다. 



-ㅜㅜ 

-일이나 하자...



뻑뻑한 눈을 끔뻑이며 턱을 치켜 든다. 좌우로 목을 꺾으니 뚜두둑 하며 목관절에서 기괴한 소리가 난다. 옆자리 푸초가 시끄럽다는 듯이 나를 흘겼다. 푸초는 내가 입사동기 이푸른초원을 부르는 준말이었다. 같은 년도에 태어난 주제에 빠른 들먹이며 은근히 언니 행세를 하는게 고까운 애였다. 뼈소리가 뭐 얼마나 크다고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눈치를 준다. 서러워서 살겠나.


스물네살이면 아직 돌도 씹어먹을 수 있는 나이라지만 (아닐수도...) 요새 내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웬만한 일에는 설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난 달에 소개로 한 번 만난 남자도 허우대 멀쩡하고 객관적으로 내 스타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있는 시간 내내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유튜브로 존잘 아이돌들 직캠을 봐도 잠깐 웃고 나면 그뿐 다시 차게 식어 무엇을 봐도 찐 행복을 느낄 수 없는 평정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취방 전자레인지에 햇반 1분 삼십초 맞춰놓고 티비로 넷플릭스를 틀었다. 어제 보다가 잠든 아는형님 있지 편을 보다가 맥없이 웃는다. 아 요즘 채령이 웃기네... 아무도 듣지 않을 감상평도 늘어놓는다. 삐익, 전자레인지가 일을 다했다며 듣기 싫은 고성을 울린다. 김이 폴폴 나는 햇판 껍데기를 잡아 들고 그릇에 담는다. 마지막 남은 계란 장조림 두개를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 터뜨리고 밥과 함께 비빈다. 


기력이 후달려서 볼 한쪽에 밥을 넣고 한참을 씹는다. 비빔밥 오분컷 하던 때가 있었는데. 잠깐 과거를 회상하며 시끌벅적한 화면으로 눈길을 돌린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그러고 있는데 미처 무음모드를 해놓지 않은 휴대폰이 시끄럽게 웅웅댄다.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스팸인가 싶어 화면을 보니 흰색으로 푸초 두 글자가 띄워져있다.



"아... 얘는 왜 퇴근하고 나서도 전화질이야."



전화 안받으면 백퍼 뭐라 할 게 뻔해 진동이 충분히 울리고 나서야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네 여보세요. 아 네. 네네. 네. 아... 네. 넵. 한숨 푹 쉬며 전화를 끊었다. 허공에 대고 주먹질도 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또 또 또 부탁인 거다. 아니 동시에 입사한 주제에 왜 맨날 나한테 일을 넘기는지 존나 억울했지만 푸초가 차부장의 조카딸이라는 소문이 있어 함부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소문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 이유는... 쟤는 하루 전에 연차를 내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주 전 5월 4일에 반차쓰고 남친이랑 일박 이일로 제주도 다녀오더니만 이번엔 석가탄신일 다음 날 급하게 연차를 썼으니 자기가 가야 할 거래처 미팅에 대신 좀 가달라는 거다. 


남은 밥을 한 입에 털어내고 게수대에 그릇과 수저를 담궜다.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려던 내 계획은 이푸초 때문에 다 수포로 돌아갔다. 새벽까지 귀칼 정주행하고 내일 저녁 8시에 눈 뜨려는 계획도 저 멀리 날아갔다. 뭐? 자료 넘겨줄테니 내일 숙지하고 모레 지 대신 미팅을 나가라고? 쒸익 대며 브라자 후크를 풀었다. 욕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실로 가관이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얼굴을 박고 분을 삭혔다. 내가 이 거지발싸개같은 회사. 딱 일 년만 일하고 반드시 뜬다. 존나 뜬다 내가.





슬랙스에 양 다리 끼워넣고 셔츠 집어 넣어 버클을 잠군다. 근 한달동안 바빠서 헬스장 킵 걸어놓은 탓에 불어난 옆구리 살이 신경쓰였다. 움직임도 편치 못한 것 같고. 오늘따라 날씨도 약간 비가 올 것처럼 습하고 구려 반곱슬 머리카락은 아무리 드라이를 해도 정신을 못차린다. 에이포 투명 화일에 정리한 자료들을 차례로 정리해 끼워 넣고 노트북, 파우치, 리유저블 컵 등을 챙긴다. 빵빵하게 다 찬 가방을 어깨에 걸어 매고 집 밖을 나선다. 오피스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흐리다. 


미팅에 나온 건 나보다 대여섯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이 습하고 더운 날 왜 두꺼운 정장 자켓까지 걸치고 온 건지 의문이었지만 나름의 성의이겠거니 싶었는데, 자켓 벗자마자 셔츠 겨드랑이 아래가 흥건히 젖어든 광경을 목격한 후로 자꾸만 그곳으로 눈이 가는 통에 죽기살기로 흐린 눈을 했다. 게다가 연신 귀 뒤로 옆머리를 넘기는 것도 약간 역겨워 참기 어려웠다. 남돌 사이에 장발 유행 돈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머리를 어깨까지 질질 기른 남자는 처음이었다. 눈이 좀 부리부리하게 생겼길래 얼굴이 좀 생겼나? 싶었는데 마스크 잠깐 벗은 사이에 거뭇거뭇하게 코밑으로 난 메기수염을 보고 나서는 완전히 밥맛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회사랑은 오래 거래를 해온 브랜드라 잘 마무리 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꾹 참고 허리 숙여 마지막 인사까지 했다. 


그런데,



"저기 여주씨,"

"네?"

"사실 여주씨가 너무 제 이상형이셔서 그런데."

"...?"

"사적으로도 만나 뵙고 싶어요. 업무 이야기 말고 다른 얘기도 좀 하면서. 혹시 회사 복귀하시는 거면 제가 태워드리면서 이야기도 좀 나누고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남자가 징그럽게 눈웃음을 치며 가까이 다가온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뒷걸음질 치며 아... 아... 그게... 연신 거절에 가까운 손짓으로 일관하는데 못 알아듣고 자꾸만 다가온다.



"그, 저는... 저는 같은 맘이 아니라서요."



다가오지 말라는 뜻으로 양팔을 펼쳐 멈추곤 죄송하다 말하니 멈춰 선 남자가 허리 춤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약간 화가 난 어투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왜요? 여주씨도 안에서 계속 저한테 눈웃음 치셨잖아요."

"제가요?"

"막 넹, 넹. 이러면서 애교도 부리셨잖아요."

"아니 제가 언제..."



원래부터 눈이 좀 휘어져서 웃는 상인데요. 그리고 넹넹 이러면서 대답한 적은 진짜 죽어도 없는데요. 너무 억울해 그 자리에서 아니라고 부르짖고 싶었지만 서초역 일대는 어딘가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는 쪽팔려서라도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아까부터 남자가 크게 팔을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없다는 제스쳐를 취하는데 자꾸만 한둘씩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만 같아 신경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언제나 데뷔를 염두에 두고 살아왔지만 서초역 진상남과 그 옆 우물쭈물녀로 SNS 유명세를 타고싶진 않았다. 



"저 진짜 억울해요! 분명 여주씨가 먼저 저를 꼬셨잖아요!"

"진짜 그런 적 없다니까요?"

"그럼 차라도 같이 타고 가요. 네?"

"아니 저는 진짜 괜찮아요..."



누가 누굴 보고 억울하다는 건지 분통이 터졌다. 나름대로 잘 끝난 미팅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좆됐구나, 이대로 가면 백퍼센트 거래처에 꽃뱀이 나왔네 어쩌네 하며 업계 내에 헛소문이 쫙 깔릴 거라 생각하니 그야말로 망연자실이었다. 지랑 같이 차를 안타준다고 유치원생처럼 몸을 털며 짜증을 내는 남자를 아연실색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기막힌 타이밍에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나!"



소리가 난 곳으로 뒤를 돌아 쳐다보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한 남자가 내 곁으로 다가 선다. 가만 보자... 내가 얠 어디서 봤지? 



"여기서 뭐해요?"

"..."

"한참 찾았네. 가요, 오늘 고생했어. 미팅 누나가 나온다길래 나 카페 앉아서 한참 기다렸잖아."



그렇게 말하며 내 앞의 남자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방금 전까지 개찐따같던 남자가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마찬가지로 허리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퍽 당황스러운 낯짝으로 갑자기 먼길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내 옆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잠시간 그러고 있던 남자가 휙, 하고 허리를 들어 나를 바라보곤 눈으로 씨익 웃는다. 



"나 몰라요?"

"... 누구...?"

"아 이거 서운하네."



남자가 모자와 마스크를 동시에 벗는다. 머리를 좌우로 털어내곤 정리하며 나를 쳐다본다. 어딘가 익숙한 눈매, 까무잡잡하고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입술...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맞다면



"이동혁...?"

"이제야 알아보네. 엉 나 동혁이."



*



유연하게 핸들을 돌리는 이동혁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얘가 언제부터 운전을 할 줄 알았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구리빛으로 빛나는 옆태가 그때 그 이동혁이 맞았다. 



"너 돈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 DH 대표 외동아들인 건 전혀 몰랐다."

"내가 좀 검소하게 살았어야지."

"스무살 주제에 온몸에 브랜드 칠갑하고 다녔으면서 퍽이나."

"그랬나. 민망하네."



이동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실소를 터뜨린다. 신호를 받아 잠깐 멈춰선 자 안에서 미묘한 시선이 오간다. 



"좀 막히는 거 같다 그치."

"막히긴 어디가. 이 누나 민망해서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맞지."



뻥뻥 뚫린 대로를 보며 말도 안되는 소리나 지껄이니 어색해서 그러는 걸 다 안다는 듯 웃는다. 너는 다 알면 그냥 좀 넘어가. 그렇게 말하며 앞을 보라고 턱짓하니 나 그냥 넘어가? 오케이. 라며 능글거린다.


이동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같은 과 후배. 얘 군대가기 전까지 2년동안 같은 학회로 한솥밥 먹으며 지내다가 군대 갔다온 사이 내가 다이렉트로 졸업해버리는 바람에 연락이 끊긴 애 중에 한명이었다. 그냥 그렇게 보통 선후배 사이라면 이 만남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선배를 곤경에서 구해준 모험적이지만 스쳐지나가는 그런 관계로 일막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우리 사이에 빠지면 안되는 중요한 포인트는,



"근데 누나. 누난 스물 네살이나 됐는데 여전히 귀엽네요."



얘가 나를 무지막지하게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과는 선후배를 짝선배 짝후배로 이어 아직 대학의 ㄷ도 모르는 후배들을 챙겨주는 관습이 있었다. 이동혁이 입학할 당시 바로 윗학번 애들이 대거로 휴학하는 바람에 두학번 위인 내가 이동혁의 짝선배가 되었고, 우린 그렇게 한 학기를 붙어다니며 밥을 먹었고, 과제를 했고, 수업을 들었고, 술을 마셨고... 


어쩌다 보니 썸도 탔다. 미필은 남자로도 보지 않던 스물 두살의 나는 우리 둘의 썸이 그저 청춘남녀가 하도 붙어다니기에 자연히 생기는 이상기류라고만 생각했지 한쪽의 열렬한 사랑 덕에 생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동혁의 물량공세를 어느 부잣집 외동아들의 감사표시와 돈자랑 정도로 여겼으며, 매일 밤마다 오는 전화는 원체 여기저기 정붙이는 곳 많은 이동혁의 유난한 다정인 줄로만 알았다.


군대 가기 전날 만나달라며 까까머리에 아디다스 캡모자 뒤집어쓰고 온 이동혁이 모자 한번만 벗어달라며 장난치곤 사진 여러장 찍어대는 나를 보며 그냥 웃길래 난 얘가 그냥 진짜 나를 웃기고 어이없는 누나로 보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그날 밤 헤어지면서 편지를 주는데 나를 너무 좋아한다는 거다. 나를 좋아해서, 보고싶어서 밤새 울어보기도 했다는 거다. 이 마음을 어찌 해야할 줄 몰라서, 그리고 난 얘가 군대 가면서 이 편지를 준 게 마음을 접겠다는 어떤 신호라고 받아들여서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휴대폰 한켠엔 여전히 이동구리. 라고 연락처가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근데 나 좀 서운해.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안 와."

"그거야... 아니 그냥 내가 좀 바빴어."



미안하단 표시로 어깨 두어번 툭툭 두드리니 입술 삐쭉 내밀곤 제 서운함을 양껏 어필한다.



"나 진짜 누나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넌 어째 변한게 하나도 없냐."

"내가 갑자기 점잖아져도 좀 답지 않잖아."

"그건 또 그래."



몇마디 스몰토크를 나누니 어느덧 회사 앞이다. 퇴근까지 끽해봐야 두 시간 남았는데 집에 안 보내주고 꼭 상황 보고 하고 가라는 최팀장의 지시였다. 다시 한 번 이 거지발싸개같은 회사 언젠가 꼭 뜬다는 다짐과 함께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워다줘서 고맙다고 하려는데 먼저 차문열고 나가 내 조수석 문 잡아주고 있다. 그리곤 스무살 적보다 한층 깊고 짙어진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다.



"왜?"

"누나."

"응?"

"나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면"

"..."

"같이 밥 먹어주나?"



그렇게 말하며 거절할 수도 없게 웃는다. 2년 전 보다 한층 떡벌어진 어깨를 하곤 수줍은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말아 접는데 뭔가가 스멀스멀 마음 속에 피어오른다. 부러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으로 텅텅 빈 스케줄러를 미간 구기며 체크하는 척 하곤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키. 내가 사줄게."

"헐 진짜?"

"응. 대신 나 야근 안하게 기도해. 부처님은 어제 왔다 갔으니까 오늘은 그 뭐야 예수님한테 기도해."

"누나 나 요즘 교회다니잖아."

"네가?"

"엉. 나 완전 아멘이야. 조용히 차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릴게."



구라는. 이동혁이 양손 모아 잡고 광대 올려 웃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덩달아 기분좋게 웃었다. 요 근래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웃어본적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차에서 뭘 열심히 찾아본 건지, 퇴근한 나를 태워 이동혁이 향한 곳은 교대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술 땡긴다는 내 말에 자긴 운전해야 한다며 내 와인만 따로 시켜준 녀석이 이번엔 스테이크를 예쁘게 썰어 내쪽으로 밀어준다. 대학 다닐 때도 워낙 주머니 사정 넉넉한 애라 한두번씩 나를 좋은 곳에 데려가곤 했는데 고작 두 살 더 먹었다고 이런 곳과 더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게 새삼 신기했다. 



"맛있어요?"

"응. 완전."



볼 양쪽에 고기 한점씩 넣고 와구와구 씹으니 모자라면 더 시켜주겠다고 천천히 먹으란다. 고개 끄덕이며 다음 타겟인 파스타에 눈길을 돌리니 어떻게 안 건지 포크 두 개로 면을 집어 보기좋게 말고는 딱 한 입 사이즈로 앞접시에 덜어준다. 



"너 이런 건 어디서 배워?"

"뭘요?"

"막 이런 매너 있잖아. 고기 예쁘게 썰고 면 예쁘게 옮겨담고."

"이런 걸 어디서 배워. 그냥 타고 난 거지. 왜, 약간 설레나."

"... 너는 꼭 한 마디 더 얹어서 매력이 좀 깎여."

"부끄러워서 그러지. 칭찬 받아본 게 오랜만이라."



내가 잘 먹는 걸 확인하고서야 제 술을 뜬다. 나랑 오랜만에 만나는 게 진짜 긴장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미세하게 손을 떤다. 다 큰 줄 알았는데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서 아직 날 좋아한단 티를 내는 거 보면 여전히 애는 애다. 얜 정말 나를 2년 내내 좋아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좋아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 내가 얘 첫사랑인가? 아 그건 좀 오반가. 말은 안해도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좀 빨리 알딸딸해지면 좋겠단 생각에 와인잔 들어 입술 위로 가져다 대니 누가 혼자 잔을 기울이냐며 맹물이 든 잔을 내 앞에 내밀고 짠 해달란다. 



"이동혁 귀여워."

"... 이 누나 취했네."

"뭐래. 나 이제 술 좀 해."

"얼굴색은 거짓말 못하지."

"......."

"누가 누구보고 귀엽대. 일어나요 데려다 줄게."



차에 타니 졸음이 몰려온다. 자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눈을 부릅뜨니 눈 그렇게 뜨는게 더 무서우니까 그냥 자란다. 취한 사람한테 맞고싶냐니까 세상에 맞고싶은 사람이 어딨냐며 오랜만에 본 후배를 사랑으로 대해주란다. 자라고 했으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가 마르지 않아서 웃다가 진지하다가 웃다가 진지하다가를 반복했다.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동혁이랑 있을 땐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모르게 흘렀다.


이번에도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연다. 내가 휘청거리니 내 손을 잡아다 제 팔뚝에 올려준다. 자기 잘 잡고 걸으라며 취객 속도에 발맞춰 천천히 걷는다.



"이렇게 취해서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해요."

"어련히 알아서 하지."

"요새도 맨날 지각해요?"

"회사원은 지각 많이 하면 짤려."

"학교도 짤릴 뻔 했잖아요."

"근데 아까부터 진짜 죽을래? 자꾸 토 달어 너."

"누나 귀여워서 그러죠."



눈매 접어 웃는 얼굴이 여전하다. 목소리는 더 두꺼워졌는데 웃음소리는 전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문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 분명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727호가 써져있는 자취방 앞에 와서야 문에 등을 기대고 이동혁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다.



"너 이제 가라."

"네."

"..."

"근데 누나."

"왜."

"... 군필이 취향이람서요."

"내가?"

"엉."



미필이 싫다고 했지 군필이 취향인 건 아닌데. 아니 그게 그건가. 복도를 밝히던 불이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한다. 침묵 위엔 불이 딸깍 거리는 소리만 얹힌다.  



"......"

"... 나는 어때요. 나는 군필인데 돈도 많고 잘생겼고 아직 어리잖아."

"..."

"회사엔 순 아재들 밖에 없던데. 오늘 그 장발 남자도 누나한텐 영 아니더만."

"......"



다가온 기회를 놓지치 않겠다는 듯 의지에 찬 얼굴. 다년간 나를 봐왔고 좋아해왔다는 데서 오는 확신. 어둠 속에서 쳐다보는 눈빛이 이전에 봐온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낯설다.



"나 오래기다렸는데. 아, 술 깨고 다시 얘기할까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는 다정한 손길. 스스로가 되게 능숙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찬가지로 거짓말 못하고 떨리는 이 손길이 녀석의 심장의 속도를 대변한다.


닿아오는 더운 눈빛에 나의 눈을 맞춘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꾹꾹 눌러담아 온 진심.  


난 아직 누나 너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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