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련이 천하를 삼키기 전에 천마가 재림하고 마교가 발호한 세계선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마교에 대항하고 있고, 사패련은 마교와 전쟁 중에 괴멸한 시점

 

 

 

 

  이미 숨이 멎어버린 이들이 산을 이루고 끈적한 피는 땅을 젖히다 못해 고였다. 등을 맞대고 싸우던 이는 오간 데 없고 들이켜는 숨에 딸려오는 것은 그저 지독한 악취와 채 빛나지 못하고 타들어 간 허망한 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뿐이더라. 형태도 없이 무너져 불타는 건물에서 피어오른 매캐한 검은 연기가 노을을 덮어 그 빛을 흐리자 퍽 요사스러운 것이 흡사 지옥과 다름없다. 인제 와서는 새로울 것도 없을 모습이었다. 과히 지옥도라 부를 만 한 곳에 오롯이 홀로 서 있던 이가 피를 왈칵 토했다.

 

  패군(覇君) 장일소(長一笑)

 

  그의 손에는 몸에서 억지로 뜯어낸 것이 틀림없을 인간의 목이 들려있었다. 엉망으로 찢겨 진 목의 단면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장일소는 한때 주교였던 이의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이기더니 이내 광소를 터트렸다. 지독하게 허기졌던 탓이다.

  장일소는 본디 목마른 자였다. 어떠한 일이 있었기보다는 태생이 그러했다. 술잔에 비친 달을 탐하듯, 가지지 못할 것에 손을 뻗고, 짓밟고 빼앗아서라도 기어이 그것을 손에 쥐어야만 성이 풀리는 이. 그야말로 패군이라는 별호가 맞춘 듯이 어울리는 자. 그게 장일소다. 그는 문득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느릿하게 훑었다. 장일소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이가 억지로 숨을 부여잡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은 끊길 듯 미약했으나 장일소를 보는 핏발 선 눈은 선명하더라. 장일소는 제 군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호가명(扈加名)

 

  장일소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붉은 선이 그였다. 호가명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달싹거렸다. 제 목숨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장일소를 염려하는 것이리라.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는 기어이 호가명의 앞에 섰다. 장일소의 곱던 비단 장포는 피를 머금은 채로 성한 곳 없이 찢겨있었고 면류관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장일소는 고개를 숙였다. 피와 오물로 엉킨 기다란 머리카락이 힘없이 툭 늘어졌다. -볼품없구나. 장일소는 붉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린아이의 머리만 한 구멍이 뚫린 장일소의 배를 본 호가명의 눈에 설핏 회한이 스쳤다.

 

 

  “말해봐라. 내가 누구더냐?”

 

 

  호가명은 대답 대신 떨리는 손을 들어 장일소의 바지 춤을 부여잡았다. 가련할 정도로 떨리는 몸을 가만 보던 장일소는 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검은 연무에 가려졌으나 기묘할 정도로 붉은 노을이었다. 장일소는 과장되게 양팔을 넓게 뻗었다.

 

 

  “하하하하핫! 하늘이 이 장일소를 위해서 타오르는구나. 가명아, 내게 퍽 어울리지 않니?”

 

 

  장일소는 언제나 허기가 지고 목이 말랐다. 속이 텅 빈 채로 태어난 탓인가? 이제는 도무지 알 방도가 없다. 그저 많은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가져야 했을 뿐이리라. 배가 고프니 먹어야 하고, 목이 타니 물을 마셔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련주 님.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기껏해야 고작 그거라니. 풍류를 모르는, 이 얼마나 가련한 충심인지…. 가명아, 네가 기어이 나를 망치는구나.

  -천하가 불타더라도 그저 가질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않느냐 하였지. 허나 천하를 가진 들, 거기에 남은 것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가명아, 나는 천하를 가지고 싶다. 온전히 천하를 가져 내 발아래에 두고 싶다. 그럼 이 끝없는 공허함도 채워지겠지. 하지만 가명아.

 

 

  “이제야 알겠구나.”

 

 

  장일소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힘을 잃은 손이 더러운 바닥으로 처박혔다. 장일소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허망할 정도로 쉽다. 어쩌면 이백(李白)이 거슬렸던 것도 저와 다를 바 없음을 진즉 알았기 때문이리라.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은 것과 이미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우둔하다 잴 수 있겠는가.

 

  가명아, 가명아. 천하가 끝난다고 한들, 같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겠느냐?

 

 

  장일소는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죽음을 앞에 둔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기개였다. 죽음도 패군의 무릎을 꿇릴 수는 없는 법. 장일소의 호쾌한 웃음이 홀로 폐허에 울렸다. 커다란 웃음은 길게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잦아들며 완전히 끊어졌다.




심심한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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