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마유.

교정 밖까지도 아오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읽고 있던 책은 진전이 없었고, 책을 쥐고 있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들려올수록 가슴이 뛰는 소리도 크게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여기있었던거야?

아오이의 그림자가 보였다.

- 전 언제나 여기 있었는데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은 체 덤덤한 척 흉내를 내며 대답을 했다. 그런 제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인지 옆자리에 걸터앉은 아오이는 옷깃을 펄럭이며 물었다.

-안 더워? 

-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를 것만 같은 것에 책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 행동또한 익숙한  듯 흐응이란 짧은 비음을 낸 그는 묵직하게 어깨에 기대어 왔다.

-무겁습니다 아오이군.

-에이 뭐 어때. 그정도는 아닌거 안다고 마유.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와 그의 내음에 현기증이 날것만 같았다. 가슴속 두근거리는 소리가 바깥까지 울려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들키는 건 아닐까. 

책을 쥐고 있던 손위로 뜨겁고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마유 손 진짜 작네

손 위로 올라와 있는 뜨겁고 커다란 손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운동을 하고 있는 아오이의 손은 탄탄하고 뜨거운 온기가 올라와서, 온 몸에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아까전까진 서늘하다 느꼈던 것이 확 열기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마유  너 어디아파? 보건실 갈래?

-아뇨. 왜그러시죠

-너 지금 얼굴 빨개졌어.

걱정스럽단 듯이 커다란 두 손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심장고동소리탓에 귀가 멀어버릴것만 같은 것이 그에게 들킬것만 같았다.  들키지 않으려면 그의 손을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야 했지만, 그렇게라도 닿아있는 그의 손길이 좋아서, 그저 눈만 깜빡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 고백을 한다면, 그는 지금처럼 나를 이렇게 걱정해줄까.

나직히  머릿속 가득히 울려오는 생각에 그저 고개를 가로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말할 일은 없었지"

쿠로코는 조용히 자신의 책을 닫아 책장에 꽂아넣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도 아닌 중학교 시절. 그는 자신의 체온이나 몸에 유독 민감했고, 걱정스러워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은 사랑을 꿈꿨다. 자신이 그랬단 것을 안다면, 그는 웃어줄까. 아니, 자신을 계속 파트너라 해줬을까. 

정답은 아니다 겠지.

스스로 답을 지으니 씁쓸함은 배로 들어왔다. 그럼에도 쿠로코는 아오미네에게 질문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아카시의 말대로, 자신은 끊임없이 도망자였으니까. 이후, 아오미네에게 전화가 왔었으나, 불편한 탓에 핸드폰을 아예 꺼버렸다. 카가미는 그런 쿠로코를 잠시 보더니 한숨을 쉬며 사라졌고 이따금  연락없이 홍길동마냥 나타나선 밥을 해주곤 떠났다. 그외엔 누구와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자주 보지 않는단 핑계도 있었지만, 영화화에 대한 조율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일에 대해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대본에 대한 틀을 써주길 바라고 있었다. 문제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대본에 대한 참견을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탓에 시간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과는 라인으로 연락하면 되어서 핸드폰을 킬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있었다. 자신은 현재 바쁘기 때문에 핸드폰을 볼 시간도, 전화를 받을 시간도 없다고.

쿠로코가 다시 핸드폰을 킨 것은, 정규시즌이 시작되면서 아오미네와 카가미가 출국한 이후였다. 기껏해야 카가미나 키세 문자들 뿐일 메시지함에, 아오미네의 문자가 숨어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제.]

[어제 잘 들어갔냐 테츠?]

많은 것을 집어 삼킨 체 묻는 듯한 질문에, 쿠로코는 입이 쓴 기분이 들었다. 눈 앞에서 아오미네가 할말을 삼키며 뱉어내는 모습이 눈가에 아른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삭제하자. 이 기분을 오래 가져서는 안된다.

삭제창을 켰다가도 미련 탓에 버튼이 눌려지지 않았다. 이제껏 끊어내기 위해 노력해왔던 미련들이 미적지근하게 달라붙어오는 것에 결국 삭제하지 못했다. 

.

바닐라쉐이크를 든체 멍하니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지 어미의 손을 꼭 잡은 체 종알대는 아이. 이어폰을 낀체 걸어다니는 학생들.  외근 나온 듯이 가방을 든체 뛰어다니는 회사원들. 각자의 리듬을 가진 체 움직이는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쿠로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붉은 머리칼이었다. 새빨간 머리칼. 누구였더라. 흐릿하던 초점을 맞추어 정체를 떠올릴 때 쯤. 머릿속으로 적생 경고가 올렸다.

"어...?"

아카시. 아카시다. 아카시가 천천히 앞을 걸어나가며 눈으로 쿠로코를 쫒고 있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할지 몰라 버둥대는 쿠로코를 눈으로 쫒던 아카시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괜스레 도망치려던 제자신이 우스운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계란한판을 채워가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감정에서 도망치는 자신이 한심하구나 싶어서. 

.

지금 이순간만큼 자신이 한심할 수 있을까. 쿠로코는 눈앞의 노트북속 화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눈 앞은 한창 NBA리그가 진행중이었다. 아오미네와 카가미의 플레이를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노트북을 켰다. 가볍게 맥주가 들어간 탓에 생긴 말도 안되는 용기였다.  마이너장르인 터라 TV로 하지 않는 탓에 사이트로 우회까지 해야했고, 외국인 캐스터가 설명하는 방송으로 봐야 했다. 부저비터 슛을 넣으며 기뻐하고, 동료들과 그 기쁨을 포효하는 아오미네에 쿠로코는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껐다. 화면안 쪽에서부터 느껴지던 온기와 열정히 한번에 사라지고, 적막과 냉기만이 집안에 가득했다. 맥주가 들어간 탓에 올라왔던 취기조차 한번에 꺼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 괜스레 술을 산게 억울했다. 차가운 식탁에 고개를 쳐박았다. 그가, 아오미네가 농구를 하며 다시 행복하길 바랬다. 자신과 주먹을 맞대고, 자신의 볼을 받으며 환히 웃던 그를 보고 싶었다. 환상의 식스맨이란 타이틀로, 그에게서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어떨까? 자신보다 강한 동료들로 가득해진 그는 자신과의 농구를 기억하고 있을까. 쿠로코는 자신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농구를 했다는 것이 무색할만큼 근육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무척이나 초라하고, 한심한 자신의 행색에 몸을 끌어안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것에 더욱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자신은 아오미네에게 지금도 소중할까. 친구.. 이긴 할까. 괜스레 느껴지는 초라함에 한없이 작아져 한줌의 흙이 되는 기분이었다. 필시 자신이 만들어낸 자괴감의 늪이었음에도, 쿠로코는 한없이 한기를 느꼈다.

자괴감의 늪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웠다. 아니 사실 이제껏 끊임없이 피해오고 피해오던 사실에 직면한 것이다. '내가 자괴감의 늪에 빠졌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돌아봤을 즘, 그는 어느새 자괴감의 늪 깊은 곳에 홀로 갖혀 있었다. 

.

.

자괴감의 늪이 깊어지는 만큼,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카시를 만나지 않는 것에 쿠로코는 안심하면서도 불안함을 느꼈다. 마음을 놓는 순간 나타나는 아이인 탓에 쉽사리 안심이 되지 않았다.

"쿠로코상. 쿠로코상!"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가까스로 대답한 쿠로코는 고개를 들었다.

"네."

"캐스팅중 한분이 앞에 스케쥴이 있어서 조금 늦어진다네요. 조금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가벼이 사과를 하라며 사라지는 편집가를 바라보며 쿠로코는 눈앞의 라떼가 든 컵만 만지작 거렸다. 진행되던영화의 캐스팅 배우들과 조우하는 날이었다. 원체 기대도 하지 않고, 불편함만 가득한 탓에 흥미가없었다. 그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눈치챌 사람들은 몇 없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고작둘 밖에 없었다. 이것보다도 불편한 것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의 배우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애초부터 자신의 소설 주인공 아오이 은 아오미네를 생각하며 만들어낸 캐릭터였다. 아오미네 외에 어울릴 남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들고 있던 종이컵을 구기작대며 탁자만 바라보는데 벌컥거리며 문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쿠로콧치?"
익숙한 목소리에 쿠로코가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얼굴이 다소 붉게 달아오른 키세가 서있었다. 주위로 웅성대며 인사를 하던 소리들이 줄어들고, 삐이익이란 사이렌 소리와 눈앞의 키세만 들어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이번 영화의 주연! 아오이 쥰 역할까지 다왔습니다! 미팅 시작하겠습니다."

감독의 소리와 함께, 절망으로 떨어졌다. 절망의 끝바닥에 홀로 떨어져 허우적대는 기분이 들었다. 아오이 쥰이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떠올리며 만들어낸 산물 것이라는 걸 키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바라보는 키세의 눈동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쫓아오는 것이 근거 중 하나였다. 이 두려움을 어떡하지. 들킨거겠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릿속 가득한 두려움에 고개가 들려지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일어서 인사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어느타임에 도망가지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쿠로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피 자신은 일개 작가일뿐이며 이곳에서도 작가임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인 터라 누구에게도 잡힐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키세에게서. 서둘러 가방을 둘러맨 체 도망치듯 나가는 쿠로코의 팔목을 붙잡은 것은 키세였다.

"수고하셨슴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키세군은 아...?"

"저 잠시 작가님과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아 그러고보니 아까 이름도 부르시고 하시더니.. 아는 사이인가 보네. 그래 그럼 나갈때 불만 꺼줘요"

"네네!"

그렇게 스탭들과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키세는 쿠로코의 팔목을 붙잡은 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 가득 황색경보가 번쩍거렸으나 힘으로 도망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팔을 밀쳐낼 의지가 사라졌다. 그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찌해야할지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감독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키세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생각했슴다."

"..."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어? 뭔가 그리운 내용이다 했슴다. 근데."

"..ㄱ.."

"대본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상하게 두명이 떠올랐슴다."

"."

"내가 너무 둘을 좋아해서. 좋아해서 그런가 싶었슴다. 아오미넷치는 해외에 있으니 만나기 힘들고, 쿠로콧치는 나한테 차갑고.  아니죠. 언제부턴가 우리 연락은 안받았잖슴까."

키세의 올곧은 눈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졸업과 함께, 쿠로코는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했었다. 한 번 다른사람들과 하기 시작하면 아오미네의 연락을 피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될거니까.

"쿠로콧치."

짧은 침묵끝에  자신을 불러오는 것에 쿠로코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나한테 할말. 없슴까?"

"생..각하는 대로입니다."

침을 꼴딱이며 말해오는 쿠로코에 무심하게 키세가 되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키세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내가 생각하는 게. 어떤건 줄 알고요?"

키세의 소리에 쿠로코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분노? 한심? 복합적인 눈을 한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제껏 피해오던 두려운 시선. 그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차마 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내릴 수 없었다.

다시 입을 열러던 키세가 입을 열기 전, 키세의 매니저가 키세를 찾는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키세상? 여기 있었네. 지금 가야되는데. 다음 스케쥴 시간 생각해야죠."

"일단, 다음에 전화하겠슴다. 꼭 받아요. 피하는거 안됨다!"

급하게 말을 흩날리는 키세의 말을 무시하려는 데 키세가 다시 팔을 잡아오며 말했다.

"피하는거. 안됨다. 알겠죠?"

그렇게 사라지는 키세에 쿠로코는 우두커니 서선 키세의 손이 잡혀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연락을 피했던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인가 보다. 키세의 손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화끈거리게 열이 느껴지는 기분이 드는 것에 쿠로코는 가만히 자국을 바라보았다. 쉽사리 발걸음을 떼어내지 못했다. 절벽에서 곤두박질친 기분이었다. 이렇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군가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자신과 가까운, 가까웠던 관계들에게 많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소설을 읽었다면 누구든 쉽게 아오미네를 떠올렸을 것이다. 역시 소설따위 써선 안되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 처음부터, 처음부터 올려선 안됬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자신의 그 당시의 기분을. 그 당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그에 대한 동경을. 이런 이기심을 가진게 잘못이었던걸까. 머릿속 가득히 들어찬 이기심에 대한 두려움에 발걸음이 흔들렸다. 가까스로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내려와 택시를 잡는 그 순간까지도 잠시 올려다 보았던 키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분노? 그런 간단한 표정이 아니었다. 한심한, 아니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머릿속 가득히 적색경고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절망을 모두가 느낄 거 같았다. 앨리베이터의 받침대를 잡고 내린 쿠로코의 눈 앞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서있었다.

"쿠로코상?"
그리고 쿠로코의 세상은 새까맣게 암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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