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화’란 인간이 특정 동물을 키우고 길들이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양이의 가축화 만큼은 예사 동물과 달랐다. 역사적으로 고양이는 그들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 인간을 ‘간택’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보통 가축을 키우는 것은 명백히 인간의 이익과 필요를 위한 것인데, 사실상 인간에게 별 도움을 주지 않는 고양이를 가축화하는 행위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수천년에 걸쳐 인간의 애정과 숭상을 한 몸에 받아왔으며, 지금까지도 인간은 기꺼이 고양이의 집사이자 캔따개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만큼 고양이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고양이 ‘진’도 그렇다.




보스의 고양이






   랙돌 중에서도 희귀한 품종인 진은 영화계의 프린세스로 군림하던 여배우 ‘김민혜’가 키우던 고양이다. 패션과 유행의 선두주자로도 유명했던 그녀는 자신이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것이 남과 차별화 되기를 원했고, 애완동물 역시 남과는 달라야 했다. 어떤 종을 키울지 고민 하던 중 미국에 로케이션 촬영을 간 그녀는 베벌리힐즈에서 한 상류층 백인 여자의 품에 안긴 파란 눈의 고양이를 보았다. 그녀는 첫눈에 그 우아하고 기품있는 고양이에게 반해 다짜고짜 다가가 무슨 종인지 물었다. 고양이를 안은 여자는 동양인을 무시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시선을 보내며 랙돌, 그 중에서도 희귀한 종이라고 덧붙이며 구하기 쉽지 않을거라 말했다. 그것은 민혜의 승부욕에 불을 붙인 꼴이었고, 집요한 수소문 끝에 홍콩 스탠리베이에 같은 종의 혈통 좋은 랙돌이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은 그녀는 대번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양이를 만난 곳은 음침한 뒷골목이었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수상한 차림새의 판매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금액을 불렀지만 그녀는 주저없이 값을 치르고 아기 고양이를 데려왔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첫사랑 이름인 ‘석진’이라 이름 짓고 줄여서 ‘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진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른 눈에 전체적으로 크림화이트 톤에 베이지 컬러가 아름답게 조화된 윤기나는 긴 털을 가졌다. 민혜는 진의 몸값에 걸맞게 최고급 사료를 먹이고 에비앙 생수를 마시게 하며 물심양면으로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진의 행복하던 일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연애고자인 민혜는 늘 나쁜남자에게 끌리곤 했는데, 진은 어느 날 그녀와 싸운 남자친구의 분풀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남자는 홧김에 그녀가 가장 아끼는 것을 없애버리겠다는 심산으로 진을 데리고 나와 알 수 없는 곳에 유기했다. 그렇게 진은 한 순간에 펜트하우스에서 길바닥으로 나앉게 되었다.

   진은 이틀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자동차 밑에 몸을 숨기고 선잠을 자거나 길을 헤메고 다녔다. 매끈한 대리석과 폭신한 양탄자만 밟아본 젤리같이 여린 발바닥으로 거친 콘크리트 바닥을 딛어야 했다. 주린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 때, 골목길 모퉁이에서 길고양이들이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비켜, 이 천한 것들아!!! 


  곱게 자라긴 했지만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었던 진은 매섭게 하악질 하며 긴털을 잔뜩 부풀려 손쉽게 그 천것들을 몰아냈다. 바닥에 놓인 플라스틱 그릇에 누군가 채워둔 사료가 반쯤 남아있었고, 옆에는 불순물이 둥둥 떠있는 물 그릇이 있었다. 속이 뒤집어질 것 처럼 비위가 상했지만 이것 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진은 조심스레 사료 그릇에 코를 들이밀어 보았다. 우웩, 역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 야! 이딴 고약한걸 어떻게 먹냐? 이걸 먹을 바에는 굶어 죽겠다. 너네나 쳐먹어! 


  그제서야 물러났던 길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진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고, 진은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 유진 오닐




  궁금한 것이 있을 때 고양이는 모든 감각을 그것에 몰두하며 무조건 직진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느라 다가오는 자동차를 보지 못하고 로드킬을 당하는 등 스스로 위험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기도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옛말은 그래서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을 진작에 새겨 들었어야 하는데. 퐁퐁 샘솟은 호기심에 이끌려 진은 저도 모르게 인기척이 들리는 골목길로 홀린 듯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골목에는 별 하나 안보이는 지금의 밤하늘보다 더 시커먼 옷을 차려입은 인간 남자들이 수두룩했는데 그들 중 하나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꿇어 앉은 사내의 눈높이에 맞추어 천천히 몸을 굽히며 쪼그려 앉더니 번쩍이는 단도의 칼등을 주저 앉은 남자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댔다. 뭘 하는거지? 인간들의 영역싸움? 아니면 암컷을 사이에 둔 치정 관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진이 몇 발자국 더 다가서며 주의깊게 그들을 관찰했다. 칼을 든 남자가 낮은 음역대의 묵직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진의 부드럽고 흰 털이 쭈뼛 일어섰다가 사르르 가라앉았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것이다.


“오억이나 해먹어놓고 안들킬 줄 알았어요?”

“대, 대표님...”

”그래도 이실장 5년이나 함께한 정이 있으니까 가족은 건드리지 않을게요. 이거, 내가 아주 특별히 배려하는거에요, 알죠?”

“제발... 살려주시면... 전부 갚겠...”


  우두머리 남자는 아무래도 영 인내심이 없는 게 틀림 없다. 그는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치 부근에 칼을 박아 넣었다. 부욱- 옷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사내의 살갗이 찢어지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분이 안풀리는지 푹, 푹, 푹, 푹 족히 열번은 쑤셔댄 것 같다. 히익, 성질이 꽤나 더러운 남자다. 기세등등한 남자의 살기에 진은 저도 모르게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한 피가 골목의 축축한 밤공기에 비릿한 쇠 냄새를 섞었다. 불쾌해. 바깥세상은 비위 상하는 것 투성이야. 

  구경은 이 쯤 하고 가야지 마음 먹었을 때였다. 진의 앞 발이 무심코 바닥에 있는 작은 돌 하나를 밟아 청각이 발달된 동물이나 들을 법 한 아주 작은 마찰음이 났다. 인간의 귀는 그리 기능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걸까? 아니면 저 우두머리 남자의 청각이 유별나게 예민한 건가? 몸을 일으켜며 돌아선 남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고 그 순간 그와 진의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그의 한쪽 눈썹이 스윽 올라가는 모습이 어딘가 기괴했다. 진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손수건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서 있는 검은 정장의 남자와, 컴컴한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얀 털의 고양이는 그렇게 처음 서로를 맞닥뜨렸다. 흥미로운 듯 커지며 빛을 내는 남자의 형형한 두 눈을 보고 진은 직감했다. 저 남자는 식육목의 최상위 포식자다. 위험해. 도망가야해. 진의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이 불을 밝혔다. 그러나 진이 발을 떼기도 전에 남자의 구둣발이 저벅저벅 땅을 딛는 소리가 들렸고, 이틀간의 노숙 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진은 몇발짝 가보지도 못하고 그의 손에 뒷덜미를 붙잡혀버렸다. 민혜의 품에 안겨 함께 보았던 드라마나 영화에서 살인자가 자신의 얼굴을 본 목격자를 처단 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안돼! 난 아직 어려! 죽고 싶지 않아!! 진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야오오옹-!!!








• 고양이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엘렌 버클리



  세단 뒷 좌석에 오른 태형은 흥미로운 듯 제 옆자리를 내려다 보았다. 사람의 손을 타며 곱게 자란 기색이 역력한 풍성한 흰 털의 고양이가 시트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평범하게 생긴 고양이는 아니긴 하지만, 내가 대체 왜 이 걸 잡아온거지? 태형은 고양이의 가슴께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들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인형처럼 몸을 척 늘어뜨린 고양이의 두 눈은 적도 부근의 옅은 바다를 연상시킬 만큼 맑고 푸른 색이었다. 그래. 바로 이 눈 때문이었지. 골목길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이 보석 처럼 푸른 눈에 태형은 홀린 듯 이끌렸던 것이다.

  태형은 진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목에 채워진 핑크색 초커에 달린 펜던트를 들어올려 보았다. 동그란 백금 펜던트에는 JIN 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진...... 진아, 배고파?”


  헉, 보스가 저런 목소리로 말을 할 줄 알던가? 태형의 다정한 말투에 흠칫 놀란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힐끔 뒷좌석을 보았다. 태형은 지긋이 미소를 띄운 얼굴로 고양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보스가 웃고 있다니! 그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 했다.

  진은 고개를 들고 태형을 똑바로 바라보며 작게 야옹-, 하고 짧은 긍정의 응답을 했다.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 듣고 대답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태형이 조수석에 탄 수행원에게 말했다. 


“근처에 어디 고양이 용품 살 수 있는 곳으로 가.”


  쇼핑을 마친 뒤, 진은 태형을 주인으로 간택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고민해보기로 했다. 탑 여배우와 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높아져 있던 취향의 진이었는데, 사료와 용품들을 전부 가장 비싸고 좋은 것으로 구매하는 저 남자는 주인으로 두기에 썩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뒤에서 굽신대는 사람들을 보니 모르면 몰라도 인간계의 알파메일인 듯, 진을 보호해줄 힘 정도는 충분하고도 남아 보였다. 고양이가 집사를 간택하는 기준은 그런 것들이었다. 나에게 쾌적하고 윤택한 삶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자, 이제 여기가 네 집이야.”


  집에 도착한 태형이 현관문을 닫으며 안고 있던 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엌으로 간 그가 스텐 그릇에 사료와 생수를 각각 채우는 동안 진은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다니며 그의 집을 탐색했다. 강남 금싸라기 땅 위에 세워진 6층 건물의 맨 윗층 전체가 그의 집이었다. 전에 살던 민혜의 펜트하우스보다도 넓고 밖에는 넓직한 테라스도 있어서 가끔 일광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썩 나쁘지 않네. 진은 이곳이 자신의 집으로 꽤 마음에 들었다.




개는 부르면 바로 오지만 고양이는 메시지만 받고 나중에 오고 싶을 때 온다. - 메리 블라이



“진아, 밥먹어.”


  먹으란다고 쪼르르 가서 고개 쳐박고 먹으면 내가 고양이가 아니라 개지. 그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짧게 눈을 마주쳐준 뒤 고개를 돌리니 태형이 피식 웃었다. “도도하네”, 하고 중얼거리며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하고 나서야 진은 부리나케 부억으로 달려가 마른 목을 축이고 그릇에 고개를 파묻으며 사료를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배고파 뒤지는 줄 알았다.


“다 먹었어? 어디 보자.”


  샤워를 마친 태형이 허리에 수건 한장만 달랑 두른 채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그루밍에 한창이던 진이 태형이 빈 그릇을 확인하는 틈을 타 그의 몸을 훔쳐 보았다. 그런데, 흐에엑!!! 하마터면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 커다란 용 한마리가 그의 어깨와 윗가슴에 머리를 얹고 입을 쫙 벌리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흉흉하게 이빨을 드러낸 용 문신은 방금이라도 날아올라 고양이 한 마리쯤은 한입에 꿀꺽 집어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 집사는 아무래도 좀 무서워. 아니, 많이 무서워. 하는 짓도 눈빛도 목소리도 몸도 데리고 다니는 용 까지도. 하나같이 무서운 사람이었다. 


“진아.”


  잠옷 하의만 입은 태형이 침대에 몸을 뉘이며 이리 오라는 듯 자신의 옆을 톡톡 두드렸다. 진은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닥에 앉아 제 앞발바닥만 열심히 핥았다. 콘크리트 바닥에 긁힌 발바닥에서 비릿한 피맛이 슬쩍 났다. 이틀간의 노숙 생활은 그야말로 악몽같았다. 진은 나름 현실 감각이 있는 고양이었다. 

그래, 인간이고 고양이고 자기 수준에 맞게 살아야해. 길바닥은 나같이 고귀하고 우아한 고양이가 살 곳이 못돼. 좀 무섭고 위험한 느낌의 집사이지만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어차피 민혜에게 돌아갈 방법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민혜... 나를 많이 찾고 있겠지.


“이리와.”


  에휴... 그러나 새 집사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 초면에 부른다고 오길 바라는 저 집사는 아무래도 고양이를 안키워봤음이 틀림 없다. 진은 태형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그가 완전히 잠들고 나서야 폴짝 가볍게 침대로 올라갔다. 온 몸을 쭉 빨아들이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뉘이자마자 수마가 몰려왔다. 새벽에는 한기가 돌아 그의 품에 더 가까이 파고들었다. 더 없이 차가울 것 같던 그의 몸은 의외로 매우 따듯하고 포근했다.

  다음날 아침, 어제는 전혀 곁을 내주지 않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등을 딱 붙이고 안긴 채 도롱도롱 잠이 든 진을 보고 태형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봐도 이건 밀당의 달인이었다. 원할 때는 다가오지 않고, 기대하지 못한 순간 다가와 감동시키는.





• 고양이는 세상 모두가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헬렌 톰슨



- 야오옹

“잘 있었어?”


태형이 퇴근할 때면 진은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현관 앞까지 마중 나가 실내화로 갈아 신는 태형의 다리를 유연한 몸으로 스윽 감으며 그를 반겼다. 그러면 그는 탄탄한 두 팔로 진을 들어올려 안아주고 따듯하고 큰 손으로 등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가끔은 진의 촉촉한 분홍색 코끝에 자신의 코를 맞대기도 했다. 그는 진의 발바닥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가 좋다며 기뻐했다. 처음에는 주인이 변태인가 싶어 질색했지만  어느샌가 진은 그의 퇴근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발바닥을 핥고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낮에는 곁에 없는 그가 그리워 하루 종일 그의 냄새가 나는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태형이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여자의 허리를 팔로 휘감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진이 현관으로 그를 마중나갔지만 서운하게도 태형은 그날 따라 진을 만져주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여자를 이끌고 침실로 향할 뿐이었다. 

여자가 뿜어내는 지독한 향수 냄새가 괴로웠지만 진은 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형은 여자를 침대에 던지듯 눕히고 바로 그 위에 올라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하는 저런 행위를 진은 전에도 본적이 있다. 진을 유기한 그 남자와 민혜 역시 침대에서 저런 '놀이'를 했다. 그 것은 진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해괴망측한 놀이였다. 민혜 처럼 태형이 데려온 빨간 입술의 여자 역시 괴로운 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서도 왜 자꾸 더! 더! 더 해달라 외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인의 구릿빛 피부에 땀이 맺히며 윤이 났다. 그가 허리를 앞으로 밀 때마다 탄력있는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갈라져 꿈틀거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여자의 살집있는 허벅지와 태형의 몸이 부딪히며 철썩 철썩 뺨이라도 맞는 것 같은 마찰음이 났다. 여자가 연신 교성을 지르며 태형의 아래에서 마구 흔들렸다. 한참 후 흐읏- 하고 태형이 괴로운 듯 신음 했다. 아픈걸까 걱정되어 살핀 그의 얼굴이 몹시 낯설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진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문득 슬퍼졌다. 그는 진이 보지 못한 새로운 목소리와 새로운 표정을 저 여자에게만 보여주었다. 둘의 행위를 끝까지 지켜본 진은 조용히 거실로 나와 소파에 올라가 앉았다. 

곧 여자가 혼자 방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은 현관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여자가 신고 온 빨간 하이힐 안에 압정이라도 넣어둘껄 후회가 되었다. 얼마 후 거실로 나온 태형이 진을 안아들고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침대로 데려가 자신의 옆에 눕혔다. 


"오늘도 잘 보냈어?"


아까는 쳐다도 봐주지 않더니 그제서야 말을 거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진은 순간 울컥했다. 방에서는 비릿한 밤꽃 냄새가 났고, 태형의 몸에서는 그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났다. 그 정사의 흔적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진은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다시 거실로 나가 소파 위에 앉았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눈물만 아주 살짝 고일 뿐이지만, 고양이에게는 정말로 가장 서러운 울음이었다.  


“진아, 왜그래? 어디 아파?”


태형이 거실로 나와 소파 앞에 눈 높이를 맞추어 앉아 진을 마주 보았다. 진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들어올려 축축해진 맑고 파란 눈을 들여다 보았다. 진의 눈 앞에 태형의 목덜미에 묻은 립스틱 자국이 보였고, 순간 화를 주체하지 못한 진은 제 얼굴을 감싼 태형의 손을 뿌리치려 발톱을 세운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야옹!


태형의 팔뚝에 붉은 선 하나가 생겨나더니 곧 핏방울이 맺혔다. 진은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놓고도 스스로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태형의 기색을 살폈다. 태형은 가만히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일어나 진을 두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 그를 화가 나게 만들어 버리다니. 그가 이제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혼자 남은 진은 또 서글픈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시원하게 소리를 내 울 수 없다는게 못내 슬펐다. 민혜가 그녀의 남자에게 했던 것처럼, 아까 빨간 입술의 그녀가 했던 것 처럼 태형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고, 그의 탄탄한 두 팔에 안기는 상상을 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처음으로 싫었다. 

테라스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청회색 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서럽고 슬픈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성큼 앞으로 다가와 귀를 내밀고 있는 것 처럼 황금빛 달은 평소보다 커다랗게 보였다. 진은 다리를 얻고 싶은 인어공주의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달님, 인간이 되고 싶어요. 나도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한참 뒤 방으로 들어간 진은 침대 위에 올라가 깊게 잠든 태형의 팔등 위 자신이 만든 상처를 할짝할짝 핥았다. 비릿한 피냄새는 진이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였지만 태형의 것은 싫지 않았다. 그리고 태형의 가슴에 최대한 가까이 등을 붙이고 잠을 청했다.

그날 밤, 진은 꿈을 꾸었다. 인간이 되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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