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을 제외한 모든 기업명, 인명은 모두 허구입니다. 해당 도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문화 등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 미드 '다이너스티'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by. 꾹꾹님❤



#1.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지민은 귀를 틀어막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만큼 술을 들이부은 지민은 보디가드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며 집에 겨우 도착했다. 해가 뜨자마자 깨워져서 불려간 곳은 저택 가장 안쪽에 있는 필립의 서재였다. 필립의 옆엔 리처드가 있었고 그의 표정은 오히려 덤덤했다. 열이 받을대로 받은 필립이 열심히 소리치는데도 지민이 듣는둥 마는둥 하자 필립의 표정을 일그러져만 갔다. 결국 폭발한 필립은 리처드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서재 책상 위에 놓인 유리잔을 던져버렸다. 부웅 - 소리를 내고 지민의 얼굴을 한끗 차이로 스쳐지나간 유리잔은 온갖 고급스러운 코팅을 발라둔 것 같은 윤기나는 나무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유리잔 이탈리아 메프라 건데... 지민이 꿈쩍도 안하는 사이 산산조각 나버린 유리잔 조각은 리처드가 치우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거 폭행으로 신고될 수 있어요."

"그래! 신고해! 그걸로 네 가벼운 주둥이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든 내가 안듣고 싶은 심정이다!"

"아버지. COO 자리에 자격이 갖추어진 건 저 뿐인거 아시잖아요? 거의 확정된 걸 먼저 터트린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 화가 나세요?"

"......"

"본인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면서 우리 가족의 화목함을 강조하며 발표했어야 하는건데 제가 뺏어서 열받기라도 하셨나봐요? 아니면 아버지와 아버지 약혼녀보다 제가 더 주목받는 것 같아 싫으세요? 제가 이런걸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가지고싶은 게 있으면 쟁취하라는게 아버지의 가르침 아니었나요? 아님 다른 사람에게 COO자리라도 주시려고요?! 아버지가 키운 엠파이어를 타인에게 물려주시게요?"


지민은 숙취로 인한 두통을 이겨내려는 듯 속에 쌓여있던 말을 조곤조곤 뱉어내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언성을 높여버리고 말았다. 말을 끝내고 나서 적막이 찾아오자 지민은 다시 머리가 윙윙 울리기 시작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할 말은 다 끝났니?"

"......그렇다면 어쩌시게요?"

"난 네게 COO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 네 태도를 보니 고려 해봐야겠어."

"네? 네??? 아버지?"

"COO는 우리 세레니테 엠파이어의 2인자라는 중요한 자리야. 너처럼 오만하고 부모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 쉽게 앉을 자리가 아니지. 네 밑엔 수만명의 직원이 있어. 정신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몰락할거다."

"......아버지. 아니... 그게..."

"변명은 됐다. 내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 들어가서 숙취나 풀도록 해. 리처드 지민에게 숙취해소제 가져다줘요."

"예."


지민이 어버버해서 필립을 바라보는 동안 리처드가 지민의 팔짱을 끼고 그대로 서재 밖을 나갔다. 질질 끌려가는 지민은 복도로 나와서도 멍한 표정이었다. 리처드... 지금 내가 모든 상황을 망친거지...? 지민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말하자 리처드는 네. 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망할... 망할!! 이놈의 입을!!!! 지민은 자신의 입을 찰싹 때렸다. 리처드는 이것마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지민이 더이상 입을 치지 못하게 막고는 방으로 안내했다.


"숙취해소제. 가져다드릴게요. 도련님."

".......그래."


리처드가 방 문을 닫고 나가자 어느새 침대에 앉은 지민은 그대로 뒤로 풀썩 넘어졌다. 자책 또 자책. 어릴 때 부터 욕심이 많았고, 버릇처럼 이루고 싶은 걸 말하곤 했다. 말로 꺼낸 것에는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지 언젠가는 꼭 이루고 말았다. 아마 술에 취해서 세레니테의 COO가 되고싶은 욕망이 튀어나온 게 아닐까. 되돌아보기는 이렇게 잘하면서도 사고를 칠 땐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민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일단 저질러본다니... 너무 어린애같잖아... 지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2.


"오랜만이야 지민."

"나도 반가워. 얼마만이지?"


우리가 아는 시카고의 북동쪽으로 쭉 올라가면 한적한 동네가 나타난다. 이름은 위네트카. 미국답게 넓은 땅에 예쁜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이 곳은 겉모습과 다르게 전쟁터였다. 시카고 위네트카는 한인들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이 동네에 위치한 뉴 트리어 하이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뉴 트리어 하이스쿨은 아이비 리그 대학을 가기 위한 첫관문이었다. 물론 시카고에 둥지를 튼 세레니테 그룹의 아이들도 모두 이 학교를 나왔다. 이 고등학교는 동양인의 비율이 다른 학교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교육 수준도 높은데다 교육열도 한국과 비교해서 절대 뒤쳐지지 않았다. 그런 학교에서 상위권을 섭렵하며 지낸 것이 지민이었다. 지민의 형인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나 꿀리는게 없는 이 집안의 사람을 모르는 이는 시카고에 없었다. 그건 전통을 자랑하는 위네트카의 정규 사교파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지민에게 인사를 했고 어떻게든 셀카 한 장이라도 찍어내려고 노력했다. 지민은 친했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얼굴조차 기억은 안나지만 영업용 미소를 보이며 그 누구보다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다. 위네트카의 사교파티는 전통 그 자체였다. 너무 전통적인 파티라서 언제나 꼰대들이 여는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테이블 세팅부터 파티장 장식까지 진부했다. 지민은 평소라면 이런 곳은 참석도 안하겠지만 위네트카 사람들의 파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지원이라면 COO자리는 금방일테니. 


"그럼 우리 뉴 트리어 하이스쿨의 자랑! 지민에게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여전히 영업 미소를 유지하던 지민은 갑자기 자신을 호명하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버렸다.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이 쏟아졌다. 지민은 애써 놀란 표정을 숨기고 자연스레 단상을 향했다. 마이크를 넘겨받는데 손이 약하게 떨려왔다.


"어...네. 안녕하세요. 지민입니다. 먼저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감히 여러분께 연설을 해도 되는 입장인지 모르겠지만요..."


청중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해!!! 리아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지민은 살짝 웃으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화려하게도 차려입은 리아가 있었고 그의 옆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위네트카 사교파티의 드레스코드인 화이트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는 조명의 강한 빛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민은 당황하지 않고 연설을 이어나갔다. 길게 하지 않으려고 생각나는대로 말했는데 연설을 끝마칠 즈음에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다. 부끄러워하던 지민이 얼굴을 붉힌 채 단상을 내려왔고 본인의 테이블로 향했다. 처음에 반 정도 비어있던 테이블에는 감사하게도 리아가 있었다. 리아는 얼굴이 빨개진 지민에게 다가가 팔을 툭툭 쳐댔다.


"말 잘하던데 지민~"

"고마워..."

"엄청 떨었어?"

"엄청... 어? 옆엔 처음 보는...응?"

"아! 우리 오빠야. 처음보는거지?"

"응응.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지민씨."


순백색의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는 리아의 오빠였다. 이름은 태형. 지민처럼 미국에서도 한글로 된 이름을 쓰고 있었다. 지민은 태형을 계속 빤히 쳐다봤다. 태형이 그런 지민의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자 지민은 시선을 피해버렸다. 태형이 씩 웃으며 물었다.


"뭐예요?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어... 아뇨. 그 혹시 저희 본 적 있어요?"

"작업을 그렇게 거시나봐요? 꽤 진부하네."

"아니...! 아니에요. 진짜 뭔가 익숙해서 그런건데... 아닌가봐요."

"난 그쪽 알죠. 그쪽 환영 파티에서 봤으니까. 리아 바에서 열었던 거요."

"아... 뉴트리어 출신이신거죠?"

"네."

"왜 몰랐을까요...?"

"우리 집이 가난해서?"


지민이 입을 다물었다. 뭐라 답해야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태형은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피식 웃어버리니까 지민은 괜히 성을 냈다. 가... 가난한데 어떻게 위네트카에 살아요! 그렇게 말하고 지민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막아버렸다. 유복했던 지민의 집과는 달리 리아의 집은 늘 돈에 허덕이는 느낌이었다. 리아는 그걸 티내려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돈이 깨지는 일이었다. 온갖 세금과 의료비, 물가는 싸더라도 학비는 싸지 않았다. 그럼에도 리아는 굴하지 않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 그녀의 오빠에게 저런 말이라니. 지민은 또 자신의 입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지민이 태형의 눈치를 살살 보는데 태형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때는 힘들었죠...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은 세레니테정도는 꿀꺽할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

"리아의 오빠인거 알잖아요. 아웃스탠드의 CEO가 나라는 얘기죠."

"......"


잊고 있었다. 지민이 열심히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아이비리그의 대학을 가고 뼈빠지게 공부해서 온갖 회사들에 스카웃 제의도 받던 그 시절. 리아와는 서로 가끔 연락만 할 뿐 만날 수는 없었던 시기였다. 그 때 리아는 갑자기 말했었다. 우리 오빠가 운영하던 작은 회사가 엄청나게 잘 됐다고. 그 후에 시카고에서 본 리아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지민과 비슷한 가격의 명품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다녔다. 리아의 집은 여전히 위네트카였지만 위네트카에서 가장 큰 저택을 구입했다. 화려한 스포츠카도 본 것만 몇 대. 거기에 본인이 하고싶다고 하니 오빠가 시카고 한복판의 유명 BAR를 인수해서 선물했다. 지민은 단순히 친구가 잘 된 것을 기뻐했다. 오히려 돈 씀씀이가 비슷해진 것이 기쁘기까지 했다. 자존심을 건드리기 싫었기 때문에 리아에게 명품조차도 선물하기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가지지 않은 것을 찾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할 정도였다. 그렇다. 그의 오빠. 태형이 세운 '아웃스탠드'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시카고에서 세레니테가 유일하게 장악하고 있지 않은 IT계열 산업이었다. 블루오션을 노린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시카고는 세레니테와 아웃스탠드가 먹여살리는 것이라고 정정되었다. 그 아웃스탠드의 CEO. 김태형.


지민이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빠진 것인지 멍때리는 사이 리아에게 얘기해서 자리를 바꾼 태형은 지민 바로 옆에 앉아 얼굴을 들이댔다.


"헉!"

"놀랐어요?"

"...갑자기 영어로 얘기해요?"

"영어도 편하니까요. 여긴 한국어를 듣는 사람이 더 많을테니. 날 처음보는 것도 당연해요. 위네트카의 사교파티는 단 한번도 온 적이 없으니까. 난 그 잘난 아이비리그를 간 남자도 아니거든요. 그저 방구석에서 열심히 사업을 키우기만 했죠. 성공하긴 했는데... 더 성공해야겠네요."

"왜요?"

"아직 연설을 제게 부탁하지는 않으니까요. 아직 세레니테의 중요 직책도 맡지 못한 당신이 연설이라니... 난 멀었나봐요."

"...뭐라고요?"

"기분 나빴나요? 사과할게요. 아,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지민이 눈을 크게 뜨자 태형은 서서히 지민에게로 다가왔다. 뭐하는... 뭐하는거지... 지민은 뇌 회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의 숨결이 귀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태형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윽하게 내리깔은 눈은 가로로도 길었다. 속눈썹은 길고 풍성해서 눈 위에 커튼을 친 것 같았다. 코는 어찌나 높은지 금방이라도 볼에 닿을 것 같았다. 진한 눈썹과 도톰한 입술까지. 그 짧은 시간에 스캔을 마친 지민은 태형이 다가온 것이 귓속말을 하려는 것임을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뜨거운 숨을 후 하고 짧게 뱉어낸 태형은 살풋 웃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세레니테. 내가 먹을겁니다."

"......"

 

지민은 떠올렸다. 리아의 바에서 열린 환영파티. 거기서 술에 잔뜩 취해 쉬려고 앉았던 테이블에서 본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3.


계속해서 지민의 옆자리를 고수하던 태형은 지민을 바라보며 앉아 대화를 시도했다. 지민은 1차적으로 세레니테를 뺏을 거라는 그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민이 이야기를 듣든 말든 태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민의 귀에서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나름의 사교파티라고 부드럽게 흘러나오던 음악은 식사와 주류가 서빙된 후 부터는 클럽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태형은 지민을 향해 몸을 더욱 기울였고, 지민은 그저 마네킹이라도 된 듯 가만히 있었다. 태형이 말하던 내용 중 귀를 통해 뇌까지 전달 된 이야기는 몇 없었다. 그가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화장실 좀."

"네. 그러세요."


연회장 화장실에 들어간 지민은 그제서야 깊은 숨을 쉬었다. 태형이 한 이야기를 대충 종합해보자면... 본인은 자수성가했고, 세레니테의 CEO인 필립이 하는 나쁜 짓들을 모두 알고 있고, 라이벌 기업으로 불릴 만큼 성장했으니 더욱 성장하기 위해 세레니테를 어떻게든 가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생각을 정리하자 지민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려졌다. 아, 뭐야. 짜증나네. 이 나조차도 겨우 COO자리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데... 뭐?! 세레니테를 인수합병 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세면대에 거칠게 내려놨다. 우지끈 하며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민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테이블에는 이미 마신 술잔들이 한가득이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태형은 조용히 와인잔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저기요."

"......"

"하... 무시합니까?"

"......"

"아니! 당신 말하는거 들으니까 짜증나는거 알아요? 자수성가했다고 내 앞에서 자랑해요? 그래요!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재산 물려받는 재수없는 부잣집 아들이에요! 그건 이해하겠는데 뭐? 감히 내가 아끼는 세레니테를 합병해?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지민이 잔뜩 열받아 태형의 어깨를 잡았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화는 무슨, 웃음이 탁 터져버렸다.

진지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던 그의 눈은 이미 풀려있었고, 얼굴도 빨개져서는... 완전히 취한 사람이었다. 술을 못하는 사람인가. 그러면서 와인은 왜 3잔이나 마신거지... 지민은 웃음을 거두고는 태형의 손에 위태하게 잡혀있던 잔을 뺏어들었다.


"그만 마시세요. 형."

"어...? 어? 뭐지? 나한테... 형이라고?"

"네. 형. 태형이 형. 맞잖아요. 한국인인데 뭐. 아님 정없이 이름이라도 불러줘요?"

"이름...도 좋고..."


태형은 저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차올랐던 분노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내 화를 가라앉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지민은 리아를 불렀다. 리아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다가 이미 테이블에 꼴아있는 태형을 보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저 인간은 술도 못하면서!!!"

"리아. 네 오빠 집에 데려다줘야 할 것 같은데?"

"아 몰라!!! 내 파티를 망치는 놈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야!"

"네 파티는 아니지만 뭐... 그렇지. 주소가 뭐야? 내 가드 통해서 보낼게."

"고마워... 지민. 역시 넌 천사야."

"웩. 말도 안되는 소리. 톡으로 보내."

"응."


순식간에 톡이 왔다. 지민은 주소를 슬쩍 보고는 늘 곁을 지키는 보디가드를 불렀다. 이 사람 집에 좀 데려다줘요. 부탁할게요. 난처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지민을 보며 보디가드는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를 전달하고 그의 정장 상의 포켓에 지폐 몇장을 꽂아주었다. 그렇게 다시 자리로. 어느덧 파티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다들 술과 흥에 취해 사진을 찍고 춤을 추기 바빴다. 지민은 한산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웨이터에게 받은 샴페인 잔을 들이켰다. 

아이보리색의 샴페인에는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목을 넘어 가는 톡 쏘는 느낌이 좋았다. 지민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파티장 한가운데서 홀로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잠시 감은 사이 잔뜩 풀려버린 태형의 눈이 생각나 버린 것은...



#4.  


위네트카의 사교파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다들 정리하고 인사를 하는 분위기였다. 나름 의리로 파티의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지민도 슬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태형을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온 보디가드에게 차키를 넘겼다. 그 때, 사람들이 유난히 몰린 곳이 술렁거렸다. 여자들이 꺄꺄거리는데다 남자들까지 원으로 누군가를 둘러싸고는 휴대폰을 들어 찍고 있었다. 뭐야. 누구때문에 저러는거야?

궁금함에 다가간 지민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커다란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고, 잘 다듬어진 눈썹은 놀라기라도 했는지 한없이 위로 치솟아있었다. 앙다문 입술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고 귀에는 피어싱을 잔뜩 달고 있었다. 수줍어하는지 머리카락을 넘기기 위해 올라온 오른손에는 타투가 가득했다. 마주친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도움을 요청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원에 다가가고야 말았다. 아. 나 뭐하는거지? 뭐야? 홀리기라도 했나? 

지민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다른 사람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 상황 자체도 웃기긴 했는데 지민이 다가오자 안심하는 듯한 남자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안나올 수가 없었다. 아마 술이 들어가서 웃음에 더 헤퍼진 것이겠지. 지민이 먼저 손을 내밀자 남자는 주저했다. 지민이 손을 까딱거리자 그제야 덥썩 잡았다. 마치 도망치는 모양새로 둘은 파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넓은 홀을 걸어가는데 그런 두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파파라치 마냥 따라왔다.


"파티는 끝났어요. 다들 집에 가서 자."

"지민!!! JK랑 사귀는거야?!"

"...누...누구? 아 뭔지 모르겠고!! 그만 따라와!"

"지민!"

"지민 여기봐!!"


파파라치 같은 뉴트리어의 동문들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두사람의 사진을 실컷 찍어댔다. 설마 내가 데려가는 이 어린애(?)가 유명인이라도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본인이 먼저 구해달라고 눈빛을 보내는 걸 어떡해... 지민이 빠른 걸음으로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는 사이 뒤에 쫄래쫄래 따라오던 남자는 묵묵히 걸음을 맞춰왔다. 드디어 지민의 애마인 페라리 카브리올레 앞에 도착하자 그제야 뒤에 끌려오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응?"

"고...고마워요."

"당황해하는거 맞지? 그래서 내가 구해준거지? 괜한 오지랖 부린 줄 알았잖아."

"구해...준거 맞아요. 그런데... 안에 제 친구가 있어서."

"아... 너도 뉴트리어 출신?"

"네."

"미안. 친구가 된 애들 아니면 기억을 못해서. 그리고 나보다 후배인거 아냐?"

"맞아요... 모르...실 수도 있죠."

"그치? 난 이제 갈건데. 너는? 아마 또 들어가면 아까처럼 둘러싸일 것 같은데. 너 유명한 사람이야? 뉴트리어 출신 중에 유명인이 있었나? 나 빼고?"

"......"


지민의 당돌함에 할 말을 잃은 듯한 남자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오물오물 거렸다. 남자는 맑은 눈으로 계속해서 지민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가 쉽게 입을 열지 않자 지민은 내가 왜 들어줘야하나 싶어서 포기해버렸다. 뭐. 그래. 너 알아서 해야지. 애도 아니고. 안녕! 지민이 쿨하게 인사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고, 덩치가 엄청난 보디가드가 몸을 쭈그려 운전석에 앉았다. 빨간 스포츠카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남자는 오물거리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나...를 몰라...? 나... JK인데..."



JK의 뒤쪽이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민에게 쉽게 거스를 수 없던 파티 참석자들이 지민이 떠나자 다시 JK에게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시 둘러싸여버린 JK는 그들과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주고 싸인을 하기 시작했다. JK는 화이트 수트가 잘 어울리던 지민이 계속해서 눈 앞에 떠올라 자꾸만 머리를 휘저을 수 밖에 없었다.


짐른은 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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