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 INFO*

- 쿠로른 전력 61분, 2017.07.22 참여글. 주제 '일탈'이었습니다!

- 별 내용은 없고 그냥 조금 꽁냥거립니다. :)




쿠로오는 어느 모로 보나 존재감이 희미한 학생은 아니었다. 언제나 친절하답니다,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눈에 띠는 외모가 자신에 대한 뒷말을 많이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쿠로오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단 하루도 ‘일탈’이라고 부를 만한 행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3학년이 되고 친해진 친구들은 그런 쿠로오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고 나면 얼굴이랑 어울리질 않는다는 둥, 쿠로오를 놀려대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한참 방학식을 향해 가고 있어야 할 시간에,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쿠로오는 새로운 기분에 취해 있었다. 애초부터 학교에는 나가지 않을 생각으로 교복도 입지 않고 나온 쿠로오는 전혀 눈에 띠는 사람이 아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대학생 내지는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하는 프리터 느낌으로, 쿠로오는 첫 번째 일탈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왜 하필 방학식 날의 오전이었느냐고 하면, 그건 친구의 조언 아닌 조언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일탈을 할 거라면 가장 북적이는 시간을 노려야 해. 예를 들면, 점심시간이지. 길거리는 밥 때에 맞춰 나온 직장인들로 북적거리고, 학교도 운동장이며 복도가 다 미어터지잖아. 아무도 모른단 말이지, 그런 시간이야말로 일탈에 딱 좋은 시간이야.’


선심을 써서 좋은 팁이라도 알려준다는 듯이 말하는 친구에게는 노는 땡땡이치는 쪽으로만 머리가 비상하시네요, 하고 비꼬는 말을 들려주고 웃었던 쿠로오였지만, 막상 일탈이라는 것을 해보려니 친구의 말이 번뜩 떠오른 것이었다. 방학식 날의 오전, 완벽한 시간대였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학생들을 통제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교정도 북적이는 시간.

그렇게 시간을 고르고 골라 집을 나선 쿠로오는 지금, 그리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네코마와 마찬가지로 오늘이 방학식인 학교에, 올해로 3년째 알고 지내는 친구를 만나러. 혹시 기회가 된다면 친구를 졸업하러.

쿠로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노선도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다섯 정거장을 가서 갈아타고, 다시 세 정거장. 시간으로는 대강 30분. 애매한 거리의 학교에는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는 중인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한 번 크게 싸운 뒤로 다툰 일이 없었고, 누가 봐도 친한 친구사이였지만,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미적지근한 애정표현이 은근하게 내비쳐지는 날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려버린 애정의 조각들을,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주워 삼켰다. 그리고 다시 친구의 얼굴을 하고 쿠로오를 보곤 했다. 때때로, 친구는 ‘친구’의 얼굴을 한 채 열기를 품은 손길을 뻗어오기도 했다. 쿠로오는 건조한 표정으로 응대했지만, 그 너머에는 친구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쿠로오는 바깥의 풍경을 응시했다. 여름색이 짙어질수록, 친구와 보내는 계절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올 여름에 정리하지 못한다면 이 관계는 영영 정의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마음을 좀먹어갔다.

“의외로 겁이 많잖아, 쿠로는.”

“내가~?”

켄마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지만, 쿠로오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한 번 만나고 오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볼 텐데-”

“쿠로.”

그게 아니잖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 아니야? 켄마의 눈동자에 담긴 확신에 쿠로오는 순간 멈칫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고교 3년 중 딱 하루, 그것도 아무도 모를 만한 날이다. 괜찮지, 뭐. 괜찮겠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만날 친구의 반응이 더 두려웠다. 그래도 쿠로오는 결국 교복을 팽개치고 집을 나섰고……. 버스가 크게 한번 흔들리고, 쿠로오는 유리창에 머리를 꽤 세게 부딪혔다. 큰 소리로 아픈 티를 내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면서, 쿠로오는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이 되었다.




예상한대로, 쿠로오가 도착했을 때는 방학식의 형식적인 행사가 진행 중이어서 교문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쿠로오는 열린 교문을 통해 살짝 학교 안으로 들어가 운동장 한 끝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문자 기록을 뒤적거리던 쿠로오는 3일 전이라는 표시가 떠있는 칸에서 멈추었다.

보쿠토,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타교의 친구를 부르는 정도의 온도여서 남들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단어였다. 하지만 쿠로오에게는 한 단어 안에 수십 번의 고민이 녹아있는 단어이기도 했다. 어차피 나만 보는데, 하는 마음과, 그러다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라는 마음이 부딪히는 밤이 수십 번이었다.

[오늘 시간 돼?]

짧은 문장을 완성해두고, 쿠로오는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찾아왔는데, 왔다는 이야기가 나을까.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마는 동작을 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서 쿠로오는 써둔 내용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끝나면 운동장 끝에 있는 벤치로 와.]

이번에도 전송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시계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열 시 십오 분. 방학식은 한두 시간이면 끝나니, 이제 끝날 때가 되어 가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어두워져가던 핸드폰 화면이 반짝 빛을 발했다.

[후쿠로다니?]

켄마의 문자에 쿠로오는 빙긋 웃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왕 온 거. 여기까지 왔는데, 뭐. 하나, 둘, 셋. 셋과 동시에 보쿠토에게로의 문자가 전송되었다. 쿠로오는 그대로 벤치에 드러누웠다. 여름 햇살은 뜨겁고, 나무 그늘만 가지고는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빈말로도 기분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두 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쿠로오?!”

“너희 방학식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쿠로오는 두 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라니 개가 웃겠다고 중얼거리며 저만치서부터 달려온 보쿠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진정해, 진정! 을 외치며 쿠로오를 다시 벤치에 앉힌 보쿠토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쿠로오에게 내밀었다.

“쿠로오, 문자 보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야?”

“그 전부터지, 정확하게 말하면.”

“헉,”

“나 진짜,”

“아냐 쿠로오 말 하지 마, 말 하지 마. 일단 물, 물 마셔!”

급하게 물을 들이킨 쿠로오가 숨을 헉헉대는 동안, 보쿠토는 그 옆에 앉아 누가 봐도 더위를 먹은 것 같아 보이는 빨간 얼굴을 이쪽에서 봤다 저쪽에서 봤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숨을 다 고른 쿠로오가 고개를 들어 보쿠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나오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는 않았고, 다만 차분했다.

“보쿠토, 우리 이제 정리할 때 된 거 같지 않아?”

“응?”

“나는 친구 아니다, 로 정리했어.”

“응?!”

보쿠토는 한껏 커다래진 눈을 하고 쿠로오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 아니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쿠로오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손이 보쿠토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더위에, 열기에, 세상이 잠시 멈춘 것만 같이, 아주 느릿하게 쿠로오의 입술이 보쿠토의 입술과 맞닿았다.

운동장은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복작거리기 시작했지만, 보쿠토와 쿠로오는 오히려 조용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한동안 입술을 맞붙이고 있었다. 체온보다 조금 뜨거운 숨이 오고가다가, 쿠로오가 처음 닿을 때보다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보쿠토는 천천히 올라가는 쿠로오의 눈꺼풀을 쳐다보다 쿠로오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에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이런 거 하는 사이는 친구라고 안 부르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쿠로오는 샐쭉 웃고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쿠로, 꼴사나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니까?"

"흐응."

"켄마, 제대로 안 듣고 있지?"

"응."


결국 쿠로오는 그 후 3일을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있어야 했다. 냉방에 얼음주머니까지 동원해서 열을 식히고, 이틀을 어지럽다며 누워 있으면서도, 쿠로오는 꿋꿋하게 보쿠토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병문안을 가겠다는 말에 질색을 하며 거부하고는 새삼스럽게 뭐하는 짓이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누가 봐도 연애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쿠로.”

“엉?”

“꼴사나워.”

“켄마, 그거 두 번째라고?!”


슬픔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그렇게 외친 쿠로오의 손에는 ‘보쿠토♥’로부터 온 [조금 이따 봐!] 라는 문자가 반짝거리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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