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하면, 사라져버린 네가 미우면서도 기뻤다. 믿고 싶지 않으면서도 납득이 되었다. 자꾸만 위험한 곳으로 뛰어드는 모습에 조마조마 하면서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나도 함께 달려들었다. 모두가 죽고 싶어서 난리냐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냥 웃었다.

 사실 나도 너처럼 원정을 떠나고 싶었으니까.

 삶의 끝은 정해져있고 아무리 다쳐도 죽지 않는 우리는 계속된 평화 속에 얼마나 고루해하고 있었는가. 영원이란 지루함에 먹혀 아슬아슬한 하루를 어떻게 버티고 있었을까. 결국 평화라는 기다란 선을 단숨에 끊어버린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린 기꺼이 최전방으로 달려가 서로를 마주보며 나누었던 눈빛에 이미 이별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누군가는 여기서 끝점을 맺을 것을, 그런 순간이 올 때까지 괴물과 싸우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선, 네가 먼저 해낸 일이었고,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아주 만족스러웠던가 보다. 그래서 나는 늦게나마 뒤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지금 눈을 떴을 땐, 끝점 너머의 풍경이기를 바랐다.






 이게 진짜 끝점 너머인지는 몰라도, 아주 신비로운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트라테이아 안에서 오직 올리브 나무의 시간만 거꾸로 되감기고 있었다. 살갗이 벗겨지듯 속내가 드러났던 기둥 껍질들이 올라오며 다시 덮이고,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던 잎 가루가 뭉쳐지더니 약간 말라있는 잎사귀로 되돌아왔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잎사귀는 중력도 거부하며 위로 올라가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라붙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땅에 떨어져 터져버린 열매들이 원래의 동그란 형태로 모아지더니, 역시나 하늘을 향해 동동 떠올라 가지에 매달렸다. 

 불쾌했던 썩은 내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맑아진 공기에 하연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심지어 우는 듯한 굉음도 점차 작아져 거의 웅웅거리는 정도였다.

 눈을 몇 번이나 깜박여본다. 그래도 변함이 없다. 나무는 아까처럼 반은 썩어있고 반은 살아있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되돌아 와 있었다.

 그 와중에 저 멀리에서는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마치 멸망을 연주하는 듯 귓가에 파고들 정도로 너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끝나버리더니,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소리 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모른다. 때로는 총이 몇 발이나 쏘아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게 명백한 싸움의 소리라고 단정 짓기엔 어려웠다. 지면에서는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무너지거나 끌리고, 넘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얽히고 얽혀서 끈끈한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뭉쳐지는 소음이 마치 전쟁이 터지던 첫 날을 떠올리게 하는 중이었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이곳도 시끄럽구나.

 "이봐아~"

 하지만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하연은 살아온 것 중에 가장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눈까지 질끈 감아버릴 정도다. 한숨을 푹 내쉬며 방금 전의 소리는 환청이길 바랐다. 3초 정도 숫자를 세고 다시 눈을 떠본다. 어쩌면 주마등처럼 죽은 후에 옛 기억의 흔적들이 들리는 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절대 아님을 확인 시켜주려는 듯, 영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이봐, 이게 무슨 일이야. 몸은 왜 그렇고. 저기 있는 너희 나무도 죽어버리면 안 되는 거 아냐?"

 울상을 지은 채 자신과 나무를 번갈아 확인하는 영의 모습에 하연은 약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사실 웃는 것조차도 아직 힘든 상태였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래도 지금의 영을 본다면 누구라도 웃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삐죽 나온 입술과 당혹스러워 하는 눈동자. 먼지가 듬뿍 발라져 있는 머리카락. 어딘가에서 버려진 걸 주웠는지 구멍이 뻥 뚫린 재킷을 입어서 팔꿈치가 자꾸만 드러나는 채로 머리를 넘겨대는 모습. 거지꼴에 가까운 와중에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 있잖아. 일단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을 시작점으로 잡아 복귀시키긴 했는데, 그렇다고 썩은 게 되살아나진 못해. 겉모습만 돌아왔을 뿐이니 언젠가는 다시 쓰러져 버릴 텐데, 그 전에 어떻게 못해? 신이 죽는 거냐고 묻긴 했었지만 진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 없다고. 그리고 이거... 저기 있는 유해들처럼 그냥 나무 밑에 두면 돼?"

 그제야 하연은 웬만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지금의 상황과 애매하게 돌아온 올리브 나무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의문점이 남는 건 두 가지 정도였다.

 '이거'가 뭐야.

 멀쩡한 상태였다면 곧장 그렇게 물었을 거다. 그게 첫 번째 의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물을 힘도, 할 말도 없었다. 물론 영도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이거 말야."

 영은 하연의 눈앞에 냉큼 자신의 손을 보였다. 거의 눈동자를 찌를 뻔한 정도로 가까워서 살짝 찌푸리는 순간, 손가락이 세 개뿐인 영의 손바닥에서 초록색으로 빛나는 유해가 둥둥 떠올랐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던 영조차 그대로 멈추더니 그걸 멍하니 주시했다. 당황한 모습을 보아하니 이건 영의 능력 때문은 아닌 듯 했다. 게다가 그걸 시작으로 올리브 나무 근처에 떨어져있던 유해들도 모두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낮게 웅웅거리고 있는 나무의 부름에 답하려는 듯, 더 높게 떠오르더니 올리브 열매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냈다.

 곧이어 유해들이 차례대로 본래의 모양을 잃으며 폭폭 터져버렸다. 겉껍질은 사라져버리고 그 안의 핵만 남은 채, 서로를 향해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마치 반짝거리는 초록색의 반딧불이 같았다. 그 빛들은 점점 커지며 올리브 나무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서 멈출 것만 같았던 빛의 확장은 나무를 넘어서도 끝나질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 눈을 뜨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도 움츠러들었다. 옆에서 영이 무섭다는 듯 꿱 소리를 지르자마자, 이윽고 엄청나게 밝은 초록빛이 스트라테이아 전역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최초의 뿔족들 중 하나가 생을 다해가 자신이 떠날 순간이 되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 뿔족은 하늘로 고개와 팔을 뻗으며 아테니케에게 말을 걸었다.

 "신이시여. 저는 곧 당신과 원정을 떠날 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나의 아래, 뿌리 근처로 오거라.

 최초의 뿔족은 올리브 나무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하늘만큼은 계속 바라봐야 했다.

 "다른 뿔족들이 죽어가는 저의 모습을 보면 어떡하나요. 때가 다가오니 알 것 같습니다. 이 끝점은 온전히 본인만 품고 가야함을. 그러니 저의 모습을 다른 뿔족들은 알 수 없게 해주세요."

 아테니케는 최초의 뿔족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 그렇게 해주마. 끝점을 맺을 때가 되어 나의 아래로 와야함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어떠한 뿔족도 너를 볼 수 없도록, 발견할 수 없도록 해주마. 너는 그 누구의 시야에도 닿지 않은 채 무사히 도달 할 수 있을 거다. 다른 뿔족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최초의 뿔족은 올리브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발끝에 뿌리가 닿을 정도였다. 

 "이제 저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저의 원정은 어디를 향하는 건가요. 처음으로 죽음 앞에 서버린 만큼 부디 이런 질문을 하는 저를 이해해주세요."

 -  삶이라는 원정을 겪고 나에게로 돌아왔으니, 다시 새로운 원정을 떠나야하지 않겠느냐. 모든 뿔족은 '내가 부여한 성씨'와 '양친이 부여한 이름'을 갖고 살아가지. 그 어떤 뿔족에게도 중복되는 성씨를 준 적이 없다. 그건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자, 너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최초의 뿔족은 나무 기둥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아무 질문도 던지지 않았지만, 아테니케는 기꺼이 대답을 건넸다.

 - 이제 너는 다시 태어나게 될 거다. 내가 준 그 성씨를 그대로 가진 채, 양친이 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말이다. 지금껏 살아왔던 기억-원정-은 여기에 남겨두거라. 전혀 다른 외형과 성격, 삶, 가족, 인연, 모든 것이 달라진 채로 새롭게 시작하자꾸나. 아무도 너의 이전 모습을 모를 거다. 앞으로의 생을 알 뿐이지.

 최초의 뿔족은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눈을 감았고, 녹색의 핵을 가진 최초의 유해가 되었다. 그건 얼마 되지 않아 나무의 일부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 광경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아주 작은 뿔 조각이 나무 기둥에 뚫린 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그 조각은 금방 녹아서 나무에게로 흡수되었다. 그리고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잎이 떨어지고 생겨나면서 꽤 오랜 시간과 기도가 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려는 듯 올리브 나무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둥이 조금씩 갈라지더니, 나무껍질을 뚫고 새로운 뿔족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죽었고, 그 다음의 시작을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최초의 뿔족이었다. 그 뿔족이 뚫고 나온 나무껍질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테니케가 주는 성씨가 적혀있었다.


 피누스 덴시플로라(Pinus Densiflora)




 어쩌면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과 끝나는 순간은 똑같을 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은 이어져서 순환하고 있는 법이니까. 삶과 죽음이 그렇듯. 뿔족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나무도 그럴 것이다.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점차 모이고 줄어든 초록색은 일그러지고 일렁이면서 스트라테이아 중앙에서 어떤 형태를 만들어냈다. 인간 같기도 하면서 거대한 나무 같기도 한 형태였다. 어떤 모습이든 신에 가깝다는 건 확실했다.

 하연은 그 광경에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아마 뿔족이었다면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였다. 모두의 시선 끝, 소용돌이치던 녹색 빛이 사라지며 그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났으니까.

 스트라테이아의 모든 것, 역사의 중심, 우리의 신(神).

 올리브 나무가 예전처럼 온전하고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채, 푸르른 잎사귀와 완벽하게 익은 열매가 매달린 가지를 넓게 뻗으며 뿔족을 반기고 있었다.

 그걸 마주한 순간, 하연은 모두가 끝점을 넘어 시작점으로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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