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위군으로 비보가 줄을 잇는다. 전각 앞 무관 차림으로 정제한 이들이 삽시간이 대열을 이루고 섰다. 한시가 바쁜 와중이다. 횃불을 높이 치켜든 자들이 앞을 밝히고 뒤로는 포졸들이 따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 칼을 찬 자의 발놀림이 가장 빨랐다. 불이 어둠을 가르기도 전, 도착한 무관은 급히 안으로 들어섰으나 한 발 늦은 셈이다. 장지문을 연달아 뚫은 사내가 먼저 그 앞에 버티고 선 것이었다.




"..대체...이, 무슨..."




온통 피칠갑이다. 도륙이 난 자인지, 도륙을 낸 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사내의 입 끝에 실소가 걸려있으니 후자 임이 분명했다. 뒤이어 대열 맞춰 전각 뜰 안에 든 자들이 모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만다. 핏빛의 사내가 든 칼에서 채 식지 않은 혈점이 떨어져내린다. 돌바닥 위로 피가 번져 흐른다. 사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연실색한 낯이다. 개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반역이다!" 하고 외친 것을 기점으로 열을 맞춰 선 이들이 우르르 사내를 둘러싸고 칼을 빼들었다.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


"장군! 부디 얼른…!"




포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이 칼끝으로 사내를 겨누고 사내와 마주 서있는 자를 재촉한다. 주변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금위군이었으니 옆구리에 칼을 차고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금위대장, 무휼이다. 무휼은 사내가 막고 버티어 선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일국의 임금이 거처하는 강녕전이다.


오늘 밤, 술시戌時. 조선의 임금이 시해 당하였다.










國求貪人







"..그래. 그럼 이제 임금이 누구지?"




옥좌에 좌정한 이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앞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대신 둘이 벌벌 떠는 꼴이다. 사내는 이제 임금이었다. 적룡포 갖춰 입고 칼을 휘두르면 서너 개의 목이 잘려나갔다. 근정전 안, 잘려나간 목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었다. 임금이 된 사내가 다음을 외치면 장지문 바깥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몇은 살아나갔으나 대부분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하고 비명조차없이 스러졌더랬다. 새 임금은 그렇게 생사로 조정의 내각을 꾸리고 있었다.




"게 누구 없느냐!"


"하명 하시옵소서 전하."


"..무휼은. 무휼은 아직이냐."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자는 전왕의 운검이었던 자이옵니다."


"해서. 어쩌라는 것이냐."


"...속히 처단하심이 옳은 처사가 아닐까 하옵니다."




넓디 넓은 근정전 내부에 또다시 실소가 흐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시체더미 앞에서, 잔혹한 임금은 홀로 웃었다.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앉아, 혈점이 튀어도 변함없는 적룡포를 만족한 듯이 내려다보는 것이다. 소맷귀에 고인 피를 바닥에 세게 뿌린 뒤, 웃음이 뚝 멎으니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잠시 간 침묵하던 임금의 입이 열리었다.




"너는 내가 어째서 왕이 됐는지 아느냐."


"..미,미천한 소신이 어찌 임금의 큰 뜻을 헤아리오리까."


"무휼이다."


"예?"


"나는 그 놈 때문에 여기 앉은 것이다."


"..그 무슨........아,아니옵니다 전하! 송구하옵니다. 신이 어리석어 미처 전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나이다. 부디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로,"




고개를 조아린 자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으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주상께서 쥔 칼이 이미 그 자의 목과 몸뚱어리를 분리해낸 터다.




"하해는 개뿔이. 다 말라비틀어졌다 전하라."




문 바깥에서 두려움 가득 품은 답이 이어진다. 나라를 틀어쥔 권세 가득한 어명이 떨어졌다. 부름에 응하지 않은 자를 추포하라는 명이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문 바깥 줄지어 선 자들이 모두 혼비백산해 도망치듯 전각을 달려나간다. 그들이 향하는 곳. 이 나라 조선제일검, 무휼의 거처리라.






.

.

.




도망치듯 임금을 벗어났으나 이쪽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었다. 상대는 조선제일검이다. 그가 칼을 한 번 휘두르면 대 여섯의 명줄이 무참히 잘려나가는 것이다. 어명을 집행하러 온 이들은 그 칼놀림에 몸이 도륙났으나 허공에 울음을 길게 토해낸 칼은 비명조차 허락지 않았다. 이미 임금의 명을 거절한 바있으니, 무휼은 살아도 사는 목숨이 아니었다. 이제 반역의 죄는 이쪽에게 씌워진 터다. 금위대장으로서 궐을 지키지도 못했고 운검으로서 주군을 지키지도 못한 죄는 무거웠다.


그러나 이미 받아 마땅한 벌을 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가 행하여야 했다. 해서 무휼은 자진하기로 결의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객客의 출현에 실패를 거듭한다. 이는 어명이었다. 임금이 제 명줄을 틀어쥐고서 번번이 살려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도는 이제 한 가지뿐이었다. 임금을 만나야했다. 그리고 임금을 죽이든, 제가 죽든 결단을 내야하는 때에 이른 것이다. 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못 돌처럼 무거웠다.




칼자루 쥐고 궐 내로 향한다. 앞을 막아서는 이는 모조리 베어냈다. 눈앞에서 혈우血雨가 뿌려져도 개의치 않았다. 이제 쥐고있는 이 칼은 상대의 배가 아니면 제 배를 갈라놓아야 했으므로. 


전각 앞에 내신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낯짝을 보아하니 전부 죽음을 목전에 둔 듯 시퍼렇다. 그러나 그들은 딱히 막아서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무휼은 곧장 전각 안으로 들 수 있었다. 용포를 갖추고 옥좌에 좌정한 이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피바다를 이룬 바닥 위에 시체들이 나뒹구는 꼴이다. 무휼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눈과 마주하고 섰다. 애초, 자신이 위험분자라 일컬은 사람이다. 출신과 성분을 알 수 없으니 곁에 두지 마라 그리 청했거늘, 기어코 우愚를 범한 임금이 그의 손 아래 스러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괘념했던 무휼 역시, 결국 이 사달이 일어날 줄은 몰랐던 터다.



'나는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자다.'


'..그렇다면 정녕 그대를 취하는 방도란 그거 하나 뿐이겠군.'



임금이 시해되던 날 밤을 떠올린다. 그날 밤 술시. 무휼은 저 자의 목숨을 앗지 못했다. 임금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실행치 못하였다. 칼을 빼들었으나 차마 벨 수 없었다. 심중을 알 수 없는 눈이 이쪽을 보며 웃었다. 그 가벼운 입으로 감히 사모思慕와 은애恩愛따위를 누설하는 자였다.




"나를 찾는다 들었다."


"그래. 찾았지. 보고싶어서."


"..시덥잖은 농은 집어치워라! 나는 결단을 내러 온 것이다."


"결단이라…. 결단이라면 나도 낼 것이 있지."




임금은 곁을 모두 물리고 문을 굳게 닫으라 지시했다. 감히 첨언을 아뢰기도 조심스러운 까닭에, 대신들은 임금과 칼을 쥔 무관만 두고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금상今上은 그저 제 맘에 들지 않는다하여 칼을 휘두르는 흉포함을 가지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죽이고 싶거든 그리 하라."


"도발하는 건가."


"..구애하는 거겠지."


"닥쳐라!"


"금위대장 무휼. 그대를 갖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올랐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말이다."


"……."


"저기. 모가지가 잘려나간 놈들이 피눈물을 흘리는구나. 고작 이따위 연유로 죽어나간 자들이다."


"…고작."


"그래. 고작. 그대 곁이 이 옥좌라서."




칼자루를 쥔 손이 무던히 떨린다. 칼끝이 비틀대더니 바닥으로 떨어진다. 칼 울음소리가 고통스럽게 퍼졌다. 추락한 검은 이제 자신도, 상대도 해치지 못하리라. 주인 잃은 검집이 허전하다.









승承

정政

원院

일日

기記






새 내각이 꾸려지고 대신들이 품계를 갖추어섰다. 딱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보위를 보필하는 자, 운검 뿐이다. 보위에 오른 자와 그를 섬기는 자, 모두가 바뀌었는데도 무휼은 여전히 금위대장이었다. 때문에 조정에서 발칙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역모로 권세를 틀어쥔 임금과 신의를 저버린 그 신하가 내통한다는 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내통은, 실로 몸을 섞는다는 것이었으니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상소가 줄을 잇고 대신들이 앞다투어 첨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이 소문의 원흉을 찾아내어 처단하고 왕실의 품위를 바로 잡아야 한다 하였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소문을 낸 자들은 다름아닌 그들이었다.


임금이 비역질을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보고 들은 자가 한 둘이 아닌데다, 내관들과 상궁들에게 은밀히 들은 바있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못들은 체 굴던 임금도 조치를 취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흉포한 임금이 말을 무서워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제 성에 차지 않으면 칼자루부터 빼어드는 성미를 고쳐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금상이 취한 조치라는 것은 대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이제 대신들의 목에는 내관들과 같은 목걸이가 걸렸다. 신언패愼言牌였다.

패에 적힌 바, 소상히 살핀다.



입은 화근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舌是斬身刀.

그러니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몸이 어느 곳에 있던지 편안하리라安身處處牢.



그리하여 이 조선 땅 위에 생을 부지하는 것들은 모두 제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함이라.








먼가 창무가 끌려서 급히 작성...... 부제는 사랑하는 미실 새주의 대사 인용입니다 흐흨큐ㅜㅠㅜㅜ


"나는 사람으로도 나라를 가지려 했다. 헌데 넌, 나라로도 사람을 가지려 하는구나."


나라와 권세로 무휼을 가지려하는 창민 임금이가 보고싶은 밤입니다......




연성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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