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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정리”가 진행 되었다.

가게는 임시 휴업을 하기로 했다. 임대 계약을 연장할지 정리 할지, 남은 몇개월 동안 생각해보기로 했다.

송아라는 느닷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 생산직에 취직했다. 갑자기 너무 빡세지 않냐 걱정 했더니. 바짝 벌고 배낭여행을 갈 것이라 했다. 사기꾼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저도 얘기를 하다보니 정말로 가고 싶어졌다 했다. 그러면서 몇년 전인지도 모를 우리 남매 셋이서만 처음으로 일본 여행 갔던 일을 꺼내들었다.

같이 가자 길래 미안하다 돈이없다 이래버렸더니 등을 뻑 때렸다. 대신 나는 비행기 표를 사줬다.

준섭은 자격증 공부와 오픽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고 털어뒀다. 취준생. 그렇게 웃는 얼굴은 속이 답답해 보였지만 또 너무 꿀꿀해보이지도 않았다. 준섭과 나는 계약 종료에 동의했다.

옆집 샌드위치 가게는 커피 판매를 시작했다. 오픈 날에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한잔 씩 주셨다.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브랜드 차원에서 아예 원두를 런칭했고 그러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하셨다고 쑥스럽게 말하시는 점주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태섭아."

"어?"

가게 휴업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생각 못한 인물의 등장에 태섭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삼남매가 내리 다녔던 태권도장 관장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장사 시작 했을 무렵에야 잠깐 들려주셨고, 그 후론 드물게 원생들 간식이나 배달 주문 하셨었는데 직접 오신 건 오랜만이다.

"와. 어쩐 일이세요."

"애들 데리고 잠깐 놀러왔다. 쉬는 날이라."

"잠깐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럴라고 왔다."

태섭은 옆가게에서 커피를 냉큼 사들고 돌아왔다. 블라인드를 쳐놓고 간이 의자를 꺼내와서 앉았다. 아늑한 카페처럼 분위기가 잡혔다.

"어우. 또 봐도 치킨집 같진 않아. "

저가 실실 웃자 관장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며 먼저 가볍게 안부를 물어왔다. 태섭은 지난 한두달 있었던 일들이 마치 저의 인생 전반을 적시는 파도처럼 밀려들어 잠깐 말문이 막혔다.

저가 신발 주머니를 흔들며 태권도장에 다니던 꼬맹이 시절에 보았던 관장님은. 지금의 저보다도 어린 나이의 '사범님'이었다. 아마 일도 배울고 돈도 벌 겸 아르바이트를 했던게 아닐까. 관장님은 저처럼 이 동네가 고향이었고 여기서 나고자라 동향의 여자와 결혼했다. 신혼 집은 도시를 하나 넘어가면 있는 신도시에 자리 잡으셨다. 슬하에 아이 셋을 둔, 요즘 시대엔 드문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제일 첫애랑 막내가 여자애고 가운데 둘째가 남자애라 했었다. 관장님은 핸드폰으로 사진 몇개를 보여주며 많이 컸지? 했다.

"나는 태섭이 네가 단 마저 따서 내 아래에서 배울 줄 알았다. 일도 하고."

"엥?"

"너 잘했어. 날라차기 1등."

그는 따봉. 엄지를 세워 보였다.

"에이. 그냥 어릴 때니까.. 했겠죠."

"아냐~ 너 고등학교 때도 가끔 들렀잖아."

그랬었다. 구석에서 혼자 스파링도 하고. 저렴하게 시간 떼우기 괜찮았다. 좀 아쉽다는 기색을 보이는 관장님의 얼굴에 태섭은 그리움을 느꼈다. 그의 잘 빗어넘긴 머리에 성성한 새치가 보였다.

관장님의 도장은 아직 이 동네에 있었다. 그가 일 했던 태권도장을 인수해서 계속 운영하고 있었다. 

신도시의 학군도 고향의 단골 고객도 포기 못한. 태섭과 닮은 부분이 좀 있는 열심히 사는 늦총각이었던, 지금은 한 집의 가장…. 그는 출퇴근 시간에는 꽉 막힌 도로 안에 한시간 반이상 갇혀 있어도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오직 저의 마누라와 새끼들을 위해서라는 명제가 그에게 자부심이 되는 듯 했다. 기러기 아빠 중엔 단거리 주자에 속했다.

"태섭이 넌 진짜 못하는게 없는 것 같아. 농구도 잘했대고. 요리도 잘하고."

"왜 이러세요."

"나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애들 키워보니까 알겠더라. 야.. 우리 도장 출신은 죄다 천재다 천재."

킬킬킬 웃음 소리가 뒤섞였다. 그는 커피를 잘 마셨다며 일어났다. 악수를 하더니 씩 웃었다. 어느새 저는 하늘같이 올려다보던 사부와 악수를 나누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잘 지내고. 평소에 못들려도, 나 너네 남매 생각도 종종 하긴 해. 담엔 기회되면 가족끼리 밥 한번 먹자."

"네. 좋죠."

딸랑. 관장님은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어린 애들이 발구르는 소리가 났다. 아빠! 아빠! 요란한 목소리가 유리문 너머로 새어들었다.

햇빛이 좋았다. 날도 맑고 풍경은 평온했다. 


무엇이든 적당히 잘하는 송태섭. 

어느 정도 손에 익고, 익숙해지는 궤도에 오르면 흥미가 식는… 송태섭.

태섭은 손에 든 테이크아웃 잔을 구겼다. 혼자있을 때면 자꾸만 생각이 나서 곤란했다. 옛날처럼 멍때리기 특기도 힘을 못썼다. 별것 아닌 장면과 사유가 전부 한 남자의 일로 이어졌다.


그런데 형은 처음이에요. 

전부 알고 싶어. 끝까지 파헤쳐서 골몰해보고 싶어.

태섭은 흐려지는 눈앞을 닦아냈다.


'내가 먼저 건드렸어.'

그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됐다. 그냥 툭 건드려본 정도가 아니다. 

당신은 천공을 찢어 발기고 나타난 재앙이었다. 초속 칠십 킬로미터. 찬란하는 섬광이 대지를 진동했다.

불길 속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시각을 잃고 매캐한 유황 내가 나는, 뜨겁고 전신을 짓누르는 열기 속에서 헤매였다. 모든 구성 성분이 녹아서 사라졌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송태섭이라는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껍데기만으로 걷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알았다. 내가 가장 드러내기 싫었던 외로움과 질투와 열등감을 호흡으로 모두 들이마셨다. 이미 그의 피와 살이 되어서 살고 있었다.

태섭의 세계는 너무 작았다. 지어진지 30년이 되어가는 20평대 아파트에도, 답답한 마음을 땀으로 쏟아내어 달리기 하던 저수지의 산책로에도, 출근 길의 지루한 풍경 속에도, 유일한 취미인 농구 코트에도, 유년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고사리 손으로 지어둔 작은 일터에도.

모든 곳에 정대만이 남아버렸다.



하지만 태섭은 동시에 깨달았다.

그를 맘에드는 새끼랑 한번 자보고 싶었던 놈으로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형 나좀 만나주면 안 될까]

구차하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될거라는.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동물적 육감이 그르릉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


무심한 말투로. 다정한 별빛이 손짓했다.


[번호 그대로야]


제 두발은 이미 그를 향해 뛰고 있었다. 답이 오던 안 오던 태섭은 어떻게든 만날 생각이었다. 만나 줄 때까지 가증스럽다 욕을 먹어도 꼴보기 싫다고 발로 차이더라도.

이제 저는 정말 아까운 게 뭔지 알았다.

그건 중간에 관둔 농구 일 수도 있고

상급자 수준의 태권도 실력일 수도 있고

이 악물고 끌고 왔던 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브레이크를 놓차마자 달궈진 몸체가 앞으로 튀어나간다. 잠깐 기울어졌던 시야가 순식간에 수평계를 맞춘다. 빠르게 빠르게 차선의 흰 선이 총알처럼 자신의 뒤로 달려간다. 까만 도로에 쏟아지는 별무리처럼.

기어를 최대로 올렸다. 



서툰...... 시작이다. 























???

“내가 뭘 한다고? 드라마?”

“그래.”

손톱으로 귀를 파내고 틱 튕긴다. 저 인간은 저 필요할 때만 싹싹하지 평소엔 누구에게나 개무시를 했다. 진짜 일품 장사치다.

“형 나한테 뭐 원수졌어?”

“대만아. 거기 앞에 거거.”

장 사장이 손짓 하는 끝을 따라가니 거대한 고목나무를 그대로 잘라 만든 테이블 위에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뭔데. 계약서?”

“그것 좀 읽어봐봐라. 첫줄 부터 소리내서.”

대만은 찝찝한 기분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전에는 저가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때려가며 계약서를 외우라 시키더니 이번에는 또 뭘….

“일위. 대체 나 같은 아저씨 어디가 좋다고….”

대만은 말이 느려졌다. 장 사장이 기다 아니다 말 없이 계속 빤히 보길래 다음 줄도 읽었다.

“이위. 내 나이에 너 만나면.. 괄호 열고 한숨 괄호 닫고.
삼위. 너 왜자꾸 나 곤란하게…. 이거 계속해?”

“어때 현수야.”

“와 형님 따봉 따봉. 느낌이 쫙~~ 온다.”

저새낀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왜 맨날 형님이래. 불곰 한 마리가 옆에서 박수를 치며 재간을 부렸다.

“대만아.”

“예 형.”

“너 오늘부터 현수 차 타고 연수 받으러가면 된다.”

“예, 형….”


(계속)















And the stars exploding, we'll be fireproof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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