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사랑이라지. 몇 번을 다시 사랑해도 그에 비견되는 사랑은 없다고 하던데.


"마누라, 뭐해?"


그럼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걸까.


"여보, 바람이 부는데."


그녀는 눈을 깜빡인다. 거기에 있는 줄 알았던 남자는 또다시 숨가쁘게 사라져버린다. 조금만 더 눈을 뜨고 있을걸, 이미 지나버린 남자의 회상을 생각하며 괜한 후회한다. 손에 닿는 잔디가 유난히 콕콕 손가락을 찔러, 그녀는 조심스레 찔린 손을 들어 어루만진다. 이렇게 말랐었나, 자신의 손이 분명한데도 오늘따라 뼈가 딱딱하다. 비쩍 마른 손가락이 부서지지 않을까, 두려워 그녀는 손가락을 슥 감춘다.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게. 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있지, 왜 죽어버린거야. 그 날, 상해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었으면서. 미라보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살아갈거라고 했으면서. 나는 그래서 작은 희망을 품었어. 당신을 생각해서 애써 도망친거였는데. 잠시 스쳤던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그저 얼굴을 알아차렸을 뿐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거짓말 따위 하지 않을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당신도 거짓말쟁이였어. 


"미츠코 아가씨!"


저기 봐, 나를 부르는 사람이 오네. 아니면 나를 꼭 닮은 그녀를 부르는 소리인걸까. 확실한 것은 내 이름은 미츠코가 아니야. 그래, 내가 미츠코였던 적은 없는데. 왜 저 사람은 나를 미츠코라고 부르는걸까. 다들, 나를 미츠코라고 불러. 나는 그래서 미츠코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나는 미츠코가 아니니까.


너는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래.


내 진짜 이름을.


"미츠코 아가씨, 여기에 나와계시면 어떻게 하나요! 춥잖아요."

"이제 봄인걸, 괜찮아. 일광욕을 한 셈으로 치지 뭐."

"들어가셔요, 의사선생님께서 검진하실 시간예요."

"그래, 들어가자."

"커피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그냥 가자."


이 병원은 크지 않아. 작지만 의사 선생이 특히나 친절하게 대해줘. 아니, 나에게만은 예외일까, 처음 왔을때는 불편해하는 느낌이 역력했었어든. 내가 돈이 많은 강 미츠코, 대부호의 하나뿐인 딸이라는게 거슬렸나보지. 늙은 의사선생은 항일 정신이 꽤나 투철한 사람으로, 젊을 적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나봐. 말했듯이 내가 처음 들렀을때는 불편해했지만, 시간이 지나고서는 많이 풀어졌어. 아직 나를 미츠코, 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곳을 좋아해. 나와 같은 조선 사람, 당신과 같은 동지들이 자주 들러오거든. 여기 젊은 청년이 하나 또 있네. 문이 얇아, 진료실의 소리가 너머로까지 다 들려와. 그 소리들을 듣고있다보면,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참 많구나 싶어. 그래서 다행히 나는 내 자신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악취미라고? 그런 게 아니야,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니까.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기를 원하는 존재.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병이 낫기를 나는 바라. 그래, 그러기를 바라. 천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다가와서 그들의 아픔을 쓸어갈 때 나의 것도 가져가기를 바라. 그러면 그 천사는 하늘로 날아가, 병은 사라지겠지.


달칵-


"다음 분, 미츠코 양."

"안녕하세요, 선생님."

"몸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스쳐지나간 젊은이의 흔적을 쫒아봐. 가쿠란을 챙겨입은 것을 보니 아직 학생인 듯 하네. 옆구리에 낀 모자에 달린 문양이 무었이었는지 기억나지를 않아. 연희전문학교? 그게 맞던가? 궁금증에 넌지시 늙은 의사에게 말을 던져보았어. 저 청년은 어떤 병이 있기에, 이곳까지 쫓겨 온 걸까.


"방금 전의 학생은 멀쩡해 보이는데요?"

"예, 참 미남인 청년이죠. 코도 오뚝하니, 입도 굳게 다물고... 늘 미소를 짓고 있답니다. 허나 예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들렀다는데, 제가 보기에는 병이 없습니다. 그저 심리적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서 생기는 압박감으로 좋지 않다고 느끼는 듯 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다 그렇지요. 예민한 젊은이는 분명 더 그럴겁니다."

"그런 병이 있을 수도 있나요?"

"사람은 생각보다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지요."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청년의 자취를 다시 한번 흘겨봐. 나무 복도는 텅 비어있어. 훤칠하게 생긴 젊은이였는데 안된 일이야. 나는 그런 청년이 아프다는 것이 조금 슬퍼 다시 물어보아.


"정말로 저 사람은 병이 없나요?"

"허허, 혹시 모르지요. 저처럼 늙은 의사는 모르는 젊은이의 병이 있는지."


젊은이의 병이라,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을까. 늙어야 걸리는 병은 알지만, 젊어서 걸리는 병이라니, 그런 병이 있을 수 있을까. 하긴, 조금 더 어릴때는 별 것 아닌것이 마음에 채이고는 했지. 그런건 결국 시간만이 약이 될테니 비참하기 짝이 없어. 맑고 깨끗한 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슬프구나. 그렇지 않아?

사랑에 빠지면 걸리는 병은 분명 있을텐데. 분명 내가 그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꾀병이 아닐까 싶을만큼 더디게 몸은 치유해. 그리고 그리워해, 그날들을. 당신도 포함해서. 기뻐하길 바라, 요즘 말로 하면 '낭만(roman)'스러운 당신이잖아. 프랑스 어를 배워볼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이런, 손목이 아프네. 펜을 들기가 힘들어. 잠시 후에 올게.









...돌아왔어, 늦어버렸네. 잠시 일광욕을 했어. 병원의 정원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그 아래에서 햇볕을 쐬고 있었지. 바람을 기다리지만 찾아오지를 않네. 나비 한 마리도 오가지 않아, 당신도 여기에 왔을 가능성은 없는걸까. 가슴을 앓고 있다고, 늙은 의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말했지? 나는 사랑이라는 병에 걸렸어. 젊은이만 걸릴 수 있는 병에 걸린 그 청년처럼. 사랑해야만 걸릴 수 있는 병이야. 나는 기뻐해야만 하는걸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며 비참하게 울어야 하는 걸까.


금잔화가 예쁘게 피었어. 한 송이를 꺾었는데,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이 꽃은 지면과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그럼 이 아이가 사는 만큼, 나도 살 수 있겠지. 나의 지면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여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저기 젊은 청년이 보이네. 나도 그만 들어가보아야겠어. 금잔화를 손에 고이 모시고.







"동주야!"

"...몽규냐, 이 밤에는 왜 또 부르니."

"니 또 시를 쓰니."

"그래, 시를 쓴다."

"이리 줘 봐라, 내 읽어나 보자."

"아직 다 쓰이지도 않은 시를... 싫다."

"아새끼 성격은... 그래, 제목이 무언데?"

"...병원."

"너 오늘 의사 보러 갔다왔다고 그런 시를 쓰니. 참 알기도 쉽다."

"잠이나 자라."







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ㅡ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DEBut뎁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