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서 걷던 민규가 문득 우린 그럼 열두시쯤 만나면 되나? 하고 물었을 때, 승관은 민규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뭐? 하고 반문할 뻔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가기 직전에 승관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내일 여의도 갈 때 같이 가자는 얘기구나. 하긴, 같은 동네 사는데 각자 가는 게 더 이상하지. 사실 민규랑 둘이 여의도까지 간다는 걸 생각조차 못 해서 좀 당황했다. 그냥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게 되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휴일이면 당연하게 서로의 집에서 빈둥대며 노닥거렸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는데.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대답을 머뭇거린 사이 민규가 살짝 인상을 쓰면서 ‘야, 부승관.’ 하고 다시 불렀고, 그제야 승관은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 그때 봐. 하고 대답했다. 전화해, 문자 하든지. 하고 얼른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설마 그걸 잊어버리겠냐? 민규가 피식 웃었지만, 승관은 농담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승관이 얼마 전부터 공부하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 원래 들고 다니던 스마트폰 대신 누나가 예전에 쓰던 폴더폰을 쓰고 있었는데, 애들이 가끔 승관이 없다는 걸 잊고 메신저로만 이야기하고 마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말로 민규가 보란 듯 문자로 ‘문자’ 두 글자만 써서 보내서 머리를 말리다가 한참 킥킥 웃고, 그다음엔 아직 머리도 다 말리지 않았는데 문자를 보내서 집 앞에 와 있다고 알리는 민규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승관은 손을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강 준비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왠지 나가려다가도 꼭 한 군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승관은 방문을 들락날락하면서 거울을 몇 번씩 더 보고, 다른 옷도 몸에 한 번씩 대 보다가 결국 문자를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현관문을 나섰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니 승관의 집 바로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계단 위를 쏘아보던 민규가, 승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죽는다, 진짜...’ 하고 으르렁거렸다. 승관이 미안한 마음에 실실 웃으면서 민규의 팔을 꼭 껴안고 매달렸다가 조금 서먹한 느낌에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풀까 말까 한참 고민했고, 얼마간 승관에게 팔을 잡힌 채로 걷던 민규의 핸드폰이 울려서 민규가 주머니를 뒤지는 틈을 타 자연스레 팔을 놓았다. 이것마저도 이렇게 숨 막히는 기분이 들다니. 승관은 새삼스럽지도 않게 좀 쓸쓸해졌다. 민규도 저처럼 당황했을까. 힐끔 민규를 보았지만, 민규는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가 건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마침 비어있던 맨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안 늦겠지? 늦으면 어때.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괜히 아무 이야기나 하다가 또 어색해질까 봐 겁이 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금 자기만 이렇게 어색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져서 승관은 그냥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보았다.


 사실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조금씩 낯설어진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닌데, 민규가 저번에 소개받았다던 여자와 연락하고 지내기로 했다고 말한 이후로 승관은 더더욱 민규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승관에 대한 감정은 민규가 헷갈렸던 거였다고 했고, 그 애랑 계속 좋은 관계로 지내기로 했다는데. 그러면 이제 진짜 민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승관을 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이렇게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적어도 승관에겐 그랬다. 차라리 오메가를 소개받아보라고 먼저 말했던 것도 승관이고, 민규의 고백에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고 말한 것도 승관이었다. 물론 그땐 고백을 거절하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고, 지금은 그게 허상에 가까운 소망이었다는 걸 겨우 깨닫긴 했지만. 아무튼, 속사정이야 어쨌든 민규의 행동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 여자랑 지금 당장 사귀고 결혼하고 할 것도 아니고. 민규와 가장 친한 친구고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건 여전히 승관인데.


 그렇지만 그 애와 민규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혹시라도 그 애와 잘 되고, 민규에게 그 애가 너무너무, 승관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된다면 어떡하지. 어느 순간 민규에게 우선순위를 물었을 때 승관의 이름보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먼저 나오게 될까 봐 승관은 문득 두려워졌다. 민규와 사귀게 되면 지금의 좋은 감정이 변해서 혹시나 민규를 잃지나 않을까만 걱정했는데, 사귀지 않더라도 민규와는 언제든지 멀어질 수 있고 민규에게도, 저에게도 언제든지 더 중요한 다른 사람이 생길 수 있었다. 승관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숨이 턱 멎는 것만 같았다.


 승관이 계속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으니, 민규가 승관 쪽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쭉 빼서 승관의 턱밑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민규의 얼굴이 코앞에 있어서 승관은 기겁하고 놀라며 ‘아 씨, 깜짝이야!’ 하고 민규의 어깨를 세게 밀었고, 민규는 밀려나면서도 킥킥 웃었다. 아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자는 줄 알았지. 승관이 뭐, 그냥... 하고 말끝을 흐리며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하고 있는데, 민규는 그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또 걔랑 연락하나? 갑자기 날카로워진 신경에, 엉겁결에 승관이 입을 열었다.


 “걔도 부르지, 왜.”

 “...뭐?”

 “너 소개받았다던 애. 걔도 부르지 그랬냐고. 벚꽃 보러 가는데...”


 제 입을 쳐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며 승관이 아무렇게나 말을 이었다. 그런 승관을 물끄러미 보더니, 민규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아니, 안 그래도 물어봤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민규의 대답에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았다.


 “뭐라고 해?”

 “그냥, 누구랑 가냐고. 그래서 친구들이랑 간다고 말했더니 애들도 너무 많고 그래서... 뭐. 부담스러운가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민규의 말이 승관의 명치를 쿡 찔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어보긴 했었구나. 우리한테, 아니,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그런 걸 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결정하냐. 그렇게 타박하려다가 혹시나 민규가 오해하지나 않을까 싶어져서 승관은 그냥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었다. 괜히 물어봐서, 궁금하지도 않았던 걸 알게 됐다. 가슴 속으로 조금 울컥,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듯했다.


 버스는 우회 운행을 한다고, 여의도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고 중간의 임시 정류장에서 승객들을 내려 주었다. 우르르 내리는 버스 안 승객들에 한 번 놀라고, 내리자마자 보이는 인파에 두 번 놀라서 승관과 민규는 혀를 내둘렀다. 주말, 그것도 벚꽃이 절정이라는 날 한낮의 여의도는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여의도 말고는 벚꽃 피는 데도 없나. 정작 저들도 여의도로 꽃구경 왔으면서, 괜스레 푸념을 좀 하고 둘은 천천히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던 장소로 걸어갔다.


 어중간하게 떨어졌던 사이는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치이다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민규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걷기 시작한 승관이 고개를 위로 들어 벚꽃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민규랑 같이 벚꽃 보고 있구나.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도 친구들은 둘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도 그냥 이 순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꽃을 보고 있다는 것에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져서, 승관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꽃 진짜 예쁘다. 승관의 말에 민규도 살짝 고개를 올리고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며 그러게. 하고 대답했다.


 잠깐 벚꽃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심성 없게 민규와 승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고,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사람이 가득한 인도에서 조금만 한눈을 팔면 인파에 그대로 휩쓸려갈 것만 같았다. 몇 번 어깨를 부딪쳐서 불쾌한 듯 얼굴을 살짝 구긴 승관의 어깨를 민규가 불시에 끌어당겼다.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고 그냥 어깨를 감싼 민규의 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민규의 손이 닿은 부분만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너 이렇게 정신 놓고 다니면 이따가 길 잃어버린다.”

 “내가 애냐?”


 민규의 으름장에 어깨에 얹힌 민규의 손등을 꽉 꼬집으며 톡 쏘아붙이고, 엄살을 부리며 승관을 더 꽉 잡아끄는 민규 때문에 작게 웃고 나니 정말 아주 잠깐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서글퍼졌다.


 이제는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다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민규의 작은 호의, 맞닿는 피부나 따뜻한 체온 같은 게 그리워져도 이제 더 이상은 그게 제 몫이 아니라는 걸. 민규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 포기해야만 했던 게 뭔지, 그게 승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깨달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서 승관은 자꾸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몇 번 엇갈려서 서로 통화하고, 우여곡절 끝에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다 모이자마자 누군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야, 여의도 오자고 한 새끼 나와. 처음 벚꽃놀이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든지 말든지, 그 친구를 가운데로 끌어내 잠시 피의 응징이 행해졌다. 이왕 갈 거면 유명한 데로 가야 더 재밌을 거라고? 이게 벚꽃 구경이냐? 사람 구경이지? 한마디씩 하며 친구를 때렸지만, 녀석은 꿋꿋했다. 야, 그래도 로맨틱하잖아. 사람들 보니까 간만에 우리도 고삼 아니라 좀 인간 된 거 같고. 친구의 변명에 기어코 석민이 엉덩이로 로우킥을 꽂으면서 말했다. 새끼, 말은 잘해. 하여튼.


 한참 여의도를 빙빙 돌다가 겨우 엉덩이를 반쯤 붙이고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내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주변을 구경하니 솔직히 좋기는 했다. 오랜만에 여유롭고, 예쁜 걸 보니 마음이 훈훈해지고. 조금 신선놀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시커멓고 거대한 남고생 여럿이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연신 사진을 찍는 게 웃겨서 피식피식 웃다가, 이 와중에도 자꾸만 민규를 바라보며 민규가 뭘 하고 있는지, 특히 민규가 핸드폰을 만질 때마다 뭘 하는 건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신이 좀 한심해져서 승관은 불안하게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손톱 옆 살갗을 죽 찢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지. 승관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승관이 화장실 갔다가 오면 다 같이 이동하기로 했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남자 화장실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건 처음 봤고 기다려 보려다가 조금 급해서 다른 화장실을 찾아 한참 걸었더니,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짜증스레 핸드폰을 열어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몇 번 가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핸드폰의 전원이 꺼졌다. 아, 이 쓰레기 같은 폰. 누나의 핸드폰을 달라고 먼저 말했던 건 저였으면서, 괜히 누나 욕을 한 번 하고 승관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민규가 일단 자리 옮기고 나서 화장실에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구랑 같이 가라고 말했을 때 들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조금 후회하며 승관은 터덜터덜 걸어왔던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사실 여기가 걸어왔던 방향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꽃은 다 비슷하게 생겼고, 사람이 하도 많아서 대체 올 때 뭐가 있었는지도 못 봤고. 편의점에라도 잠깐 들러서 핸드폰 충전이 되나 물어볼까 했지만, 출시된 지 십여 년이나 지난 구형 핸드폰이라 아마 안 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지나오는 편의점마다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걷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막막한 상황이 되니 오히려 대책 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승관은 한참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무리 걸어도 눈에 익은 장소는 영 보이지 않고, 승관이 두리번거리면서 한눈을 판 탓에 자꾸만 사람들에게 부딪쳤고,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의 짜증 난다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자 조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람은 발에 챌 정도로 많고, 사람이 많은 만큼 알파도 많고. 그냥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짜증 나는데 알파와 부딪칠 때마다 훅 페로몬을 느끼면 너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알파는 제 페로몬을 잘 갈무리했고 한없이 예민해진 승관이 페로몬을 과하게 느껴서 불쾌해하는 거라지만, 개중엔 승관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장난이라도 치듯이 확 페로몬을 개방하는 알파도 분명히 있었다. 여기저기 섞여서 묻은 향들 때문에 머리가 다 띵해져서, 몇 번 헛구역질까지 났다.


 이럴수록 생각나는 건 민규뿐이었다. 가까이 붙어 있어도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 마음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알파. 이럴 때 눈치 빠르게 온몸으로 승관을 감싸 안고 최대한 다른 알파들과의 접촉을 차단해주려 노력하는 사람. 민규를 생각하자 또 울컥 뭔가가 치받쳤다. 잔뜩 조바심이 나서 머리를 정신없이 헝클어트리면서, 승관은 더 분주하게 걸었다. 아니,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갑자기 팔목을 확 붙잡혀서, 승관은 ‘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얼굴을 확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가, 조금 전까지 미칠 것처럼 간절히 떠올렸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걸 보고 그대로 굳었다.


 상기된 볼, 살짝 찌푸리고 있는 미간, 뭔가가 맘에 안 드는 듯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조금 거칠어진 숨을 천천히 고르는 민규를, 승관은 말을 잃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해가 져서 민규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벚꽃이 살랑살랑 날려서 민규의 머리에 떨어져 사박사박 쌓였다. 석양으로 새빨갛게 물든 하늘이 어쩐지 눈부셨다. 민규가 하도 힘을 세게 줘서, 붙잡은 손목이 조금 아플 정도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바보냐? 어릴 때 미아방지 교육 안 받았어? 길 잃어버리면 거기 가만히 서 있으라는 거 몰라?”

 “...”

 “이렇게 사람 많은데 무슨 생각으로 싸돌아다녀?”

 “아니, 나는...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무슨 수로. 핸드폰도 꺼져 있는데?”


 핸드폰 빌려서라도 나한테 연락을 했어야지. 화난 말투로 이야기하는 민규의 해결책을, 정말 생각도 못 해봐서 승관은 멍하니 ‘아...’ 하고 혼잣말처럼 탄성을 내뱉었고, 그런 승관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며 민규가 푹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대꾸하려던 승관은 민규의 날카롭게 긴장한 듯한 표정을 보자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짜증과 답답함 같은 감정이 잔뜩 묻은 민규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안도감 때문인지 뭔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쭉 풀렸는데, 이상하게 뒷목은 쭈뼛 섰다.


 사실은 무서웠고, 또 걱정됐다고. 문득 알파들의 향을 맡을 때마다 너만 생각나서 좀 울고 싶었고, 다시는 못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곁에 없으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막막해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꼭 그만큼 이 감정을 꼭꼭 숨겨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함께 느꼈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민규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잖아. 복합적인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승관은 얼굴을 살짝 굳혔다.


 이럴 거면 새끼야, 키즈폰이나 사. 그건 씨발, 위치 추적이라도 되지... 하고 한참 승관이 듣든지 말든지 넋두리처럼 이야기하던 민규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걱정스레 승관에게 물었다. 별일 없었냐고, 혹시 또 이상한 새끼들이 무슨 짓 한 거 아니냐고. 승관이 작게 고개를 젓자 땅이 꺼질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승관에게 눈을 흘기고, 민규는 핸드폰을 들었다. 일단 너 찾았다고 애들한테 얘기해야지. 다들 존나 걱정했어. 말하는 민규에게 승관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 어떻게 찾았어?”

 “뭐?”

 “나 어떻게 여기 있는 줄 알고... 그러니까, 뭐 지나가다가 우연히... 아니면 나한테서 향 엄청나게 나기라도 하는...”

 “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자꾸 하냐.”


 민규가 살짝 짜증이 난 듯한 말투로 승관의 말을 끊었다. 민규의 반응에 진짜 조금 서러워져서,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려고 했는데, 민규가 신호가 가는 걸 힐끔 보다가 승관을 똑바로 보고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널 못 찾겠냐?”

 “...”

 “내가 부승관을 못 찾는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민규는 다시 핸드폰 액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관에게는 커다란 바위같이 무겁게 느껴지는 묵직한 말을 직구로 던져놓고, 정작 민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승관의 귓가에선 다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직 민규의 대답만 우레처럼 울리고 있었다. 날 찾아낼 수 있다고. 오메가 향이고 뭐고, 그런 거 없이 그냥 부승관이라는 사람을. 다른 의도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승관의 가슴이 더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민규는 아마 모르겠지. 모르고 한 말이겠지. 사실 승관이 정말 원했던 건 민규가 이렇게 말해주는 거였다. 오메가가 아닌 부승관이 김민규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랐는데, 지금처럼. 승관이 오메가가 아니라 해도 어디에서든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해주는 거. 내가 물어봤을 때 이렇게 말해줬으면 되잖아. 그 때는 왜 대답도 못 해서, 네 마음을 이제야 알게 했어. 괜히 민규에게로 화살을 돌리며, 마음속에 남았던 응어리 같은 걱정들, 감정들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걸 느끼고, 승관은 이제 진짜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민규가 깜짝 놀란 듯 승관의 팔목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줬다. 그리고 승관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지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서 있다가, 승관과 함께 쪼그려 앉았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푹 파묻었어도 핸드폰 너머로 전화를 받은 친구가 뭐라고 하는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그렇지만 민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한참 친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민규가 겨우 입을 열어서 대답했다. 잠깐만...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그러더니 친구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뚝 끊고, 승관을 바라보았다.


 “너 많이 놀랐구나.”

 “...”

 “괜찮아, 이제... 가자.”


 민규가 연신 승관의 등을 둥글게 쓰다듬었다. 민규가 손을 뻗어 다가오자 민규의 알파 향이 아주 미미하게 풍겨왔다. 승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달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향을 훅 들이마시며, 승관은 천천히 긴장을 풀고 손을 움직여서 제 손목을 잡은 민규의 손목을 맞잡았다.



-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꽉 들어차서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손을 뻗어서 승관을 감싸 안으려다가 망설이는 사이 조금 떨어져서 서게 되었고,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민규는 계속 힐끔힐끔 승관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푹 파묻혀 있는데도 승관만 왠지 더 진하게, 선명한 물감으로 덧칠된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새삼 승관의 물음이 기막혀서 민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어. 이렇게 사람이 가득 찬 공간에서도 한순간도 승관을 찾아내지 못한 적이 없고, 그럴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오메가 페로몬을 감지하고 나서부터는 그게 조금 더 쉬워지긴 했지만 그거야 부차적인 수단이고, 어차피 공공장소에서 승관이 페로몬을 폴폴 풍기는 것도 아닌데.


 오늘 승관이 확실히 좀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 질문을 민규에게 던진 것도 그렇고, 그 이후에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갔을 때도 승관은 괜히 계속 웃으며 민규를 자꾸만 쳐다봤다. 안 그래도 승관이 화장실에 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을 때, 잔뜩 심각해진 얼굴로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승관을 찾으러 가봐야겠다는 민규를 보고 친구들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차했었는데. 그러고 나서 승관까지 민규에게 묘하게 구니 친구들은 이제야말로 정말 뭐가 됐다는 듯 같이 실실 웃고만 있었다. 이번에도 헛다리거든, 이 새끼들아. 괜히 짜증이 나서 민규는 더 승관에게 툴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관은 자꾸만 민규의 옆에 딱 붙어서 걸었다. 승관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올 땐 버스 안에서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죽을상을 하더니, 집에 갈 때가 되자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꽤 오래 서서 가다가 번화가를 지나자 빠르게 승객이 빠졌고,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민규는 슬슬 자리를 옮겨 승관에게 가까이 가서 마침내 옆에 붙어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두 자리가 나자 승관이 냉큼 민규의 옷을 붙잡고 앉았다. 가까이서 본 승관의 표정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승관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다가, 승관이 이상하게 느껴질수록 더 조바심이 나서 참지 못하고 민규는 입을 열어서 아무 말이나 꺼냈다.


 “나 걔한테 벚꽃 같이 보자고 말 안 했어.”

 “...그래?”

 “응. 그냥 네가 그런 거 물어보니까... 괜히 기분이 그래서...”

 “그랬구나.”

 “어... 그냥 그랬다고.”


 승관이 민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분명히 수없이 많이 본 웃는 얼굴인데도, 지금 민규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승관의 얼굴은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간질간질한 느낌이고, 뭔가 참을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되고. 그래서 승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니, 평소 같았으면 뭘 보냐고 톡 쏘거나 아예 얼굴을 돌려버렸을 승관이 민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진짜 이상하다. 오늘 부승관 진짜 왜 이러지... 심장이 막 제멋대로 쿵쿵 뛰고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만 같아서, 민규는 팔을 앞 좌석 등받이에 얹고 푹 엎드렸다. 부승관, 승관아. 입안에서 동글동글 구르는 이름이 오늘따라 더 몽글몽글 부드러워서, 자꾸 입안에서 음미하면서 민규는 승관을 곁눈질했다. 오늘 왜 이래. 자꾸 헷갈리게...


 “피곤해?”

 “어?”

 “피곤해서 엎드린 거야?”

 “어... 어. 좀...”

 “그럼 기대.”


 승관이 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왜 불편하게 그러고 있어. 승관의 말에 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놀라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노력도 할 수가 없었다. 민규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진짜...?’ 하고 묻자, 승관이 바로 대답했다. 그럼 진짜지 가짜냐?


 승관의 말에도 민규가 여전히 우물쭈물 거리고 있으니 승관이 어휴, 정말. 하고 장난처럼 한숨을 푹 쉬면서 민규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눌러서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조금 떨었지만, 승관이 어깨를 대 주는 대로 얌전히 기대서 눈을 살짝 감았다. 승관이 어깨를 살짝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지자 민규는 진짜 속이 울렁거려서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당연히 정류장에서 더 가까운 승관의 집에 먼저 들렀다가 가려고 하는데 승관이 한사코 민규를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너 진짜 오늘 왜 이러냐? 이제는 속으로만 생각하지도 않고 대놓고 승관에게 물어봤는데, 승관은 자꾸 웃기만 했다. 승관이 웃을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장난치는 거야? 내가 아까 있지도 않은 말 지어내서 대답했다고 복수하는 거야? 아니면 길 잃어버렸다고 짜증 내서 일부러 이러는 거야? 묻지도 못할 질문을 한참 떠올리며 민규는 잠자코 승관과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즐거운 듯 한참 이야기하는 승관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 골목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면서 민규가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월요일에 봐. 그런데 승관은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민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자 승관이 말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뭐?”

 “왜?”

 “...”


 왜냐니, 왜 묻는지 몰라서 하는 얘기냐. 민규는 또다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승관이 이렇게 이해할 수 없게 민규를 대할 때가 몇 번 있었고, 그럴 때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다시 민규의 심장을 꽉 쥔 것처럼 구는 승관이 밉다거나, 꼴도 보기 싫지 않다는 게 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민규를 지그시 바라보며 승관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민규를 바라보는 승관에게서 몸을 돌려 들어가면서도, 민규는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것처럼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



 비 오네. 승관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오는 날씨는 좋아하지만, 비가 올 때 집 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비 내리는 창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지, 우산을 써도 추적추적 흩날리는 비에 다 젖어서 꿉꿉한 기분으로 밖을 걷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오늘처럼, 시험 기간이라 일찍 집에 갈 수 있는 날은 더 그렇다.


 그래도 우산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침에는 비가 안 오길래 그냥 나오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따 오후에 비 올지도 모르니 꼭 우산 챙기라고 신신당부해서 마지못해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보는 거 하나도 없다고, 턱을 치켜들 좌 여사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시험은 내일 하루가 더 남아 있지만, 까다로운 과목들은 이미 첫날과 둘째 날에 다 몰아서 봐서 심적으로는 이미 시험이 끝난 것처럼 편안했다. 승관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도 비슷한 듯 우중충한 날씨에도 표정이 밝았다. 이미 시험이 끝난 것처럼 오늘 놀러 간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다. 물론 담임의 무서운 눈초리에 헤헤 웃으며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종례를 간단하게 마치고 학교에는 1분도 더 남아있기 싫다는 것처럼 우르르 빠져나가는 애들 사이에서 승관은 천천히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어차피 우리 반이 일찍 끝나도 일찍 갈 수는 없는걸. 그리고 한 층 내려와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민규의 반을 보고 씩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럴 줄 알았지.


 민규의 반 담임은 말이 많기로 악명이 높았고, 덕분에 3학년 반 중 가장 늦게 끝나는 반은 언제나 민규의 반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험 기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규의 반이 워낙 늦게 끝나니 친구를 기다리던 학생들도 미련 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승관을 비롯한 극소수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내려가는 애들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승관은 아무렇지 않았다. 계단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서 천장 모서리를 한 번 보고, 빗방울이 투둑투둑 부딪치는 복도 창을 가만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살짝 빼서 반 창문을 보고. 그렇게 민규를 기다리고 있으면 지루하지도 않았다.


 평소 끝나는 시간에 비해선 일찍 끝난 편이었지만, 어쨌든 다른 반들보다는 턱없이 늦게 끝난 민규의 반 학생들이 터덜터덜 교실 밖으로 걸어 나왔고, 계단 끝 모서리에 앉아서 민규가 뒷문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지켜보다가 민규가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에 픽 웃음이 터져서 승관은 천천히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승관을 바라보고 맥이 탁 풀린 듯한 표정을 짓는 민규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간 줄 알았냐?”

 “아니거든?”


 민규가 승관의 농담에 짐짓 발끈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얼굴에는 안도했다고 크게 쓰여 있었다. 하여튼 민규는 아직도 이렇게 모른다. 승관이, 저를 두고 먼저 갈 리가 없다는 걸.


 현관으로 걸어 나와서 승관은 우산을 꺼내 활짝 펼쳤다. 그리고 우산을 머리 위로 쓰며 바깥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는데, 민규는 승관을 따라 나오지 않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우산을 살짝 들고 민규를 바라보다가, 다시 민규에게로 다가가면서 승관은 물었다. 우산 없어? 민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없다고 하면 되지. 왜 서 있는데.”

 “...”

 “빨리 와.”


 승관이 우산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손짓했다. 민규가 조금 망설였다. 왜 망설이는지 아주 어렴풋이는 짐작이 갔지만, 승관은 모른 척 다시 민규를 불렀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 없는데. 아니, 사실 우리가 아직 망설일 필요가 있는 사이라고 해도, 그래도 뭐 어쩔 건데. 집까지 비 쫄딱 맞고 가기라도 할 거냐고. 승관이 민규가 걸어 나오길 기다리다 못해 성큼성큼 걸어가 민규의 소매를 잡아끌었고, 휘청이며 승관의 우산 속으로 같이 들어온 민규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가 어깨로 비를 다 맞고 잔뜩 움츠리며 다시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작게 접히는 3단 우산은 승관 한 사람이 쓰기에도 조금 작았고, 그런 데다 둘이 같이 쓰니 안 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자연스레 더 키가 큰 민규에게 우산 손잡이를 넘겨주고 나니 승관의 한쪽 어깨가 비 때문에 천천히 젖었다. 그래도 승관은 나쁘지 않았는데, 오히려 비를 맞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불쾌하지 않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는데, 민규가 아주 조심스럽게 승관 쪽으로 우산을 자꾸만 기울여서 승관은 휙 고개를 돌려서 민규를 바라보았다.


 “뭐 하냐?”

 “난 이미 다 젖었잖아.”

 “아, 됐어. 나도 젖었어.”

 “그래도... 너 비 맞는 거 싫어하잖아.”

 “너는 좋아하냐?”


 우산이 자꾸만 불안하게, 시소처럼 기우뚱거렸다. 이제 머리에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에만 우산을 쓴 의의를 둬야 할 것 같았다. 민규나 승관이나 어깨와 등, 다리까지 젖었는데, 그런데도 이제는 꼭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구도 물러나지 않고 서로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한참을 팽팽하게 실랑이하다가, 민규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승관의 허리를 확 감싸서 안았다. 우산 속에서 둘의 몸이 겹쳐지며 승관이 폭 민규의 가슴에 안겼고, 너무도 익숙하고 또 그리웠던 민규의 향이 확 풍기는 것과 동시에 귀 바로 옆에서 ‘이러면 되지?’ 하고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민규 때문에 승관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일 뻔했다.


 꼭 안긴 채로 천천히 발을 맞춰 걸으면서, 민규의 품이 꼭 저를 이렇게 빈틈없이 끌어안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잠시 해볼 정도로 아늑하고 따뜻해서 승관은 자꾸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민규와 닿은 모든 곳에서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이었고, 복잡한 생각을 다 정리한 후 처음으로 닿은 민규의 온기가, 그리고 민규의 향이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편안해서 오히려 승관의 심장을 더 거세게 뛰게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민규도 말이 없었다. 머릿속을 자꾸만 빼곡하게 채우는 충동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승관은 자꾸 입술을 질끈 깨물며 껍질을 다 물어뜯었다.


 민규의 집 앞에 도착해서도 둘 다 쉽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다가, 승관이 먼저 굳은 결심을 하고 민규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서 민규를 마주 보았다. 사실 벚꽃을 보고 왔던 그 날부터, 마음은 이미 다 정리했고 민규에게 먼저 말할 날만을 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직후부터 시험 기간이다 뭐다 하고 바빴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쉽게 기회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고,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지금 당장 나한테 화내고, 가지고 노는 거냐고 역정을 내도 할 말은 없지만, 이번엔 진짜 진심이라고. 매일 자기 전에 곱씹었던 그런 말들을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승관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민규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김민규.”

 “미안...”

 “어?”


 뭐가 미안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민규를 바라보았지만, 민규는 승관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여서 발끝만을 바라보더니, 승관이 기다림에 지쳐서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고 묻기 직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민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민규의 표정에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와서 승관이 살짝 이마를 찌푸림과 동시에, 민규가 말을 이었다.


 “나 티 많이 났지.”

 “뭐가...”

 “나 진짜 엄청 노력했는데. 네가 불편해하니까. 싫어하니까. 그런데, 아...”

 “....”

 “너 끌어안으니까, 진짜 너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조절하려고 나도 진짜 애썼는데.”

 “민규야.”

 “근데 승관아. 이제 나 너한테 이건 진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거든? 네가 그냥 오메가라서... 그냥 너한테서 나는 향이 좋아서만 이러는 건 아닌 거 같아.”


 나도 알아. 김민규. 네가 나한테 무슨 마음인지, 내가 너보다 먼저 눈치챘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벅차서, 입을 연 순간 꼴사납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올까 봐 승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민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승관의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민규가 제자리에서 불안하게 발을 동동 구르더니 승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놀라기도 했고, 민규가 격앙된 감정에 너무 세게 잡기도 해서 승관이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큰 소리를 냈더니, 승관이 놀란 것에 민규가 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어? 아파? 미안...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리고 정말 조심스럽게, 터지는 비눗방울을 손에 얹기라도 한 것처럼 승관의 손 마디 사이로 살그머니 손을 움직여 살짝 깍지를 꼈다.


 “다신 아프게 안 할게. 놀라게도 안 하고. 진짜 천천히... 응? 그러니까...”

 “...”

 “너... 무섭다며, 알파. 징그럽고. 싫고. 나는 진짜 안 그럴 거니까...”


 아주 천천히 다가오면서, ‘승관아, 응?’ 하고 허락이라도 구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묻는 민규를 보다가 승관은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더운 한숨을 훅 내뱉었다. 결국 이번에도 승관은 민규에게 먼저 말하지 못해서 민규를 다시 한 번 조바심내게 했다. 깊이 자책하며 승관은 민규가 먼저 잡은 손에 꽉 힘을 줬다.


 그냥 그 날, 벚꽃을 보면서 말해주고 꼭 안아버릴걸.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그러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행복하고, 미안하고, 그만큼 민규가 사랑스럽고, 그런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확 북받쳐서 승관은 민규의 목을 냅다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알고 있어. 네가 날 무섭게 할 리 없잖아. 징그럽고, 싫을 리도 없고. 민규를 거의 넘어뜨릴 것처럼 달려든 승관 때문에 민규가 그대로 돌처럼 굳어서 서 있다가, 승관이 입술을 꾹 누르고 혀끝으로 앞니를 두드린 순간 우산을 거칠게 던져버리고 승관을 꼭 끌어안았다. 쏟아지는 비를 다 맞아서 흠뻑 젖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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