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처럼 체육관에서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토스와 그걸 치는 나의 하늘, 보쿠토 코타로. 어제와 변한 게 없는 당신과 나지만, 오늘따라 더 높아 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넋을 빼앗겼다.


"아카아시! 괜찮아?"


공이 날아오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다가 눈 옆으로 공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마터면 코노하 씨의 공에 맞을 뻔 했고 다들 놀라 나에게 다가 왔다.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 네. 괜찮아요."

"오늘 어디 아픈 거 아냐? 집중을 못하는 것 같은데…."


보쿠토 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는 코노하 씨 옆에서 나의 어깨를 부여 잡고 마구 흔들었다. 열이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한데. 그 뒤로도 연습할 때 집중을 하지 못해 결국 오늘은 연습을 쉬겠다며 중간에 나왔다.


달이 보이지 않는 밤. 연습이 끝난 뒤 보쿠토 씨와 매일 함께 걷던 이 거리가 왠지 낯설다. 흔한 벌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풀들이 서로를 할퀴는 소리만 내 귀에 파고 들었다. 인적이 드문 거리였지만 이 정도까진 아닐 텐데. 원래 이 시간에는 사람이 없나? 의문을 갖고 혹시 몰라 주변을 경계하며 걸었다. 그때 나의 등을 톡톡 치는 의문의 손길.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뒤를 돌아 봤다.


"학생, 이 짐 좀 저기까지 들어 주지 않으련? 이 할매가 허리가 많이 아파서 그려…."


나는 의심없이 그 짐을 들어드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차도까지 함께 걸었다. 생각해 보니 납치는 보통 이런 수법으로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니겠지. 인상도 좋아 보이셨는데. 나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벌써 차도였고 할머님은 고맙다며 사탕을 손에 꼭 쥐어 주셨다. 나는 아니라고, 당연한 일을 한 거라고 말씀 드리고 다시 길을 돌아가려던 찰나, 누군가 나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나."


아, 머리가 아프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손발이 차고 꼭 대리석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웅크렸다. 귀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곧 차가운 물이 내 온몸을 매섭게 때렸다.


"일어 나!"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내게 안대를 씌운 것 같았고 목엔 시린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직감적으로 속박 당하고 있다고 인지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뻐근한 입을 벌려 물었다.


"… 원하는 게 뭡니까."

"이 새끼 웃기는 놈이네."


보통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나? 비아냥거리며 나의 턱을 잡아 위로 당기는 거친 손길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누구길래, 나를 죽이지도 않고 가둬 놓은 걸까? 거칠었던 손길은 곧 나의 뺨을 두어 대 가볍게 치고 문을 여닫는 소리와 함께 그는 사라졌다.


나는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일어났다. 날카로운 쇠의 소리와 함께 뒤로 당겨지는 목. 팔과 다리는 자유로웠지만 아무래도 목줄을 채워 놓은 듯 앞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목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때 들리는 한 남성의 목소리.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내는 누구일까.


"최대한 상처없이 데려 오라고 했는데…."


쯧, 뒤통수에 이게 뭐람. 능글맞은 목소리로 나의 뒤통수를 살피는 또 다른 사람. 손길은 다정한 듯 하였지만 저절로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이게 어딜 봐서 상처가 없습니까. 안대라도 풀어 주세요."


그는 크게 웃으며 지금 그게 납치된 사람이 할 대사냐고 물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지금이 웃을 상황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힘겹게 참으며 주변을 더욱 경계하였다. 작은 숨소리조차 내겐 천둥 소리와 같았다.


"상처가 너무 없으니, 보쿠토 군을 자극하기엔 역부족 아닐까."

"… 보쿠토 씨요?"


그 선배 이름이 왜 나오는 걸까 의문이 들었고 혹시 나를 납치해서 보쿠토 씨를 협박하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였다. 그래서 그 사내에게 보쿠토 씨는 상관없다며 구걸했다.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두 번째 남성은 네가 얼마나 소중한데 그런 말을 하냐. 섭섭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너무 미워하진 말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의 뺨을 강하게 내리치고, 옆구리를 발로 차고 쓰러진 나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몇 번 더 뺨을 내리친 후에야 그는 만족했다는 듯이 나를 내팽겨 치고 나갔다. 힘이 빠진 나의 몸은 적막한 방의 바닥으로 쓰러져 홀로 남았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총성과 거친 언행들. 마치 싸움이라도 난 듯한 소리였다.


"아카아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설지 않은, 아니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야. 아니, 들어선 안 되는 목소리야.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위험하니까 당장 나가요. 계속 같은 말을 하였다.


"괜찮아, 아카아시. 이제 다 끝났어. …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다쳤어. 응?"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신의 손길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숨이 차오른다.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긴장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풀려버렸다. 내가 지금 우는 이유는 당신을 보고 내 마음이 안정돼서? 아니면 당신이 나를 구하러 와서? 아무래도 후자겠지. 나는 당신이 날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안대가 풀리고 당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물이 가득한 얼굴. 왜 당신은 나보다 더 슬퍼 보여요? 다쳐서 아픈 건 난데. 무서웠던 것도, 두려웠던 것도 모두 나인데.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힘이 빠진 나를 들고 빠르게 그곳을 빠져 나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의 품에서 정신을 서서히 잃었다.


*


"아카아시? 정신 좀 들어?"


이곳은 또 어디일까. 기절만 오늘 몇 번째인지. 아니, 새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침인가? 일반 가정집 같아 보이는 방을 느리게 둘러 보았다.


"이곳은 보쿠토 씨의 방인가요?"


응, 맞아. … 아카아시! 지금은 일어나면 안 돼. 가만히 누워 있어, 응? 서툰 요리 실력으로 죽까지 끓여 온 걸 보니 어지간히 걱정하신 모양이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괜찮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상황 파악이 도저히 안 된 나는  그에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 물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굳게 닫힌 입을 열어 자초지종 설명해 주었다. 아버지가 어떤 조직의 보스시고, 나는 그 뒤를 물려 받아야 되는 사람이다. 전에 아버지께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땐 절대로 구하러 가선 안 된다 말씀하셨다. 하지만 너는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앞으로 혼자 있으면 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내 본가에서 지내라. 이런 얘기를 하셨다.


"보쿠토 씨. 후회 안 해요?"

"뭐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제야 이해한 듯, 후회를 왜 하냐고 소리 지르는 당신이었다. 나는 그럼 됐다고 시끄러워서 식사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그를 내쫓았다. 그리고는 작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태양조차 고개를 내밀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당신은 나와 마주 앉아 웃을 수 있을까요."


*


띠리링—.


"여보세요."

[아카아시~ 잘 있었어?]

"… 만족하셨습니까."


첫 대사가 그게 뭐야. 섭섭하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어서 들려 오는 벌레 같은 목소리. 


[아카아시, 보쿠토가 말한 내용을 잘 들었고. 앞으로 네가 해야 하는 일이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그 사탕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위치 추적도 너희가 다정하게 대화하는 것도 듣고 좋네.]

"… 쿠로오 씨."

[오야, 지금 제 말을 거역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그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쿠로오 씨가 속한 조직의 일원이었고 그 조직은 보쿠토 씨가 속한 조직을 위협하려고 했다. 나는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곳을 나오면 나의 가족들이 위협하고, 보쿠토 씨에게 더 큰 위협을 가할 게 뻔했기 때문에 이 작전을 수행하였다. 


끝은 비록 비극으로 치닫고 있지만, 당신은 분명 그 비극 속에서 살아남을 거야. 당신은 나의 하늘이잖아. 그래도 고마워. 나를 구하러 와 줘서. 물론 당신이 나를 구하러 오지 않길 바라고 있었지만,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어. 그래서 울었던 것 같아. 너무 미안해서.


"그럼 끊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창문을 두드리는 거센 빗줄기. 그 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비극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나를 용서하지 말길.'







In the dark — 가려진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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