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나 장아찌 안 먹는다고."

 

정은호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좋게 봐줘서 내려놓은 거고, 삐딱하게 보면 툭 던졌다. 네모난 식탁에 둘러앉은 나머지 가족들의 숟가락이 동시에 멈췄다. 은호는 그 순간 엄마도, 아버지도 아닌 형의 눈치를 봤다. 승호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이어 나간 덕에 식구들도 식사를 이어갔다. 숟가락을 던진 정은호만 빼고. 절절매는 건 늘 그렇듯 은호가 아니라 그의 모친이었다.

 

"미안해, 아들. 좋아하는 반찬 해준다고 한 건데."

"이거 먹은 주엔 경기에서 무조건 진다고 했잖아. 한, 두 번 말한 것도 아니고."

"응, 그랬지. 엄마가 잊어버렸다. 미안해."

"짜증나. 나 안 먹어."

 

은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기숙사에서 사느라 오랜만에 집에 온 고1 현승호는, 오랜만이니 참자 참자 하다가도 그간 집안 분위기가 어땠을지 뻔히 보여서 더 참는 게 조금 어려웠다.

 

"정은호."

 

그래도 참기로 했다. 오랜만이고, 제가 못 참으면 그때의 집안 분위기 역시 좋지 못할 거였으니.

 

"앉아."

"내 징크스라고."

"앉아."

"싫어!"

"나 두 번 말했다. 세 번째는 말로 안 해."

"은호야- 그럼 장아찌 말고 다른 거랑 먹자. 은호 된장찌개도 좋아하잖아, 응?"

 

형제의 기 싸움에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모친이 거의 사정을 해가며 은호를 앉혔다. 된장찌개를 은호 앞으로 조금 더 밀어주고, 손에 숟가락을 쥐어줬다. 은호는 못 이기는 척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그러면서도 애호박이 덜 익은 것 같네, 국물이 짜네, 못 하는 말이 없었다. 현승호가 그나마 좋게 봐줬던 정은호의 장점 중 하나는 애가 그래도 집에서 막내 노릇은 한다는 거였다. 안 그런 척 애교도 떨고 눈치도 잘 봤다. 근데 지금 하는 꼴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춘긴가. 고작 한 살 차이인 동생의 사춘기를 대충 가늠해보던 승호가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먹기 싫으면 먹지 마."

"……."

"내 방에 들어가 있어."

 

은호가 몸을 움찔 떨었다. 티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식사를 위해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숨기지는 못했다. 방에, 그것도 현승호 방에 들어가 있으란 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승호가 식사 끝날 때까지 기다리란 뜻이 아니다. 최소한 엎드려뻗쳐야 한다. 게다가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식사를 마친 승호와 돌아오면 대화를 나누게 되겠지. 길고 힘든 몸의 대화를. 은호는 오랜만에 본 형과 그런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 먹는다고."

"……."

"먹고 있잖아…."

 

국이 짜고, 장아찌는 징크스 때문에 못 먹고, 그게 먹는 거야? 승호는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걸 이번에도 참았다. 정은호가 알아야 할 텐데. 이번이 마지막으로 참는 거란 걸.

 

그렇게 평화롭게 넘어가면 좋았을 텐데. 누가 축구 하는 애 아니랄까봐 은호는 승호가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대차게 걷어차 버렸다. 불과 저번 달에 산 축구화가 별로라 새 축구화를 사셔야겠단다. 애들 다 신는 신발이라고, 나만 이게 뭔데, 축구화 때매 지면 엄마가 책임질 거야? 막내아들이 들들 볶아대니 버티는 듯싶던 모친의 지갑이 열렸다. 딱 거기까지 보고 승호는 동생을 방으로 호출했다.

 

"너 한 번만 더 징크스니 운동화니 쓸데없는 얘기 꺼내라."

"……."

"네가 열심히 안 뛴 걸 어디 남 탓을 해? 그것도 어머니 탓을."

"열심히 뛰었어."

 

현승호 방에 호출되면 일단 기본자세가 엎드려 뻗치는 거다. 은호는 기합받는 중에도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퉁퉁댔다.

 

"그래? 그럼 너랑 내 '열심히'의 기준이 다른 거 같은데."

"나도 열심히 했다고."

"근데 왜 져."

"……."

"왜, 이번엔 같이 뛰는 친구들 탓하게?"

 

걔들이 답답한 걸 어떡해. 정은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 몸이 열한 개라면 우리나라에서 이기지 못할 중학교 축구부는 없을 거라고. 열여섯의 정은호는 그랬다.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은호에게 승호는 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기합을 주거나 매를 들어 기만 조금 꺾어놨을 뿐이었다. 다만 모든 훈육의 끝에는 악담 같은 당부가 붙었다.

 

"넌 꼭 창경고 와라."

"형이 그렇게 말 안 해도 갈 거거든. 수원에선 거기가 그나마 제일 알아주니까."

 

그나마? 창경 고등학교는 전국구에서 축구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매년 입학 전쟁을 치르고 들어오는 학교다.

 

"형은 어떡하냐. 내년엔 형보다 내가 더 잘할 텐데. 그래도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

 

은호가 아무리 시건방을 떨어도 승호는 그의 말을 딱히 정정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입학한 순간 알게 될 거다.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입학이나 가능하려나. 일반 중학교 축구부에서 겨우 탑을 찍는 정은호가.

 

"미리 사인도 받아 놓고 해. 나 국대 되고 나서 잘 보이려고 고생하지 말고."

"넌 그게 엎드려뻗쳐서 할 소리냐?"

"그니까. 일으켜주면 안 돼?"

"한 시간만 더 해, 정은호 국가 대표 선수."

 

정은호가 실실 웃었다. 좋단다. 기합 한 시간은 벌도 아니라 이거지. 승호가 책상에 앉았다. 하는 꼴 보면 몇 대 때려줘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그러기엔 제 방으로 호출된 은호 너머로 보이는 어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한 달 만에 집에 와서 뜨신 밥 먹고 하는 짓이 동생 패는 거면 부모님 볼 낯이 없다. 불과 오늘 오후 선배들에게 걸린 단체 집합으로 제 몸부터가 성치 않기도 했고.

 

 

잘 뛴다는 말이 백 퍼센트 허풍은 아니었는지 은호는 다음 해 당당하게 창경 고등학교에 입학해 축구부에 들었다.

훈련 첫날, 승호는 저와 같은 축구부 유니폼을 입고 바짝 긴장한 정은호가 낯설고 웃겨서 운동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게 티가 났는지 훈련 끝나고 따로 남겨져 집중 못 한다는 이유로 선배들한테 기합받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 새낀 저 새끼고 나는 나다. 괜히 신경 쓰지 말자.

그러나 마음이 마음대로 된다면 그게 가족이겠는가. 기합받으며 다짐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넌 뛰는 폼이 왜 그렇게 엉성해? 너 이름이 뭐야?"

"……."

"야, 너! 57번!"

"…저요?"

 

갑자기 호명된 제 등 번호에 놀란 은호가 감독 앞까지 뛰어와 뒷짐 지고 섰다. 거기까지는 운동하며 구른 짬이 있어 자동적으로 해냈지만 머릿속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뛰는 폼이 엉성하다고? 내가?

 

"이 새끼는 정신 빼놓고 뛰나, 불러도 대꾸가 없어!"

"죄송합니다."

"넌 앞으로 공 차지 말고 운동장만 돌아. 기본도 안 된 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예?"

"못 들었어? 볼 반납하고 가 뛰어, 새끼야."

 

은호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독설이다.

승호의 권유로 들어간 일반 중학교 축구부는 취미로 공 차는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담당 교사는 열정적이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학생들이 선수로 클 수 있게 훈련 커리큘럼을 짜거나 일 대 일 피드백을 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만고만한 학생들 사이에서 정은호는 단연 돋보였다. 전체 집합을 제외하면 후배일 때도 담당 교사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선배들한테 제대로 혼나본 적 한번 없었다. 공 한 번을 차도 교사의 칭찬과 학생들의 은근한 시선을 받았던 정은호는 구를 대로 구른 타 동기들에 비하면 멘탈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잘 못 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약한 멘탈은 습관처럼 뾰족한 말투를 뒤집어쓰고 튀어나왔다.

 

"뭐 이 새끼야?"

"그게 감독님 역할 아니냐고요."

"야!!"

 

감독의 고함으로 정은호의 반항을 운동장에서 뛰던 축구부 전체가 알게 됐다. 정은호는 아랑곳 않고 제 할 말을 뱉어냈다.

 

"잘 못하니까 훈련 빠지란 말은 씨발, 저도 해요. 입 터는 걸 누가 못 해."

 

주체 못하는 분노는 눈 앞을 가리고 머릿속을 뿌옇게 만들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입 털지 말고 제대로 가르치라고 우리 부모님이 등록금을-"

 

필터링되지 않은 말을 끊어준 건 감독도 주장도 아닌 현승호였다. 운동장 반대편에 있다가 감독의 고함과 그 앞에 삐딱하게 선 정은호를 보고 큰 보폭으로 걸어온 승호가 은호의 뺨을 쳤다.

 

"사과드려."

"싫어, 형이 뭔데!"

 

승호가 아무 표정 없이 손을 높이 올렸다. 화와 원망으로 점철되었던 은호의 얼굴에 다른 감정이 드러났다. 두려움. 그걸 보고도 승호는 그만두지 않았다. 높이 올라간 손바닥이 그대로 은호의 뺨을 내리쳤다. 체벌을 가장한 폭력은 한 대로 끝나지 않고 몇 번이나 이어졌다. 힘에 못 이겨 뒤로 밀린 은호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나서야 승호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러고도 현승호는 정은호 앞에 버티고 서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언제든 이 말도 안 되는 체벌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에 은호가 딱딱하게 부어오른 뺨을 한 번 만지지도 못하고 감독 앞에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 뭐야!"

 

감독이 몇 박자나 늦게 승호에게 화를 냈다. 현승호는 익숙하게 뒷짐 지고 서서 제 몫이 아니었던 그의 분노를 받아냈다.

 

"뭔데 끼어들어서 훼방을 놔!! 공 좀 잘 차면 단 줄 알아??"

"죄송합니다."

"후배를 새끼야, 누가 감독 앞에서 이렇게 패, 어?!"

 

감독이 승호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승호는 감독이 힘을 주는 대로 밀리면서도 곧잘 제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새끼들아, 신입생 교육이 이렇게 안 돼? 이학년 너네 뭐 하는 놈들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가르치겠습니다."

"너 이학년 주장이야?"

"아닙니다."

"그럼. 네가 뭔데 책임을 져."

 

정은호가 슬쩍 현승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여태 담담하던 얼굴에 고민의 빛이 서렸다. 그동안은 암묵적으로 학교에서 형제임을 티 내지 않았었다. 밝히면 귀찮아질 테니까. 잠깐 뜸을 들이던 승호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입니다."

"동생? 친동생? 넌 현 씨고 쟨 정 씨인데 무슨 동생이야?"

 

그래, 이런 식의 귀찮음. 짐작이야 했지만 면전에 대고는 처음 듣는 소리에 은호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성은 다른데 가족입니다."

 

현승호 역시 예상했던 질문인지 답이 금방 나왔다. 이해되지 않는 듯 승호와 은호를 번갈아 보며 설명을 기다리던 감독이 꾹 다물린 형제의 입을 보고는 아주 다른 말을 했다.

 

"이 새끼 제대로 교육 못 시킨 축구부 전체! 앞으로 한 달 동안 훈련 전후로 타이어 끌고 뛰어라."

"예 알겠습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운동장에 큰 대답 소리가 울렸다. 은호는 차마 답도 하지 못했다. 뺨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몇 대씩이나 얻어맞은 것도, 저 때문에 집단 전체가 벌을 받는 것도 전부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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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풀어보고 싶었던 승호와 은호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한 편짜리 번외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고민하던 차에 승호 생일이 되어서 일단 앞부분을 급히 첨삭해 가져왔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금방 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현승호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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