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재정]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


作 Hello angel



 

 

비록 나는 도시고를 졸업하지 못하고 전학갔지만 그래도 졸업한 학교보다 도시고에 더 애착이 있었다. 도시고에는 내 첫사랑이, 내 청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준희와 나같이 도시고 출신 여자애 둘이 모이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오빠 요즘 뭐하는지 알아?”

 

 

우리에게 정재현은 ‘그 오빠’로 통했다. 너의 첫사랑이자 나의 첫사랑.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짝사랑으로 끝난 덕분에 정재현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왕자님이자 아이돌이요, 어떤 하나의 전설의 레전드를 찍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나는 정재현을 무슨 구남친처럼 대했다. 실제로는 인사 한 번 정식으로 안 나눠봤는데 말이지.

 

정재현은 우리보다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모두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라는 자리에서는 졸업하지 않고 영원히 군림중이었다.

 

 

 

인터넷 어디에서 봤는데 짝사랑을 오래 하면 사람 머리가 좀 어떻게 된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짝사랑이라기보다 망상과 집착에 가깝다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 대상과 어떻게든 해보겠다, 가까워져 보겠다는 의욕은 사라진다고...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상상속의 상대와 관계를 혼자 발전시키고 있다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 상대를 하나의 유니콘처럼 만드는 것에 공을 들인다고.

 

틀렸다고 부정하기엔 나도 그렇고 내 주변에도 그 사례가 너무 많았다. 사실 전학을 간 다음부터 나는 살아있는 정재현의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도시고에 재학할 때도 운좋아야 스치는 정도였지... 그래도 나와 준희는 늘 상상 속의 정재현과 깊이 있고 근본 있는 사랑을 해왔다.

 

정재현에게서는 언제나 늘 쿨워터 향이 풍긴다느니, 그의 배에는 복근이 쫙쫙 갈라져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의 출처는 하나같이 우리 도시고 출신 여학생들 머리에서 튀어나온 뇌피셜이었다.

 

 

“겨드랑이 털도 안 날거야.”

 

 

..짝사랑의 끝은 진짜 광기인걸까? 광기 섞인 준희의 말에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 대상이 정재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납득했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영구 제모는 기본 옵션으로 물고 태어났을 수도 있어. 정재현이잖아.

 

 

우리들의 취향대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정재현은 사실 못하는 것도 많고 안되는 것도 많았다.

 

 

“에비앙만 마셔야 돼.”

 

“맞아.”

 

“돈까스 금지.”

 

“당연!”

 

“심심할 때 유투브보면 안돼. 무한도전 금지, 오분순삭 금지!”

 

“절대!”

 

 

..남들이 들으면 실존인물을 두고 뭐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하냐 싶겠지. 정재현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지독하게 짝사랑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사실 나와 준희는 한창 그런 문학에 빠져있는 광인들이었다. 수능볼 때 공부하는 문학 말고 리디북스, 카카오페이지가 바로 우리의 문학이었고 바이블이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리디광공과 실존하는 정재현을 섞다보니 엉망진창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활자에서만 살아 숨쉬는 가상의 인물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정재현에게 공들여 입혔다. 그러다보니 정재현은 하나의 사람이라기보다 그냥 광공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의 정재현보다 리디북스에 있는 정재현을 더 사랑하는 걸까?

 

정재현이 알면 어이가 없고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가 알 일도 없고... 피해주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안녕?”

 

“.....”

 

 

내가 수능에서 조상신의 가호를 받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쩐지 그 해 수능날 역대급 한파였더라. 내 윗대 조상신들이 전부 나의 뒤에서 힘을 불어넣어주느라 그러셨나봐. 그분들 덕분에 내 실력에는 과분한 도시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에서 정재현과 이렇게 엮이는 일이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

 

 

준희야.

 

 

“나 도시고 졸업했는데... 너 잠깐 도시고 다녔었지? 우리 어떻게 보면 동문이다, 그치.”

 

 

리디광공이 동문 후배 아는 척하는 거 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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