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

공이 상하운동을 하는 소리.

바닥면에 그 몸을 온전히 내던졌다가 손에 자리를 잡듯 감겨온다. 큰 손 위로 자리 잡힌 배구공은 언제든 내 손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잡고 있길 원한다면, 나와 함께 있길 원한다면 공은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 사람과 달리.


“나이스!”


공은 직선을 그리며 코트 선 위로 떨어졌다. 아슬하게 IN. 감독은 신이라도 났는지 크게 웃었다. 에이스 잘 한다! 연습할 때 맨날 지적만 하던 양반은 어딜 간 건지 내 어깨를 툭툭 치기까지 한다.


“오늘 컨디션 좋네?”

“그렇습니까.”

“서브 치는 족족 서비스 에이스잖아.”


하긴 오늘따라 유독 공이 손에 잡히는 감각이 좋았다. 연습 상대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보고 있는 걸 보니 이걸로 벌써 6점은 넘게 땄나 보다. 주장 형도 날 보며 엄지를 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컨디션이 좋을 때를 보여주고 싶은데.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아이는 나와 4살 차이니, 올해 대학에 갔다면 신입생일 터다. 


“여기까지 하자. 학교 가는 놈들은 잘 가고. 채선 너 특히. 수업 빠지지 마라.”

“네.”

“시즌 잘 끝냈고 당분간은 쉬어라. 이상.”


일사분란하게 짐을 챙기는 형과 동생들에 난 혼자 보스턴 백 안에 짐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볼 일 없겠다? 인사를 하고 떠나는 동료들에 난 고개만 까딱였다. 팀 이동이 없는 이상 올 여름이 지나면 또 볼 얼굴들이다. 

3월까지 치뤄진 리그 때문에 이제야 학교를 정규적으로 다닐 수 있게 됐다. 수업에 불성실한 탓에 감독님한테 여러번 전화가 간 것인지 내가 주차장에 있을 때조차 감독은 찾아와서 수업 좀 빠지지 말라며 잔소리를 했다. 성인한테 수업 빠지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건 또 뭡니까. 괜히 한 소리 했다가 머리를 얻어 맞았다.

아프다. 전직 배구선수한테 머리를 얻어맞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괜히 뒷머리를 슬슬 문지르며 차에 올랐다.


너는 머리가 짧았던가. 시선은 분명 현재에 머물러 있는데 생각은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

뒤늦게 돌아보면 네가 어리다는 것쯤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분명 나보다 어릴 거라는 생각은 했다. 실제로 넌 나보다 어리다고 이제 막 성인이 됐다 말했다. 한 살 터울.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설명되는 나이라고 스물 한 살의 난 생각했다.

사랑스러웠고 애틋했고 소중했다. 동생이 없던 나에게 넌 동생이면서 동시에 연인이었다. 평균적으로는 큰 손이지만 나보다는 작은 그 손을 엉겨잡으면서 행복을 이야기했다. 감성이라곤 말라비틀어진 내가 너만 보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네게 말하지 못했으나 첫연애였고 첫사랑이었다. 네가 어리숙한만큼 나 또한 어렸다. 넌 날 크게 봤을 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널 사랑했기에 질투했고 널 사랑했기에 집착했다. 네게는 드러내지 못하는 어린 감정이 내 머리를 들쑤시고 내 속을 뒤집었다.


‘형... 제발요.’


그 와중에 넌 고백했다. 날 속였다고. 머리 한 구석에선 그럴 수 있다고 날 너무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확히 절반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널 역겨워한 것이 아니라 날 역겨워했다. 성인이... 이제 막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를 그런 더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미친 것만 같았다. 알고도 무시한 게 아닐까?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들이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내 탓은 아니다. 

사고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널 탓하기란 쉽지 않았다. 군대를 가서도 선임에게 배가 까이는 와중에도 네 잔상이 머리를 떠나가질 않았다. 서지하라는 중독에 걸린 거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였다.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다.

전역을 하자마자 내가 찾아간 건 미국에 있는 형도 회사에 계신 아버지도 아니었다.

‘...채선?’

그나마 가까이 지냈던 사촌형.

피곤한 낯의 그는 묵묵히 내 얘기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떠도 나와 닮은 이 사람은 내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후회할 거 같아?’

목적어가 없는 물음에 난 반쯤 감긴 눈으로 사촌형을 바라봤다.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후회할 거 같냐고.’

차마 다가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생각해보지도 않은 문제였다. 내가 무슨 수로. 망할 놈의 핸드폰은 고장까지 나서 그 아이와 내가 나눈 문자까지 다 날려버렸다. 넌 날 찾았을까? 뒤늦게 궁금해할 뿐이다.

내가 그럴 자격은 있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 둬.’

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애한테 넌 악몽일 뿐이야.’

악몽.

채선.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이제와서 그 아이를 마주친다 한들 날 곱게 볼 리가 없다. 미련을 버리자. 잊으려 노력하자. 

이제부터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망각하기 위함이다. 내 세계에서 지우려 함이다. 

들어오면 도망칠 게 분명한 백색의 공간에서 이젠 다시 홀로 남아야할 때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상.

나조차 두려운 흑색의 공간. 네가 있어서 그나마 하얬던 공간은 이젠 그 빛조차 잃어 어두운 우주와 다름 없었다.

우주에서 부유한다고 해서 두렵지는 않았다. 우주가 생각나고 10년을 넘게 혼자 떠다니기만 했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 오랜시간 해왔던 걸 이제와서 못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네가 보이지만 않았다면.


친구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널 찾았다. 해가 떠 있는데도 밤이 있었다. 온전히 밤하늘을 담은 듯한 네 눈이 내 시선을 붙잡는다. 시선이 얽힌다. 

네가 들어선다. 

별이 생긴다.

그리고 다시 하얗게 변해간다.


“...서지하.”


몇 년동안 담지 않았던 이름이 입술 틈으로 빠져나왔다.

내 몸이 널 잡았다. 깨질까 널 쉽게 붙잡지도 못했던 네 손이 네 손목을 잡아챈다.


“...보고싶었습니다.”


네 얼굴을 보기 두려워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잇따른 네 대답을 기다리듯 난 고개를 떨군 채 하얀 세상에서 널 기다린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날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미안해요.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날 사랑해주세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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