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비정기연재

*개눕 님 리퀘 (신선 유기 - 군주 유장)











‘시발. 뭐가 잘못된 거지.’

기상과 동시에 든 생각은 처절했다. 아침에 유장은 항상 눈을 뜸과 동시에 몸을 바로 일으키곤 했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루틴대로 생활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이 날 눈을 떴을 때 유장은 창밖이 너무 밝다고 느꼈다. 몇 시일까 하는 의문보다 빠르게 일상이 어그러졌다는 좌절이 한기처럼 내려앉았다. 지난밤 내내 수분을 뽑아낸 탓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주군! 마초 아침으로 김밥이랑 우동 먹고 싶…!”

“야야야야야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조그만 손발이 빼꼼 보였다가 뒤에서 누가 낚아챈 듯 후다닥 거실 겸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강유와 방통의 당황한 목소리가 세 영웅패의 상황 파악 현황을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유장은 눈물이 나오지 않는 눈을 두 손으로 꾸욱 눌러 덮었다.

“쉿! 유장 님 피곤하시니까 조용히 해, 마초야. 내가 사줄게.”

“신선이 돈도 있어?”

“돈은 없고, 카드라는 게 있어.”

“주군이 그건 비장의 무기라 하셨는데… 다시 보았다, 신선 유기!”

“나가서 떠들어, 이 새끼들아!!!”

유장은 칼칼한 목으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정식 경기에서 상대로부터 단 한 라운드도 빼앗지 못한 끝에 녹아웃을 당했을 때보다 더 비참하고 짜증났다.

‘신선이나 영웅패나 다 똑같아. 망할 놈들. 빌어먹을 놈들!’

“일어나셨어요?”

문을 열면서 유기가 화사한 미소를 띠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유장을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아님에도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시야를 가려야 했다.

“식사하셔야 하죠? 배달시킬까요? 아니면 요리사를 부를까요?”

“이게 미쳤나… 아니,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주운 카드 함부로 쓰면 안 돼! 당장 이리 내!”

유장이 욕을 하려다 말고 손을 내밀며 윽박질렀다. 유기는 눈을 깜빡이며 유장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닌데, 받은 건데….”

“뭐? 누가 카드를 막 줘? 체크카드야?”

“모르겠어요.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고 주셨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설마 이놈이 얼굴로 멀쩡한 사람을 홀려서 금전 갈취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에 유장이 입을 떡 벌렸을 때였다.

“그래서 뭐 드시겠어요?”

처음 봤을 때보다, 그리고 어제보다도 더 휘도가 높아진 듯한 얼굴로 묻는 유기 앞에서 유장은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듯이 머리를 흔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식단 정해져 있어. 그보다… 이제 선계로 갈 수 있는 거야?”

“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기에게 유장은 화를 내지 말자,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놈은 5세 미만 유아다, 아니 그럼 나는 유치원도 못 갈 꼬맹이하고….

“흡.”

의식의 흐름 도중에 하마터면 오열할 뻔했던 유장은 다시 헛기침으로 제 이성과 목을 달래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사…, 흠… 사, 사랑에 빠져버려서 선계에 못 간다며. 그럼 이젠 다시 갈 수 있는 거냐고.”

생각만으로도 낯부끄러웠지만 보통 이런 건 그놈의 사랑인지 전쟁인지가 이루어지면 해금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유장은 그렇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유장 님 보고 싶어서 선계로 못 간다는 건데. 어? 아! 아야! 유장 님? 왜 때리세요? 아! 어? 저도 같이 때려야 돼요?”

유장은 말없이 유기의 한쪽 팔을 붙잡고 철썩철썩 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자신이 처한 사태를 파악 못 하겠는지 유기는 커단 눈만 끔뻑댔다.

“아니야, 가만히 있자. 넌 맞기만 하면 될 거 같아.”

“어? 어? 저 아픈데, 아얏! 유장 님.”

“응, 그러라고 맞는 거니까 그냥 좀 맞자고.”

말은 그리 해놓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유기 앞에서 유장은 금세 손을 내렸다. 이유조차 모르면서도 유장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서 눈치를 살피는 유기를 보고 있자니 화가 조금 누그러진 탓이었다.

“애를 데리고 진짜 이게 무슨 짓이야….”

“저 애 아닌데… 그치만 유장 님이 애가 더 좋으시다면 애인 걸로 해요.”

그 말에 유장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어떤 심정을 표현하려는 듯 흔들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뭐 이런 물건이 다 있냐는 유장의 마음은, 물론 손톱 끝의 미생물만큼도 당사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고 있다가 혼자 밝은 얼굴로 손뼉을 치기까지 했다.

“유장 님, 그러면요!”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가 샛별눈이 되자 부담스러움이 더해져 유장은 슬쩍 뒤로 물러나야 했다. 운만 띄웠는데도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제 저는 신선이지만 유장 님 애인이기도 한 거죠?”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고개를 저어버릴까 고민했다. 그렇지만 그래봤자 잠시 유기의 우는 얼굴을 구경하다 눈물을 닦아준 후 승낙하는 흐름으로 시간을 잡아먹을 뿐이었다. 유장은 평소 하던 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중단하고, 흐름에 따르기로 했다. 이제 와서 드림 배틀을 그만둘 수도 없고, 약속은 약속이니 유기를 제 신선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서로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무려 섹… 까지 했으면 사귀는 게 맞을 것이고.

“…마음대로 해라….”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한숨에 섞어 유장이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유기의 눈가에 송골송골 눈물이 고이며 모양 좋은 입매에 미소가 번졌다.

안면 피부 아래 LED를 이식한 걸까. 그래서 번쩍이나. 얼뜬 줄 알면서도 엉뚱한 생각이 숨 쉬듯 들었다. 첫 만남부터 묘하게 눈부셔 보이던 유기라는 인간, 아니 신선에게 어쩌면 첫눈에 반했던 건지도 모른다. 새삼스럽다고 하기에는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았고 반면에 벌어진 일이 너무 컸다.

체념과 수용은 빠를수록 고통이 적다는 법칙을 적용시키며 유장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이불 아래 맨몸인 것을 깨닫고 이불을 두른 채 급히 옷장으로 꼬물꼬물 이동해 속옷과 셔츠, 반바지를 잡히는 대로 걸쳤다. 잘은 몰라도 이 녀석 앞에서 알몸으로 있는 건 별로 좋지 않을 듯했다. 한 겹이라도 좋으니 방어를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아참, 정식으로 인사드려야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들리는 소리에 유장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유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간밤에 엉망으로 뒹군 흔적은 어설프게 정리가 되다 만 상태였고, 개지 않은 이부자리까지 더해져 너저분했다. 도둑이 이 방에 들어와 가치 있는 무언가를 훔치려고 한다면 선택할 건 아마 하나뿐이겠지 하며 유장이 시선을 보낸 곳은 유기의 뽀얀 얼굴이었다. 지저분한 방 안에서 어여쁘고 빛나는 것 하나가 그였다. 만개한 꽃처럼 작작한 모습으로 유기가 유장 앞으로 무릎으로 기어 다가오더니 다소곳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왕에게 작위를 받기 위해 자세를 잡은 기사 같았다.

다른 얼굴로 저 자세를 취했다면 발로 차 버렸을 텐데, 생각하며 유장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자 유기가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더니 얼굴을 들어 유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선 유기, 주군을 봬서 너무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눈꼬리에 눈물을 단 채 발그레한 뺨으로 빙긋 웃는 유기의 모습에 유장은 심장이 너무 뛰다 못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 보균자 같은 녀석이 미지의 신선 바이러스를 제게 주입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이상했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상대를, 만전의 준비를 다해 공식전 링 위에서 만났을 때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심해에 뛰어들어도 저 얼굴을 거부할 방법은 찾아낼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멍한 머리가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저도 열심히 싸울게요! 우리 꼭 드림 배틀에서 우승해요.”

관장님 미안해요. 미친놈이랑 팀플하게 됐어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뇌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유장의 손바닥 위에 가볍고 뼈대가 있는 매끈한 손가락 끝이 조심스럽게 얹혔다. 그 온기와 무게가 계약의 완료를 알렸다.

“너, 나랑 어디 좀 가자.”

“네, 주군이랑 같이 가는 거라면 어디든 좋아요!”

유기견이 네 마리로 늘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하고 심드렁한 척하면서도 유장은 비시시 웃고 말았다. 가늘게 눈을 접고 웃는 유장의 모습에 유기는 한층 더 커다란 미소로 응답했다.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높지 않은 뒷산이었지만 사람의 발길이 흔히 닿는 곳은 아니었다.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봉분을 쓰다듬으며, 유장은 유진과 함께 인사를 했다.

형이 엄마랑 아빠 잘 보살펴드리고 있었구나,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유진의 머리를 유장은 말없이 쓰다듬었다. 방통이 잘 일러준 덕에 유기도 형제의 뒤편에서 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앞으로는 꼭 같이 오자면서 유진은 다시 만난 날처럼 눈물콧물을 쏟다가 좀 진정하겠다며 산 입구로 먼저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야 유장이 뒤편에 오도카니 서 있던 유기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말없이 손을 들어 손가락만 까딱이려다가 급히 제 손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이리 와 봐.”

어린아이나 동물에게 쓸 법한 호출 방법을 성인 남자에게 써먹는 게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였다. 녀석들 때문에 화가 치밀 때는 개라고 생각하고 참자, 참자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개 취급을 해버릴 수도 없으니까. 정말로 개라고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터다.

“여기가 내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이야. 신선과는 좀 달라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분들이거든.”

부모님을 잃었을 때 어렸던 유장은 무엇 하나 대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납골을 하든 봉분을 세우든 어딘가에 모셔야 한다며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분이 물심양면으로 나서주셔서 겨우 뒷산에 묏자리를 얻었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까지 그분이 필사적인지 몰랐다. 하지만 유진을 잃어버리고 나서, 나이를 먹고 나서 이곳은 유장이 마음 기댈 곳이 되어주었다. 정말 힘들고 지쳤을 때 찾아올 곳이라곤 이곳뿐이었다.

“인사드려도 돼요?”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말고 다른 사람과 이곳을 찾으리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건만, 어쩐지 유기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게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유기가 해준 일이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되새기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전조 하나 없이 불쑥 나타나긴 했지만 어쩌면 이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감해서 그런 마음이 든 것도 같았다.

‘이젠 꼬박꼬박 진이 데리고 올게요. 다음엔 벨트도 따가지고 올게. 응원 많이 해줘요.’

유기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뒤에서 유장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인사를 마친 뒤 봉분 앞에 늘어놓았던 과일이며 떡을 정리하는데 빠르게도 샛별이 저 멀리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군 이제 챔피언만 되면 되겠네요.”

완만한 구릉을 타고 산을 내려오는데 방통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씩 웃으며 유장이 기분 좋게 대꾸했다. 이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드림 배틀에서 이기고, 꿈을 꼭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신선이 있는 상황에서 배틀을 치러본 적은 없다. 유장은 전력 체크보다도 호기심으로 물었다.

“서서인가 걔는 이상한 마법 같은 걸 쓰던데… 너는 어떤 거 하냐?”

곤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배배 꼬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건만, 뜻밖에도 유장의 물음에 유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신선 마법이요! 제가 제일 잘 쓰는 도술은 전격 계열인데, 보실래요?”

전격이라니 제법 강할 것 같은 울림이었다. 그렇지만 유기의 말이다 보니 설령 온몸에 정전기가 흐르는 정도라 해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기가 몇 미터 정도 거리를 떨어트리고 자세를 잡더니 수인을 맺어 하늘 위로 무언가를 쏘아 올렸다.

펑, 하고 어둑해져가는 하늘 위로 쏘아올린 빛이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꽃이 되어 쏟아졌다. 유장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유기는 연달아 몇 발을 더 쏘아댔다.

“낙뢰라고, 원래는 적에게 벼락을 내리꽂는 마법인데 제가 응용했어요.”

축제의 마무리처럼 빛이 가시고 나서야 유기는 유장에게 다시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근데 왜… 공격 마법이 불꽃놀이가 됐냐?”

“유장 님도 참, 남한테 어떻게 벼락을 내리꽂아요.”

“나한테 다른 건 잘도 꽂… 아니다.”

말을 하다 말고 유장은 제 얼굴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미치긴 미쳤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맥락 없이 지난밤의 기억이 툭툭 튀어나왔다. 유장은 고개를 돌아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옆으로 돌린 채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도 숨기지 못한 심란함을 혀에 고스란히 실었다.

“…그래. …내가 열심히 할게.”

기대치를 대폭 낮춰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장은 당초의 계획대로 유기를 옆으로 치워두고 영웅패들과만 배틀을 치르겠다고 결심했다.

“이 마법의 제일 중요한 점은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유기가 다시 또 불꽃을 만들어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작은 불꽃들이 배경 효과처럼 유장의 앞길을 비추며 팡팡 터졌다. 어귀까지 내려왔다곤 해도 초목이 우거진 곳인데 괜찮은가 싶었지만 실물이 아닌지, 조절을 하는 건지 불이 번지는 일 없이 딱 그 자리에서만 타오르다 사라졌다.

“예쁘다는 거예요. 예쁜 걸 보면 마음이 온화해지잖아요.”

신선은 드림 배틀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더니 얘 에러 아니야? 강렬한 의심이 치밀었지만 어차피 이미 군신계약은 맺어졌고 돌이킬 방법은 알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예 참가를 안 하면 모를까, 못 볼 꼴 다 보여 놓고 이제 와서 저 녀석이 다른 참가자의 신선이 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속된 말로 자기 따먹은 놈이 다른 새끼 신선 되는 꼴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심산으로 유장은 한숨과 함께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온화해지는 건 모르겠고… 그래, 예쁘긴 하네.”

이곳에 와서 불꽃놀이 같은 걸 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언젠가 유진과 함께 꼭 오겠다고 셀 수도 없이 다짐했지만 그게 정말 이루어질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유진이 외국으로 영영 떠났거나, 다신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지우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눈앞에서 어둠 속에서도 말갛게 빛나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유기가 신이 나서 앞장을 서는 이 상황에 설렐 줄, 유장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어째선지 너무나 가슴이 뛰는 광경이었다.

“…영영 흘러가버린 줄 알았는데.”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건만 유장의 말은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겠다며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기가 유장에게 다가와 끌어안았다.

“되찾아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고생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녀석이, 뭘 알아들었다고 하는 대꾸일까. 그런 생각과 동시에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치솟았다. 하지만 화가 치밀었을 때의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슬프거나 아플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공연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유장은 눈에 힘을 주고 마른침을 삼킨 뒤 유기의 속도에 걸음을 맞추며 구시렁거렸다.

“걷는 데 방해된다. 떨어져. 그리고 불꽃놀이나 계속해 봐. 자잘한 게 예쁘네.”

“네!”

그러자마자 떨어져 다시 조그만 불꽃을 쏴 올리는 동안 저만치에 유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자기도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유기의 말에 유장은 그러라고 했다. 서서 말고 다른 신선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였다. 하지만 유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유기가 신선복에서 갑자기 휴대폰을 빼들 때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디서 났냐는 물음에 유기는 일전의 카드와 마찬가지로 받았다고만 했다. 마침 소개하고 싶은 분도 카드하고 휴대폰을 주신 분이라는 소리에 유장은 질문을 포기했다. 차라리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묻는 게 낫겠다 해서였다. 그러다 짧은 통화 뒤 집 앞에 리무진이 서자 당황은 최고점을 찍었다.

“기사님, 안녕하세요.”

왜 자연스럽냐고 당황하고 있는데 기사의 대답 역시 극히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바로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선계에 잠든 비보를 찾아서 이쪽 세상에 갖다 팔기라도 했니? 유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유기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유기는 그런 유장의 속내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방싯방싯 웃고만 있었다. 어쩐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힘이 빠졌다.

“그래, 더 놀랄 일이 뭐가 있겠냐….”

다리 사이의 최종 보스를 이미 경험한 터라 어지간한 걸로는 놀라는 것조차 귀찮다는 게 유장의 마음이었다. 별 생각 없이 유기가 붙든 제 손을 방기한 채로 유장은 창밖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도 간간이 창에 비친 모습을 보면 유기는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웃고 있었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느라 유장은 차가 지나고 있는 골목이 어디선가 많이 본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정원이 딸리고, 지하와 지상층이 나뉜 집 현관을 지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유장은 유기가 속고 있는 게 아닌지, 혹시 연예인으로 만들어 대박 나게 해주겠다며 어디 질 나쁜 소속사에게 걸린 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노래나 춤, 연기 같은 건 모르겠지만 얼굴과 몸이라는 재능을 생각하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유기는 마치 제 집인 양 편하게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짐작대로 전에 와 본 곳인지 안내가 자연스러웠다. 설마 계약을 벌써 해버린 건 아니겠지, 만약 해버린 거라면 어떻게든 깨주겠다고 다짐을 거듭하는데 유기가 걸음을 멈췄다.

“유장 님.”

“어.”

그제야 눈앞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음을 깨닫고 유장은 급히 자세를 잡고 자연스레 허리를 숙였다. 화려한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선 인물이 유장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질 건 따지더라도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저버릴 수는 없는 유장이었다.

“저어….”

“아버지, 이분은 유장 님이라고 해요. 제 주군이시고요.”

“아버지이?”

지금까지 유기가 한 말 가운데 예측이 가능한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날개라도 돋친 듯이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바람에 유장은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장 님, 이분은 유표 님이라고 해요. 제가 아들 해드리기로 했어요.”

요새 노예 계약은 입적까지 하는 건가? 아니, 얘 호적 없지 않아? 생각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도는데 유기가 목소리를 낮춰 슬쩍 유장에게 속삭였다.

“제가 잃어버린 아들하고 꼭 닮았다셔서요.”

그러더니 유표 쪽으로 가서 어깨를 살갑게 붙잡으며 씩 웃어보였다.

“아버지가 유진 님 찾는 것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우리 아들이 찾아달라는데 별 수 있나.”

실제 부자지간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굉장히 친근한 건 잘 알 수 있었다. 유표는 자신의 어깨에 얹힌 유기의 손을 겹쳐 잡으며 웃었다. 모르고 소개받았다면 진짜 부자지간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웃는 얼굴에 닮은 데가 있었다.

“그래, 동생하고는 잘 만났고?”

“네, 덕분에. 감사합니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됐어, 됐어요. 앉아요. 우리 아들이 자네 이야기를 어찌나 하던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앉기를 권하는 유표 탓에 유장은 얼떨결에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뭘 마시겠냐는 말에 얼음물을 부탁한 뒤 유기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유기는 유장에게 유진을 찾아주겠다고 한 이후 자취를 감춘 몇 달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장 님의 기억 속에 있던 집으로 찾아가 봤는데,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되어 있었어요.”

유진과 함께 살던 그 집이겠지. 유장 역시도 몇 번이고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집은 일대가 토지째로 매각되어 허물어지고 재개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부유층 주택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게 바로 여기예요.”

“어?”

생각을 읽힌 듯한 타이밍이라 유장은 자기도 모르게 추임새처럼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러자 유기가 계속 들어보라는 듯이 손바닥을 마주 붙인 채 손가락만으로 작은 소리를 내며 손뼉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꼭 찾아드려야 하는데 어쩌지, 하고 눈물이 핑 돌아서 이 집 담 앞에 쪼그리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일 마치고 돌아오던 아버지하고 마주친 거죠. 무슨 일이냐고 하시기에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다고 했어요.”

“어려서 잃어버린 아들하고 똑 닮은 얼굴을 하곤 내 집 담벼락 앞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다고 하는데 가만 놔둘 수야 있나.”

“헤헤.”

좋다고 해실해실 웃어대는 유기를 앞에 두고, 유장은 차마 대놓고 인상을 구기지는 못했다. 대신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에 혼자 팔짱을 낀 채 얼굴만 굳히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따라갔더니, 저한테 맛있는 차하고 과자를 주셨어요.”

유장은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손을 내렸다. 위험한 사람, 위험한 곳이었으면 어쩌려고! 사고 수준이 마초하고 동급인 녀석한테 내가 떼어놓겠답시고 무슨 일을 맡긴 거람 하는 자괴가 몰려왔다.

“그러고는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도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더라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안 돼서 어깨도 도닥여 드리고 같이 울기도 하고 하면서 며칠 정도 여기 집에 있었어요. 그러고 났더니 내가 찾아주마! 하시길래 어떻게요? 했더니 어디다 전화를 거시더라고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사람 하나 찾아와, 하시는데 되게 멋있었어요. 물론 유장 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리고 기다렸더니 유진 님을 진짜 찾아주신 거예요!”

“그랬지.”

또다시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유기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쓱쓱 쓰다듬는 유표의 눈에서는 애틋함이 뚝뚝 흘렀다. 그리고 유장은 두 사람을 냉동 참치처럼 흐리고 굳은 눈으로 응시했다.

관계를 가진 건 기세에 떠밀려 그렇게 되었다 칠 수 있다. 하지만 애당초 군신계약과 세트라던 키스를 받아들인 건 약속 때문이었다. 인간세상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두 달이 넘도록 어딜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한 걸까 했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을 당장 꼬깃꼬깃하게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만 있다면! 뭐? 전화 한 통? 아버지이?! 사람 하나 찾아와?! 결국 이런 집에서 남의 돈으로 놀고먹으면서 두 달 넘게 날 기다리게 했다는 거잖아!!!!

“야.”

“네!”

유기를 하대하는 유장의 말투에 유표의 눈길이 슬쩍 사나워졌지만 유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눈치를 챘다 해도 알 바 아니기도 했다.

“물러. 나 너랑 안 사귈 거야.”

“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유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기 계약을 당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거의 동시에 유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우리 아들하고 사귄다고?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유장이라고 질 리가 없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사 부자지간의 두 남자와 마주하게 된 유장은 저도 벌떡 일어나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었다.

“안 사귄다고요!!!!! 아저씬 빠지세요!”

“아니, 그런데 이놈 말본새가 왜 이따위야?! 너 깡패야?!”

“아버지, 아버지이. 유장 님한테 그러지 마세요.”

“유기 너는 애비보다 애인 편들기냐?”

“누굴더러 깡패래! 애인 아니라고! 안 한다고!!”

“왜요!! 하기로 했잖아요!”

나름 목소리를 높인다고 높인 끝에 유기의 눈에 또다시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혀 떨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속도가 빨라서 마치 몇배속으로 돌린 필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본격적인 울음이라 순간 화를 내다 말고 유장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우, 우냐…?”

“아이고, 인석아. 아무리 속이 상해도 그렇지. 야, 너. 유장이랬지? 얼른 잘못했다고 해. 애인 맞다고 하라고.”

“아저씨, 노망 났어요? 내가 왜? 야, 빨리 그쳐.”

“제가 유장 님 애인 할 거예요오….”

“유기야, 내가 더 좋은 녀석 찾아주마. 군신계약인지 뭔지 그거 파기해라! 내가 더 좋은 주군 찾아줄 테니까.”

“아저씨가 뭔데 계약을 깨라 마라예요?! 난들 이 녀석 예뻐서 신선 삼아준 줄 알아요? 아, 예뻐서 삼았지…, 여하튼 비실비실해서 어디 다칠까 봐 전투에 써먹지도 못하는 걸 신선 삼아 줬더니!”

“예쁜 줄 알면 아껴를 줘야지 왜 애한테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

“아저씨 빠지시라고요!!! 이건 이 녀석하고 제 문제예요!”

“뭐가 어째?!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고 이러십니까아?! 야, 가자.”

“내 아들은 왜 데려가?!”

“제 신선이니까요! 유사 부친께서 배웅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으니 나오지 마십쇼!”

“이, 이, 이놈 말버릇이! 안 되겠다, 유기야! 헤어져라!”

가자면서 유장이 유기의 한쪽 팔을 붙잡았고, 왜 데려가냐며 유표 역시도 반대편 손을 붙잡았다. 서로 한 아이의 어머니임을 주장하는 두 사람 앞에서, 유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처럼 판결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정신도 없었다. 대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상태에서 아예 털썩 주저앉아 목소리를 높여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유장 님, 그만 싸워요, 흐아아앙. 애인 할래요, 으아아앙.

목청을 돋우다 말고 귀를 막아야 할 만큼 커다란 오열이었고, 결국 두 사람은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임시 평화 협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 나중에 두고 보자는 시선을 보낸 뒤 알겠다고, 일단 눈물부터 그치라며 유표와 유장은 카펫 위에 함께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유기 옆에 나란히 앉아 유표는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냐며 머리를 쓰다듬었고, 유장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느라고 서로에 대해 치솟은 짜증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줄은 깨닫지 못한 채였다.

아버지와 애인 겸 주군의 위로를 받으며 유기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치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해죽 웃으며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럼 안 싸우시는 거죠? 이제 사이좋게 지내실 거지요?”

석연치 않았지만 또다시 유기가 통곡을 시작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표와 유장 사이에 한 번 더 눈짓이 오갔고,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부갈등을 막아낸 줄도 모르는 유기는 남은 흐느낌을 털어내며 다시 웃어 보였다.

“헤헤.”

‘역시 내 신선이야. 예쁘네.’

‘과연 내 아들이야. 잘생겼네.’

표현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마음으로 신선의 무구한 미소를 바라보던 두 인간은 폭발 직전이었던 역정이 어느새 사르르 녹아버린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결정된 삼각 관계 도면이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 또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험난한 연애도, 드림 배틀도 이제 마악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끝>













* 음... 제 유기는 못되든 착하든 일단 미친 애인 걸로... 

* 대놓고 가벼운 코믹물을 쓰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쿨쩍) 즐겁게 읽으셨다면 기쁘겠습니다.

* 공미포 삼만자 안 넘었으니 단편이야

*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찍어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후원해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가끔 치이면 글을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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