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는 카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짓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썼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였다.

‘어렸을 때의 나는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난 좋은 부모님이 있고 아프리카의 어린이처럼 굶지도 않으며 개미처럼 밟혀 죽지도 않는다. 옛날처럼 여성차별이 심한 시대에 살지도 않고 노예제도나 사형제도는 없다. 민주주의는 꽃을 피웠으며 모두모두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난 분명 커서 완전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나의 꿈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나...?

***

평생 교직을 잡으셨던 어머니는 말 그대로 현모양처였다. 아버지를 완벽히 뒷바라지 했으며 그녀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명문대로 진학했다. 그 올바른 모습은 학창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누가 뭐라 했던(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의 하늘이었던 어머니.

 하늘에서 홍수가 내리면 그 아래 인간과 개미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고, 물에 이끌려 다닐 뿐이다.

“올해 너희 오빠에게 모두 지원을 해 주려고 한단다. 너희 오빠 머리가 좋잖니? 노력도 엄청나고. 우리 수연이X는 착하니 모두 이해하지? 아, 또 엄마는 네가 엄마처럼 교사를 했으면 좋겠단다. 한 사람을 올바르게 나아가게 돕는 것, 그게 나의 행복이란다. 난 너도 네가 그 행복을 알았으면 좋겠단다. 혹시, 다른 위험한 일을 하진 않겠지? 우리 수연이X는 날 닮았으니 교직을 잡으리라 믿어. 넌 똑똑하니 별다른 지원 없이도 분명 잘할 거라 믿는단다.”

내가 고2때 들었던 말이다. 오빠는 수능 답을 밀려 써서 재수를 하던 참이었고, 나는 그날 어머니께 장래희망 조사서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는 참이었다. 어머니는 좋은 뜻이었겠지만, 나는 그저 강요로 들렸을 뿐이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의 신념을 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전 바다로 가고 싶어요. 전 아이들과 안 맞고, 하고 싶은 일도 따로 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삶의 방향에 교육이란 이름으로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너무 두려워요. 그 사람 인생에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도, 또 그 사람 삶에 책임 따위 지고 싶지 않다고요. 전 엄마가 지금 그러는 모습이 제 미래의 모습일까 두려워 죽겠어요. 이건 엄마에게 교육이란, 사랑이란 이름이겠지만, 저에게는 그저 협박일 뿐이라고요. 전 제 삶을 완벽하게 살고 싶어요. 오빠에게 지원하는 건 일부만 해주시고, 저에게 지원을 해 주세요. 제가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오빠는 이미 충분한 지원을 받았잖아요. 오빠때문에 제가 피해 보는 건 싫어요. 반반으로 나누어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오빠만 가족이에요? 전 성적 1등급 나와 좋은 대학 가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학과로요. 그러니 제 말 좀 들어주시고, 이건 가족 다 함께 의논하게 해 주세요. 저도 함께요.’

그렇지만 내 대답은 정말 바보 같은 “네”였다. 난 이때의 나를 떠올리며 이 말을 생각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그렇게 나는 고3때 열심히 지구멸망을 기원했고, ㅌ위터를 시작했으며, 수능을 치고 민증을 받아 공식적인 ‘어른’이 되었으며 좋은 명문대에 가고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직을 하나 잡았다. 사실 민증을 받았을 때는 그리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술을 거침없이 들이키며 즐기기까지 하고, 빈ㅊ를 먹을 때는 어렸을 때처럼 무늬조차 살피지 않고 거침없이, 기계적으로 우적우적 씹어 삼킬 뿐이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냉장실 가득 사 본 적은 있었지만, 그 후 다이어트니, 몸매조절이니 해서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여자는 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뚱뚱하면 욕을 먹으니까? 내가 남을 뚱뚱하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인생을 욕하고 망친다고 해서 내 인생이 행복해지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늘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면 마네킹이 된 기분이다. 예쁜 옷을 걸치고, 계속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 마네킹은 웃고 있다. 그렇지만 난 그냥 겉으로만 웃고 있는 거다. 내 미소는 그냥 피부가 패여서 생긴 거라고.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난 비참하게 울고 있다. 아니 증오하고 있다. 이 세상을, 불같이 뛰며... 그렇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사람들이 뜻하는 ‘나’가 되어서 말이다. 바르고, 착하고, 참한 그런 내가 되어서. 분명 그들은 마음씨가 예쁜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하지만, 분명 착한 마음씨의 이수지와 연민정을 고르라 하면 분명 연민정을 택할 사람들이다. 그런 말을 하고 나 같은 사람 며느리 삼고 싶다 하면 아주 쌍욕을 쏟아 붓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한다. 난 그들에게 계속 착한 ‘나’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나는 그들이 만든 틀을 부수고 싶다. 나는 처량하게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난 그러지 못한다. 망할.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보고 분명 강박증이니 뭐니 할 것이다. 슬프게도 이건 우리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가진 강박증이다! 현재 여성들은 무조건 날씬해야 하며, 여성체라 가슴이 달렸는데 그 가슴을 숨기려고 브래지어를 차는데 브래지어를 찬 걸 숨기려고 나시티를 입는데 또 그 나시티가 야해서 40도를 웃도는 날씨에 그 위에 하나 더 입어야 한다. 또 생리가 별 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 생리대 값을 올리려고 하는데 여성은 15세부터 51세까지 생리를 한다고 하면 2160일, 72달, 6년 생리를 한다. 하루에 약 6~8장, 많은 사람은 10장까지 생리대를 소비하고 그 가격이 하나에 평균 331원이니 드는 돈은 최소 6장으로 잡아도 4,289,760원이 든다. 거기에 생리는 대놓고 말할 수가 없다. 여자들이 예민한 건 생리로 치부된다. 개인적으로 생리통은 배 안 내장을 대놓고 발로 문대는 느낌인데, 너라면 예민해지지 않겠냐? 솔직히 생리냐 대놓고 물어보는 내 남친 같은 남성들에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 나 생리라 피 엄청 흘리고 있어. 그러니 너도 함께 흘리지 않을래?’ 그리고 흠씬 두들겨 팰 것이다. 함께 피를 흘리도록.

 

나의 남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는 세간에서는 ‘좋은 남편, 남친감’으로 인식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에게는 그냥 5살배기 어린이일 뿐이다. 아, 아니다. 어린애들은 귀엽고 미래가 있기라도 하지, 그 자식은 나에게는 시체와 다름 없는 새끼이다. 그는 뚱뚱한 여자들을 보고 ‘찐따’같다고 한다. 그는 아마 이 말을 찌질한 왕따의 줄임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건 양다리 길이가 다른 소아마비 환자나 지뢰에 한쪽 발을 잃은 군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것으로 말을 막긴 하지만, 늘 이 먹을 것에 ‘쓰르라미 울적에’같은 함정을 설치하고 싶은 경우가 많다. (아, 이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그를 죽이려하는 친구에게 주먹밥을 받아먹는데, 그 안에 커터칼 심이 들어있었다.) 어느 날은 백화점에 갔다가 문화센터 강좌를 보고 한번 이탈리어 어를 배워보고 싶다 했더니 그는 너 같은 게 무슨 이탈리아냐고, 요리나 배우라고 했다. 자고로 여자는 집에서 얌전히 요리나 해야 한다고 말이다. 욕하고 싶었다. 드라마에서처럼 김치로 따귀를 날리고,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잡아당겨 주고 싶었다. 한번은 억지로 키스를 한 적이 있다. 난 분명 싫다고 하였는데, 그는 정말 억지로 하였다. 왜 했냐고 추후에 물어보니,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한다 하지 않냐고 한다. 머리에 총을 대고 죽일까? 라고 물어보고 싶었다. 싫다고 하면, 그건 강한 부정이니 긍정과 같으므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말을 보면 나는 정말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맞다. 이게 내 모습이다. 이걸 널리널리 알리고 싶지만, 슬프게도 그러지 못한다. 난 이제 교사니까. 그렇다. 교사. 교사. 교사. 교사. 교사. 교사... 교사 김수연...‘

***

여기까지 쓰고 X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2월 11일의 목요일에 볕 좋은 카페에 앉아 3월까지의 D-day를 확인했다. 그날은 그녀가 교사가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의 신참 국어교사가 될 것이었다. 그녀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자기야, 오늘 7시에 @@식당으로 와 줄래?’

무슨 일일까, X는 별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수연아, 엄마야!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았다고 해야 해! 너 좋으라고 하는 거니, 명심하고, 꼭 밤에 연락해~ ’

일방적인 통보였다. 정말 무슨 일 있나. X는 무언가가 예상되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설마 아닐 거야.

***

설마가 사람 잡는다. 진실이었다. @@식당에서 스파게티를 먹고 난 후 들려오는 달달한 사랑노래. 흰 벽면에 달달한 영상이 비추어지고 영상의 마지막에는 ‘수연아, 나랑 결혼해 줄래?’ 라는 핑크빛 메시지가 나온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놓인 반지. 남자는 큰 목소리로 말한다. “수연아, 결혼하자!”

어떻게 식당에서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대답을 뭐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가는 길 중간에 정신이 돌아왔다. 편의점에 가서 맥주랑 소주를 사고 집으로 갔다. 윙윙거리는 폰은 배터리를 빼서 방구석에 던졌다.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지우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노트북을 키고 ㅌ위터에 들어갔다.

그녀는 화장품 냄새가 나는 듯한 ㅍ이스북이나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려대는 밴ㄷ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 자신의 일상을 꾸밈없이 익명으로 올릴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듯한 ㅌ위터를 좋아했다. 그 안에는 맛집 정보나 유용한 프로그램같은 좋은 정보가 가득했고,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자랑하고 공유하고,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솔직한 정보와 비판이 넘쳐흘렀다. 여기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한 것이었다. 익숙하게 탐라(타임라인)을 쭉 훑어본 후, 친한 트친(트위터 친구)가 게임을 한다길래 같이 하자고 했다.

바로 게임에 들어왔다. 고급시계라는 게임이었다. 보통 그녀는 트레이서라는 캐릭터로 플레이를 했다. 비록 조작이 어려웠지만, 스피드가 빠르고 어지러운 게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캐릭터의 성격이 정의롭고, 자신의 목적이 분명하단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흐느적거리는데. 문어처럼. 앞으로, 당장 내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문어가 되어 먹히는 게 좋을 것 같아. 한번 게임을 했다. 이겼다. 하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남은 술을 마저 다 마시고 잠에 들었다.

***

 어린왕자가 여우와 나타나서 말한다. ‘달을 영어로 루너라고 하잖아요. 루너틱은 미쳤단 뜻이고. 달은 사람을 살짝 미치게 하는 힘이 있거든요. 달을 보며 소원을 빌면 정말 소원이 이뤄지든가, 아님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소원이 이뤄진 것처럼 정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거죠.’ 어린왕자는 거위를 타고 달로 날아가 버린다. 여우는 트레이서로 변해버린다.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 나랑 가자! 그럼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X는 게임의 다른 캐릭터인 디바가 되어 로봇을 타고 적들을 공격한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는 평면이 되어버린다. 다시 누군가 그녀를 입체로 만든다. X의 어릴 적 모습이다. X의 어릴 적 모습은 주머니에서 빈ㅊ를 꺼내며 말한다. ‘무슨 모양이었을까요.. 그건 몰라도 아마도 당신은 호주머니에서 창백하게 부서진 나비의 잔해를 꺼내겠죠. 그리하여 건네면서 말하겠죠. 일생을 아이처럼, 쓸쓸하게 이것을 좇았노라고. 그녀의 로봇은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다 부서진다. 온몸에 피가 튀지만 움직일 수 없다.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폭풍우 속 배에 올라와 있고, 항해사 옷을 입고 있다. 파도가 출렁이고, 그녀는 그만 바다에 빠진다. 그리고 엄마가 나와 말한다. ’거봐, 위험한 일은 하지 말랬잖니... 여자는 교사나 돼서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이야...‘

 ***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개꿈일까. 창밖에서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꿈과, 그리고 현실과 대비되는 화창한 날씨이다. 휴대폰을 켜 보았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엄청나게 와 있었다. 다시 집어던졌다.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걸쳤다. 멍하니 핸드폰과 지갑, 편지를 들고 나간다. 목적지는 없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고르다가 오늘도 같은 걸. 예쁠 이유가, 설렐 이유가 모자라서, 아니 꾸며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는 집에서 조금 걸으면 나오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뭔가 단걸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포장해 드릴까요?”

“아뇨, 그냥 주세요.”

웃는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이 그녀를 반긴다.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듯한 기분. 부모들은 힘들게 부모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김수연X라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세상을 원망하고 꼬집으며 자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비리를 저질렀단 공무원도,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도, 옛날에 지금을 위해 죽었던 사람들도 모두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죽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존재하니까. 그럼, 난 그림자인가?

“무슨 맛으로 드릴까요?”

아르바이트생의 발랄한 목소리가 생각을 깨뜨렸다. 조용히 아무 맛이나 고른 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예전에 아이스크림 가게의 알바를 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녀는 포장해 달라는 어느 남자 손님을 상대하던 중이었다. 드라이아이스의 양을 정하기 위해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냐고 묻자, 그는 왜, 관심있나고 물었다. 그녀는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녀의 사랑, 세종대왕님의 알현을 위해 아니라고 대답하고 포장을 위해 돌아섰다. 그 남자가 자기 일행에게 돌아가 자랑하는 소리,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스크림 죽이나 먹어라.’ 그녀는 아이스크림이 녹도록 일부러 아이스크림 통에 손을 싹싹 문지르며 생각했다.

매장을 가득 채운 노래의 큰 소리가 그녀의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먹으며 가게를 나왔다. '엄마는 외계인' 이라는 맛이었다. 바삭바삭한 과자와 초콜릿의 달달함이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자, 누군가 와 있었다. 엄마였다.

“너...너....”

엄마는 딱히 말을 잇진 못했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은 마치 외계인 같았다. 엄마가 외계인으로 변해버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서 착착착 정리된다. 난 널 그렇게 키운 적이 없다. 무례하다. 왜 그랬냐. 화를 내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엉엉 울어버릴 것이다. 멋도 몰랐던 어렸을 때는 자신이 마냥 잘못한 것인 줄만 알았지만, 크고 나서는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엄마고, 끝도 엄마라는 걸.

자리에 앉아 용암 같은 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하였지만, 용암은 모든 걸 녹이는 것을 잊고 있었다. 용암은 머리로 파고 들어가 옛 기억을 마구 자극한다.

그녀는 중1때 우울증을 앓았다. 책임 때문이었다. 부모가 말하는 착하고 좋은 딸, 선생님이 믿고 맡기는 우등생, 친구들과의 교우관계, 그리고 사춘기때 분비되는 호르몬에 의한 반항심. 부모님께는 늘 반항하고 싶었지만, 착한 딸이 되려면 참아야 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고, 심부름도 해야 하였기 때문에 늘 바빴다. 만약 조금만 잘못하면 날 혼내고, 싫어하고, 무엇보다 날 믿지 못한다는 그런 게 두려웠다. 친했던 친구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 무리에 낄 수는 있었지만, 정말 재미없었다.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였는가. 그때 하였던 반장 일은 나름 열심히 했는데, 아이들에게 불만을 샀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화를 풀 곳이 없어 자신에게 그걸 돌려버렸다.

우울에는 절망과는 다른, 나름의 침몰 방식이 있었다. 절망이 강물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라면, 그래서 어느 정도 내려가면 다시 딛고 올라설 바닥에 닿는 식의 침몰이라면, 우울은 바닥을 짐작할 수 없는 심해로 빠져드는 일과 비슷했다. 그렇게 X는 심해에서 참던 숨을 조금씩 소모하다가 결국 죽기 직전에 이르렀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사흘 동안 학교를 빠진 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항우울제를 먹었다. 결과는 더 나아졌지만 선생님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정말 암울했다. 우울증은 다 나은 것이니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더욱 힘들어졌고, 약을 빼먹는 날에는 자책으로 하루를 보냈다. 결국 그녀는 고3때 다시 치료를 받았고, 그걸 지금까지 받고 있다. 단지 약만이 그녀를 버티게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항우울제를 사흘째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수밖에. 기쁨이나 슬픔은 몸 안의 세로토닌 같은 것들이 융합되어 나타나는 그런 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다. 나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세상 모든 것은 화학교과서일 뿐이었다. 화학교과서는 다시 화학으로 분해된다. 영원히... 그것은 다시 화학에 의해 읽혀진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참 뭐라 뭐라 하시더니 울음을 터뜨리셨다. 분명 날 위한 울음이지만, 전혀 미안하지가 않았다. 미안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순식간에 핵폐기물로 변해버렸다. 울던 어머니는 알아서 하라며 나가버렸다.

바로 약을 찾아 먹었다. 핵폐기물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찌꺼기는 남아있었다. 분명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생각이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듯 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그녀 안에 들어있는 핵폐기물 찌꺼기는 그녀를 녹여버린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고 했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기억은 독약밖에 없는 약국인 것 같았다. 항상 괴로웠다.

 ***

다시 카페로 갔다. 노트북을 펴고 다시 글을 썼다. 교사라는 말을 지울까 고민하다가 내버려 둔 후 다시 글을 써내려 갔다.

‘나는 항해사가 되고 싶었다. 인어를 믿었기 때문이다. 아마 인어들은 우리처럼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우주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도 물 없는 세상을 생각할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게 키운 항해사의 꿈은 갈수록 살을 덧붙여 나가며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한때는 이렇게 꿈에, 젖어들기도 했다. 좋았다. 내 마음이 한때는 꿈에... 그러나 엄마의 말이 떨어지고, 나는 육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멋진 꿈일수록 비웃음 당한다 하지만, 난 그 비웃음이 비수 같아 정말 괴로웠다. 그래서 아직 있지도 않은 비수를 내가 직접 꽂으며 다른 꿈을 택했다.

어제는 고백을 받았다. 결혼해 달란다. 그 사람은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항우울제가 없음 핵폐기물이 되어버리고,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게임 하는 것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맨 얼굴의 자신을 말이다. 많이 만난 것도 아니다. 아마 1년 되었다. 정말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나에게 요리를 배우라 강요하고, 생리를 별 것 아닌 것이라 생각하는 여혐분자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냥 지금 결혼하고 싶진 않다. 아직 해외여행은 못 가봤고, 하고 싶은 일도 많으니까 말이다.

어제는 텔레비전에서 유니세프 광고가 나왔다. 그걸 보니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아프리카 친구들은 이런 나물도 못 먹으니 감사하게 먹자고. 지금 생각하면 웃길 따름이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똑같다. 그런데 비교나 하고 있다. 그들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이 있으니 내가 가장 불행하지 않다며 위안이나 얻고 있는 것이다. 정말 짜증난다.

사실 외롭다는 것은 사랑받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들은 외롭다는 것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난 고통을 낭만적으로 말하는 것이 싫다. 고통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말하면 나는 슬프다. 필 때도 아프고 질 때도 아프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가 되기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의 난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서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위험천만한 착각이요 교만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이렇게 누구든지, 악당이라도 상처주고 싶지 않았는데. 난 상처받는 것도 상처 주는 것도 두려웠다. 지금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고 있는 나는 지금 옳은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 아닌 느낌이다. 분명 카페 창가의 저 화분도 원하는 것이 있겠지. 저 꽃이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은 꽃이 시들까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물을 갈아주는 나는 산 것들을 살게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바로 눈감게 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사실 누구나 나를 상처 입힐 것이다. 나는 그저 아파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ㅌ위터를 한 것이었다. 그곳은 정의를 가장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작은 사회나 다름없으니까. 거기서 아파할만한 사람을 찾아 합리화 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지구나 멸망했으면.‘

지구나 멸망해버렸으면.

***
그녀는 자신이 수학 문제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하나의 방정식과 함수. x의 값 중 참인 것은 정해져 있다. 사람들은 늘 참이 되기를 강요한다. 참이 아닌 거짓은 배척당하고는 나쁜 것이라 가르친다. 어떤 값을 입력하면 무조건 정해진 값이 나온다. 다른 값을 원해도 어쩔 수 없다. 틀이 저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틀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신경 써야 한다. 아이가 안 울면 얌전하단 평가를 받고, 그걸 끝까지 쭈욱 밀고나가면 그 사람은 얌전한 사람, 밀고 나가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렸을 때의 자신과 비교를 받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정비례 그래프로 1사분면과 3사분면을 지나 위로 올라가는 그런 그래프를 타고 있고, 누군가는 반비례 그래프로 들쑥날쑥한 삶을 살아간다. 다른 점은 계속 올라가진 않을 수 있다. 틀은 다른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X는 나오지 못했다. 방정식의 틀에 갇혀서. 그렇지만 그녀는 태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그래서 소원을 빌었다.

 ***

그녀는 오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X로 살아간다.

***

그녀는 꿈에서의 어린왕자의 말을 떠올린다. 달에게 소원을 빌면 미쳐버린다고. 혹은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달에게 소원을 빌었다. 지구가 멸망하게 해 주세요. 여성혐오가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그런 세계는 전부 없어지게 해 주세요. 만유인력이란 서로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원한다. 누군가는 증오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누군가는 사랑으로 해소한다. 그렇지만 그 증오가 증오가 아닐 수도, 사랑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X는 분명 그게 너무도 끔찍했을 것이다. X는 생각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부탁이니까 모두들 울지 마. 이게 우리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 슬픔은 영원히 남는 거야.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정말 편하게 지내는. 집.

 ***

그녀는 소원을 비는 그날 밤, 책을 읽으며 좋은 글귀를 찾았다. ‘형, 지구는 진짜 돌고 있어요. 이렇게 지구가 도는 게 느껴질 땐 말이죠, 문뜩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정말 우주에서.. 행성 위에서 살고 있는 거잖아요. 이런 곳에서.. 왜 고작 이 따위로 사는 걸까, 라고요.’ 그러게. 왜 그렇게 살까. 그녀는 울었다.

***

그렇게 지구는 멸망했다.

화학적 반응으로 이루어져 함수로 도출되는 세상이 멸망했다.

같은 인간끼리 생식기의 종류로 구분되고, 그 구분된 선을 기준으로 서로 미워하는 세상이 멸망했다.

장애인이란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세상이 멸망했다.

어린아이들이 학대를 받아 사망하거나 심각한 상태로 발견되는 뉴스로 차 있었던 세상이 멸망했다.

학생들이 성적에 따라 가축마냥 등급이 매겨지던 세상이 멸망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피부색, 언어, 문화 때문에 수많은 차별을 받던 세상이 멸망했다.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달고 쥐꼬리만 한 봉급과 수많은 일거리들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살던 세상이 멸망했다.

같은 인간끼리 등급을 매기며 마네킹이 되갔던 세상이 멸망했다.

수없이 많던 행성 중 하나가 멸망했다.

수많은 문명이 사라졌다.

수학적 그래프는 불타 없어졌으며 화학은 무(無)가 되었다.

 

X는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어쩌면 내가 잘못되었을지 몰라.

그렇지만 그녀는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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