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는 속이 상했다.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영서는 속삭였다. 영서의 팔은 영서의 다리를 감싸 안고, 영서의 머리카락은 영서의 어깨를 토닥였다. 영서는 영서의 몸을 천천히,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오직 영서만이 영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영서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위로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모래 씹는 소리가 들린다. 발가락 사이로 작은 모래알들이 재잘거린다.

영서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주먹으로 꽉 쥐어도 보고 손가락으로 머리 뿌리를 당겨보기도 했다. 뱃속은 무겁고, 열은 오르고, 속은 어지럽고, 머리는 핑 돌았다.

- '어떻게 당신이 울 수 있어요? 내 잘못인가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내 것이 맞나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빠. 아주 잔인하고 못됐어. 당신은 절대 착하지 않아.' 

핑글핑글, 눈가에도 열이 오른다.

- '혹시, 혹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나만 입 다물고 있었더라면 금방 끝날 일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바보야, 나는 바보야, 나는 바보야. 아니야. 아니지. 거짓말이라도 했어야지. 나는 속아줄 마음이 있었어. 다른 말을 했어야지. 바보! 거짓말이라도 했어야지.'

영서는 속이 뒤틀렸다. 마구 욕을 내뱉어 당신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싶었다. 매섭게 돌아서서 두 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 소리치고 싶었다. 어느날 갑자기 당신의 눈 앞에서 홱 사라져선, 당신이 나를 찾으며 후회하고 우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다 마음이 풀리면 다시 당신의 앞에 나타나 당신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또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영서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너무 미워했다.

영서는 울기 시작했다. 영서가 바라보는 책갈피가, 일기장이, 영서의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이 울고 있었다. 영서의 방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끈적하게 젖어가는 발바닥을 바라 보며 영서는, 영서는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허무하다. 태어날 때부터 본디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허무하다. 눈물이 흐를수록 영서의 몸은 빈 껍데기가 되어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가 팔랑거렸다. 영서가 사랑하던 것, 그리고 영서를 사랑하던 것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영서는 사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고, 알면서도 끊임없이 물어봤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긁어 부스럼 만든 꼴이다. 영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영서가 지금껏 사랑해온 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영서는 아주아주 작아져서, 바늘 구멍에 들어갈 만큼 작아져서, 아주 좁고 따듯한 곳에 들어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영서는 영서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빠르게 잊었다. 무슨 짓을 해도 영서가 바라는 사랑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서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영서는 다시 당신을 생각한다.

- '나를 사랑해요?'

영서는 몇 번이고 물을 것이다. "영서를 사랑해요? 영서가 제일 좋지요?"  영서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영서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할것이다. 영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으니까. 영서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이었다. 그냥 그 말. 그건 영서에게 정말 중요하니까.

영서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아하, 멀리서 모래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모래성이 무너지는구나. 영서는 자신이 무너지는 모래성 안에 갇혀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영서는 나쁜 꿈을 꾸었다. 분명 마른 기관지에 피가 맺히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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