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망할 놈의 팝스는 꼭 6월에 하는 거야? 좀만 덜 더울 때 해도 되잖아!” 

“3월은 추워서. 4월은 벚꽃 때문에. 5월은 중간고사. 7월은 그야말로 찜통 장마고 인마. 빨리 뛰어!”


6월 중순으로 넘어갈 무렵. 점차 해는 높아지고 길어졌다. 그리고 전주 고등학교 1학년 1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전교생이 하루 종일 굴려지는 고난에 처하게 됐다. 운동장 한쪽에는 팔 굽혀펴기며 유연성 테스트를 하기 위해 매트가 일렬로 펼쳐져 있었고, 햇빛이 더 뜨거워지기 전에 오래달리기를 마치기 위한 행렬이 줄 지었다. 여자들은 3바퀴, 남자들은 5바퀴. 그러나 지구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던 세린이 볼멘소리를 내뱉었고, 운 나쁘게도 바로 뒤에 있던 체육 교사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페이스를 맞추며 호루라기를 삑삑 불었다. 은수는 이미 행렬의 맨 끝 쪽으로 뒤처진 지 오래였다. 늘 이모네 집으로 땡땡이를 치러 가긴 해도, 지구력 증진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은 듯했다. 유정은 의외의 선방을 하고 있었다. 삐쩍 마른 팔다리가 힘겹게 요동쳤다. 이 짓거리를 앞으로도 몇 번 더 해야 한다니. 탄식 속에서 마지막 바퀴를 돌아낸 유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정 옆으로 늘어진 계단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마실래?” 

“어.”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제윤이 들고 있던 생수병을 유정에게 내밀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왔어? 다섯 바퀴잖아.” 

“빨리 쉬려고 빨리 뛰었는데.” 

“미친.”


그렇다고 한 사이클에 300미터나 되는 걸 다섯 번이나 전력을 다해서 뛰는 놈이 어딨냐,는 눈빛을 한 유정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팔락거리며 털어낸 제윤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여전히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듯했다. 유정은 그런 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생수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차갑던 것이 뜨겁게 끓어오른 속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미지근해져서는, 마셔도 마신 것 같지가 않았다. 연신 갈증이 일었다. 


“나 이거 다 마셔도 돼?” 

“와. 양심은 있냐. 나 한입만 더 마시고.”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질 않는다. 유정은 군말 없이 생수병을 제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웬걸, 제윤이 그만 생수병의 밑바닥을 보이고 만 것이다. 유정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거 내 거잖아. 왜 내가 사과해야 할 것처럼 그래?” 

“남겨 준다면서! 다 마실 거면 마실 거라고 하던가!” 

“그게 중요한 거야?” 

“못 지킬 거면 말을 하지도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럼 세상은 기막혀서 어떻게 살아?” 

“말을 말자.”


유정은 괜히 심술을 부리며 자리를 떴다. 그녀는 체육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동전의 개수를 세며 매점으로 향했다. 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생수 버튼을 누른 유정이 허리를 숙여 생수병을 꺼냈다. 그리고 일어섰을 땐 자판기의 투명한 창으로 제윤의 낯이 비쳤다. 유정은 뒤를 돌지 않고 병뚜껑을 돌려따며 그대로 목을 축였다. 


“뭐. 왜. 뭐!” 

“너 요새 왜 나만 보면 성질내냐.” 

“언젠 안 그러냐면서.” 

“이유가 없잖아. 평소엔 내가 너 놀린 거고.” 

“그걸 알긴 아는구나.”


안다니깐 더 어이가 없다. 유정은 그때까지도 제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달리기를 끝낸 지는 오래였는데도 심장 부근이 터질 것 같은 이유는 뭘까. 


“제윤아!”


그때 누군가 제윤의 이름을 부르며 매점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윤제윤을 저렇게 남사스러운 톤으로 부를 사람이 전교에 몇이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유정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여자애를 바라보다 제윤을 번갈아 보길 반복했다. 


“매점에 있었네?”


그러더니 그 애는 제윤에게 가까이 붙어 뭐라 뭐라, 안부 인사 같기도 깨를 볶는 것 같기도 한 의미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유정은 본능적으로 둘 사이에 무언가 있음을 눈치채고 자리를 벗어났다. 제윤이라고 해서 그 상황에서까지 그녀를 쫓아갈 재간은 부릴 수가 없었다. 유정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웃지 않으면 어딘가 조금은 뚱하고 멍해 보이는 영락없는 사춘기 고등학생의 얼굴을 한 채, 다시 운동장 쪽으로 걸어가던 유정의 입술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이내 댓 발 튀어나온 아랫입술로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삐져나왔다. 윤제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저 멍청한 놈에게 그런 게 생겼다. 그리고 저에게도 그런 연애 감정이 생기고 말았다는 사실을, 유정은 그제서야 확실히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심란한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가는 법. 괜히 고된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업도 어영부영 넘어가곤 하던 날을 기점으로 아이들의 시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말고사와 장마. 얇디얇은 스니커즈를 신고 나갔다간 한걸음 뗄 때마다 물 빠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계절을 지나 어느새 1학기 종업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전주 고등학교의 아이들은 저마다 사물함을 비우며 곡소리를 냈다. 미리 짐을 옮겨두어 웃는 놈들과 그러지 못해 한숨을 푹푹 쉬며 어떻게든 가방 안에 온갖 것들을 쑤셔 넣는 놈들. 분실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며, 기어코 사물함이 모두 비워진 것을 본 뒤에야 종례를 시켜주겠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김유정, 박세린, 이은수. 셋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에다가 다 옮겨두면 뭐 해? 책 버리려면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이놈의 한자랑 체육은 몇 번 펼쳐보지도 않았는데 아오. 안 들어가. 나 여기 한 번만 잡아주라.”


유정은 틱틱거리며 책을 반으로 접어 이리저리 쑤셔봤다. 세린은 무심하게 마대 자루의 반대편을 잡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3학년들은 내려오다가 책 엎고 난리던데.” 

“그거 우리 미래야.”


은수 또한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한번 훔쳐 내며 책을 마저 구기며 맞장구를 쳤다. 


“와. 미술 책은 또 왜 이렇게 쓸데없이 크고 두껍냐. 그림만 많아가지고 아주.”


불평 끝에 마대 자루가 터지도록 책을 욱여넣은 유정은 손을 털며 쓰레기장을 나섰다. 온갖 색의 명찰들을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보기란 흔치 않았지만, 방학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뭐 했다고 벌써 여름방학이야! 아. 보충 나오기 싫다.” 

“난 학원이랑 과외 때문에 패스.” 

“부러워. 아니. 미안. 취소. 안 부러워.” 

“나도 너네가 부러운데 안 부러워.”


세린은 기지개를 켜며 투정을 부렸다. 유정은 벌써부터 빽빽한 여름 스케줄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고, 은수는 생각 없이 내뱉은 속마음을 허겁지겁 주워 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저마다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스트레칭도 하고 팔을 주무르며 계단을 올랐다. 그래봐야 갑작스레 시비가 걸린 근육은 진즉 삐져서 다음 날이면 성을 낼 게 뻔했지만. 


집이 가까운 은수는 양팔 무겁게 짐을 껴안은 채로 걸어갔고, 버스에 올라탄 세린과 유정 역시 양손 사정은 비슷했다. 그들은 짐을 미리미리 옮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손 가득 뭔갈 들고 있음에 의아해했지만 방학 직전은 어쩔 수가 없는 법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만원. 번화가쯤에서 겨우 한산해진 버스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두 사람은 괜히 에어컨을 향해 손을 뻗어보기도 하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세린아.” 

“엉.”


괜히 품 안의 책을 펼쳐보던 세린의 이름을 부른 유정은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윤제윤 여자친구 생겼어.” 

“엥? 진짜?” 

“어. 저번에 보니깐 그러던데.” 

“헐……”


왜인지 모르게 세린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정말 저도 모르게 유정의 어깨를 두드려줄 뻔한 것이다.


“진짜 뜬금없다. 걔가 무슨 여자친구야.” 

“내 말이.” 

“근데 누군데?” 

“현광수네 반 애 같던데. 멀리서도 만났다 아주. 뭔 미진인가. 아. 심미진이다.” 

“어? 나 걔 아는데. 건너건너.” 

“어떤 애래?” 

“잘은 모르겠는데. 그냥…그닥. 잘 모르겠는 친구 같아.” 

“이씨. 만날 거면 괜찮은 애를 좀 만나던가. 짜증 나.”


유정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흘겼다. 아스팔트가 꼬부라지는 꼴이 아주 제 속 같다고 느낄 정도로 심사가 꼬여 있었다. 


“나 다음에 내려야겠다.” 

“기다려봐. 자리 비켜줄게.” 

“땡큐. 나 갈게. 연락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유정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화가 덜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열하는 태양이 정수리에 닿자마자 온몸이 힘들다가 아우성을 쳐댔다. 정류장에서 집까진 그렇게 멀지도 않았지만 한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못해 축축 처졌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한 지는 한 달 남짓이고 앞으로도 그쯤은 더 더울 텐데. 유정은 실로 오래간만에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땀이 식기도 전에 다시 젖어버린 이마가 반짝거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방으로 달려가 들고 있던 것들을 책상 위로 쏟아버린 유정은 곧장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두고 교복 셔츠를 벗어젖히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받쳐 입은 티도 온통 땀으로 젖은 게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샤워라도 해야겠다 싶은 심정으로 아무렇게나 세수를 하고 수도꼭지를 잠근 유정의 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이 시간엔 유민이 자고 있었어야 정상인데, 방학도 일찍 한 대학생 주제에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간 건지 모를 일이었다. 유정은 제 오빠지만 참 꾸준하게 도움 되는 일이 없다 생각하며 인터폰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쩍이는 화면으로는 처음 보는 남자애가 뭔가를 들고 멀뚱 허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정은 황당한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쟨 또 뭐지. 그러자 초인종 소리가 한번 더 울렸다. 


“이사 떡 돌리러 왔는데요-.”


변성기를 막 지나친 듯 갈라지는 목소리가 유정을 재촉했다. 망설이던 유정은 잠금장치를 걸어둔 채로 문을 소심하게 열어보았고, 열린 문틈으로는 생각보다 더 멀끔한 인상의 남자애가 나른한 표정을 하고 서서는 저와 눈을 마주쳤다. 


“이사 왔어요. 윗집에. 이거 시루떡이에요.” 

“아. 네.”


얼굴이 꽤나 까무잡잡한 남자애는 제 또래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딘가 인상이 성숙해 보였다. 제게 떡만 건네주고 가려는 그를 붙잡은 유정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닫아두고선 유민의 방으로 들어가 당당하게 그의 책상 위에 있던 포카칩 파란 봉지를 집어 들고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떡 감사합니다. 이거 드세요.”


과자를 받아든 그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감사 인사를 전하며 시루떡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특징 없고 기억할만한 것도 없는 첫 만남을 이후로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 뒤, 7월의 끝 무렵. 보충 수업을 나가는 친구들과 달리 오전부터 과외 수업을 듣고 돌아온 유정은 제 집 거실에서 이름 모를 유치원생을 마주했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쯤 먹었을 그와 눈이 마주친 채로 가방을 풀어내리던 유정은 이윽고 부엌에서 과일 접시를 들고 나온 제 엄마 수영씨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 보면 부엌 식탁에 처음 보는 아주머니까지 앉아계셨다. 


“어. 윗집 애긴데. 유치원 하교하는 길에 애 엄마를 만나서. 인사해. 윗집 이사 오신 혜숙이 이모. 엄마 중학교 동창.”

“안녕하세요!” 

“어-그래. 네가 유정이구나? 공부 잘한다면서? 아침부터 학원 다녀온 거야? 배고프겠다.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요. 배 엄청 고파요. 안녕. 너 이름이 뭐야?”


유정은 뱃가죽을 쓸어내리며 대답하다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곳에 앉아있던 어린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수줍음이 많은 듯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유정을 멀뚱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정은 속으로 이 집도 형제끼리 한 개성한다며, 무뚝뚝한 게 둘이 똑 닮았다고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눈만 굴려댔다. 아무래도 제 이름을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혜숙이 웃으며 말했다. 


“정원아. 누나가 이름 물어보잖아. 저는 김 정원입니다, 해야지. 유정아, 이해 좀 해줘. 쟤가 워낙에 낯을 가려서. 제 형은 안 그러는데 유독 정원이는 그래.” 

“그럴 수 있죠.” 

“정원아. 그럼 형 이름은 뭐야? 유정이 누나랑 동갑이잖아.”


제 엄마의 재촉에도 뚝심 있는 어린이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질 않았다. 유정은 수를 쓰기로 결심했다. 미끼로 유인하듯, 그녀는 식탁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유리병을 들고 정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안에는 색색깔의 과일 맛 사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유리병과 유정을 번갈아 보더니 드디어 입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유정은 그때까지만 해도 윗집에 이사를 왔다던 놈의 이름이 궁금하기보단 어린 친구가 가진 용기의 크기를 더 궁금해할 뿐이었다. 


“재원…” 

“형 이름은 재원이야? 너는 정원이고?” 

“네에.”


그래도 역시 귀엽구나. 유정은 씩 웃으며 사탕을 골라냈다. 정원은 뚱하게 나온 입이 꽤 특징적이었다. 이런 건 또 제 형이랑 닮은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김재원이라는 애가 그렇게 귀엽다는 건 아니지. 그냥 느낌이 닮았다는 말이지. 유정은 이런저런 생각을 덧붙이며 사탕 하나를 꺼내들었다. 레몬맛 썬키스트 사탕. 정원의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나 줄까?”


정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은 이게 정원의 최선임을 인정하며 고사리 같은 정원의 손바닥을 펼치고, 그 위에 사탕을 한 아름 올려주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유정은 인터폰 화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곤 저번과는 달리 단번에 문을 열었다. 문이 바로 열릴 줄은 몰랐다는 듯, 재원은 꽤나 황당한 표정으로 유정을 응시했다. 


“안녕.” 

“어. 안녕. 동생을 데리러 왔는데…” 

“일단 들어와!”


유정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재원은 담담히 인사를 주고받으며 방문 목적을 밝혔다. 유정은 예상했다는 듯이 재원을 안으로 들였고 재원은 허공에 인사를 건네며 신발을 벗었다. 얼결에 반말을 주고받아버린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실례합니다.” 

“실례는 무슨, 얘. 반가워. 네가 혜숙이네 첫째구나?”


붙임성 좋은 수영 씨가 부엌에서 달려 나와 윗집의 첫째를 맞았다. 내내 소파에 앉아있던 정원 역시 부리나케 달려와 제 형의 다리 맡에 꼭 붙었다. 이제야 비빌 구석이 생긴 어린이의 뒷배가 두둑해지는 순간이었다. 유정은 그런 정원이 귀여워 손을 흔들고 작별 인사를 했다. 


“정원아, 잘 가?” 

“얘가 너한테 이름 알려줬어?” 

“아니. 이모가 말씀해 주셨어.” 

“아…”


윗집의 첫째는 제 동생의 이름이 유정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는 듯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어진 유정의 해명에, 그는 실망한 듯 멋쩍게 웃었다. 유정은 무심하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 변화에 신기해하며 굿바이 인사를 건넸다. 


“너도 잘 가. 재원아.” 

“내 이름도 엄마가 알려주셨어?” 

“아니. 그건 정원이가 말해준 거야.”


그러자 재원이 살포시 웃었다. 묘하게 피어난 그의 웃음을 유정은 감히 해석할 수 없었다. 연신 입꼬리를 가만두지 못하던 재원은 그랬구나-하더니 웃음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재원은 정원을 단번에 안아들며 정원에게 애교 섞인 물음을 건넸다. 


“정원이가 누나한테 형아 이름 알려준 거야?” 

“응.” 

“잘했어.”


유정은 순간 웃는 것이 꼭 닮은 두 사람을 보며 마음이 뭉글뭉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정의 시선을 느낀 재원은 그녀를 의식하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봐서 알겠지만 얘가 낯을 많이 가려.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도 쑥스러워하거든." 

“그런데 네 이름은 잘만 말하던데.” 

“그러니까. 그래서 더 신기하다니까.” 

“이렇게 널 좋아하는데, 그럴 만도 하지.”


재원은 또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간질간질. 유정의 코끝이 간질거렸다. 


“또 봐. 이모 저 갈게요! 간다.”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고 현관으로 향하는 재원의 뒤에 따라붙은 유정이 제 이름을 일러주며 그를 마중했다.


“난 유정이야. 김유정.” 

“그래. 다음에 보자, 유정아.”


좋은 사람을 보면 마음 한편이 간지러운 법이다. 유정은 비밀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비밀이랄 것도 까놓고 보면 별거 아닌데 뭘 그렇게 숨기고 아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재원은 그런 비밀이 어울렸다. 별거 아니더라도 본인한테만큼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며 이해를 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그가 떠난 뒤로 유정은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재원은 현재 발레를 배우는 중이고, 서울에서 유명한 예술중학교를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것까지. 덕분에 더 이상 서울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혜숙 씨네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고된 연습하느라고 애가 철은 빨리 들었는데, 그래도 애는 애야. 그 먼 데서 혼자. 어휴.” 

“그래도 장하네.” 

“내 아들이지만 장하긴 해. 그래서 뭐. 출국 전까지는 여기서 휴식 겸 해서 연습실만 다니게 하려고. 다음 달 중순에나 갈 것 같아.”


조만간 가는구나. 거실에서 티비를 작게 틀어놓고 과일을 먹던 유정은 어느새 제 귀로 흘러들어오는 엄마와 혜숙 씨의 대화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혜숙 씨는 이만 저녁을 차려야겠다며 위층 집으로 돌아갔다. 그쯤 유정 역시 학원에 갈 채비를 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순식간에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유정은 해내자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때, 위층에서도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유정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주황빛 센서 등이 켜져서 유리창에는 누군가의 정수리가 희미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재원일 것이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런 확신을 한 것에 놀라워하고 있던 사이, 여유롭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편한 운동복 차림에 숄더백을 맨 재원과 유정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재원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또 안녕.” 

“어. 안녕. 어디 가?” 

“연습하러. 몸 굳으면 안 되거든.” 

“아. 맞다. 너 발레 한다면서. 이모한테 들었어.” 

“맞아. 너는 학원?” 

“응. 수학학원.” 

“와, 나 수학 진짜 못했었는데.” 

“이젠 안 하겠네?” 

“그렇지.”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대화가 조금 더 길어진 것은 집요하게 따라붙은 재원의 시선 때문이었다. 유정이 가벼운 민망함을 느낄 즘에서야 시선을 거둔 재원이 말했다. 


“신기하다.” 

“뭐가?” 

“다 부럽다던데, 나보고. 학교 안 가도 되고 공부 안 해도 되니까.” 

“너도 연습하러 가잖아. 이 시간에.”


유정은 제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8시 10분 전. 비교적 늦은 시간임은 확실했다. 유정은 멍한 재원을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까지 간다며. 가족들은 여기에 있는 거지?” 

“그렇지.” 

“난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사는 건 상상도 못 하겠어. 아니, 상상은 하겠는데 상상만으로도 힘들고 외롭고 그래.”

“나도 그래.” 

“그래. 그러니까.”


유정은 장난스레 입을 쌜쭉이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나 배려해 준거야?” 

“뭐…” 

“고마워.”


민망스레 웃으며 손끝을 괴롭히던 유정은 속에서 어지럽게 부딪히던 것들이 일순간 멎음을 느꼈다. 재원의 감사는 직선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나 곧은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처음이었기에, 묘하게 기분이 들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1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입구쯤에서 가볍게 목례를 건넨 재원은 유정과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질간질. 별안간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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