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 전화 하려고 했었어. 아직 너 못 잊은 거 확실해]

 

[네 생일이나 너랑 관련된 무슨 날만 되면 사람이 연락이 안 돼. 징그럽다 진짜. 그냥 둘이 다시 사귀면 안 되냐? 너도 석진이 형 좋아하는 거 아니여 아직?]

 

[전역한 뒤로 내가 알기론 아무도 안 만났어. 못 만난 거지. 저러는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

 

태형은 카페에 앉아 석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호석과의 통화에서 들었던 말들을 곱씹고 있다. 호석은 제법 솔직하게 자신이 보고 들어 온 것들을 털어 놓았다. 석진이 그간 자신을 잊지 못했다고 할 만한 증거들이며, 어제 술이 취해서 주절거렸던 이야기들까지. 어느 하나 석진이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증거는 없다.

그래서 태형은 지금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새로운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건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사실 태형이 꿈꾸던 우연이기도 하다. 태형은 서울로 와서 언젠가는 석진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연락처도 모르고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그런 확신이 강했다.

어제 키스할 때의 장면들을 다시 떠올린다. 버둥거리면서도 자신을 강하게 밀어내지 않았다. 오랜만에 삼킨 석진의 입술은 치명적으로 달콤했다. 오랜만이어서, 너무도 간절하게 소망하던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옛날의 키스와는 결이 달랐다. 블랙홀처럼 무섭게 제 입술을 빨아 들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만날 수 없다. 얼토당토 않은 핑계를 둘러대는 석진의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그 모든 것이 김석진 다워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변한 게 있었다면 오늘 태형은 무척 서글펐을 것이다. 만약 석진이 자신을 깨끗이 지우고, 다른 삶을 살기로 노력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태형은 오늘 석진과 만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 가격대면 사람 살 만한 방은 없다고 보면 돼요. 내가 비록 이걸로 돈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내 아들 같은 사람이라 거짓말은 못 하겠네]

 

태형은 오늘 새로 지낼 방을 알아 보고 오는 길이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고시원은 사실 태형이 계약을 직접 한 것이 아니다. 사촌 형이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원래는 그가 머물던 방이다. 그런데 그가 지금 한 달 정도 고향에 내려 가야 할 일이 있어서 태형에게 잠시 방을 빌려 준 것뿐이다. 태형은 자신의 힘으로 새 방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돈이 없다. 지금 태형이 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이라고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방 뿐이다.

오죽하면 부동산 공인 중개사가 태형에게 저런 말을 했었다. 자신들도 어떻게든 거래 하나만 성사시키면 작으나마 돈을 벌 텐데, 양심 상 도저히 그런 방을 보여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태형은 억지로 우겨서 제 돈에 맞는 방을 보러 다녀 왔다.

중개인을 따라 털레털레 한참을 따라 가도, 그가 소개해 주겠다는 집은 나오질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됩니까? 물었더니 그러게 내가 사람 살 만한 데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라는 막연한 대답만 돌아 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땀이 오슬오슬 맺힐 만큼 걸었더니 산동네가 나왔다. 지은 지 수십 년은 지난 듯한 낡은 주택들 천지였다. 태형이 소개 받은 방은 그 동네의 끄트머리에 있는, 한 오래 된 집의 쪽방이었다.

 

“자 보세요”

“아......”

 

태형은 두 말 않고 방문을 도로 닫았다가(대문만 따로 있을 뿐, 방과 바깥을 연결하는 창구는 오로지 미닫이 문 하나뿐이었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열었다.

 

“잠깐만요”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그 방의 남루한 모습을 폰에 담았다. 방을 내 놓는다고 새로 도배를 한 것 같지만, 화장을 아무리 두껍게 한들 가려지지 않는 얼굴이 있듯 그 방도 그랬다. 계온도는 방 안이나 방 바깥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정도라면 한겨울엔 어떨지, 한여름엔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법했다. 더군다나 벽지가 야무지게 발라지지 않은 곳곳에 거무튀튀한 곰팡이 자국이 눈에 띄었다. 결국 발길을 돌렸다. 사실 이 정도 방이라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그에겐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찍 왔네”

“어. 퇴근한 거가?”

 

“응. 왜 보자고 했는데?”

 

이제 석진의 냉랭한 말투가 꾸며낸 것쯤이라는 건 잘 안다. 태형은 그래서 주눅 들지 않는다. 그리고 제 계획대로 석진에게 말을 꺼낸다. 물론 그의 반대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다.

 

“부탁 하나만 할라고”

“무슨 부탁”

 

“형 집에 잠시만 얹혀 살면 안 될까”

“.............뭐?”

 

“제대로 된 방...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너 지금 무슨 개소리야 그게? 너 고시원에 살고 있다며”

 

“그거 사실 사촌 형이 살다가 잠깐 비워 준 방이다. 사촌 형 곧 다시 온다. 그라면 내 나가야 된다”

“아니 이게 무슨....”

 

“근데 돈이 없다. 내가 가진 돈으로 방 구할라고 하니까 이런 방밖에 없다 카드라”

 

태형은 제 폰을 켜서 석진에게 불쑥 내민다. 낮에 찍어 두었던 방의 사진이다. 폐가나 다름없는 방 사진을 석진은 힐끔 쳐다 본다. 대체 얘는 돈이 얼마나 없는 거야 - 어쩌자고 돈 한 푼 없이 서울이란 곳엘 오게 된 걸까. 서울에 오는 지방 사람들의 목적은 대개 학업이나 직장이다. 보통의 그들은 제 한 몸 편히 뉘일 만한 방 하나 얻을 돈은 챙겨 온다. 그런데 태형은 그런 사연도 아닌 듯하다.

 

“대체 왜 온 건데 돈 한 푼 없이?”

 

아무튼 지금 석진이 사진으로 보고 있는 방은, 아무리 백 번 양보를 한다 해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유나 알자. 왜 대구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니가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

 

“아 답답해!”

“진짜 말 해도 되겠나”

 

“왜 왔는데, 뭐 하려고 왔길래 돈 한 푼 없어서 이런 방이나 보고 다니냐고!”

“안 듣는 기 좋을 낀데....”

 

“아오 진짜, 한 대 맞을래 김태형?!”

 

“엄마랑 싸웠다”

“네가 애냐! 사춘기야? 너 그럼 어머니랑 싸워서 집 나온 거야?”

 

“그 일 때문에”

“.........................”

 

“엄마는 아직도 내가 용서가 안 되는 갑드라. 그래서 내가 나와뿠다”

 

 

그 일- 태형과 석진 당사자들도 그렇고, 그 일을 목격하고 기억한 모든 사람들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 아, 그래서 안 듣는 게 좋다고 한 거구나. 항상 태형의 말을 듣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석진은 태형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조금씩 위험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사람인 반면, 태형은 얌전하고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렇지 않았다. 태형은 좀 직선적인 데가 있었다. 한 번 해야 겠다 마음을 먹으면 후퇴란 없다. 좌우를 살피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날의 일로 인해 석진 역시 가족과 멀어졌다. 서울에 본가가 있으면서도 굳이 나와서 홀로 지내고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 일은 태형과 석진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석진은 태형을 만나지 않았다. 그가 그때부터라도 다른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면 상처도 조금은 덮어지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닌 모양이다. 살갗이 벗겨지는 것처럼 쓰리고 아프다.

 

에이 모자란 놈아. 등신아 - 태형을 향해 외치고 싶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또 내한테 미안해 하라고 하는 소리 아이다. 물어 봐서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다”

 

사실 좀 미안해 하라고 한 소리였다. 날 꼬드겨 놨으니 책임지라는 말.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는데 빙 둘러 말한 거다. 그러나 이제 방법을 좀 바꿔 보려고 한다. 예전에는 석진이 혼자 끙끙 앓는 모습을 지켜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아보려 한다. 석진더러 혼자 끙끙 앓아 보라고, 내버려 둬 보고 싶다. 끙끙 앓다 못해 제 힘으로 버티기 힘들면 알아서 손을 내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폐 안 끼치도록 노력하께. 알바는 구했으니까 방세 낼 수 있다. 그러니까 방 같은 방 구할 때까지... 내 좀 거둬 도”

 

태형이 마치 길 잃은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것 같다. 인간이 가장 떨쳐내기 힘든 감정 중 하나가 연민이다. 사랑은, 그저 좋아서 허덕이는 사랑은 힘이 약하다. 하지만 그 사랑에 연민이 얹히면 그 강직도와 점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석진은 자신이 이미 태형에게 굴복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는 반박할 힘도,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대체 우리의 앞날은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일까. 석진은 힘겹게 입술을 뗀다.

 

 

“그렇게 해... 그럼...”

 

결국 또 한 번 태형에게 백기를 드는 석진. 그는 사랑과 연민 앞에 자신이 너무도 무력한 존재라는 걸, 한동안 잊고 살았다.

 

 

 

 

 

 

 

 

 


 

[기상. 기상. 현 시간 부로 전 병력 기상하시기 바랍니다. 점호 집합 시간은 06시 25분까지입니다. 06시 25분까지 전 병력, 연병장으로 점호 집합 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아- 아침이다. 단말마의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갈라진 아우성들. 새 아침이 또 다시 밝았다. 태형이 자대에 전입 온 이후로 처음 맞는 아침이기도 하다. 어제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인지 죽은 듯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달게 잤다. 

아직 불침번이나 야간 경계 근무에 투입되지 않기 때문에 태형에게 잠 잘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곤히 잠든 것이 문제였을까. 기상 방송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눈을 뜨지 못 했다. 그보다 먼저 눈을 뜬 석진이 태형을 보고 기함을 하며 그의 몸을 흔든다. 태형은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다.

 

이 자식 간이 배 밖에 나왔네 -

 

석진은 제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태형을 마구 흔든다.

 

“야 김태형 일어나!!”

“흐으....”

 

“이 자식이...?”

“야, 신병 아직 안 일어났어?”

 

부스스한 눈으로 반대편 침상에서 이쪽을 건네다 보는 병장. 그의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얼어 붙어버린다. 지금 가장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건 태형의 맞선임. 그러니까 이등병들과 일병들이다. 비상 사태다. 어제 전입 온 신병이 기상 방송을 듣지 못한다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 쟤 깨워라....”

 

병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관심하게 고갤 돌리지만, 그 말에 살벌한 뼈가 숨어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석진은 마음이 몹시 다급해져 태형을 마구잡이로 흔든다. 그제야 태형은 슬며시 실눈을 뜬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석진의 얼굴을 보고 배시시 웃는다. 이 미친 놈아 니가 지금 웃음이 나오냐? 석진은 태형의 등 밑으로 억지로 손을 집어 넣어 그를 추켜 올린다.

 

“기상 시간 지났어!!”

“헉”

 

“빨리 일어나서 모포 개고 옷 갈아 입어!”

“아... 알았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태형이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무엇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몸만 허둥지둥 바쁘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녀석이 뭘 하겠다고 덤벙거린다. 석진은 하는 수 없이 제가 할 일을 포기하고 태형을 챙긴다. 태형이 허둥거리는 동안 관물대에서 전투복을 꺼내어 입히고, 단추를 잠그고. 서랍에서 군번줄을 꺼내 목에 걸어 주고. 바짓단에 고무링을 걸 줄도 모르는 새내기에게 고무링을 건네며 옷매무새를 단속하고. 그리고 모포와 포단과 베개를 정리하는 일까지. 그 모든 일들을 신병답지 않게 능숙하게 해 내는 석진을 보고, 태형은 의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태형의 칫솔에 치약을 짜서 손에 수건을 들게 한다. 그리고 지민에게 딸려 보내 세면장으로 내쫓는다. 그러고 나서야 석진은 제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태형을 모두 챙겨 주고 나서야 옷을 갈아 입고 침구를 갠다. 졸지에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게 된 석진을 보고 모두 혀를 끌끌 찬다.

 

 

“야 석진아, 네가 아침부터 고생이 많다”

“괜찮습니다. 처음엔 다 저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기상 방송 못 들은 건 꽤 충격인데?”

“아직 둘째 날이니까 뭐... 너그럽게 좀 봐 주십쇼”

 

“아니 뭐 누가 뭐라고 하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

“............”

 

 

이등병이 갖춰야 할 절대적인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예민한 귀와 세련된 센스다. 이등병은 주변에서 들려 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태형은 전입 온 지 고작 둘째 날이므로 누구든 그를 탓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일이 앞으로 종종 벌어진다면 큰 문제다. 

석진에게는 사실 태형을 챙겨야 할 의무가 없다. 신병을 보살피는 일은 대개 그 맞선임들이 맡는다. 어쩌다 졸지에 신병 놀이의 주연이 되어 이 고생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신병 놀이도 오늘이면 끝난다. 내일은 서정완이 돌아오는 날이므로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눈 봐봐”

“어?”

 

“뭐 묻었어”

“어.... 고맙다....”

 

“방송 잘 들어야 돼. 아침에 그러고 있으면 큰일 나”

“미.. 미안....”

 

“아냐. 오늘은 첫날이라서 다들 그냥 봐 줄 거야. 다음부터 잘 하면 돼”

 

태형은 자신이 가시방석에 올라 앉아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 할 정도로 정신이 없다. 늦잠을 잤다는 사실도 겨우 깨달았으며, 자신의 두서없고 굼뜬 행동이 남의 눈에 고깝게 보일 거라는 지각도 이제야 겨우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아침 점호를 무사히 마쳤다.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석진은 태형의 눈에 붙은 눈곱을 떼어 주며 간단히 경고했다. 사실 경고라기보다는 일종의 충고에 가깝지만, 태형은 그 말을 듣고 무척 불안해 하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긴장을 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실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구나 한 두 번의 실수는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세 번, 네 번, 반복되는 실수 앞에는 부처도 돌아앉는다. 더군다나 내일이면 서정완이 돌아온다. 서정완은 행동이 굼뜨고 눈치가 느린 사람을 가만히 보아 주지 않는 타입이다.

그래서 석진은 지금 걱정이 산더미다. 태형은 유순하기는 하지만 말과 행동은 남들보다 느린 편인 것 같다. 맞은 편에 앉은 지민을 향해 눈짓을 한다. 오늘 이것저것 교육을 잘 시켜 두라는 뜻이다. 지민이 알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태형은 또 밥을 어느새 다 비웠다. 그리고는 다시 별 뜻 없이 먼저 일어서려는 눈치를 보이자, 석진이 태형의 허벅지를 손으로 꾹 누른다. 선임들이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다. 다행히 태형은 그 뜻을 알아 들었는지 굳은 표정으로 도로 앉는다.

 

 

 

 

 

 

 

“형, 석진이 형!”

“어? 어어, 중대장님한테 갔다 왔어?”

 

“어. 상담하고 왔다”

“너 보직 어떻게 하실 거래?”

 

“아직 며칠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하시던데”

“아아....”

 

석진은 애초에 이번 신병이 들어 왔을 때 자신의 부사수로 당겨 올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막상 태형을 받고 나니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진다. 과연 이 아이가 내가 하던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을까? 당분간이야 함께 일을 할 테니 큰 걱정은 없지만 문제는 일 년 뒤다. 일 년 후에는 태형이 혼자서 이 일들을 맡아 해야 하는데, 어째 아직은 뚜렷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석진은 태형을 부사수로 끌어 당겨야겠다는 결심을 점점 굳힌다.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가 데리고 있으면서 하나 하나 가르치고, 챙겨 주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참 이상한 녀석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 앞에 있어도 신경 쓰이고 손이 간다. 태형을 챙겨야 하는 건 지민과 같은 아이들의 몫인데, 석진이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오히려 모든 걸 석진이 가르쳐 주게 된다.

무엇이든 새로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다. 어제 저녁, 석진은 태형이 외워야 할 선임들의 이름과 상하 관계, 간부들의 이름과 직책까지 수첩에다 꼼꼼히 적어 주었다. 이거 일주일 안에 외우는 게 좋아. 그래야 네 군생활이 편해. 알겠지? 태형은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석진은 못미더웠다. 중대 인원 팔십 여 명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계급 순서를 외우는 건 사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레 익히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당장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뿐더러 민감한 이들은 분명 태형이 그걸 외우지 못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외우라는 거 좀 외웠어?”

“어! 거의 다 외웠다!”

 

“진짜?”

“응. 근데 막 줄줄줄 말이 나오고 그러지는 않는 거 같고....”

 

“빨리 외워야 될 건데”

“형은 얼마나 걸렸는데?”

 

“나는 사흘”

“우와. 엄청 똑똑한갑다”

 

“......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까 외워지던데”

 

사실이다. 석진이 처음 전입을 왔을 때는 부대 내 분위기가 훨씬 더 삼엄하고 험악했다. 지금의 서정완 같은 선임들이 생활관마다 두 셋씩 포진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외워야 했고 살기 위해서 뛰어다녀야 했다. 그 덕에 석진은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선임들로부터 인정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특별히 석진에게 태클을 거는 선임들은 없다.

 

“난 형이 있어서 너무 좋다”

“어?”

 

“내 혼자면 우짜까 싶었는데. 형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진짜”

 

그렇게 웃지마라 아가야. 넌 웃는 게 왜 그렇게 예쁘니? 태형의 무해하고 순백한 웃음에 다시 한번 석진은 함몰 당한다. 게다가 형이 있어서 좋단다. 그 말을 어찌나 달콤하게 하는지 석진은 자신이 프로포즈를 받고 있는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그랬던 그 놈이. 그토록이나 사람의 심장에 대고 예고 없이 어퍼컷을 날리던 그 놈이. 지금 눈앞에 있다. 저 혼자 삼겹살을 우적우적 다 씹어 먹으면서. 같이 구워 먹으려고 사 왔는데 정작 석진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다. 태형이 너무나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석진은 지금 태형을 보면서 처음 태형이 신병으로 왔던 때를 떠올린다. 그때의 그 순진무구하던 눈망울. 그 눈빛이 아직 태형에게는 생생히 남아 있다.

 

“안 묵나?”

“나 먹을 걸 남겨 주고 먹으라고 해야 정상이지?”

 

“아...”

“잘 먹는 줄은 알고 사 왔는데, 이게 마지막이야”


“아따, 눈치 에지간히 주라. 담에 돈 벌어가 실컷 멕이 주께”

 

태형은 어제 부로 석진의 집에 입성했다. 그의 짐이라곤 달랑 트렁크 하나. 석진은 기함을 했다. 아예 눌러 앉아 살려고 서울에 왔다는 놈이 고작 이 짐뿐이라니. 그는 어머니와 싸운 후 도망치듯 서울로 온 게 분명하다. 석진이 사는 곳은 다행히 복층 구조의 오피스텔이다. 

처음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고 구한 집은 아니지만, 쓸 일 없던 위층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석진은 아래층에서 지내고 태형은 위층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나마 층이 분리되어 있는 게 천만다행이다. 만약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자야 한다면 - 생각만 해도 석진은 눈앞이 아찔하다.

혼자 살 때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던 텅 빈 냉장고가 눈에 거슬렸다. 뭘 먹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반찬이랄 것도 없고. 고기를 잘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석진은, 우선 이 가여운 영혼의 배에 기름칠부터 해 주자 싶었다. 정말 잘 먹는다. 사흘은 내리 굶은 애처럼 고기를 쓸어 담는다. 석진은 고기를 몇 점 입에 대어 보지 못 했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래 너라도 잘 먹어라 - 석진은 여전히 태형을 연민한다.

못 해 준 게 많아서. 못 해 본 게 많아서, 석진은 그래서 자신이 유독 태형을 못 잊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깨끗이 잊으려면 미련이 없어야 하는데 태형에겐 미련의 여지가 너무 많다. 분명 태형을 만나기 전에도 사귀던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감정의 두께가 다르다. 태형과의 사이에 쌓인 감정의 두께는 상상을 초월한다.

 

“짠”

 

혼자 먹어 대는 게 미안했던지 멋쩍게 웃으며 건배를 권한다. 쨍-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태한 마음을 꾸짖어 깨운다. 앞으로 대체 어쩔 셈이냐고.

 

 

“아, 그라고 방세는 반띵하면 되나? 있는 동안이라도”

“얼마나 있게?”

 

“모르지? 방 구해질 때까지는”

“그 돈으론 턱도 없다며”

 

“돈 좀 벌어갖고 얻는다 했잖아. 내일부터 일 나간다”

“뭐야, 말도 없이. 어디 가는데”

 

 

“노가다”


의외로 많은 청년들이, ‘노가다’라고 불리는 건설 현장 아르바이트를 선택한다. 힘은 들지만 수입이 꽤나 짭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군대 가기 직전이나 방학 중에, 짧게 돈을 당기고 빠져 나오는 식으로 일을 한다. 석진 또한 몇 번 그런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친구들도 더러 하는 모습을 봐 왔기에 특별할 일이 아닌데도 어쩐지 말리고 싶어진다.

넌 사서 고생 하는 게 취미구나 - 이렇게 비꼬아 말하려다가 말았다. 날 좋아했던 것도 사서 고생. 집 나온 것도 사서 고생. 집 나와서 그 일을 하는 것도 사서 고생. 그 고생을 해서 대체 얻으려는 게 뭔지.

 

“신세지는 게 미안해서도 아니고, 나도 내 살 길 찾아야 안 되겠나. 그때까지는 이것저것 해 볼라꼬”

 

꽤나 어른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한다. 이제는 태형도 이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제법 뚜렷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도면에 끊임없이 그려 봐야 한다. 물론 삶이라는 게 도면대로 이뤄지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제 명확한 목표 의식이 필요한 때다.

 

“코 골드라이”

“뭐?!”

 

“군대 있을 땐 안 골았잖아. 뭔데, 아재 돼 가는 거가”

“야, 아재는 무슨!”

 

“발끈하기는, 귀엽다고. 코 고는 것도 귀엽다고”

“미친 놈아...”

 

잠이 수월하게 들 리가 없었다. 태형은 어제 위층에서 아래층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 보며 잠들지 못했다. 석진이 잠들어 있는 저 옆자리로 무작정 파고 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입술을 탐하고, 그의 옷을 벗기고. 예전에 했던 그대로 그를 통째로 집어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먼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가져선 안 된다. 석진이 잠자는 모습은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차라리 처음 고백하던 때에는 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태형은 그때보다 겁이 많아졌다. 옛날의 태형이라면 이번에도 무작정 석진에게 고백부터 갈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은근히 겁이 많은 석진은 오죽할까 싶다. 그렇게 진지한 성찰에 빠져 있던 중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에, 태형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와, 김석진 코 고네 - 나직하면서도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무척 앙증맞고 귀여웠다. 꼭 생긴 대로다.

 

“야. 너 그 소리 잘못 들은 거야. 나 코 안 골아”

“풉....”

 

"코 안 곤다고!!“

“알았다 알았다. 안 고는 걸로 해 줄게”


“아이 씨”

“골면 뭐 어때서.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끼리”

 

“때린다”

 

 

 

 

 


 

석진은 천천히 전투복 상의의 단추를 잠근다. 하나 하나 단추를 맺어 갈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원래 신병 놀이는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하는 게 아닌데. 태형은 놀려 먹기에 적당한 대상이 아니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발랑 까진 녀석이라면 재미가 있을 텐데, 태형은 그저 순박하기만 하다. 오늘 저녁으로서 신병 놀이도 끝이다.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난 이 유희에 대해서 누구도 미련을 갖지 않는다. 그냥 김태형은 노잼이네 - 모두들 이렇게 웃고 말았다.

물론 아직 남은 것이 있다. 석진이 자신의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태형의 반응이다. 지금 태형은 지민을 따라 청소를 하러 나갔다. 곧 태형이 돌아 오면 옷을 갈아 입은 석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석진이 더 이상 제 동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부터 신병 놀이는 사람 봐 가면서 해야겠다. 그치?”

“아무래도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김태형 쟤는 너무 싱거워. 양념이 없어”

“그래도 애 귀엽지 않습니까?”

 

“밉진 않더라. 야, 너 서정완 병장 보는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서정완 병장 눈 뒤집어질라”

“........... 그런 말씀 하지 마십쇼. 소름 끼칩니다”

 

“서정완 병장 누가 너랑 친하게 지내는 거 꼴 못 보잖아”

“으....”

 

석진은 몸을 떨면서 전투복의 마지막 단추를 채운다. 문 밖에서 말소리들이 들려온다. 청소를 하러 나갔던 아이들이 이제 돌아 오는 모양이다. 석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문을 향해 돌아선다. 지민이 태형을 데리고 문을 열고 돌아온다. 

지민은 석진이 옷을 갈아 입은 것을 먼저 눈치 채고 얼굴을 씰룩거린다. 웃음을 강제로 참는 것이다. 반면 태형은 아직까지 석진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원래 놔두던 곳에 내려 놓고, 별 의식 없이 석진의 옆자리인 제 자리로 돌아온다.

 

얘도 어지간히 눈치가 없긴 없구나 -

 

모두들 웃음을 참고 잔뜩 긴장하고 있는 이때. 태형이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석진을 가만히 쳐다 본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이어진 태형의 행동이다. 태형은 벌떡 일어나더니 석진을 붙잡고 전투복 단추를 마구 벗기기 시작한다. 당황한 석진이 태형의 손목을 붙든다. 그러나 태형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석진의 귀에 속삭이듯 말한다.

 

 

“형 옷 잘못 입었다!!”

“............. 태형아.....”

 

“그거 다른 분 옷이잖아!!”

“태형아 그게.....”

 

“얼른 벗어라 와 이라노!!”

“..............하.....”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을까. 지금 태형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다. 만약 사실을 밝혔다간 울지 않을까 싶을 만큼 눈에 물기까지 초롱초롱 맺혀 있다. 얜 대체 왜 이렇게 순진한 거지? 그제야 태형의 뒤통수에서 터지는 웃음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태형은 눈동자를 굴리며 석진만을 바라본다. 결국 누군가 견디다 못해 태형에게 현실을 일러준다.

 

“태형아! 김석진 상병님 네 동기 아니야 장난 친 거야 지금까지!”

“...................?”

 

지금 태형의 눈빛은 마치 ‘네 입으로 직접 말하라’는 듯한 눈빛이다. 석진은 혀가 굳어서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아이 하나 속이는 일이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석진은 신병 놀이에 동참한 것을 그제야 후회한다. 태형이 눈빛으로 애원한다. 제발 아니라고 말 해. 제발. 그러나 석진은 그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의무를 갖고 있다. 결국 어렵사리 입을 뗀다.

 

“태형아... 그... 내가... 상병 맞아. 너보다 일 년 빨라”

“...................?”

 

“신병 놀이라고... 신병들 오면 선임들 중 누가 신병인 척하고 속이는 놀이.... 아 내가 이걸 왜 너한테 일일이 설명하고 있냐. 아무튼 그렇다고. 나 니 선임이야. 알겠어?”

 

그러나 석진은 태형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그는 지금 빛을 잃은 눈 먼 자의 표정이었다. 그의 세상은 오늘 부로 끝난 것 같은 얼굴. 지구 종말을 맞닥뜨린 사람의 얼굴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어둡고 창백하다. 석진은 입술을 깨문다. 괜히 왜 이런 짓을 해서는. 하지만 곧이어 화가 나기도 한다. 아니 이런 장난도 못 쳐? 그러나 태형의 눈동자는 너무도 어둡게 젖어 있다.







 

“태형아”

“............”

 

“김태형? 선임이 부르면 관등성명 대야지?”

“이병 김태형”

 

큰일났다.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겼다. 김태형이 달라졌다. 분명 석진이 태형과 같은 이등병이 아님을 밝히고 난 뒤부터다. 아 이 자식 진짜 뭐지? 석진은 태형의 울적한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신병 놀이라고 해서 별로 한 것도 없다. 안 하느니만 못하게 흐지부지 끝나버렸으니 태형이 그다지 마음 상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형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저 혼자 집어 삼킨 듯하다.

석진은 한참 동안 태형의 눈치만 보다가 겨우 말을 걸어 본다. 이등병의 목소리답지 않은 기어 들어가는 소리. 다른 후임 같았으면 이등병이 목소리가 그게 뭐냐고, 정신 못 차리냐고 윽박질렀을 법도 한데 태형에게는 차마 못 하겠다. 대체 이놈은 어떤 놈이길래 이렇게 다루기 조심스러울까. 유리 구슬 같다. 눈동자도 그렇고 하는 짓도 그렇다. 자칫 부주의했다간 흠집이 생기거나 깨져버릴 것 같다.

 

태형은 한 살 짜리가 아니라 스물 한 살이다. 성인이 된 놈을 데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안절부절. 석진은 지금 자신의 불안한 심정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태형아, 그냥... 음... 이건 널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라 더 친해지자고 하는... 가벼운 장난 같은 거야. 너도 나중에 이런 거 하게 될 걸?”

“................”

 

“속인 건 미안해. 근데 네가 너무 그러고 있으면 보는 우리가 미안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어?”

“김석진 상병님이 저랑 동기시라는 게... 너무 좋았는데...”

 

김태형 목소리는 정말 이상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간질거린다.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노란 병아리 떼가 떠오른다. 그 병아리 떼를 한꺼번에 가슴에 안은 기분이다. 품 속에서 애처롭게 삐약삐약. 병아리 치고는 좀 크긴 하지만, 어쨌든 하는 짓을 보면 알에서 갓 깬 병아리나 다를 게 없다. 

이해는 한다. 처음 자대에 전입 왔을 때 가장 불안하고 두렵다. 낯선 세상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던져진 것이니까. 게다가 보이는 사람들 모두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운 윗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등병 시절에는 유달리 동기들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석진 역시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신병 놀이 끝에 이렇게 풀이 죽은 이등병은 처음이다.

 

“동기 아니면 어때? 어차피 너랑 나랑 같은 생활관에 있고 어? 같이 밥도 먹을 수 있고! 충분히 동기처럼 지낼 수 있... 은 아니구나. 미안”

 

그래, 지민이라면 몰라도 난 아니지. 일 년 차이 나는 선임이 얼마나 어려운 사람인지 석진도 잘 안다. 자고로 일 년 정도 차이나는 고참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법이라고, 얼마나 귀가 따갑도록 교육을 받았던가.

 

하지만 태형이 이렇듯 시들해져 있는 모습을, 석진은 도저히 보고 있기가 힘이 든다. 달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틀 정도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그새 정이 든 모양이다. 다시금 학교 앞에 팔던 노오란 병아리를 떠올린다. 연민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한 마리 사서 집에 데려 온 적도 있다. 물론 그 병아리는 얼마 못 가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석진은 결국 또 한 마리의 병아리를 입양해 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잘 키워 보자. 어릴 때는 병아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몰랐다. 그러나 이 김태형 병아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때마침 석진에게는 훌륭한 수탉으로 자랄 병아리 한 마리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태형아, 너 내 부사수 할래?”

“예?”

 

“나랑 같이 일하는 거. 어떠냐?”

“........... 헤.. 좋습니다”

 

뭐야, 엄청 토라진 것도 아니었잖아. 금세 개나리처럼 웃는 김태형. 그러나 그렇게 쉽게 웃어 준 덕분에 석진의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래, 까짓 거 내가 책임지지 뭐. 형만 잘 따라 와라 병아리야 - 석진은 웃는 태형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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