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기숙사 한가운데로 꽂힌다. 맷과 나의 사이를 가로질러 길게 드리우는 햇살에 방안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보이는 것들을 보다가 시선을 옮겨 침대에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거의 파묻고 잠들어 있는 맷의 얼굴을 바라봤다. 잘생겼으니까, 자주 보면 좋으니까, 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친구들의 말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내가 정말 쟤를 좋아하나? 하지만 두근 거리는 것도 아니고, 설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면 기분 좋은 정도인데. 이 정도면 그냥 정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닐까? 룸메니까 나 혼자 내적 친밀감 쌓고 그런 거지. 

내 멋대로의 결론을 내고 바르게 누워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본 건너편의 침대에 이불과 팔에 턱선이 거의 가려져 있는 곱게 감은 두 눈은 아직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주말이니 그럴 만도 하지. 


씻고 나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 올 때까지 여전히 자리에 누워있던 맷은 내가 책상에 앉은 지 1시간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천천히 인기척을 보였다. 실은 이대로 1시간 넘게 자리에서 안 일어나면 생사를 확인해야 하나 걱정하려던 참이었는데 바스락 거리다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드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눈부시면 커튼 쳐줄까?" 

"아... 흠흠, 아니야 괜찮아." 


막 자다 깬 탓인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잇는데 그 소리가 제법... 대체 난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지? 생각이란 걸 못 멈추나? 이러니 친구들이 그딴 소리를 하지. 내가 쟤를 좋아하다니, 왜? 잘생긴 거 말고는 나한테 잘해주는 애도 아니고, 친절하거나, 상냥하거나, 따듯한 그런 것도 전혀 모르겠는데. 니들은 얼굴만 보고 사람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사람 좋아할 땐 기본적으로 성격적인 면도 맞아야 하는 거야.


"오늘은 안 나갔네." 

"응?" 

"주말이잖아.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없었던 것 같아서." 

"아... 응. 시험기간 이잖아." 

"하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비적비적 걸어간다. 근데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나? 아니지 없지. 네 말대로 난 주말엔 항상 새벽부터 놀기 바빴으니까. 그런데 그걸 인식하고 있었... 아니 당연히 알만하지. 룸메이트잖아. 아침에 눈을 떴는데 내가 없는걸 여러 번 봤으니까 인식이야 당연히 했겠지. 안 되겠다 피터 파커 생각을 멈추자. 공부를 해, 공부를 해야 돼. 샤워기 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눈앞의 과제가 중요하다. 모레가 마감이다. 마감 마감.... 


"저기..." 

"어?" 

"나 수건을 들고 오는 걸 깜빡해서. 내 침대 밑에 서랍에 있는데 하나 갖다 줄 수 있어?" 


아주 조금 열려 있는 욕실 문 사이로 눈만 내놓고 수건을 가져다 달라는 소리를 한다. 


"어, 잠깐만." 


그의 부탁대로 침대 아래의 서랍을 열자 나와는 달리 아주 깔끔하게 잘 정리된 옷가지와 수건들이 보인다. 얘는 이런 정리를 무슨 시간에 어떻게 하는 걸까.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보이는 흰 수건을 들고 욕실 앞으로 다가가자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지 맨 팔이 나와 수건을 가져간다.


"고마워." 

"뭐, 별말씀을." 


욕실 문이 다시 닫히고 그 앞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망할 놈의 친구들은 왜 그딴 소리를 해서 별 것도 아닌 상황도 신경 쓰게 하는 걸까. 내가 진짜 다신 맷 얘기 안 한다. 절대 안 해! 





"하아..." / "에휴..." 


나란히 각자의 책상에 앉아 동시에 뱉어낸 한숨에 서로 눈이 마주치고 '피식'소리를 내고 웃었다.

 

우린 원래 대화가 많은 사이가 아니다. 실은 '우리'랄 것도 없을 정도로 그저 얼굴만 아는 그런 사이. 어디 가서 '친구냐'라고 누군가 물어도 '친구까진 아니고 그냥 룸메이트'로 퉁쳐질 만한 관계였다. 그런 관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호감도 없는 담백한 관계에서.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각자의 공부 나 과제를 하고 있었고 몇 시간째 아무 말도 없는 상태였다. 피터는 중간중간 뭔가를 바스락 거리면서 먹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와 마시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공부를 하면서도 뭔가를 많이 까딱이는 편이었다. 좀 거슬리긴 했지만 과제를 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라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동시에 터져 나온 한숨엔 별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너는 왜?" 

"과제 때문에. 너는?" 

"나도. 하필 전공 과제." 

"나도." 


나의 대답에 피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노트북을 살피는가 싶더니 잡고 있던 마우스를 '탁'소리를 내며 책상을 살짝 치고 아예 의자를 돌려 나를 향해 앉는다. 그래, 네가 어떻게 조용히 있겠니. 뭐라도 말을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아마 입에 거미줄이 쳐질 거야. 


"전공 과제가 뭔데?" 

"... 내 거?" 

"응." 

"왜?" 

"나 지금 리프레쉬가 필요해. 내 거 말고 남의 거 고민해볼래." 


피터의 말에 버릇처럼 입술을 삐죽이다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실은 나도 리프레쉬가 필요하긴 했으니까. 


"바닥면을 최소화한 안정적인 조형물에 대한 이론과 예시." 

"..... 뭐야, 무슨 말이야 그게." 


흥미를 가지고 반짝이던 두 눈이 멍청해지며 고개를 뒤로 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의 표정이 재밌어 살짝 웃다가 그가 알아들을 만한 말로 조금 쉽게 풀어냈다.


"역피라미드 구조 같은 거지. 위로 갈수록 부피와 무게가 커지는 조형물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균형을 잘 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무게 균형점은 어디에 있는가." 

".... 굉장히 물리학처럼 들리는데 내가 오해하는 건가." 

"하하, 아니야. 우리 과 애들도 다 같은 얘기야." 

"실제로 구현도 해야 돼?" 

"선정되면. 이번 학기는 선정작을 뽑고 다음 학기에 팀으로 실물 제작해야 돼." 

"흠...." 


진짜로 고민을 하듯 의자에 뒤로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든다. 한참을 고민하다 버릇인지 입술을 쭉 내밀고 윗입술 위로 펜을 올려놓는 것에 나도 모르게 '피식'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손톱을 뜯는 사람도 있고, 연필 뒤쪽 지우개를 씹는 사람도 있다는데 아무래도 피터는 입술 위에 펜을 올려놓는 게 그 버릇인 듯했다. 그 모습이 재밌어 웃고 있으니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기에 나 역시 손에 있던 펜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의자를 돌려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과제는 뭔데?" 


아이디어도 없는데 그냥 수다나 떨 생각으로.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공대생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자율주행 2단계에서 전방 추돌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즉각적인 아이디어." 

".... 자율주행 2단계가 뭔데?" 

"부분 자동화 단계. 특정 조건을 충족했을 때 차량의 조향과 가감속을 차와 인간이 동시에 제어할 수 있는 단계. 사실상 지금 시장에 있는 자율주행 모드 최고 단계 갸 2단계야."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전방 추돌 사고에 대한 아이디어는 왜?" 

"실질적으로 2단계가 시장에 도입되면서 운전자들의 긴장도가 떨어졌고 전방주시 의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거든. 그렇다 하더라도 전방에 충돌 위험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속도 제어가 되어야 하는데 전속력으로 전방에 추돌하는 사고가 좀 있었거든." 


대학생이 연구하는 과제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내 과제를 들었을 때 피터의 기분도 이랬을까. 리프레쉬는커녕 우리는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만 분명해졌다. 


"전방 장애물을 센서가 감지하지 못한 건가?" 

"뭐, 그렇지." 

"장애물의 특징은?" 

"흰색." 

".... 흰색?" 

"응. 트럭 인적도 있고, 일반 승용차였던 적도 있어. 그런데 색으로는 지정을 못하거든. 붉은색 이러면 노을이랑 상충할 거고, 파란색 이러면 하늘이랑 상충하니까, 잠수함에서 쓰는 음파탐지를 달아야 하는 거 아니냐 했는데 바닷속은 다른 소음이 별로 없으니까 가능한 거고 도로에선 어렵지. 누가 옆에서 클락션만 울려도 교란되니까." 

"실제로 구현 가능해야 한다는 거네." 

"응. 아마 학기말에 테스트도 해볼 거야. 그러니까 예산도 맞아야 돼." 

"흠...." 


확실히 내 과제보단 남의 과제를 고민하는 쪽이 더 재밌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에겐 책임이 없으니 아무 말이나 뱉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잡다한 상식들을 꺼내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영역 과는 도무지 아무런 상관없는 이 과제는 무책임한 실언을 뱉을만한 기회도 없어 보였다. 각자 리프레쉬가 필요하다며 서로의 과제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고민을 더하고 있는 꼴이라니. 책상에 기댄 팔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피터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예 매달면 어때?" 

"... 어? 뭘?" 

"조형물 말이야. 바닥면을 최소화한다고 하는데 결국 한계가 있을 거란 말이지. 그리고 조형물은 돌 아니면 청동으로 하던데 그 무게를 버티자면 사방에 버팀목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럴수록 바닥면은 늘어나는 거고, 어떤 조형물이든 보통 3개의 버팀목은 필요하잖아. 무게 균형을 잡으려면." 


허공에 손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을 시작하는 피터의 이야기가 제법 흥미로웠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가 신나보이기도 했고. 


"야외라는 전제조건은 없지?" 

"그런 전제는 없어." 

"그럼 실내라고 하자. 어차피 전시를 하더라도 실내에서 할 거 아냐?" 

"교내에서 할 건데 모르지." 

"그럼 장소를 네가 선정해. 이스트 브리지에서 해버리겠다고 하거나, 켄트 홀에서 한다고 해버려." 


생각도 못해본 대담함이었다. 켄트 홀이라니, 거기서 미대생의 학기말 과제를 하라는 발상은 얼마나 창의적이어야 할 수 있는 걸까? 


"하하하. 그게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주지 않은 교수님 책임이지. 아무튼 그리고 행잉 해버려. 그럼 바닥면에 아예 안 닿잖아. 꼭 닿아야 한다고 하면 전체 조형물의 가장 아래 조각을 세밀하게 세공해서 바닥면에 붙게 하는 거지. 아, 그리고 그러려면 천장이 버텨야 하니까 전시 공간의 건축 하중을 미리 좀 알아야겠다. 아예 샹들리에처럼 조각을 내서 작은 피스로 나눠 붙이면 천장에 부담되는 무게까지 분산시킬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럴법한 얘기였다. 바닥면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지 매달지 말라는 다른 조건들은 없었으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노트에 간단한 스케치와 메모를 하고 있으니 피터가 다시 옆에서 꽤 쓸만하냐고 물어온다. 


"응. 괜찮은 것 같아. 이걸로 설계해야겠다." 

"이렇게 간단한걸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야?" 


팔짱을 끼고 으스대듯 말하는 그를 짧은 한숨과 함께 바라보니 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에 그만 '피식'하는 웃음을 흘렸다. 나도 뭔가를 줘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면허도 없고, 운전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아는 건 그저 신호등과 교통표지판뿐인데... 아! 


"반사도료." 

"어?" 

"고굴절 반사재의 원리를 이용한 특수 재료가 있어. 물체의 식별이 곤란할 때 식별이 용이하도록 설계된 특수도료인데 도로 교통 표지판에 많이 쓰여. 난반사가 많은 낮시간엔 흰색으로 보이는데 조명이 닿으면 마치 그 자리에 led 조명이라도 넣은 것처럼 눈부시게 보이거든. 그걸 흰색 차량 뒷면에 반드시 바르게 하면 어때? 다만 밤에는 많이 눈부실 수 있으니까 센서가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바르는 거야." 

"네 말대로면 표지판 하고 어떻게 구분해?" 

"AI가 텍스트를 인식하는 기능이 있지 않아? 텍스트를 배제하도록 명령어를 넣을 수는 없나?" 

"있지!" 

"센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빛을 쏘고 반사해서 읽는 방식이면 낮에도 용이하게 구분할 수 있을 거야." 


대답도 없이 노트북으로 검색을 시작한 피터가 몇 개의 페이지를 빠르게 복사해 친구들과의 작업창에 넘기고 간단한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간단한걸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가 말한 대로 흉내를 내며 으스대듯 하니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피터가 '푸하하' 하는 큰 웃음소리를 냈다. 


"이야,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그런 거라니?" 

"넌 왠지 그런 장난 안칠 것 같았거든." 

"그러면?" 

"굉장히 근엄하게 앉아서..." 


갑자기 의자에 바르게 앉는 피터가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인사라도 하듯 손짓을 까딱였다. 


"뭐한 건데?" 

"너 처음에 나한테 이렇게 인사했어." 

"내가?" 

"응."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하는 피터가 다시 웃음소리를 내다가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더니 이내 과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근데 내가 저렇게 무뚝뚝하게 인사를 한 적이 있나? 기억도 나지 않는 얘기를 해놓고 마치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신의 과제에 빠진 그를 보다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나의 과제를 붙잡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차가운 인사를 했는데도 너는 나에게 한결같이 대해줬다는 건가. 그럼 혹시 내가 너를 귀찮아했던 것도 알고 있는 걸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돌아봤지만 그는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뭐, 아무리 그렇다 한들 대화도 관심사도 천지차이인 우리가 어떻게 친해질 수 있겠냐만 어쩌면 생각보다 좀 더 좋은 녀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스름한 새벽 저절로 눈이 뜨였다. 어쩐지 꼼꼼히 닫혀있는 커튼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았지만 커튼에 푸른빛이 비치는 걸 봐선 또 이른 새벽녘이겠지.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여지없이 5시 28분이다. 이런 이상한 시간에 깨고 나면 꼭 다시 자기가 어려웠다. 자세를 옆으로 돌려 건너편 침대에 누워있는, 누워있다기 보단 구겨져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은 피터가 침대 헤드 쪽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덮고 있던 이불을 부여잡고 새근새근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저렇게 자면 불편할 것 같은데 괜찮은가. 곱게 감은 두 눈과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이불을 부여잡고 있는 게 꼭 어린애 같아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창밖에 어렴풋이 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건너편 침대에선 고른 숨소리가 넘어온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피터를 향한 채로 그의 숨소리를 따라 숨을 쉬었다. 잠들기 어려운 새벽인데도 저절로 눈이 감긴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포근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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