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고개를 조금 숙이고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승관의 동그란 머리통을 물끄러미 노려보다가 민규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눈꼬리를 비비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새로 샀는지 민규가 처음 보는 옷, 분주하게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꼴이 딱... 그 소개팅 했다는 새끼 만나러 가게 생긴 꼴이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오늘 승관과 카페에 마주 앉은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승관이 소개팅한 뒤 민규를 만난 날 남자를 그다지 나쁘게 말하지 않았을 때부터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의문인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이런 타입이 좋아? 물었을 땐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던 걸 보면 외모가 취향인 건 아닌 거 같은데. 실제로 만났을 땐 엄청 매너 있고 괜찮은 사람이었나? 부승관 반응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데 굳이 왜 또 만나는 거지. 그쪽에서 애프터 온다고 해도 당연히 거절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승관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무심코 손톱을 살짝 물어뜯었다. 너 또. 민규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승관에게 으름장을 놨다. 승관이 움찔 놀라 손을 내리고 머쓱하게 몇 번 쥐었다 폈다. 승관이 저렇게 손톱을 물어뜯을 땐 보통 초조하거나 생각에 잠길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민규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승관을 응시했다. 과연 승관은 조금 뒤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형 뭐 더 할 일 있어?"

"어?"

"아니면 먼저 가." 


민규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안 그래도 심사가 다소 꼬여 있었는데, 승관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명백한 축객령에 기분이 확 상했다. 민규는 저도 모르게 잔뜩 험악한 시비조로 반문했다.


"쫓아내냐, 지금? 나 가라고?"

"아, 아니..."

"왜 가라 마라야."


이 정도로 뾰족하게 날 선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듯 승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박이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이제 약속 있으니까..."

"..."

"혹시 형 더 할 거 없으면 먼저 가도 된다고..."


나 때문에 안 앉아 있어도 된다고... 승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적잖이 당황한 승관의 얼굴을 보자 민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걸로 혼자 꽁해 있다가 승관에게 화풀이를 한 꼴이었다. 가뜩이나 부승관, 남의 말과 행동에 신경 많이 쓰고 고민도 많이 하는데. 한참 머쓱하게 눈을 굴리던 민규가 고민 끝에 승관의 손끝을 살짝 쥐었다. 승관의 약지 손톱을 엄지로 살살 쓸면서 민규는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너 오늘 걔 만나러 가지."


모호한 대명사였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민규와 승관 둘 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엉."


승관이 살짝 웃으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렇게 다정하게 구슬리겠다고 다짐해놓고, 저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승관의 얼굴을 보자 괜히 또 기분이 상해서 민규는 아예 의자를 당겨 앉으며 편한 자세로 테이블에 엎드리듯 기댔다. 왜? 나랑 있다가 걔 오면 가면 되잖아. 나지막한 민규의 목소리에 승관이 당황스럽다는 듯 민규에게 잡히지 않은 왼손으로 뺨을 감싸서 매만졌다. 입술을 들썩이며 한참 말을 고르던 승관이 말했다.


"좀... 아, 모르겠네. 내가 남자 좋아해서 이상하게 느끼는 건가?"

"뭘?"

"근데 형도 소개팅 상대 만나러 가는데. 그 여자분이 남사친이랑 둘이 같이 있으면 조금... 그렇지 않겠어?"


승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그래서 민규는 더 속이 마구 뒤틀렸다. 상대를 잠정적인 연애 상대로 보고... 아니, 잠정적이 아니라 그냥 그거지, 뭐. 어쨌든 그렇게 그 새끼를 배려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저를 얼른 치워야 할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순간 민규는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서운해졌다. 우리가 그렇게 그저 남사친으로 정의될 만한 사이야? 흔하디흔한, 발에 채게 많은 그냥 친구 사이? 격앙된 감정을 갈무리하려 긴 한숨을 내쉬고, 민규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줘서 말했다.


"뭐 어때. 우리 사이에."


승관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표정이 왜 저래. 승관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민규가 고심하고 있는 사이, 민규의 말을 한참 곱씹은 승관이 이내 민규를 물끄러미 보면서 살짝 웃었다.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왜 이렇게 시원찮게 느껴질까. 민규가 어렴풋이 생각한 동시에 승관이 대답했다.


"그치. 형이랑 나랑 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뭐가 있긴 있지? 근데 그냥... 그런 사이 아니잖아. 우리."


당황스러워서 민규는 허리를 세워 똑바로 앉았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굳이 승관의 오해를 정정해 주는 것도 조금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고, 또 구구절절 제 의도를 설명하자니 민망하게 느껴져서 민규는 우물쭈물 승관을 바라보았다.


그때 승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에 민규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예감대로 사진으로만 봤던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승관이 마치 민규의 손을 뿌리치듯 제 손을 물리는 거에 또 괜스레 마음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민규도 승관을 따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승관을 발견하고 저벅저벅 걸어온 남자가 자연스럽게 승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승관에게 가볍게 웃으며 인사한 다음, 남자는 맞은편에 앉은 민규를 슬쩍 보았다. 민규는 애써 친근해 보이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했다.


"안녕하세요. 김민규입니다. 승관이 친구예요. 제일 친한."

"아... 네. 송제성입니다."


민규는 남자를 골똘히 응시했다. 애써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처음부터 색안경을 쓰고 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하지만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별로였다. 이목구비가 못난 건 아닌데, 숨길 수 없는 허세와 건들거리는 날티 때문에 그런지 인상이 너무 안 좋아서 얼굴이 더 못나 보였다. 게다가 탁한 눈빛으로, 민규를 잔뜩 경계하듯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마저도 기분이 나빠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이름 세글자마저도 재수 없게 느껴졌다. 민규는 당장이라도 승관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고 너는 이런 새끼 어디가 좋은데? 하고 삐딱하게 따지고 싶어졌다.


그러나 마음이야 어쨌든, 처음 본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아무리 민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승관이 선택했다면... 선택한 상대니까. 민규는 자꾸 삐딱하게 토라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애써 웃으며 사근사근 말했다.


"저녁 먹으러 가?"

"으응."

"뭐 먹으러 갈 거야?"


굳이 궁금하지 않은 저녁 메뉴를 물어본 건 사실 어떻게든 대화를 끊지 않고 이어 나가서, 둘이 함께 나가는 시간을 조금 늦춰보려는 떳떳하지 못한 속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민규의 그런 속셈을 제성이 알 리 없지만, 혹여나 알고 제성이 기분 상해 해도 뭐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는데. 


"글쎄요. 그건 저희 둘이서 차차 생각해 보려고요."


하지만 승관과 대화하고 있는데 그 질문의 말허리를 끊고 대답을 가로채는 건 예상 밖이었다. 민규가 얼떨떨하게 제성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답을 고민했지만, 제성은 민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어나면서 승관을 살짝 잡아 끌었다. 가자, 승관아. 승관의 손목을 잡아 끄는 손짓도, 말투마저도 고압적으로 느껴져서 민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제성이 인사하는 둥 마는 둥 민규를 보지도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시늉만 했고, 승관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민규를 보더니 '내일 봐.' 하고 인사한 뒤 남자를 따라 카페를 나섰다. 민규는 카페 통유리를 통해 둘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눈도 떼지 않고 보았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승관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드는데, 눈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꾸만 떠올라서 머리가 터질 거 같아진다. 민규는 연신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한참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쿵쾅쿵쾅 뛰는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민규는 결국, 컵에 조금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예 원샷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왠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거 진짜 기분 더럽네.



-



수업이 끝난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가 민규의 팔을 툭 쳤다.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돌아보니 윤수가 환하게 웃으면서 민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난 또... 민규는 입꼬리를 둥글게 끌어올려 빙그레 웃었다. 붙임성 좋게 '안녕하세요.'하고 꾸벅 인사한 윤수가 자연스럽게 민규의 옆에 나란히 붙어 섰다.


"너도 여기서 수업 들어?"

"네, 선배도 지금 수업 끝나셨어요?"

"응. 전공... 너는?"

"저 경제학원론이요."

"아... 전필? 나 저번 학기에 들었는데. 최민철 교수님?"


어, 네. 윤수의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우르르 몰려 기다리고 있어서 멍하니 있다간 엘리베이터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닭 쫓던 개 모양새가 되기 십상이었다. 민규는 재빨리 윤수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인파를 비집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고개 돌릴 틈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민규가 윤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으니 사람들이 내리고 타느라 움직이는 사이 어느새 윤수는 민규와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머쓱한 듯 눈을 살짝 굴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윤수를 보며 민규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윤수를 마냥 어린 스무 살 새내기로 봐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안절부절못하는 윤수가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지금 말 걸면 기절하는 거 아니야? 민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수야."

"어어. 네."

"나 경제학원론. 아는 누나한테 받았던 족보 있을 텐데. 찾아보고 있으면 줄까?"

"와, 진짜요?"


언제 눈치 보며 당황했냐는 듯 민규를 보는 윤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민규는 이제 웃음을 참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아, 진짜 귀엽네. 꼭 꼬리 흔드는 어린 강아지 같기도 하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자 사람들이 터진 자루에서 쏟아져 나오듯 우르르 로비로 걸어 나왔다. 로비를 지나 경제관 정문으로 나왔을 때 윤수가 물었다.


"선배 이제 점심 드시러 가세요?"

"응."

"혹시 따로 약속 없으시면 저랑 같이 드실래요? 저번에 밥 사주신 것도 감사하고... 제가 살게요."


조잘조잘 말하는 윤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민규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네가 사긴 뭘 사. 새내기들은 어디 가서 지갑 열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다음에 형이... 입에 발린 인사치레를 하던 민규가 살짝 머뭇거렸다. 이렇게 말하면 좀... 완곡한 거절이 되는 거 아닌가? 그 순간 떠오른 건 승관의 조금 한심한 듯한 얼굴과 저를 채근하던 승관의 말이었다. 김민규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숙맥이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질질 끌고 있어? 


한번 떠오른 승관의 얼굴은 떨쳐내려고 해도 민규의 시야에 둥둥 떠다녔다. 승관의 얼굴을 자꾸만 생각하니 민규는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가? 아무래도 내가 같은 남자라고, 너무 재고 무서워했던 걸까? 승관의 말을 곱씹어 보니 정말 자기가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도 같아서, 민규는 하려던 말 대신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같이 밥 먹을까?"

"네! 뭐 먹으러 갈까요? 선배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나 아무거나 잘 먹어.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


네가 사는 건데. 키득키득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물론 윤수가 계산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뭘 먹으러 갈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윤수를 보며 민규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무슨 선배라고 해. 딱딱하게... 그냥 형이라고 불러.' 민규의 말에 윤수가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배시시 웃었다. 네, 형.


경제관 앞 긴 산책로를 지나 정문으로 난 큰길로 향하던 민규가 별안간 우뚝 멈춰서서 어, 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테이블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밝은 갈색의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익숙했다.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와서, 민규는 윤수를 돌아보며 눈짓했다. 잠깐 인사 하고 가자. 그리고 윤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승관에게 걸어갔다.


부슬부슬한 머리칼 사이로 민규가 손을 넣어 간지럽히듯 쓰다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관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민규의 얼굴을 확인한 뒤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뭐야. 놀랐잖아..."


승관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가볍게 투정했다. 그리고 민규의 손을 살짝 감싸 쥐어 머리에서 내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승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안녕하세요.'하고 제게 인사하는 낯선 목소리에 승관은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민규와 윤수를 번갈아 보다가 어. 어떻게 둘이 같이 와?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받아주며 어정쩡하게 잡고 있던 민규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멋진 선배인 척 윤수에게 다정하게 대답하면서도 승관의 매서운 눈초리는 민규를 향해 있었다. 자꾸만 윤수를 곁눈질하며 민규에게 눈짓하는 모양새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왜 둘이 가던 길 안 가고 제게 알은체를 하느냐는 무언의 항의임은 알 수 있었다. 민규가 앉으려고 눈치를 봤는데 기어코 자기가 앉아 있는 옆자리 짐을 치우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민규는 승관의 시그널을 눈치채지 못한 척 승관의 맞은편 벤치에 앉았고, 자연스레 윤수가 민규의 옆에 따라 앉았다. 


"어디 가?"

"점심 먹으러."

"둘이?"

"응... 너는 밥 먹었어?"

"아니, 아직 안 먹었지."

"너도 같이 갈래?"


승관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민규를 잠시 째려보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 둘이 가. 나도 약속 있어. 그러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괜스레 바쁜 척을 했다. 민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승관을 보았다. 저거 누가 봐도 핑계인데. 나랑 윤수 둘이 밥 먹으라고 일부러 빠져 주는... 꼭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승관이 왜 안 가냐는 듯 자꾸만 눈치를 줬지만, 민규는 시치미를 떼고 꿋꿋이 자리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셋이 함께 있다 보니 화제는 주로 동아리 이야기였다. 이번에 정기 답사 얼마나 간대? 생각보다 많이는 안 가는 거 같은데. 이번에 루트 재밌어 보이던데... 회장 힘 빠지겠네. 윤수야, 네가 같이 많이 가자고 해봐...


그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민규가 불현듯 '맞다, 회장이 숙소 예약한 거 뭐 확인해 달라고 했는데.'라며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인터넷 창을 열었다. 민규가 마지막으로 보던 페이지가 화면에 떴다. 학교 근처에 새로 생겼다는 베이커리 카페를 리뷰한 블로그 글이었다. 윤수가 반색하며 민규에게 말했다.


"어, 여기 저도 지나가면서 궁금했었는데. 형 이따가 밥 먹고 여기 한번 가 보실래요?"


민규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승관을 힐끔 보았다. 승관은 물끄러미 핸드폰을 함께 보다가, 민규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걸 느끼고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민규는 난감함에 입술을 혀로 살짝 쓸었다. 어떻게 말해. 지나가다가 보고...  빵 좋아하는 부승관이 환장할 거 같아서 찾아본 거라는 걸. 


한번 갔다고 다시 못 가는 곳도 아니고 윤수와 먼저 가도 아무 상관 없는데도, 괜스레 마음이 좀 이상했다. 어떤 장소든 두 번째, 세 번째로 가는 것보다 처음 갔을 때의 첫인상이 언제나 가장 강렬하기 마련이고, 그 첫인상과 감상을 동행인과 함께 공유하는 건 생각보다 의미 있는 일이니까. 게다가 온전히 승관만을 생각하면서 찾아보았던 장소에 정작 승관이 함께 가지 못한다면 더욱. 그래서 민규는 망설임 끝에 승관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 가."


승관이 이제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도 못한 채 민규를 보았다. 눈동자에 '너 미쳤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서 손사래까지 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다.


"아니, 괜찮아. 됐어. 나 오늘 커피 많이 마셨어. 둘이 가."


구구절절 말을 덧붙이며 늘이는 게 제법 간곡하게까지 느껴졌지만, 민규도 쉽게 포기할 거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승관이 자꾸만 윤수 쪽을 살피며 한사코 거절하고 있어서 더 삐딱한 반발심이 솟구쳤다. 내가 너에게 물어봤는데, 왜 윤수 눈치를 보고 있어?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면 되지. 민규가 승관을 지그시 보다가, 아예 손목까지 붙잡아서 살짝 끌어당겼다.


"왜, 같이 가자."


승관이 난처하게 땀을 뻘뻘 흘리다가, 손목이 붙잡히자 금방이라도 욕할 것 같은 표정으로 민규를 보았다. 그 순간 승관의 핸드폰이 울렸다. 승관이 그 커다란 손으로 액정을 반쯤 가려서 발신자의 이름을 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이 형'이라는 뒷글자를 보자 민규는 발신자가 누군지 왠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순간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어, 네. 형. 아... 어 진짜요? 정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길게 빼 보이지도 않는 정문 쪽을 보는 꼴이, 굳이 승관에게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 새끼 왔나 보네. 민규는 이제 구겨지는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승관을 보았다. 민규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면 꼭 신경 안 쓰는 척해도 저를 신경 써 주던 승관이었는데, 제 표정이 이렇게 굳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승관은 다급하게 민규에게 입 모양으로 '제성이 형'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심술을 부리며 승관의 손목을 더 꽉 붙잡고 싶었지만, 곧 그것도 다 의미 없단 생각에 민규는 조금 허무해졌다. 민규가 힘없이 승관의 손목을 놓았다.


살짝 귀에서 핸드폰을 떼며 '가, 다음에 봐.' 하고 인사하는 승관에게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민규는 잔뜩 가라앉은 기분으로 윤수와 터덜터덜 정문을 향해 걸어 내려왔다. 윤수가 계속 민규의 눈치를 보며 자꾸만 말을 걸었다. 순간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짙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윤수를 앉혀 놓고 배려 없이 승관과 이야기했고, 어린 애 앞에서 어른스럽지 못하게 기분대로 행동했다. 깊게 반성하며, 민규는 애써 미소를 짓고 윤수에게 밝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옅은 우울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샤워를 하고 나와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승관은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제성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와 있었다. 메시지를 한참 읽다가, 답장할 기력이 없어서 승관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카톡을 꺼 버렸다. 구구절절 말은 길지만 핵심은 간결했다. 형이 좀 급하게 생각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


잠깐 학교 앞에 왔다고 하길래, 사실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었다. 핑계야 뭐 만들자면 많으니까. 하지만 민규가 조금 미친 사람같이 구는 통에 일종의 도피처럼 자포자기해서 제성을 만나러 갔다. 말은 뭐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다더니, 그다음부터는 계속 같이 있자고 끈질기게 질척였다. 저녁에 혹시 약속 있냐, 술 마시지 않겠냐 따위의 말을 한참 하더니 마치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아, 승관이 자취한다고 했었지?' 하고 반색하더니 노골적으로 승관의 집에 함께 오고 싶은 티를 냈다.


승관은 이런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럴 줄 알고, 이런 걸 감안하고 소개 받은 거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난 지 두 번 만에 베드인은 빨라도 너무 빨랐고, 또 결정적으로 승관이 영 내키지 않았다. 처음도 아니고, 뭐 언제부터 그렇게 절절하게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잤다고. 심지어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지 정말 오랜만인데도... 그런데도 제성과는 정말 아닌 것 같았다.


헤어드라이어를 꺼내 전원을 켜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문득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 승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럴 리 없는데. 설마 제성이 형이 우리 집을 아나? 안 알려줬는데? 대답도 못하고 굳어서 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승관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놀란 심장을 겨우 부여잡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화면엔 '김민규' 세 글자가 떠 있었다.


바깥에 들리는 건 아니겠지. 승관은 최대한 현관문에서 멀리 떨어져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숨죽여 대답했다.


"여보세요?"

"...너 집 아니야?"


민규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승관은 눈치 빠르게 현관문 밖에 서 있는 미지의 방문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 난 또... 승관은 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고,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민규가 생각에 잠긴 듯 복잡한 표정으로 밖에 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인상을 굳히는 것 같더니, 곧 편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승관을 확인하자 곧 얼굴이 사르르 풀어져서 환하게 웃음 지었다.


"왜 집에 있으면서 문을 안 열어? 또 옷 갈아입고 있었다고 핑계 댈 거야?"

"아... 누군지 어떻게 알고 문을 열어."

"너희 집에 이렇게 불쑥 쳐들어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민규가 피식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승관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거야 그렇지... 이렇게 남의 공간에 예고도 없이 훅 밀고 들어와도 화내지 못하고 마냥 받아줄 수 있는 거 김민규 말고는 잘 없지. 긴장 뒤 느낀 안도감이 가시고 나니 금세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정윤수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던 민규의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정윤수와 밥도 먹고, 그 분위기 좋은 새로 생긴 카페도 갔으면 좀 더 같이 있지. 아니, 최소한 정윤수를 만나고 나를 만나러 오지나 말지. 


왜 왔어? 퉁명스레 승관이 내뱉었다. 민규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종이봉투를 식탁에 올려놓았다. 승관은 봉투를 열어보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정사각형의 미니케이크 박스와 비닐로 개별포장된 빵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윤수랑 먼저 먹어놓고 선심 쓰듯 옜다 너도 먹어라 던져 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슬금슬금 짜증이 치밀어올라 승관은 뾰족하게 내뱉었다.


"안 먹어. 너 가져가서 먹어."

"아, 왜. 또 다이어트 해?"

"어."

"뭔 다이어트... 너 뺄 데가 어딨다고 자꾸 그래."


민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승관을 물끄러미 보았다. 주기적으로 다이어트랍시고 샐러드나 단백질 셰이크 따위로 식사를 해결하는 승관을 볼 때마다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민규가 머쓱한 손길로 봉지를 한참 뒤적이더니 케이크나 크림이 들어간 빵은 빼고, 딱 절반을 꺼내서 식탁에 늘어놓았다.


"그럼 이거만 먹어. 사 온 성의를 봐서... 너 좋아할 만한 거 골라 왔단 말야."

"..."

"너 여기 좋아할 거 같아서. 너랑 가려고 찾아본 덴데."


민규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중얼거렸다. 원래 나랑 가려고 했었다고? 어쩔 수 없이, 당황스러움보다는 원초적인 기쁨과 뿌듯함이 먼저였다. 승관은 저도 모르게 식탁에 놓인 빵 봉지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래서 아까 나한테 같이 가자고 한 거야?"

"당연하지. 인테리어도 그렇고, 파는 빵도 그렇고... 보자마자 딱 부승관 취향이다, 했는데."


티 내지 않으려 해도 처음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진 승관의 말투에 민규도 조금 기운을 되찾고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승관은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말 나 쉬운 사람이다. 짝사랑하는 상대가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함께 밥 먹고 카페에 갔다가 저를 만나러 왔는데, 그런데도 저를 생각해서 빵을 사 왔고... 다른 사람보다 저를 먼저 생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승관은 개별 포장된 에그타르트를 집어 들었다. 언제 승관을 타박했냐는 듯 민규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성화를 부렸다. 어, 야. 에그타르트 진짜 맛있어. 우리 갔을 때 딱 새로 구워 나와서 바로 먹어봤는데, 대박. 빨리 먹어 봐. 눈동자까지 빛내며 승관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는 민규 때문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승관은 피식 웃으며 에그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오... 우리 학교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고급스러운 맛."

"그치, 그치."

"맛있다... 거기서 막 나왔을 때 먹었으면 더 맛있었겠네."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할 때 갔어야지. 너 에그타르트가 중요해, 그 새끼가 중요해."


민규가 눈을 가늘게 흘기며 툴툴거렸다. 비교 대상이 되려야 될 수 없는 두 가지를 비교하는 억지를 부리는 민규 때문에 승관은 키득키득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타박이나 했을 텐데, 지금은... 승관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러게, 에그타르트 중요한데. 같이 갈 걸 그랬네."


승관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던 듯 민규가 잠깐 멈칫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민규의 엄지가 자연스럽게 승관의 입가로 다가와 입 주변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털어주었다. 승관도 익숙한 듯 민규의 손길에 얼굴을 맡긴 뒤, 남은 에그타르트 조각을 입에 넣고 말했다.


"고마워. 나 생각해서 사 오고."

"말로만?"


민규가 짐짓 토라진 척 입을 삐죽이며 승관에게 농담했다. 뭐, 돈이라도 줄까? 하고 키득키득 웃는 승관에게 '진짜 너는 사람을 쓰레기로 만드는 데 뭐 있다.' 하고 대답한 뒤 야무진 손놀림으로 사 온 빵을 정리하는 민규를 가만히 보다가, 승관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리고 살짝 까치발을 해서 민규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까만 점이 콕 박힌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부딪쳤다.


민규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승관을 내려다 보았다. 민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승관의 입술이 닿은 뺨을 살짝 감싸고 있었다. 얼빠진 민규의 얼굴을 보며 승관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거는 안 돼? 탈락이야? 농담하는 승관을 멍하니 보다가 민규가 '아...' 하고 한숨 같은 탄식을 내쉬었다. 그리고 승관의 뺨을 두 손으로 붙잡고 조금 급하다 싶을 정도로 입을 맞춰 왔다.


잠깐, 잠깐마안...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승관이 몸을 빼는 시늉을 했지만, 그때마다 민규는 승관의 등을 감싼 손에 힘을 줘서 승관을 꽉 붙잡고 날개뼈부터 척추, 등허리를 살살 더듬었다. 민규의 손끝이 닿는 부분마다 오싹할 정도로 전기가 올라 승관은 몸을 파르르 떨며 민규의 양 허리를 꽉 붙잡았다가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벽에 등을, 어깨를 부딪혀가며 정신없이 키스하다가 민규의 정강이에 침대 프레임이 닿았다. 민규는 자연스럽게 승관의 허리를 꼭 안은 채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민규가 승관의 등을 천천히 쓸어 내리다가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꾹 쥐었다. 그 순간, 승관이 흠칫 놀라더니 부스스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여기서 승관이 다시 민규를 끌어안고 입 맞추면 자연스레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 그건... 승관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건 아무래도 아직 안될 것 같았다. 아직인지, 어쩌면 영원히일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승관은 애써 숨을 고르고, 최대한 태연하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어.. 형 오늘 수업 다 끝났지. 이따가 갈 거야? 저녁... 저녁 먹고 갈거야? 뭐 먹을래?"


누가 봐도 어색함을 이겨내려고 아무 말이나 주절대고 있는 승관을, 민규가 진지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곧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짓고 승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 저녁 먹고 갈래. 나 좀 씻어도 돼?"

"으응."


 민규가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갔고 승관은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침대에 푹 엎어졌다.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게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민규가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해졌다. 최소한 김민규는, 지금껏 자각 못한 바이섹슈얼이 분명했다. 승관은 문득 자기가 먼저 말했던 이 연애의 목적을 다시 상기해냈다. 김민규가 진짜 남자도 되는 건지 한번 테스트를 해보자고, 기꺼이 시험 상대가 돼주겠다고 했던 제안. 


김민규도 지금 그 제안을 다시 떠올리고 있을까? 씻고 나온 민규가 산뜻한 얼굴로 '봐, 내가 말했지? 나 남자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하고 관계의 종말을 고하지 않을까? 승관은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 있는 시한부, 가짜 관계에 무슨 불안을 느끼고 있나 싶어져서 아까와 조금 다른 의미로, 괜한 수치심에 얼굴이 훅 붉어졌다.


물소리가 멈추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붉어진 얼굴을 민규에게 보일 수 없어서 승관은 계속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 있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간지 민규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민규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침대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침대맡에 그대로 멈춰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 승관아?"

"...아니."

"아..."


가만히 누워 있어서. 자는 줄 알았어. 민규가 살짝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민규가 승관의 머리에 손을 얹어 살살 쓰다듬었다. 승관은 민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인글 버전에서 부적절한 표현 및 장면을 수정한 버전이며, 내용 전개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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