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blue



작고 정돈된 식물이 액자의 틀처럼 건물을 장식하는 망원동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텐텐은 인테리어가 멋있고 조용한 곳이라 내가 좋아할 거라 말했다. 그의 안목은 항상 탁월했으므로, 이번에도 당연히 카페의 분위기와 맛은 대단할 것이며 중요한 건 얼마나 환상적인 공간과 음료의 맛을 느낄 수 있을지, 그 환희의 단계였다.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의 1단계, 가끔 미소가 걸리는 2단계를 넘어 입구에 늘어져 있는 넓적한 돌과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은 가히 35단계라 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텐텐은 단호하리만큼 번잡스럽고 촌스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탐이 날 정도로 정적이고 고급스러운 것들을 수집한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인 딸기, 블루베리, 천혜향이 각각 올라간 타르트 3개를 그의 집에 머무르는 3일 동안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로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정성과 적당한 핏의 톰보이 재킷의 소매 그리고 지나치지 않은 워싱의 청바지 끝단을 무심하게 접은 모양새는 그의 세계의 구성들로 적절하다.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여유 있게 채운 소품들을 보면 쓸데없는 상상에 빠져든다. 

자기만의 방이 존재하고, 그 곳을 내가 좋아하는(지금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단계지만) 것들로 채운다면 그 공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흥미로운 생각은 가지는 것보다 놓는게 익숙했던 나의 양손에 힘을 싣는다.

박탈감은 옅어졌다. 작고 진한 점으로 찍힌 그것에 친구의 안녕을 바라는 이타성의 물을 한가득 부어서 묽게 만들었다. 험하고 어두운 세상, 소중한 친구가 안락한 둥지를 만드는 걸 고까워할 사람이 있을까? 선택할 수 없는 건 받아들이고, 선택할 수 있는 걸로 나를 채우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가 행복하면 좋겠다는 바람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우리는 정원에 스며드는 달빛을 배경으로 한 채 근황을 배제한 대화를 이어갔다.

텐텐은 가슴을 울렸다는 시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흰 접시에 대해 말하려고 했으나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린 문장 안의 사람이 어떤 심정일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전에 텐텐이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는 말을 떠올리고 매끈한 접시의 끝을 만지는 상상을 했다. 혹여 이가 빠진 접시라면, 그리고 깨진 불투명한 단면을 손톱으로 긁으면 등에 소름이 돋고 이가 시릴테다. 

정면을 돌파하지 않은 벌로 아무도 반기지 않을 서늘한 촉감을 받은 화자를 멀찌감치 구경하고, 내 가슴을 울린 것은 무엇인지 회상했다. 텅 빈 곳간의 문을 닫고, 텐텐에게 요새 읽는 것보다 쓰는 걸 선호한다 말했다. 책을 내기로 4달 전에 결심한 후로, 등 뒤에 무언의 감시자를 세우고 허겁지겁 글의 꼭지를 채우는 중이다.

독서는, 즉 타인이 켜켜이 쌓은 고뇌의 집합을 읽는 행위는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책을 읽으면 이야기를 즐길새 없이 흐름을 분석하고, 단어의 참신함에 질투를 하게 된다. 접속사를 쓰지 않아도 원활하게 흘러가는 문장들의 길목에 서서 검문을 하고 절륜 등의 어려운 단어에게 왜 나의 글에는 놀러 오지 않냐 타박도 한다. 그래서 자꾸 책을 피했다. 알량한 자존심을 세워서 노트북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얼른 멋있어지라고 내 글을 종용했다.

텐텐은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 강조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듣는 조언은 가치 있지만 하기 싫은 걸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알아.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향이 좋다며 윌리엄 블레이크 원두의 커피를 권한 그는 내가 다정한 사람이라 했다. 그를 기분나쁘게 한 나의 말이나 행동이 일말 없다 하였다.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는 그이기에, 담담한 눈빛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유형의 칭찬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다정하다는 칭찬보다 유능하다는 감탄을 더 좋아하는데, 거짓말처럼 마음이 울렸다.

나는 내가 아주 나쁘고, 냉정하고, 시니컬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간 받아온 상처를 외면하기 위해서, 앞으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머리도 가슴도 차가워야 한다 생각했다. 

화이트티를 한 모금 마신 후 바라본 하늘은 (텐텐의 말을 빌리자면) 군청색이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하늘에 진초록의 자욱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짙은 푸른색의 수국을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그렇게 발견되었다.  




얼렁뚱땅 김제로의 진지하고 코믹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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