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5 장

사 랑 은  아 무 것 도  바 라 지  않 는 다

  

 

플로렌스 그룹 총수 율리아노 플로렌스 회장, 전 미대통령 지미 카터의 조카딸과 결혼 발표 임박

 

아직 정확한 공식 기자회견은 없었지만 이미 플로렌스 그룹 본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문이며 거의 확정적...고문 변호사의 긍정적 답변...신부 측 플로렌스 그룹과의 결혼설에 수긍..내달 안에 약혼식..초호화 결혼식이 될 거라는 세간의 이목...율리아노 플로렌스, 거액의 신부를 맞아 더욱 탄탄해질 플로렌스 그룹...

며칠 전엔 FBI 부국장의 딸이 상원의원과 결혼설이 터져 뉴욕 시민들을 흥분에 휩싸이게 하더니 이번엔 플로렌스 그룹의 완벽한 총수의 결혼설이 사실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건 뭐 결혼 붐이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더랬지만 오늘 새벽부터 하늘이 어둡더니 병원 창문 바깥엔 벌써 소나기가 폭우처럼 퍼붓고 있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끝으로 나원은 휴게실에서 일어났다. 결혼설. 결혼. 정략결혼. 그가 결혼을 한다...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선택한다거나 보류한다거나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직과 그룹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었다. 누구보다 플로렌스 그룹 안의 생리를 잘 아는 나원이야말로 그를 이해해야만 했다. 아무런 표정도 지어보일 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걷는 길이 다른 걸.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잖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런날이 올거라고..그때 그렇게 병원에 옮겨진 후 나원은 부랴부랴 퇴원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경호원들을 나원의 주변을 지켜주고 있었다. 

연락은 언제나 없었으나 쏟아지는 장대비를 바라보던 나원은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창가를 무심히 바라보는데 늘 한결같은 곳에 주차되어 있고 나원의 곁을 지켜주던 경호원들의 차가 없었다. 자리를 비운 걸까? 아니면, 아니면...지켜보던 여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 내가 방해했니..? 

" .......아...아니요. "

  

 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너무 듣고 싶었던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수화기 반대편에서 빗줄기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선 이 근처인 것 같았다. 플로렌스 가문 사람들이라면 나원은 치가 떨렸다. 

앨리스와 클로이 모자로부터 받은 모든 감정들을 배제하고서라도, 그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 스피노라 해도 경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랬지만, 그랬던 집이었으나 제희가 있어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제희에게는 손톱만큼의 악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고 그리운 얼굴 마주 대할 때마다 온 심장이 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목소리 듣는 것이 소원이더니, 

눈물겨운 얼굴 사이로 그녀는 소원을 성취했다. 잠시 나올 수 있냐는 그의 말에 나원은 달음박질 치듯이 응급실을 지나고 병원 입구에 섰다. 비는 더욱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부담스러울까봐, 또 위험에 처할까봐 발걸음도 하지 않겠다던 그였다. 항상 나원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주던 남자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왜 무리해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왜 경호원들이 없어졌는지도 알 것 같았다. 제희의 눈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던 나원이었다. 마지막이구나...가슴이 철렁한 사이로 나원은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웃었다. 이런 날이 언제고..올 줄 알았다니까...남자는 철철 비가 흐르는데도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 





왜 비를 맞고 있냐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 그냥 입을 열면 아무 말이나 내뱉을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책임감의 무게로 이 자리까지 왔는지 나원은 잘 알고 있었다. 철 들면서부터 책임감부터 먼저 배웠다고 했나. 

계모와 이복 동생, 자신에게 짐이자 부담감이자 커다란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 엄격한 아버지, 정글의 야생과도 같은 조직, 매일 매일 어린 그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긴장을 늦출 수 없던 이사진들, 그리고 언론. 






수많은 소문들. 율리아노 플로렌스라는 브랜드. 이 모든 것이 제희가 걸어왔던 길이었다. 한국인이었던 친엄마가 지어줬던 제희라는 이름 대신 율리아노 플로렌스로 불린 날들이 더 많지 않았나. 그리고 하나원은 자신을, 

율리아노 플로렌스가 아닌 제희로 봐 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으로 봐 준. 재벌 후계자나 마피아 보스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 준 유일한 사람. 봄 햇살...내 아픈 열 손가락. 나의...내 영원한 첫 사랑. 경호원들은 이제 앞으로 안 올거다. 빗속에서 코끝이 빨개진 남자가 간신히 말을 해주었다. 굵어지는 빗줄기 때문에 목이 메인 남자의 목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원은 주억거리듯 고갤 끄덕였다. 짐작했어요. 여자의 차분한 말에 제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 ...이젠....마지막이죠? 이게, 마지막인가요? "  

" 그래. " 

 

 순간 흔들리던 나원의 시선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지만 나원은 예상했었던 대답인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물이 멎지 않았다. 울지 말자. 웃는 모습만 보여줘야지. 마지막은 예쁜 모습으로 기억되게 하고 싶어...

애써 웃던 나원은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얼굴을 보고 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남자가 그제서야 돌아섰다. 온통..젖은 어깨를 하고. 태산보다 넓은 심장을 가졌던 사람.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 


굵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남자가 천천히 돌아서는 게 보였다.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나원은 마음 속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거겠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끝까지 그는 그룹과 조직을 위해서...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만 쳐다보던 나원은 빗속을 달렸다. 잠깐만요...잠깐 기다려 줘요.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아직요...

아직 난 할 말을 못했어요...나원의 고함소리에 남자가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빗줄기로 인해 온몸이 추위를 느끼는 듯 떨렸다. 금방이라도 폐렴에 걸릴 것만 같은데, 여자 역시 쏟아지는 비를 맞느라 온통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건지, 빗줄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본 제희는 나원을 마주보았다. 마지막, 





이라 해도 좋겠지. 나원은 그가 숫제, 미쳐서 사랑했던 한 여자일 뿐이었고 그는 그 앞에 온전히 옹졸한 한 남자일 따름이었다. 빗줄기는 굵어지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게 아팠다. 마음을 내뱉으면 그게 끝일 것 같았다. 

결혼을 한다고..그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데 나원은 상대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를 향한 질투로 폭발할 것 같았다. 원망도 아픔도 다 접고 제희를 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결국 여자가 감기에 걸릴까봐 전전긍긍하던 제희는 먼저 물어야 했다. 저러다가 또 쓰러질까봐 겁이 났다. 안 그래도 비가 쏟아지는데,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약속해 줄 수 있어요...?  

.....  

행복해 지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냐고요...  

!!!!!!  


그룹이나 조직을 위해서라기보단 여자를 위해서, 라는 말이 더 정확했다. 사실 스피노에게 말할 수도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보류할 수도 있었다. 아니, 결혼에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비서 제스의 말대로 그렇게 말한들 스피노가 강제적으로 명령할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제희가 정략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놀라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그저 모리오네파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 경우는 엘리자베스 베라를 납치한 클로이를 응징하기 위한 미카엘 그린의 복수였을 뿐이지만 그런 일이 또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원을 잊어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평화로워 지기만 한다면.







그래서 결혼을 선택했다. 사람들이...나원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이 나원의 약점을 모르게 하기 위한 최선의, 최고의, 최악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행복해진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냐는 여자의 우는 목소리에 제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참는다고 했는데...참기로 했고, 울지 않기로 했던 길이었다. 아, 당치 않은 소리. 여자를 위해 흘려본 눈물이 얼만데 또 눈물을 보인대서야...

  

" 보스가 아니고, 그룹의 총수도 아니고..그냥 한 사람으로써..." 

" ...... "

" 더 행복하고, 더...많이 웃어 줄 수 있어요...? 아주 멀리서라도요.." 

" ...... "

" 그럼 내가 더 행복할 것 같거든요...? " 


 제희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이라 그의 얼굴을 하나 하나 새겨놓고 싶은데 눈물로 가린 뿌옇게 흐려진 눈가 때문에 더욱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끝까지, 넌 끝까지 이런 식이었어. 넌 끝까지 날 어쩔 줄 모르고...

제희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에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여자의 어깨가 떨려오고 있었다. 마지막..서로를 볼 수 있는 진짜 마지막. 







약혼은 잠시일 터였고 결혼이 곧 닥칠 테니까. 울고 있는 나원을 향해 다가선 제희는 그대로 여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소리내어 울고 싶은 기분을 꾹 참아낸 나원은 제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안해...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게 이렇게 초라하고 궁색하구나...이렇게밖엔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제희의 속삭이는 말도 목이 메어 쩍쩍 갈라졌더랬다. 소리없는 눈물이 나원의 피부 너머로 번져갔다. 더 오래, 더 많이...





이젠 행복한 모습으로 편안히 살아주길 바랬다..그 동안의 아픈 악몽은 다 잊고, 전부 다 잊고..이젠 행복해지렴. 널 놔줄 때가 된 거 같다. 이제 넌 자유야..나원아..제희는 눈을 내려감고 여자의 어깨를 안았다. 마지막...

정말 이게 마지막이구나. 더 꽉 끌어안는 나원의 체온을 느끼면서 제희는 포옹을 풀고 여자의 손을 놓아 주었다. 남자의 뜨거운 손의 체온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제희의 발걸음이 멀어져가는 걸 보면서 나원은 길바닥에 얼굴을 묻고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 하느님....하느님...하도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온 몸이 얼어붙고 물이 뚝뚝 흐르는 중이었다. 울다 지친 나원은 조용히 그가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았다. 비를 피하던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의 젖고 바랜 행색을 보며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미친 여자로 보이겠지. 하하...






오, 하느님. 차라리 미쳐버릴 수나 있었다면. 그러나 나원은 매우 맨 정신인 게 분명했다. 이렇게 또렷한 정신일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누구세요, 하면서도 미친 행색의 나원을 만류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치는 와중에도 나원은 젖은 몸으로 물기를 떨어뜨린 채로 그가 사라진 길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나원은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물기가 젖어, 그렇게 비를 맞고도 얼어죽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온몸이 덜덜 떨려오는 와중이었는데도 나원은 벌개진 얼굴로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사랑해요. 」 

 

나원은 그를 올려다보듯 또박또박 말을 놓았다. 그리곤 실성한 여자처럼 웃었다. 

   

「 ..네. 사랑해요..죽을 때까지, 당신 하나만 사랑할 거예요. 두고 봐요..」

   

아...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말했어....나는, 고백했어...나는...사람들이 미친 여자, 아냐 하고 그러는 사이로 나원은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들끓던 열들이 퍼져서 온 몸을 에워싸는데도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건 이별의 인사였고 그토록 숨죽이며 지켜보며 오열하며 가슴에 멍 들어하던 그 순정파 남자의 모진 고별서였다. 아팠다. 그가 아픈가봐...그래. 대신 아파야 해..나 같은 건 대신 아파도 좋아. 대신 아프게만 해 주세요. 








제게 못 박던 그 사람 또 울기 전에..모진 말을 제게 던져놓고도 자기가 우는 얼굴 하면서 아파할 그 사람 대신에..이젠 제발 제가 대신 아파하게만 해 주세요..언제까지나 부르짖던 소원. 그거 하나였다. 고통은 가장 확실한 속죄의 길이었다. 대신 아파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대신 아파서, 이제 그 모든 아픔 감내하며 다시 예전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힘없이 가녀린 나원의 손이 떨어지면서 나원은 다시 차가운 빗속으로 주저앉듯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은 희미해져만 가는데 웃는 얼굴로 이별의 인사를 뱉어내던 그의 마지막 얼굴 하나만은 또렷했다. 내 사랑하는 이...너무 좋았어요...오늘 당신을 볼 수 있어서 미치게 행복했어..슬프게 떠도는 눈물 사이로 나원은 울고 또 웃었다.  


사랑해요...오로지, 살아 생전 당신 하나만을 사랑할 거예요..

 

  

 리무진에 올랐지만 비서 제스는 차에 오른 보스가 차가 출발하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것을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봐야 했다. 병원으로 가자고 기사를 닦달하는데 제희는 말라서 하얗게 바랜 입으로 말했더랬다. DVD 좀 틀어 봐. 영화 보고 싶은데. 뚱딴지 같은 태양의 말에 제스는 기가 찼지만 보스의 명령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영화는 <러브레터>라는 일본 영화였다. 하얀 눈...영화의 배경음악이 흐르는데 제스는 기사에게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해야 했다. 배경음악이 아프게 흐르는데 제희는 제스가 기사와 실랑이를 벌일 동안 리무진에 설치된 작은 TV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울지...너 또 울지....울지 않기로...그래서 내가 보낸 거니까 울지 않기로 했었잖아...내내 젖어드는 눈...또 눈물이....눈을 감은 제희는 정말이지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은 할 수가 없었다. 눈만 뜨면 당장 달려가 왜 이러냐고, 외쳐대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나원의 모습이 눈에 밟힐 텐데 도 도대체 무슨 정신인지 또렷한 눈으로 비디오를 보는 그였다. 고열이 40도 이상으로 치솟았다면 분명 폐렴일 가능성이 많다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제스는 열에 달뜬 얼굴로 거의 무너지듯 주저앉은 제희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이별 끝까지 갔다간, 그를 완전히 잃을 것 같아 더욱 그러했다. 

얼른 병원으로 데려가야 겠다 싶어 제희 쪽으로 몸을 튼 제스는 TV를 끄기 위해 스위치에 손을 뻗었다. 마침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 중이었는지 그가 벽에 기댄 채 뭔가를 읊어대고 있었다. 제스가 쳐다보는 것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제스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입술이 말라붙어 정말 고열로 시달리는 그가 온 몸을 떨면서도, 영화 여주인공의 대사를 따라하는 중이었다. 목소리가, 음성이..너무 애절해...숫제 울음이었다 그는.  

 

 「 오겡끼..데스까....」

 

 하얀 눈 밭에서 여주인공이 외치자 제희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젖은 목소리로 따라한다. 눈물같은 비가 맺힌 콘크리트 바닥에 두고 온 나원..그리고 젖어드는 눈...

 

「 ..와따시와..겡끼데..쓰...」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향해 더 절절해진 음성의 여주인공이 목이 터져라 외친다. 따라하던 제희는 목이 메이는지, 조금 쉬었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와따시와 겡끼데쓰...아예 영화 속엔 주저앉아 버린 여주인공이 있었지만 제희는 눈을 감았다. 흐린 눈 사이로 나원이 보이는 중이었다. 제희의 어깨를 잡으려던 제스는 그만 벽을 짚었다. 아아...세상에.....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고 서서 히 하얀 눈으로 덮이는 화면을 바라보던 제희는 흐린 눈을 부비면서 입술을 뗐다. 백미러로 점이 되어 멀어져가던 나원의 모습이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울던 그녀가, 가슴에 맺힌 채. 이별 얘기로 그녀 가슴에 못을 박은 그가 오히려 가슴에 스스로 못 박혀하면서 그렇게...모진 말을 한 건 나인데, 왜...이제 이별 하자는데 왜 나는....왜 왜....

 

「 잘..지내시나요....」  

 

 흐려져 얼어버린 음성의 제희 목소리는 낮고 목이 메었다. 제스가 있는 것도 모른 채 제희는 손을 뻗었다. 눈을 감으니 그녀가 있었다. 하얗게 서린 눈가를... 

 

「 당신이..없는 제가 어떻게....」

  

잘 지내시나요... 

당신이 없는 제가 어떻게... 

잘 지내시나요.. 

당신이 없는 제가 어떻...  

 

 후우...제희는 완전히 불덩이가 된 뺨이 손에 스치자 흠칫 했다. 위험신호였다. 스스로가 그렇다 느끼는 중이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차가 신호에 막혔는지 멈추어 섰다.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선 제희는 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스가 제희를 붙잡았지만 제희는 제스를 뿌리치고 차 밖으로 나섰다. 흩날리는 진눈깨비 같은 장대비 사이로 제희는 비속에 푸욱 파묻혔다. 

비의 차가움보다도 자신의 달뜬 체온이 먼저였다. 부글부글 열이 끓었고, 나뒹굴듯 드러누운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영어로 무어라 힐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뒤따라나온 제스가 어깨를 잡아채며 핸드폰을 들고 비명처럼 앰뷸런스를 부르는 소리도 멀어져 가면서 흐릿한 의식 사이로 나원이 울고 있었다. 눈을 번쩍 뜨니 또 아무도 아녔다. 눈을 감으니 또 나원이었다. 우는 나원이가, 또 웃는 나원이가...그는 웃었다. 

 

차디찬 눈물 사이로...이젠 행복하렴, 내 사랑....

 

  

.

 

 

 어느 허름한 골목의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아영은 세수를 하고 퉁퉁 부어오른 눈을 한 채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이게 나야..? 

그럼. 나지..이제 웃고 떠들고 내내 발랄한 스무살 진아영은 어디에 있니... 없어...다시 웃을 수가 없어.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레오의 생각만 하면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모리오네파..율.,보스..







그리고 다시 레오...그리고 다시 진아영...단단히 마음을 고쳐먹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여관 주인이 물을 건네주면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관방을 올라오다가 어딘가에서 흘린 모양이었다. 주인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작은 방 모퉁이에 앉았다. 깜깜해진 어둠 사이로 오래된 고성당의 종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나가려는 주인을 붙잡고 아영은 물었더랬다. 오늘이 몇 일이죠? 그러나 견습 수녀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베스양이 온지 딱 2주 되는 날입니다. 2주...16일이나. 주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아영은 핸드폰의 새까만 액정에 버튼을 눌러 켜지게 만들었다. 딩동....컬러풀한 핸드폰에 메인 화면이 눈에 들어오자 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영이랑 초딩보스님하랑 ★ 

 

언제던가..유정과 우진과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던 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배경으로 찍은 아영과 율의 커플사진이 발랄하게 붙여져 있었고 그제서야 현실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사라진 16일의 부재..

그리고...그리고...아영은 부재중 통화 110건에 음성 메세지를 열었다. 대부분이 율이었고,  문자를 보지 않고 음성 메세지를 열기 위해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대었다. 낭랑한 안내원의 멘트가 아영의 귓가로 울려퍼졌다. 


첫번째 메세지입니다...

  

어디야? 왜 전활 안 받어. 어딨는지 알아야 찾을 거 아니야!!! 


두번째 메세지입니다..

 

일어났어? 밥은 잘 챙겨먹었지? 삼각김밥 금지. 샌드위치 금지. 영양가 없는 햄버거도 금지. 뜨뜻한 국물에 밥 말아먹기. 너 자꾸 이렇게 숨바꼭질 하는 거 나 별로 재미없어. 빨리 어딨는지 말해..  

 

세번째 메세지입니다... 

  

학교도 안 나오는 거 알고 있어. 어디 숨어 있냐고.  

 

네번째 메세지입니다. 들으시려면 1...

 

왜 연락이 안 돼. 사람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어딨는지 말을 해야 내가 말을 할 거 아니야.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건데. 어딨냐고.   

 

...열다섯번째 메세지입니다... 

  

나야. 너 지금 일주일일째 잠순 거 알어? 어디야!   

 

...스물 네번째 메세지... 

  

빨리 연락이나 해..어디야, 도대체..1주일 동안 왜 아무 연락이 없어..나 진짜 숨통 막혀 죽는 거 보고싶어서 이래? 진아영... 어딘데. 응??

   

마흔 네번째 메세지... 

  

아영아, 어디 있어...어디가 됐든 내가 얼른 갈게. 듣고 있어..?!   

 

백 스물 네번째 메세지...

  

.. 


...더이상 용량 부족으로 음성 메세지가 녹음될 수 없사오니...

 

 오랫동안 방치해 둔 탓인지 뜨뜻한 피부에 와 닿던 핸드폰이 저절로 소리를 내면서 꺼졌다. 배터리가 다 닳은 모양이었다. 용량 때문에 음성 메세지에 들어와 있는 내용은 모두 124건이었다. 남자는 투정을 부렸다가, 

걱정했다가, 할머니처럼 잔소리꾼이 되었다가, 깜깜한 밤에 오래도록 기다린 듯 지치고 힘겨운 목소리였다가, 너무 걱정이 되어 목이 쉬고 갈라졌다가, 오래 기다리다 못해 피가 마르고 애간장이 탄 그 안타깝고 애절한 음성이 모두 전해져 왔다. 아영아..하는 남자의 피말리는 목소리를 듣는데도 온 몸이 불덩이가 되더랬다. 아아.....! 아영은 엉엉 울면서 핸드폰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 지워야지....다 지워야지..전부 다..믿질 못하겠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네 얼굴만 봐도 레오가 생각나고..그리고..그리고..

  

그래도... 

 

 차디찬 바닥에 그대로 엎드린 아영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고작 16일 동안 얼마나 그가 안쓰럽게 무너졌을지 잘 아는 그녀였다. 자신이 기억 못하는 약속까지 일일이 꼬박꼬박 다 기억하는 남자. 율이 없는 지금은 과연 예전 같아질 수 있을까.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아버렸다지만 엄마도 아빠도 없던 아영에게 율은 새로운 샘이었다. 하지만 레오, 레오는...고아로 어렵사리 자라던 선예에게 한 점 혈육과도 같던 소울메이트였다.

그 남자의 절절히 아프고 바다처럼 높고 넓은 마음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제서야 피부로 와 닿고 실감이 되던 중이었더랬다. 용서가 안 되는 만큼 보고 싶었고, 용납할 수 없는 만큼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죽어가는 레오가 생각나서였다. 왜 하필..그랬어..왜 그랬어..왜 레오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어...율아....입을 틀어막은 채 절절히 통곡하던 선예는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울어야 했다. 그리고 희뿌연한 새벽 해가 밝아올 때 쯤에야,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오려가고 있었다. 피맺히는 절절한 눈물의 끝에서. 

 

 

 

 

 아영은 사라진 지 2주가 훌쩍 흘렀다. 그리고 제인 쇼트라스키는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린 이 시점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이우진 변호사도 어디로 갔는지 두문불출이었고, 거기다 2주 사이에 영양실조로 몸무게가 4kg나 줄어버린 보스 때문에 일대 파란이었다. 

2주가 흘러서야 진상이 파악되었다. 아영이 레오의 일을 오해하고 떠났다는 것. 제인이 워낙 겹겹이 함정을 파 놔서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는지도 나중엔 불분명하게 되었고, 클락의 지시로 처음 소문을 퍼뜨린 사람을 확인하려 애썼으나 이제는 모든 히트맨들마저 그 소문을 사실처럼 믿어버려 누가 먼저 퍼뜨렸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바람에 제인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죄책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영이 사라진 후 학교며 수녀원을 이잡듯이 뒤졌고 그 근교까지 모든 조직원과 히트맨을 풀어 찾았으나 어디서 숨어 사는건지 꼭꼭 숨어있기 때문인 건지 2주 동안이나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부러 수녀원도 찾지 않고 학교 근처에도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율이 자신을 찾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뉴욕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제인은 추측해 보았다. 모든 것이 제인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아영은 율에게 이별을 선언했고, 다시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완전히 그에게 정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형제처럼 자라난 레오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어쩌면 영원히 멀어질지도 몰랐다. 다 계획대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인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상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율리아노의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나원의 초연한 표정이 떠올라서 제인은 가슴 한 구석이 늘 답답했었다. 그리고 2주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영양실조라는 진단까지 받은 터에 보스는 진료까지 거부하고 있었다. 오로지 진아영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무리하다가 결국 탈진해서 쓰러진 율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지독한 영양실조. 2주 동안 4kg가 빠졌다지 않았나. 제인은 주치의 브라우닝 박사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침실을 나서자 불안한 듯 의사에게 다가섰다.

 

" 박사님...." 

" 안 되겠어, 제인. 도무지 치룔 받으려고 하시질 않아. "  

"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열이 떨어지지도 않고 체중은 계속 줄고, 헛소리까지 하시면서 저렇게 비쩍 비쩍 말라가는데! "  

" 나라고 보슬 안 살리고 싶겠나. 환자 본인이 치료 받으려는 의지가 없어. 베스만 찾아. "  

" !!!!! " 

" 길은 하나야. 미국 전역을 뒤져서라도 엘리자베스를 데려오는 수밖에. 그 방법밖에 없어. 저 지경의 보스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제인도 나도 아니고 링겔도 주사도 아닌 엘리자베스 베라야. " 

" ....!!!!! " 


 브라우닝 박사를 돌려보내고 침실로 들어선 제인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4kg가 빠진 보스의 모습은 영락없는 환자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질 거라고 굳게 믿었던 제인은 비틀거려야 했다. 

도대체 그 여자애가 뭐길래...그 애의 어디가 그렇게...가슴이 아팠다. 이런 결과를 바랬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 정도일 줄이야..이렇게까지, 이 정도일 줄이야..먹지도 자지도 마시지도 않을 정도로, 그애가 그렇게 절박했을 줄이야. 입술을 깨물고 다가온 제인은 의자에 앉았더랬다. 그제서야 반쯤 눈을 뜬 율은 제인을 보자 다시 눈을 내려감았다. 설득할 생각 마. 주사 맞을 생각 없어. 율의 까내린 목소리에 제인은 심장이 타는 것 같았다. 






졌구나. 나원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던 제희가 떠올랐다. 점점 말라가는 율을 지켜보는 제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런 결과를 바란 게 아니었어요...고개를 외면한 채 숨만 내쉬는 율을 쳐다보던 제인은 눈물을 닦고 눈을 내려감았다가 떴다. 내가 졌어. 내가 졌어요...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내가 졌어요.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스를 쳐다보던 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예요. 그 소문 퍼뜨린 사람.  

.....!  

..베스한테 그 말 한 것도 저고. 제가 그랬어요.   

.....  

눈에서 멀어지면...마음에서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이런 보스의 모습을 보게 될 줄 몰랐어요. 이 정도일 거라고는...생각도 못 했어요.   

.....  

보스...?

  

 그러나 숨만 쌕쌕 내쉬던 율은 탈진한 듯 손이 침대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맥박이 희미하게 느껴지자 제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스!!!!!! 미카엘 님!!!! 침실을 박차고 나온 제인은 당장 브라우닝 박사를 모셔오라고 소리를 질렀고, 제인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에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뛰어온 클락은 안색이 새파래진 제인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율의 상태가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2주에 가까운 영양실조...

그 어떤 설득과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고. 식사는 물론 주사를 맞는 것도 철저히 거부하고 계시다는데...부들부들 떨던 제인은 안타까워 하는 클락의 손을 잡았다. 이대로 있다간..모리오네가 위험해. 결연한 표정의 제인은 클락을 바라보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져. 모든 죄값도 내가 받는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엘리자베스 베라를 찾아내세요. 보스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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