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선, 게 있는가?”

침전과 그다지 멀지 않은, 홀로 있고 싶을 때 주로 쓰는 작은 전각에 앉아 나풀거리는 촛불을 바라보던 광훤은 무언가 결심한 듯, 상선을 불렀다. 이내 상선이 살며시 들어와 허리를 숙이자.

“공 좌랑을 불러주게. 지금, 이곳으로.”

늦은 밤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오래 전각에 불을 켜두며 일을 하는 것을 광훤은 모르지 않았다.

제가 그리 힘든 이별을 하게 만든 것을 잊으려 일에 몰두하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제 부친을 닮아 천성이 일에 파묻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걱정스러운 마음에도 찬희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제법 길어, 한참 눈을 감았던 광훤은 찬희가 도착했다는 말에 눈을 떴다.

“들이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체구. 광훤은 찬희가 제 앞에 허리를 숙였다.

“전하, 소신을 찾으셨다 들었사옵니다.”

“이리 앉거라.”

찬희의 물음에 광훤은 손으로 자리를 짚으며 제 앞에 있는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찬희는 고개를 숙인 채, 광훤의 손만 바라보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광훤이 무언가 말을 하기를 묵묵히 기다렸고, 그 모습에 광훤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어쩜, 제 아비와 이리도 같은 모습일까.

“내 우리 손녀 며느리에게 청이 있어 이리 걸음을 옮기게 했구나.”

“청이라니요, 전하. 그저 하명을 하오시면.”

아직 광훤의 거리감이 익숙하지 않은 찬희의 답에 광훤은 눈썹이 들썩했지만, 곧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신하를 마주한 임금이 아니라, 내 손녀의 정인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할아비라네.”

평소와 다른, 안희를 제게 부탁한다며 들려주던 차분한 목소리에 찬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광훤의 시선과 마주했다.

이제 안희는 보지 못할 다정하고 어진 미소를 지은 모습,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찬희를 향했다.

그런 광훤의 모습에 찬희도 조금은 긴장감을 내려놓고서, 그저 물었다.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긋해진 목소리로.

“감히 여쭙겠나이다, 전하. 무엇을 청하시려 소신을 이리 찾으셨는지요?”

찬희의 물음에 어딘가 불편한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린 광훤은 그래도 곧 다시 표정을 풀고서 느릿하게 제 목소리를 내었다.

“내, 너희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구나. 우 별장을 불러볼까 잠시 고민하였으나, 그리하자면 세손의 안위를 위협하는 이들이 틈을 노릴까 하여 쉬이 부르지 못하겠더구나.”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또 떠오른 생각에 광훤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보다, 그 녀석이 불같이 화를 낼 것 같구나.”

광훤의 말에 찬희는 그렇지 않을 거라 말하고 싶었으나, 이내 머리에 떠오른 물음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찌, 이리 성심을 감추시옵니까? 그리 저하의 안위가 걱정되신다면 그 성심을 저하께도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찬희의 말에 광훤은 길게 늘어진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 느릿하고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내가 아니었으면 연인의 곁에서 편한 밤을 보내고 있었을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인해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이 늙은이도 다 안다.”

광훤의 말에 찬희는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늙은이가 내 손녀에게, 그리고 그 연인인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런 말뿐이라 미안하구나.”

광훤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긴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아는 일이지만, 나는 벌써 내 식솔을 여럿 잃지 않았더냐? 조강지처도, 계비도, 딸아이에 며느리까지. 거기에 이 잔인하고 외로운 자리는 내 아들과 손자들까지 앗아갔어.”

광훤에게서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찬희는 그저 묵묵히 광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보위에 오르는 일은 선대왕의 유지와 왕실에 나 이외에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로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내 식솔들이 모두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한 것은……. 다 내 업보일 테지.”

짙은 슬픔과 회한이 묻어 나오는 광훤의 말에 찬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한데, 이제 내게 남은 식솔이 저 아이 하나뿐인데, 이 자리가 저 아이까지 앗아간다면. 나는 이 자리에 올라선 나를, 죽어서도 용서치 못하겠지.”

대전을 호령하며 중신들을 위압하던 광훤에게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보기 힘든 나약하고, 유약한 말. 저한테 보여주는 이 모습이 진심이라면, 이런 약한 말을 하는 때가 아니라면 물어볼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감히 여쭙겠나이다, 전하. 하옵시면 더 품에 안으시고, 더 다정하게 대해주셔야 함이 옳지 않습니까?”

찬희의 물음에 광훤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제 수염을 매만졌다. 자신도 한참을 고민했고, 망설여야 했던 물음이었기에. 짧은 한숨과 함께 광훤은 대답을 내놓았다.

“아가, 네 말이 옳다. 그래, 이럴수록 더 따스하게 품에 안고 더 다정하게 보듬어줘야 하지.”

광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긍정의 대답에 찬희의 마음이 불에 덴 듯,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훤의 한숨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품에 싸여 보호받아 자란 화초가 잘 자라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모진 풍파를 견뎌내는 것이, 이 잔인하고 잔혹한 조정을 헤쳐나가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인가……. 이미 내 나이가 미수(美壽-66세)를 넘어섰으니, 그 아이를 천천히 준비시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하겠더구나.”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사람의 명줄이라는 것이, 하늘에 달린 것이 아니겠더냐.”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조정에서 마주했던 임금인 광훤은 가차 없고 단호했으며 어찌 보면 정말 임금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랬던 광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나약한 말.

“그 아이를 노리는 이들에게서, 내가 지켜주기만 한다면. 그 아이가 장차 어좌에 올랐을 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을까, 저를 휘두르려는 자들에게서 휘둘리지는 않을까. 괜히 그런 노파심이 드는구나.”

그렇게 약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광훤은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왕위에 오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였던 정안도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세자로 지내면서 자신을 잘 지켜왔지만. 결국, 자리를 탐하는 이들에게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하오나 전하, 아직 전하의 옥체가 강녕하시고 이리 정정하신데. 너무 섣부른 생각이 아니신지요?”

찬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광훤은 고개를 저었다.

“이만큼 긴 시간을 자리를 보전하며 무탈하게 장수했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하나, 버텨온 시간이 있는 만큼 곧 이 노쇠한 몸은 무너질 일만이 남았겠지.”

광훤은 짧게 자신의 숨을 고르고 빈 책상 위에 얹은 자신의 늙은 손을 바라보았다. 긴 시간을 살아왔지만, 돌이켜 보면 많은 후회가 남는 짧은 삶의 흔적이 가득한 제 손을.

“해서 아직 내 정신이 맑을 때, 정신이 흐트러진 나를 쥐고 흔들려는 이들이 나타나기 전에 정안에게 선위하려 했던 것인데. 내 아직도 욕심이 많고, 시간을 재기만 하다 이리 사달이 난 게지.”

말하는 중간부터 눈과 목소리에 젖어드는 슬픔을 엿보면서 찬희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지도 못하고 젖은 채 그 빗속을 하염없이, 오직 한 방향만 바라보고 나아가던 길 끝에 맞이한 절벽의 끝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세자처럼 긴 시간을 준비시킬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이 있고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테지. 그러니 준비되지 않은 이를 휘두르려는 자들에게서 벗어날 힘을 기르게 하려면 안간힘을 쓰고 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채찍질을 해야 하지 않겠더냐.”

광훤의 눈에 슬픔과 함께 쓸쓸함이 감돌았다. 애정을 기반한 저 쓸쓸한 슬픔을 보면서 찬희는 제 기억에도 없는 조부가 살아계셨다면 저한테 애정을 가지면서도 감추셨을까, 아니면 제게는 아낌없이 보여주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할 만큼.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이런 애정 어린 마음을, 조부가 손녀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보이지 못하고 냉정으로 가려야 하는 이 상황이.

“하오나 전하, 그래도 저하께 언질이라도 하시는 것이.”

찬희의 목소리에 흘러든 안타까운 마음을 읽었지만, 광훤은 그 말을 다 듣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그 아이의 버팀목이 세워진다면. 그리해서 그 아이가 무탈하게, 제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있는 임금이 된다면. 수백, 수천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들 나는 그 아이의 원망을 짊어질 터.”

말을 마친 광훤의 입에서 잔기침이 터져 나오자 찬희는 품에서 보라색으로 꽃을 수놓은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잔을 내밀다 찬희는 아차 싶어 손을 거두려 했으나.

“괜찮다, 이건 상선이 준비해놓은 것이니. 지금의 내가 죽어서는 그 어느 쪽도 득이 될 것이 없으니 당장 나를 해하려들 이들은 없을 것이야.”

잔을 잡았던 찬희의 손이 움찔했으나 광훤은 개의치 않고 물 잔을 받아 들이키고 다시 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이제 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느냐?”

이미 차고 넘칠 만큼, 광훤의 속을 꺼낸 말은 찬희의 마음을 채웠다.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시옵니까?”

찬희의 물음에 광훤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처음. 네가 기억하는 처음부터 들여다보고 싶구나.”

광훤의 말에 찬희도 눈을 감으며 안희와의 처음을 회상했다. 십 년이 훌쩍 지나 가물가물하면서도 찬희는 그 기억의 끝자락을 붙들었다.

찬희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세자빈, 희유의 예장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GL러버💕 읽는 것에 환장하고 쓰는 것을 좋아해요🦊💕 onlyonedayS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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