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인다. 몽롱한 기분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묘하게 몸이 가벼워진 듯 몸 안의 피가 소용돌이치는 듯 나 자신이 아닌 무엇인가를 몸 안에 담고 있는 느낌과 내 안에 있던 무엇이 사라진 느낌이 공존하는 이상한 기분이다. 수혈을 받은 왼팔에는 주사바늘 대신 지저분한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에는 검붉은 피가 얼룩져있었지만 이것이 내 피인지, 수혈받은 피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의 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수혈을 권했던, 눈을 붕대로 가린 휠체어를 탄 노인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환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없었다. 진료소에는 아무도 없었고, 적막과 어딘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의 끝자락만이 내 곁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휠체어 노인을 만나 수혈을 받기 전 내가 앓던 병을 제외하고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안개가 드리워진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고향이 어디인지, 내 가족이 누구인지, 난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수혈을 하기 전 봉인과 서명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피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계약이었다고 했지만, 어째서 치료를 받는데 계약같은 게 필요했던 것일까. 무엇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도 모르는 새 꽉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펴보았다. 어딘가에서 찢어낸 종이에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가 있었다.


["창백한 피"를 구해라. 사냥을 완수하기 위해]


내 글씨처럼 보인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쓴 것 같다. 그런데 사냥을 완수하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창백한 피. 그래, 창백한 피로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했었다. 난 그 말을 믿고 피의 치료를 수행하는 야남에 왔다. 그래, 그랬다. 하지만 사냥을 완수하다니, 나는 사냥꾼이었나? 내 병을 치료할 창백한 피와 사냥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냥이라는 단어를 보니 피의 치료를 받던 중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에서 날 집어삼키려던 야수가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서 불에 타들어 가던 모습을 지켜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야수는 어디서 나타났고, 또 누가 그 야수를 불태웠던 것일까. 그 야수가 내가 잡아야 하는 사냥감이었을까. 그냥 꿈이었을까.


"창백한 피를 구해라. 사냥을 완수하기 위해."


머릿속의 안개를 걷어내려 일부러 소리내어 말해본다. 창백한 피란 묽어진 피를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묽어진 피라는 건 또 무엇인가. 혼란스럽기만 했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단서는 창백한 피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우선 창백한 피를 구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마냥 아무도 없는 진료소의 더러운 침상 위에 누워있을 수는 없다.

출입문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붉은 노을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 닫힌 문을 밀자, 나무문은 삐걱하는 큰 소리와 함께 천천히 좌우로 열리기 시작한다.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어두컴컴한 계단 끝에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진료소 1층도 2층과 별로 다른 점은 없었다. 환자들을 위한 침상과 치료도구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약품들이 즐비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약품으로 보이는 붉은 액체병이다. 아마 내 몸에 주입된 수혈액과 같은 것이겠지. 야남은 피를 치료제로 사용하는 특이한 도시니까. 출구와 연결된 병실로 들어서자,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늑대처럼 생긴 시커멓고 커다란 짐승이 보였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서 전신 구석구석으로 피가 소용돌이치는 느낌이었다. 병실바닥은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했고, 짐승은 식사에 몰두하고 있는지 아직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짐승은 꿈에서 보았던 불에 탄 야수와도 비슷해 보인다. 야수가 막아서고 있는 복도 끝에는 문이 보였지만, 야수를 피해 도망갈 자신이 없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슬며시 뒤를 돌아본 야수와 눈이 마주쳤다.

내려올 때보다 훨씬 더 길어진 듯한 계단을 전력으로 뛰어 올라가자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이 아팠다. 조금 전 분명히 내가 열었던, 2층의 병실로 연결된 문은 굳게 닫혀 더는 열리지가 않는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곧 거친 야수의 숨소리가 목덜미에 닿고, 저릿한 느낌이 등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의식이 아득해지고 눈앞에 거꾸로 매달린 모양의 이상한 표식이 떠오르며 주변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날 깨우듯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코를 간지럽힌다. 엎드린 몸을 일으켜 세웠더니 커다랗고 창백한 보름달 아래 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향기를 내뿜는 흰 꽃으로 뒤덮인 언덕 위에 외로이 서 있는 건물은 낯설기보다 어쩐지 정겨운 느낌이 든다. 마치, 잊었던 고향에 찾아온 것처럼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만날 것처럼. 건물로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길 중간의 왼편에는 피에 취한 야수 대신 예쁘장한 인형이 버려져 있었다. 인모로 보이는 은발부터 섬세하게 만들어진 손가락 관절에 이르기까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정교한 작품이다. 인형의 곳곳에 만든 이의 세세한 손길과 애정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런 곳에 이렇게 버려져 있다니, 어떤 사연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언덕길 오른편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비석의 아래에는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한 작은 생물 같은 것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언덕 위의 건물의 문은 여기에 온 자는 누구나 환영한다는 듯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휠체어에 탄 노인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내버려두고 간 진료소에는 커다란 야수가 있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휠체어에 탄 노인은 그제야 내가 건물 안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린 듯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하, 자네가 새로운 사냥꾼인가 보군. 사냥꾼의 꿈에 온 것을 환영하네. 한동안은 여기가 자네의 안식처가 될 거야. 나는.. 게르만이라고 하네. 자네와 같은 사냥꾼들의 친구지. 아직은 안개를 헤매는 기분이겠지만,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어. 나가서 야수들을 좀 사냥하게나. 다 자네를 위해서야. 그게 사냥꾼들이 하는 일이잖나. 곧 익숙해질 거네."

게르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로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소리도, 풍기는 분위기도 나에게 수혈을 시행한 노인과는 전혀 달랐다. 치밀어오르던 분노를 겨우 가라앉히며 게르만이라는 노인에게 질문했다.

"사냥꾼의 꿈..? 이곳은 사냥꾼들이 지내는 곳이란 말인가요? 제가 사냥꾼이라니 무슨 말이죠?"

"한때 여기는 사냥꾼들의 안식처였지. 사냥꾼들이 피를 이용해 자신의 육체와 무기를 강화하던 공방이야. 예전만큼 도구가 많진 않지만.. 여기서 찾은 것들은 마음대로 써도 되네. 인형까지 말이지.. 자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노인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공방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안개가 햇빛에 녹아 사라져버리듯 게르만이란 노인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멍하니 서서 그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다 건물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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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글쟁이를 꿈꿨던, 전업 글쟁이는 포기했지만, 글은 포기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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