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에필로그와 이어지는 짧은 글입니다.







“누나아…….”

아직 어린 탓에 제 누나와 비슷한 음성을 가진 세실이 앳된 목소리로 알레시아를 불렀다. 왜 부르냐는 듯 고개를 돌린 얼굴엔 어린아이답지 않은, 특유의 자존감이 어려 있었지만 4등신의 몸으로는 큰 위엄을 내보이기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레시아는 조막만 한 손으로 아동용 목검을 야무지게 쥐고 물었다.

“왜?”

“이거 바…….”

세실이 바람 새는 발음으로 종알거리며 제 누나에게로 다가가자 옆에 앉아 책을 읽던 사이러스가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푸른 눈이 소리라도 날 것처럼 데구루루 굴러가는데도 세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 알레시아에게로 향했다.

“이-“

쑥스러운 듯이 뺨을 홍조로 물들인 세실이 미소를 짓듯 통통한 입술을 옆으로 시원하게 찢으며 이, 하고 잇몸을 보이자 알레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

“어!”

앞니가 빠져 아기 천사 같은 인상을 한층 더 깜찍하게 만들던 잇몸에 아주 작은 유백색의 새 이가 빠끔히 나와 있었다. 알레시아는 쥐고 있던 목검을 집어 던지며 우유 반죽 같은 세실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아 우악스레 옆으로 당겼다. 손길이 아파 세실이 미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는데도 알레시아는 그런 사소한 반응 정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우와! 세실은 다 컸네!”

다 컸다는 말을 이 세상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는 알레시아가 고작 일 분 남짓 어린 동생의 어깨를 퍽, 퍽 두들기며 호탕하게 외쳤다. 아직 어린아이임에도 힘이 어찌나 좋은지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세실이 휘청대자 사이러스가 재빨리 일어나 제 형의 팔을 붙잡았다.

레이라를 닮은 푸른 눈이 알레시아를 노려봤다. 마음 같아선 알레시아가 하듯 똑같이 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세실의 앞에서 머리채를 쥐어뜯길지도 몰랐다. 사이러스는 왜 그런지 자신도 이유는 모르지만, 세실 앞에서 머리채를 쥐어뜯기는 몰골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알레시아에게 반항하는 대신 세실을 은근슬쩍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그때, 놀이방의 문이 열리더니 평균적인 남자들의 목소리보다 한 톤 더 낮은 음성이 나지막이 울렸다.

“너희 여기 모여서 뭐 하니.”

세 아이의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강하고 멋진 부친, 에드윈이 나타난 것이다. 제 아빠를 발견하고 흥분한 알레시아가 환히 웃으며 “아빠!” 하고 외치더니 던졌던 목검을 다시 붕붕 휘두르며 다짜고짜 에드윈의 허벅지를 공격했다. 검은 뱀아, 죽어라! 패륜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 종종 에드윈을 검은 뱀이라고 부르는 알레시아 때문에 하인들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가족들만의 애칭이겠거니, 하고 이해했다 - 

알레시아가 냅다 일격을 내지르기 위해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에드윈이 딸애를 번쩍 들어 한쪽 팔에 걸쳤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무척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알레시아, 아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떡해.”

“아빠 아니야!”

“내가 네 아빠가 아니면 뭐니…….”

“으응, 아빠 아니고 엄청 큰 뱀이라서, 그래서 알레시아가 막 칼로 찔러서! 무찔렀어!”

이렇게! 이렇게! 하나뿐인 딸이 제 아빠를 칼로 찔렀다는 대목에서 실감 나게 목검을 휘두르자 에드윈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잘했다고 대충 칭찬하며 목검을 자연스레 빼앗았다. 허공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꼴이 저러다 죄 없는 세실이나 사이러스의 정수리에 꽂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레시아가 뿌듯한 듯 히히 웃으며 단단한 목에 팔을 감았다. 어린아이 취급받는 것을 싫어하는 알레시아가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때였다. 에드윈은 원숭이처럼 달라붙은 아이를 안고 남은 두 아이에게 손짓했다.

“저녁 식사해야지. 너희 아빠 기다려.”

“아! 내려, 내려요!”

레이라를 지칭하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알레시아가 허공에 발을 구르며 보채기 시작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행동에 에드윈이 야생 고양이를 붙잡아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바닥에 내려주자 알레시아가 세실에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세실, 빨리 가자!”

세실과 사이러스 중 고르자면 항상 세실을 선택하는 알레시아가 저도 안기고 싶어 눈치 보는 동생을 불렀다. 둘 중 한 명을 편애한다기보단 알레시아의 기준에서 세실이 보다 못 미더운 동생이라 챙겨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의 입장에선 하찮고 가소롭기 그지없는 책임감에 그는 피식 웃으며 세실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중에 안아주겠다는 뜻이었는데,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고작 머리 한 번 쓰다듬어준 것만으로도 순하게 히… 웃은 세실이 알레시아의 손을 잡고 놀이방을 빠져나갔다.

“어어, 조심, 조심!”

계단에선 조심해야 해, 하고 잔소리를 하는 알레시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높았다. 알레시아가 유독 몸놀림이 날래어 그렇지 따지고 보면 세실도 못지않게 운동신경이 좋은데 왜 저리 못 미더워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에드윈이 의아하게 사이러스를 내려다봤다.

“사이러스, 넌 왜 안 가니.”

평소 같으면 알레시아를 은근슬쩍 밀어내며 세실을 독차지하려 드는 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자 이상하게 느낀 에드윈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놀이방이라 앉을 만한 의자라고는 우스꽝스러운 고양이 발 모양 다리가 달린 아동용 벨벳 의자뿐이었다. 고양이 발 유아 의자와 도저히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운 바닥 사이에서 고민하던 에드윈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앉기를 택했다. 고민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내내 올려다보게 만드는 것보단 이게 나을 듯했다.

“할 말 있으면 해.”

“이빨 요정님이 이빨을 못 찾으면 어떡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냅다 내뱉은 사이러스의 표정이 결연해 보였다. 에드윈은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위의 두 아이보다 내면세계가 깊고 유독 총명한 아이가 또 무슨 생각 중인지를 가늠했다.

“언제는 요정 같은 건 안 믿는다더니?”

“안 믿는다고는 안 했어요.”

또박또박한 말투에 에드윈이 기가 찬 듯 픽 웃었다.

‘어디서 이런 게 나왔을까.’

나온 배가 확실하긴 한데, 아무리 잘 봐줘도 똑 부러진 구석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레이라가 낳았다기엔 신기하기만 했다.

“세상에 요정이 어디 있어, 사이러스. 그런 걸 믿니?”

“…….”

괜한 장난을 치던 에드윈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자 잠시 고민하던 사이러스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드윈의 다리 사이에 폭 앉았다.

“……있다고 했잖아요.”

언제는 이빨 요정이 뺀 이를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도록 반드시 베개 아래에 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면서 이제 와 딴소리였다. 사이러스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억울한 기색이 어린 얼굴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러스는 분명히 에드윈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영특했지만, 부친들이 워낙 끼고 돌아 그런지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 특유의 순진무구함을 여태 유지하고 있었다. 그 무구함은 아직은 터무니없는 요정 설을 믿는 천진과 장차 이치와 논리에 기반을 두지 않은 사실은 무시하게 될 기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했다.

“글쎄. 네가 믿으면 있는 거고, 믿지 않으면 없는 거겠지.”

“…….”

장난기 어린 말투에 불만어린 표정을 한 사이러스가 한숨을 포옥 쉬며 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조그만 머리통이 셔츠에 묻히며 폭삭, 하고 햇빛에 말린 수건이 바삭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에드윈은 고민이 무엇인지 캐묻는 대신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톱이 잘 다듬어져 있는지, 손이 청결한지 따위를 검사했다.

사이러스는 위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묻지 않은 것들까지 재잘대는 알레시아와도, 안고 달래면 한참 고민하다 비밀을 알려주듯 속삭이는 세실과도 달랐다. 다그치지 않고 내버려 두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내키지 않은 얼굴로 에드윈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곤 했다. 말하고 싶진 않지만, 호기심을 해결할 장소는 여기뿐이라는 듯이.

손 점검을 끝내고 레이라 덕에 얻은 금발을 헝클어트리고 있자 사이러스가 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렸다.

“……이빨 요정님이 형아 이를 안 가지고 갔는데 왜 이가 새로 나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납득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에드윈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문득 든 의문에 관해 물었다.

“안 가져간 건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사이러스.”

항상 똑 부러지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아이가 딴청을 부리며 다시 품에 숨으려 들자 에드윈이 엄한 목소리를 냈다. 엄격한 목소리에도 한동안 대답이 없던 사이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땐 장미색 뺨이 불퉁했다.

“……형아가 베개 아래에 놔뒀다가 잃어버리며언…….”

“잃어버리면?”

“이빨 요정님이 이빨을 못 찾아서, 그러면 어떡하냐고 해서…….”

“…….”

“사이러스가 대신 보관해주기로 했어요.”

막내아이가 세실과 연관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내고 관심 가지는 걸 알았지만, 이런 행동까지 했을 줄은 몰랐던 에드윈이 묘한 기색으로 사이러스를 관찰했다.

이를 보관하다니. 에드윈은 자신을 그대로 답습한 자식을 보며 “사이러스는 너랑 너무 닮았어……”라고 중얼거리던 레이라를 떠올렸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셋 중 가장 자신과 닮았지만 이런 면까지 같을 줄은 상상하지 못한 에드윈이 화려한 금발을 습관처럼 만지며 물었다.

“어디에 보관했어?”

“…….”

아이가 대답이 없었다. 고백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라는 듯 조개처럼 입을 다문 사이러스가 못 들은 척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드윈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자신의 무릎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단순한 호기심일까. 어쩌면 좋아하는 형제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따라 하고 싶은 애정일지도 모른다. 에드윈은 겪어본 적 없어 모르지만, 뭇 아이들은 제 손위 형제들을 따라 하길 좋아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아빠, 이빨 요정님이 이빨을 안 가지고 갔는데 왜 이가 나요?”

생각에 잠겨있던 에드윈이 아이의 보챔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사이러스는 당장 그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열흘간은 잠조차 자지 않고 골몰하겠다는 양 심각한 표정이었다.

“글쎄……. 아빠도 요정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아빠도 모르는 게 있어요?”

부친에게도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기보단 이 말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워하는 발칙한 말투였다. 기가 찬 에드윈이 낮게 웃자 아이가 왜 웃냐고 어깨를 흔들었다. 자식의 동화적 환상을 지켜줄지 아니면 진실을 알려줄지 고민하던 에드윈이 일어나며 사이러스를 번쩍 안아들고 뺨에 입을 맞췄다.

“물론. 난 아직도 너희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어.”

레이라를 지칭하는 말에 사이러스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이빨 요정은, 음.”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마음먹은 에드윈이 천장으로 한 번 눈을 굴렸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어내는 데엔 재능이 없어 머리 회전이 평소처럼 빨리 돌아가질 않았다.

“이빨 요정은 확인했을 거야. 네가 대신 잘 보관했다는 걸. 그래서 세실에게 새 이를 가져다 준 거지.”

“으응…….”

썩 납득이 가지도, 그렇다고 안 가지도 않는 얼굴의 사이러스가 다시 고민에 빠져들려하자 에드윈이 화제를 돌렸다.

“이만 내려가자. 다들 기다려.”

우선은 이만 하자 싶어 방을 나가려는데, 사이러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종알거리며 에드윈의 목깃을 붙잡았다.

“내릴래요…….”

“왜?”

“……형아가.”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에드윈은 사이러스의 생각을 충분히 짐작했다. 제 형이 울고 속상해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아이는 혹시나 아까 에드윈에게 안기지 못했던 세실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 서운해 하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하고 있었다.

에드윈은 자신의 기준에선 정도가 지나쳐 보이는 우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이가 좋은 형제자매들은 모두 이런 걸까? 상상하려 노력해봤지만, 자신에게 누이나 형제가 있다 한들 이렇게 애틋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계단에서 내려줄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내려주면 잠시간 안겨있을 수도 있고 세실에게 이 모습을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제안하자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윈의 곧은 목에 팔을 감아 껴안았다. 아직은 안겨있는 게 좋을 나이의 아이를 토닥이며 에드윈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알레시아가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버릇이 있어서 세실이 그걸 따라하고, 사이러스가 또 세실을 따라해서 삼 남매는 어린 시절에 3인칭으로 자신을 칭했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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