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괜찮다면서, 오늘따라 유난히 의욕이 없어 보이는 파트너의 눈치를 살핀다. 같이 너튜브도 보고 간식도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때를 놓쳐서 약간 늦은 오후에 점심을 하게 됐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면 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일도 없다고 했다.

 

고민거리가 있다는 핑계로 회사에서도 보는 파트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상한가? 허도영은 이제 그냥 파트너가 아니라 좋은 이웃 언니 정도가 됐다. 말하자면 친구들과 같다. 회사에서 시달려서 집에서 쉬어야지 싶다가도 친구를 만나러 시간을 내고 노는 동안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있다가 돌아오면 피곤해지는 그런 거. 그러면서도 그날 하루는 잘 보낸 기분이 드는 그런 사람. 허도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핑곗거리이자 정말 상담을 하고 싶은 주제…를 언제쯤 꺼내 들어야 할지 고민이다. 끓는 물에 넣은 면발을 들었다 놨다 하며 공기에 노출을 자주 시켜줘야 꼬들꼬들한 면이 된다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눈치를 본다. 늦은 점심은 가볍게 먹고 저녁을 제대로 먹기로 해서 라면은 한 개 반을 끓였다. 물론 내가 반개다. 한 개를 못 먹어서? 아니. 가볍게 먹자는 말은 이걸 다 먹으면 후에 운동 걱정을 하는 나를 위해서다. 먹는 족족 티가 나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은 아닌데, 기본적으로 먹는 양의 두 배씩은 해치우는 파트너를 보자면 세상은 불공평하다.

 

“언니, 다 됐어요. 냄비 받침.”

“깔아놨어요. 뜨거우니까 내가 가져올게요.”

“언니는 안 뜨겁고요?”

“난 뜨거운 거 잘 참아요.”

“그래요?”

 

불을 끈 채로 냄비를 두고 먼저 앉았다. 파트너는 의외로 이런 자잘한 것들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데, 처음에는 스스로 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도 하려고 드는 것들이 많아 한 번에 수긍해주는 편이다. 솔직히 미안할 때가 많긴 한데, 이럴 때 약간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뿌듯한 모습을 잠깐 보인다. 언니라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꽤 귀엽다. 편하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 너저분하게 있던 것들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다. 수저와 중앙에 작은 김치, 라면을 덜어 먹을 그릇과 시원한 물도 각자 세팅되어 있다. 곧 테이블 한쪽에 라면 냄비가 턱 놓이자마자 언니 그릇을 선점해 건더기들을 덜었다.

 

“어어?”

“노른자 언니 거!”

“설아 씨 드세요.”

“언니 주려고 달걀 안 풀었단 말이에요.”

“아….”

“이것 봐, 좋으면서 그래요?”

 

이런 표정 말이지…, 약간 입술을 벌리고 헤, 하는 느낌으로 미소지은 얼굴. 아마도 허도영이 미인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만,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런 부분이 귀엽다고나 할까? 이러면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긴다고나 할까.

 

통째로 덜어 준 노른자는 파트너의 한입에 사라졌다. 좋아하는 걸 나중으로 미뤄두는 나와는 달리 먼저 먹어버리는 타입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파트너의 그릇에는 메인이 되는 반찬부터 사라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언니는 좋아하는 것부터 먹어요?”

“꼭 그렇진 않은데, 아끼지는 않는 것 같아요. 설아 씨는요?”

“전 아꼈다가 마지막에 먹어요. 그래서 뺏긴 적 많아요.”

“그렇구나. 적당히 빨리 먹어치우니까 그런 경험이 없는 걸까요?”

“누가 언니 걸 빼앗아 먹겠어요. 죄다 주고 싶어서 안달이겠지.”

“그럼 앞으론 설아 씨가 빼앗아 먹어요. 화 안 낼게요.”

“좋아요. 그럼 앞으로 치킨에 날개는 내 거.”

“좋아요.”

 

이 언니는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 뭐가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크게 면을 집어서 그릇에 덜어 젓가락질 몇 번에 다 먹어버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매번 신기하단 말이지. 저게 다 어디로 가는데 유지가 되는 거야? 외근을 자주 나가서 그런가?

 

“근데 그 날개 내가 언니 드세요. 하면 거절하지 않기.”

“그건 빼앗는 게 아니잖아요?”

“약탈한 후에 인심 쓰듯이 양보해 보는 거죠.”

“큽.”

“코 먹지 말고요.”

“매운 국물 마실 때 웃기지 맙시다.”


 

***


 

가볍게 먹자면서 후식은 꼭 챙긴다. 냉장고에서 컵 과일을 가져와 설아 씨에게 건넨다. 요즘은 혼자 살아도 신선한 과일을 남김없이 먹을 수가 있다. 비닐이나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는 게 단점이다. 뭐든 버릴 게 많으면 귀찮다.

 

과일 하나로 매운 라면의 흔적을 지우는 동안 쓸모없는 주제만 나오던 이야기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설아 씨는 소파에 기대어 잠깐 고민하더니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꺼내고야 만 것이다. 물론 그 주제는 언제 꺼내도 마음의 준비는 하지 못했으리라.

 

“언니, 언니. 개발팀 김 주임님이요.”

“아, 네.”

“언니 김 주임님 잘 알아요?”

“잘은 모르고 일하다가 몇 번 대화한 적은 있죠.”

“그래요…, 어때요? 김 주임님?”

“잘 모르겠어요. 일만 한 거라서.”

“그래도요. 막 예의가 바르거나 아니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거나 그런 건 있잖아요. 인상? 인상은 어땠어요?”

“기본 예의는 있으셨고, 대화도 잘 통했어요. 인상…, 사실 잘 모르겠어요. 관심이 있질 않아서.”

 

세상 제일 나쁜 사람을 만들어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으니 남의 험담을 쉽게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김 주임이라는 사람이 내게 험담을 들을 정도로 뭘 잘못한 것도 없다. 있다면 최근에 설아 씨에게 고백해서 이딴 상담이나 하고 있게 만든 것과 고백을 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는 설아 씨를 보는 내가 비참해진 거. 달달하게 먹던 과일은 달다 못해 쓴맛이 나는 것 같아 반절도 먹지 않은 채 내려놓았다.

 

“그래요? 언니가 관심 있는 님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비밀이에요.”

“와, 절대 안 속아. 나는 만인이 알게 됐는데.”

“사귈 건가요?”

“모르겠어요. 김 주임님은 언니한테 고백한 적 있다? 없다?”

“없다.”

“헐, 진짜요? 잘 생각해봐요. 너무 많아서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진짜 없어요. 후….”

 

입안이 쓰다.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냈다. 괜히 사용한 휴지나 뜯어낸 컵 과일의 패키지 비닐 같은 것들을 모아 돌돌 말아 쥐었다. 손에 뭐라도 들고 있고 싶었다. 설아 씨는 김주임에게 호감은 아니더라도 관심은 있는 것 같다. 그 관심이 호감이 되는 건 최악이지.

 

“그게 뭐가 중요해요? 설아 씨 마음이 중요하지. 그래도 관심이 있나 봐요.”

“관심?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고백이라는 게 참 굉장한 것 같긴 해요. 너무 공개적이어서 좀 곤란하긴 하지만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하고….”

“….”

“그냥 기다리신다고는 했는데, 너무 오래 지난 거 같아서 정리해서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도통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김 주임을 향한 이 관심조차,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 그렇다고 해요.”

“뭐를요?”

“당신을 모르겠으니까 마음도…. 그냥 대답 안 하는 건 어때요?”

“허, 언니는 꼬박꼬박 거절하잖아요.”

 


알면서도.


 

“그냥, 연애 안 하면 안 되나.”

 

마주 앉아있던 설아 씨가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오전에 방문해서 옷을 갈아입은 직후처럼 두 팔로 허리를 감싸고 팔에 턱을 괸다.

 

“뭐야, 내가 연애하는 게 싫어요? 우리 언니는? 입이 왜 그렇게 댓발 나왔어요?”

“아닌데요?”

“맞는데요? 언니 좀 귀여운 거 알아요? 회사 사람들 다 모를걸요? 언니 이렇게 귀여운 거.”

“내가 뭐가요?”

“지금 이러는 거요.”

“….”


“언니, 나 연애 안 한다고 하면, 언니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지 마요. 내가 더 잘 해줄게요.”



 

-출간작- My M8(Mate), 오렌지, 애집(愛執), 불온(不穩), true romance -출간예정작- oui+oui 스핀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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