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이전의 기억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기억의 파편조차 남은 것이 없고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1년 동안 병실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바깥을 보면 커튼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이 살랑거렸다. 햇빛은 나를 바라보며 잘 잤냐고 인사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일어난 걸 확인한 간호사는 곧장 아버지를 모셔왔다. 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분명 나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나를 통해 누군가를 또 떠올리는 듯한 눈빛이다. 


“아빠, 괜찮아요 저.”

“그래도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을 해도 내 손을 꽉 잡은 아버지의 손은 말없이 떨기만 했다. 한 방울씩 포근한 이불 위로 떨어지는 아버지의 눈물은 그 어느 것보다도 구슬픈 눈물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저 아버지를 꼭 끌어안았다.



*

 

  병실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신듯한 아버지의 몰골은 초췌했다. 퇴원 수속을 밟기 위해 기초적인 진단과 상담을 받았고 수술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병실 안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한 병원을 나왔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작은 바람은 햇빛을 끌어들였고,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이 빛은 마치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것처럼 포근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익숙한 장소인데도 이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거실을 지나 내가 사용하던 방으로 이끌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는 아직까지도 내 냄새가 남았고 꾸준히 청소를 해두셨는지 먼지 한 톨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누군가 남겨둔 캠코더가 하나 남아있었다. 아버지의 글씨도, 내 글씨도 아닌 누군가의 글씨가 노란 메모지 위에 쓰여있다. 


 샤워를 하기 위해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냈다. 왼쪽 가슴에는 커다란 수술 자국이 남아있고 실밥은 몇몇 개 아직 남아있다. 만지면 아직도 쓰라린데 살갗이 아픈 것인지 아니면 안쪽 심장이 아픈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거칠게 샤워를 하며 아픔을 잊어보려고 했다. 그래도 욱신거리는 느낌은 심장이 뛰는 박자에 맞춰서 아파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봐달라고, 잊지 말라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꽤 오랫동안 뒤척였다. 계속 기억을 찾아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이 엄습했다. 고개를 돌려 살랑거리는 달빛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달빛은 무척이나 아버지를 닮았다. 차가운 인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위해서 한없이 감정을 보여주시는 아버지. 한데, 태양은 누구를 닮았더라?



*


  집에서 잠을 청한 첫날밤, 잊지 못할 꿈을 꾸었다. 그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태양 아래 낯익은 사람이 서있다. 그녀는 흐릿한 발자국만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가까이 있지 않아도 이 사람이 무척 포근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니야, 가지마. 내 옆에 있어줘. 


일어나 보니 내 눈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침대 옆에서 흔들거리는 햇빛은 꿈에서 본 그 사람을 비춰주었다. 나를 닮은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캠코더를 가리켰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고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사라졌다. 떨어진 눈물은 햇빛에 반사되어 허공에서 잠깐 반짝이고 사라졌다. 침대에서 다급하게 일어나 캠코더를 집었다. 손으로 캠코더를 만지자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내 두 손을 어루만졌다. 빨리 확인해보라고 재촉했다. 내 머릿속도, 내 마음도 다급해졌다. 오른쪽 전원 버튼을 누르자 동영상 한 개가 저장되어 있었다. 꿈속에서 만난 그 여자다. 나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 엄마다. 




*



“응, 그래. 엄마야.”

영상이 시작되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많이 놀랐을 거 알아. 일어나 보니 엄마가 없지? 수술은 잘 끝났지?”

“엄마가 많이 미안해. 건강하게 낳아줬어야 했는데.”


왜 당신이 미안해하는 거예요. 내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건데. 


“…”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화면 속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라있다. 떨어질 듯 말 듯. 가능하다면 당장 화면 속으로 들어가 품 속으로 파고들어 꼭 안아주고 싶다. 울지 말라고.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오래 못 산다는 병원의 소리를 듣고, 내 심장을 네게 내어주기로 했다.”

“알아, 너는 필사적으로 말렸지.”

머릿속에서 조각난 기억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두통에 캠코더를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자식이 어떻게 부모보다 먼저 떠나니. 어떤 부모가 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니?”

“나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다.”

“너 자신을 원망하지 말렴. 이건 온전히 내 선택이니까. 응?”


화면 속 엄마는 따스한 햇빛에 반사되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내 심장이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록 이번에 넘어졌을지라도, 너에겐 언제나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위험한 행동하지 말고, 술 마시지 말고, 담배도 하지 말고. 그냥 건강하게 지내줘 이제는."

"사랑도 네가 원하는 만큼 해. 꼭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네게 다 못 주고 간 내 사랑을 이어서 나눠줄 사람을. 너의 지금 이 미소를 유지해 줄 사람."


엄마는 고개를 숙여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나를 위해 죽음을 앞둔 엄마의 가냘픈 어깨는 떨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희미하게 본 눈물처럼, 화면 속 엄마가 흘리는 눈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네겐 이 엄마가 무슨 존재였니? 내가 바라컨데, 햇빛 같은 엄마였었으면 하는구나."

"항상 어디를 가나 너와 함께 있고, 따뜻하고 너를 위해주는.. 그런 사람, 그런 엄마."

나는 고개를 들어 캠코더를 볼 수가 없었다. 고작 수술 따위로 나를 위해 희생한 엄마를 잊어버린 나 자신이 너무 미워서. 또 너무 미안해서. 자책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제서야 병실에서 아빠가 나를 통해 누군가를 보았는지 짐작이 갔다. 내 안에 엄마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산다. 엄마가 나를 위해 심장을 내어주셨다. 가슴속에 엄마가 주무시고 계셨다.


"내 아이로 태어나줘서 너무 고마워."

"다음에도 내게로 와줘."

"건강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기면 심장에 손을 대봐. 이 엄마가 뭐든 도와줄 테니까."

"엄마는 죽는 게 아니야. 너와 오랫동안 함께 하기 위해 일부를 나누는 거야."

자연스레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엄마가 답을 한다.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사랑해, 아이야. "

"정말 사랑해"

참고 있던 눈물이 굵은 방울을 만들어내어 어느 순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심장도, 나도 같이 울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캠코더를 부여잡고 머리를 숙여 울었다. 어두운 방안 뒤에, 따스한 봄바람이 창문을 통해 햇빛을 이끌었고,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햇빛이 나를 감싸 안았다. 햇빛이 엄마를 데려왔다. 엄마는 방안으로 들어와 떨리는 내 어깨를 부여잡아 한 품에 쏙 들어오게 끔 세게 끌어안았다. 심장 소리에 맞추어 등을 다독였다. 잊지 못할 포근함이었다. 

캠코더를 책상 위에 내려두고 두 손을 왼쪽 가슴에 모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중얼거렸다.

"나의 햇빛. 나만을 위한 햇빛. 심장을 내어준 햇빛. 나는 엄마를 위해 살겠어요."


햇빛은 중얼거림에 응답하는 듯 갑자기 밝아지더니 캠코더 화면을 비추더고 서서히 사라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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