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 인물의 위법 행위를 서술한다고 해서, 그것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고 바랍니다.





“형.”

“….”

“형!”

“조용히 좀 해라. 왜 자꾸 말을 시켜.”


정국은 신경질적으로 이어 마이크를 뺐다. 이제 막 안의 대화를 들어 보려고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자꾸만 말을 시켜 순간적으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짜증이 난 탓인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손길이 거칠었다. 그런데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지태가 무전 신호를 끊어 목소리가 섞이지 않게 한 다음 정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깃발 올라왔대. 복귀 명령이야.”

“뭐라고?”

“깃발 하루 이틀이냐.”


정국의 답 뒤로 시큰둥한 기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태는 환멸 느낀 표정으로 기석에게 대충 시선을 준 뒤 다시 정국과 눈을 맞췄다.


“왜 그렇게 봐, 새끼야.”


지태의 행동에 약이 오른 기석이 다소 큰 목소리를 내는데도 정국은 차분한 표정으로 시간을 살피기만 했다. 묻는 이만 있고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도대체 깃발이 뭐라고 월척이 코앞에 있는데 복귀하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 기석은 인상을 썼다. 한참 동안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던 지태가 참지 못하고 기석을 노려봤다.


“사람이 죽었어. 심각한 척이라도 좀 해.”


나지막이 깔린 지태의 말과 함께 차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에이 원. 검은 천에 빨간 띠래.”


정국은 지태의 말을 곱씹으며 이어 마이크를 다시 귀에 꽂았다.


“저 새끼들 이제 막 다 모였어. 잠깐이면 돼.”

“김 팀장님이 지금 당장 복귀하래.”

“….”

“형이 결정해. 우린 형 명령만 따라.”


명령. 명령의 주체는 확실했다. 여주는 여주의 팀에게. 정국은 정국의 팀에게. 그러니 복귀하라는 명령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됐다. 팀의 결합일 뿐 그 누구도 우위에 있지 않았다. 정국이든 여주든 서로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국은 깃발이 올라왔다는 소식보다도 복귀하라는 명령에 더 강하게 꽂혔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일 것이다. 위급 상황이니 일단 몸을 사리라는 뜻이거나, 너희와 연관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 당장 오라는 뜻이거나. 

지태가 여주의 의사를 한 번 더 정확히 전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저쪽 팀의 의도를 충분히 인지한 후 명령을 내려 달라는 말이었다. 정국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무전에서 신경을 끊지 않았다.


-형. 들어가?

“어.”

-들어가라고?

“들어가서 녹화 하나만 떠. 얼굴 다 나오게. 몇 명 얼굴 잘린다.”

-알았어.


들어가라는 말이 작전을 지속하겠다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팀원들은 숨을 죽였다. 그사이 정국은 애꿎은 라이터만 손안에 굴리며 입술을 물었다. 복귀 명령. 그리고 요원의 죽음. 여주의 상태가 어떨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불안해하고 또 조금은 화가 났을 것으로 생각했다. 에이 원에 검은 천이라면 인사팀장이 살해당했다는 말인데, 그게 정국 팀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몰랐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복귀를 조금 미루고 일을 마치고 싶었다. 판은 다 깔렸고, 위험 요소 없고, 그냥 이대로 관찰하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갈 것이다. 두 시간만 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했다. 여주에게 양해 구할 생각을 하는 자기 자신이 어이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고 복귀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핸드폰 진동이 연달아 두 번 울렸다.

정국은 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진동이 느껴지자마자 발신자가 누구인지 짐작했고, 아니나 다를까 여주에게서 두 통의 아주 간결한 문자가 와 있었다. 이는 팀장 대 팀장의 의사 전달이 아니었다. 아내로서,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정국이 짙은 한숨과 함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곧이어 이어 마이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전 팀원에게 무전을 넣었다.


“녹화 후 철수. 10분 뒤에 합류 지점에서 보자.”


정국은 문자를 한 번 더 봤다.


-이번에는 그냥 내 말 들어줘.

-제발. 부탁이야.


이는 애원이었다. 남편으로서,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여주는 완벽하게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섞었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 당장 정국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안가는 지독한 침묵만 흘렀다. 통화를 마친 후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털썩 앉은 여주가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하고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십삼 번 깃발 올라왔습니다. 에이 원, 검은 천에 빨간 띠가 둘려 있습니다. 모든 깃발 내리고 대기하라는 명령입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은 언제나 익숙지 않았다. 아무리 그 상대가 증오해 마지않는 앙숙이라고 한들, 충격의 강도가 다르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암호화된 문장을 찬찬히 곱씹은 여주가 이미 그 뜻을 알아차렸는데도 굳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하던 직원의 목소리도 함께 머릿속에 깔렸다.


“십삼 번 깃발 올라왔습니다.”

“1본부 3지부 요원 사망.”

“에이 원,”

“인사팀장.”

“검은 천에 빨간 띠가 둘려 있습니다.”

“살해 후 자연사로 위장.”


여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한 번 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전보다 힘 있게 느껴졌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에이 원이 죽었는데 왜 우리가 대기해야 돼?”


여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로 눈을 맞추며 눈치를 보던 팀원들이,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인가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여주는 눈을 질끈 감고 신경질적으로 목 언저리를 긁적이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위로 휙 던지듯 내려놓았다.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며 테이블 유리에 부딪혀 지저분한 소음을 만들었다. 화면 위로 곧장 메시지가 떴다.


-지금 들어가.


정국의 답변이었다. 그런데도 핸드폰을 손에 쥐지 않고 팝업 창으로만 답장을 확인한 여주가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 팀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희도 핸드폰 올려놔.”

“네?”

“핸드폰 좀 보자고.”


강압적이고 어쩐지 화가 섞인 말투였다. 반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모두 순순히 핸드폰을 꺼내 놓을 만큼 완강한 모습이었다. 가장 늦게 핸드폰을 꺼내 든 지민이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여주의 눈치를 살폈다. 정국은 여주가 불안해하고 또 조금 화가 났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주는 약간의 불안감이 모두 감춰질 만큼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여주가 뿜는 기운이 눈에 보인다면 머리 위로 하얀 김이 풀풀 날 것만 같았다. 지민은 핸드폰을 여주에게 맡기고 소파에 편히 기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사이 제 핸드폰을 팀원들 쪽으로 밀어 넣은 여주가 가장 먼저 지민의 것을 손에 쥐며 까딱 고갯짓했다.


“지금부터 이거 싹 다 뒤질 거니까 너희도 내 거 확인해.”


단 한 문장뿐이었지만 팀원들은 느낄 수 있었다. 단언컨대 오늘의 여주는 3년 전 그날에 이어 두 번째로 분노한 상태였다.






핸드폰에 무언가 있을 리 없었다. 있다고 한들 멍청하게 남겨 놓지 않을뿐더러, 여주는 제 팀원들은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확실히 확인해야 했다. 이 팀은 기필코 A1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인사팀장은 여주 팀이 맡은 사건과 전혀 접점이 없다. 오히려 지민의 헝가리 체류 건이나 유제국 사건 보안 건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며 성질을 긁기만 했다.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작전이 중단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팀원이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감사팀에서 오는 거겠죠?”

“응. 그렇겠지.”

“민 팀장님이 직접 오실까요?”

“나 열받아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그러겠지.”


상황이 엿같지만 그래도 여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기 명령이 떨어진 이상, 감사팀에서 사건 파악을 마치고 대기를 풀어 줄 때까지 그냥 닥치고 있어야 했다.

‘만에 하나 이게 또 한 번 발목 잡으려고 수 쓰는 거면 명령이고 뭐고 다 엎어 버릴 거야.’

감사팀이 먼저 도착할까 정국이 먼저 도착할까 초조해하는 팀원들과 달리, 여주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화가 끓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딩동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지현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월패드로 달려갔다.


“누구야?”


몸을 반쯤 돌리고 묻는 여주의 말에, 지현은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민 팀장님인데요.”






정국은 안가 앞에 주차된 낯선 차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여주의 개인 차 한 대와 작전용 차 두 대, 마지막으로 문 앞에 삐딱하게 주차된 저것은 분명 이 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차를 좆같이 대 놨네.”


발끝으로 타이어를 툭 차며 뱉은 정국의 말에 기석이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걸어가 번호판을 확인하는 정국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국정원의 보안 차량. 정국은 단번에 감사팀 차라는 것을 눈치채고 낮게 욕지거리를 뱉더니 초인종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소리 없이 불빛만 반짝이는 초인종을 보며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내 손에 쥐었다.


“감사팀 새끼들 또 삽질하네.”

“형. 일단 진정을,”

“네 네 하니까 누굴 호구로 아나.”

“형….”

“사람이 죽었는데 왜 여길 오고 지랄이야. 개새끼들 보나 마나 속 뒤집으려고 그러지.”

“….”

“이래서 참아 주면 안 돼. 참아 주니까 끝도 없이 기어오르잖아.”


딸깍 문이 열림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안가로 걸음을 옮기는 정국에 반해, 팀원들은 멀뚱멀뚱 서서 정국의 뒷모습만 빤히 봤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더니 정국은 몇 년 전 그때처럼 눈에 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 년 전 그때, 가장 험한 현장에서 세상 굴곡 다 겪은 팀원들도 실수 한 번에 벌벌 떨며 정국의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모습 말이다.


“그래도 형수님 계시니까 괜찮겠지?”


행여 정국이 사고를 칠까 봐 불안해하는 한 팀원의 말을 시작으로 지태가 다급하게 정국을 쫓아 안가로 뛰어 들어갔다.

이들이 안가에 들어섰을 때는 여주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오자마자 여주부터 찾는 정국의 물음에 지민이 거실 끝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민은 곧장 방으로 향하려는 정국의 팔을 덥석 잡고는, 가면 안 된다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요. 한판 뜨는 중이거든요.”

“누구랑.”

“감사팀장.”

“감사팀장?”

“네. 감사팀 민윤기. 여주는 지금 민윤기한테 에이 원의 죽음은 우리와 관계없다고 증명하는 중이에요.”


툭 팔을 떨군 정국이 미간을 구겼다.


“그걸 우리가 왜 증명해야 하는데?”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어쩐지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인사팀장이 뭐라고 아무 관련도 없는 팀의 작전까지 중단시키는 건지 의문이었다.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사람도 아니고, 직속 상사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군가가 그 사람을 죽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정국은 듣는 귀가 많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기석의 말처럼 깃발 올라오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까지 유난을 떠나 싶었다. 그깟 사람 하나 죽었다고 이 난리냐, 그런 뜻은 물론 아니고. 사람이 죽었어도 할 일은 해야지, 그 뜻에 좀 더 가까웠다. 진정 이게 감사팀까지 올 일인지 몰랐다. 머릿속이 복잡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짜증이 밀려와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셔츠 단추를 푸는데 대뜸 여주의 고함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정국은 지민의 팔을 떼어 내고 망설임 없이 거실 맨 끝 방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야. 민윤기! 너 말 다 했어?”

“뭐? 야, 민윤기? 너?”

“누가 누굴 죽여.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줄타기 잘못하면 골로 간다. 너희 팀도 삼년상 치르게 해 줄까. 이거 다 네가 인사팀장한테 한 말 아니야?”


여주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꼭 물었다. 정곡이 찔리거나 당황한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어이가 없었다. 겨우 그깟 말 하나로 사람을 살인자로 모니 화가 치밀었다. 감사팀 유난 떠는 거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 엿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때문에 남의 작전까지 간섭하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려고 그랬구나.’

여주가 꼭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이 상황에도 여유 부리는 민윤기의 낯짝을 힘껏 노려봤다.


“말은 누가 못 해. 그런 식이면 나 여기서 일하는 6년 동안 골백번도 더 죽었어.”

“너 살아 있잖아. 인사팀장은 죽었고.”

“죽이고 싶었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지. 근데, 죽일 생각은 없었어.”

“죽이고 싶었다. 명분 확실하고.”

“죽길 바라지도 않았어. 누가 몰라. 여기서는 그 어떤 명예로운 죽음도 그냥 개죽음인 거.”

“별로 설득력 없는 거 너도 잘 알지?”

“설득력? 내가 널 왜 설득해. 나한테서 변명이 듣고 싶은 거면 증거부터 가져와. 싸가지없게 구는 거 딱 여기까지만 참아 줄 거니까. 그래도 동기라서 참아 주는 거야. 운 좋은 줄 알아.”


결국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여주가 지체 없이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곧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민윤기 때문에 얼굴이 잔뜩 굳어서는 스르륵 몸을 돌렸다. 민윤기는 의자에 앉아 얼굴까지 가리고 웃었다.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 여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민윤기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흥분해? 답지 않게.”

“….”

“에이 원이 무슨 줄타기를 어떻게 잘못해서 골로 갔는지 좀 알려 줄래?”

“….”

“여주야. 내가 말했지. 적을 만들지 말라고.”

“….”

“너는 나를 적으로 돌린 게 가장 큰 실수였어.”


문고리에 올려놓은 손을 툭 떨군 여주가 잔머리에 후 바람을 불었다.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내내 묶었던 머리를 풀어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혈압이 올라 머리가 조금 당겼는데 풀고 나니까 한결 나았다. 자연스레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게, 여주의 상기된 얼굴을 조금 가려 줘 더 잘된 일이기도 했다.

머리칼을 쓸어 넘긴 여주가 윤기에게 걸음을 옮겼다. 풀어 헤친 머리에서 스며 나오는 향이 강해 윤기는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여주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책상 위에 손을 짚은 채 앉아 있는 윤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때문인지 윤기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나를 적으로 대했던 인간들. 지금 다 어디 있게?”

“그런 말 때문에 네가 지금 내 의심을 받는 거야.”

“그럼 오늘부터 하루하루 불안에 떨면서 살아 봐. 네 말대로라면 다음은 너겠네. 너 곧 죽겠다, 윤기야.”

“에이 원이 무슨 줄타기를 어떻게 잘못했다고?”

“직접 알아봐. 무임승차하지 말고.”

“부탁 아니야. 협박이야. 말해.”


협박. 그 한 단어에 여주는 표정 관리를 포기했다. 차라리 명령이라고 하면 지랄하지 말라고 쏴붙이기라도 했을 텐데, 뭐라도 알고 있는 척 협박 운운하니 심사가 뒤틀려 버렸다. 

그 순간 윤기가 여주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 주기 위해 살며시 손을 뻗었다.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여주의 볼 가까이에 닿으려는 순간, 예고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정국이 들어섰다. 정국은 책상에 손을 짚고 윤기를 향해 몸을 숙인 여주와 그런 여주에게 뻗은 윤기의 손을 말없이 바라봤다. 이내 다소 거칠게 문을 닫고 빠른 속도로 다가가 여주를 제 뒤로 감췄다. 윤기는 미간을 팍 구긴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정국을 올려다봤다. 윤기가 보기에 정국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나 있었다. 감정 섞인 말투가 정점을 찍었다.


“얻다 손을 대.”

“웬 과잉보호. 그새 둘이 많이 가까워졌네요?”

“감사팀이면 아무 때나 불쑥 찾아와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해도 되나? 팀장이라는 사람이 현장 안 가고 왜 여기 와 있는지 궁금한데.”

“유력한 용의자를 심문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경찰 같네. 사망 추정 시간은 나왔겠지. 그 시간에 우리 모두 안가에 있었다는 건 당연히 확인했을 테고.”


윤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의 말대로 알리바이 확인은 진작 끝났고, 용의선상에 올리지 않아도 될 여주를 굳이 심문하러 여기까지 온 윤기였다. 여주는 윤기가 왜 그러는지 알아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정국은 이유가 뭐가 됐든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어 차분하게 화를 눌렀다. 여주보다 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윤기를 바라보는 정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근데 왜 애먼 사람을 잡고 있나. 너 때문에 방금 월척 하나 놓치고 오는 길인데.”

“난 전 팀장님 들어오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럼 깃발 내리고 대기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데. 계속 말꼬리 잡네. 빡치게.”

“깃발 내리고 대기하라는 건 김 팀장한테 한 소립니다. 에이 원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야 했거든요. 그나저나 왜 자꾸 반말이지? 빡치게.”

“꼬우면 너도 반말해. 너네 하는 짓 엿같아서 말 곱게 안 나가니까.”


좀만 더 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싸울 기세라 여주가 정국의 손등을 두어 번 톡톡 쳤다. 눈을 맞춰 오는 정국에게 하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으니, 정국은 분해하면서도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던 윤기가 입으로는 미소 띤 채 미간을 구겼다. 그사이 한결 차분해진 여주는 피곤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문지르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나도 에이 원 죽은 거 누구보다도 유감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만하자. 너도 알잖아. 나랑 관련 없는 거.”

“내가 궁금한 건, 왜 네 업무도 아닌 일을 캐고 있었냐는 거야. 인사팀장 뒷조사했잖아.”

“한 번만 더 건드리면 확 먹이려고 했다. 됐어?”

“그래서 뭘 얻었어?”

“얻긴 뭘 얻어. 소문 대로던데. 정치판 기웃거리는 거.”

“정치판이라면 유제국 쪽 말하는 건가?”

“아니. 그 반대쪽. 그래서 줄타기 잘하라고 한 거야. 이번 총선 유제국 압승이 유력하니까.”


지칠 대로 지쳐 윤기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여주가 아는 걸 조금 털어놓았다. 어차피 인사팀장이 정치판 기웃거리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고, 사람이 죽어 버렸으니 정보가 쓸모없어지기도 했고. 이제 됐냐는 듯 눈을 깜빡인 여주는 고개를 대충 까딱이며 윤기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그런데도 자리에 앉아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던 윤기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여주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정국이 입을 꾹 다물고 윤기의 손만 빤히 바라봤다. 윤기는 제 입에서 떨어질 이야기를 기다리는 여주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가 기관 직원이 유제국 반대편에 서서 공사를 치니까, 유제국은 되게 화났겠다. 그치.”

“뭘. 지들도 다 하는 짓인데.”

“그래 봤자 댓글 공작. 그 정도?”

“그래 봤자라니. 걔네 얼마나 악랄하고 치밀한지 몰라? 손가락 하나로 여론이 바뀌어. 죄다 잡아서 감방 보내 버려야 하는 건데 뒤에서 똥이나 닦아 주고 있으니.”

“그럼 상부에 에이 원 찔러 버리지. 기관 망신시키는 버러지를 왜 두고 봤어?”

“….”

“김 팀장 너, 자신 없었지?”

“뭐래. 관심이 없었지.”

“아니. 너 자신 없었어. 겁쟁이 다 됐다.”


실소를 터트린 윤기가 여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기분이 나빠 표정이 굳어 가는 여주를 보고도 윤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으로 웃었다. 보다 못한 정국이 윤기의 손을 탁 쳐 내니, 순간 표정이 굳어 정국과 눈을 맞추는 윤기였다. 정국은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제 보니 책임 전가가 일상이네. 너희가 할 일을 왜 김 팀장한테 시키지? 그거 다 누가 뒤집어쓰라고.”

“책임 전가가 아니라,”

“전담팀도 모르는 걸 다른 팀장이 알고 있으면 나 같으면 쪽팔려서 말 못 하겠다. 중립 안 지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동안 감사팀은 뭘 했는데?”

“모르긴 누가 몰라.”

“알았으면 더 문제고. 그래 놓고 누구한테 겁쟁이래.”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온 건지 의아했다. A1의 죽음,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여주를 의심하는 민윤기의 태도. 물 흐르듯 대화를 주도한 윤기는 결국 여주 입으로 A1이 정치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왜 그걸 캐고 있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고 했는지, 말 그대로 감사를 해야 하는데 민윤기는 이상하게 여주의 성질을 긁으며 왜 찌르지 않고 참았냐며 자극했다. 마치 애초부터 A1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주는 또 한 번 불꽃 튀게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멍한 눈빛으로 입술을 물었다. 순서에 따라 차분하게 생각이 이어졌다. 

여주가 인사팀장 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그걸 민윤기가 알고 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여주와 인사팀장의 틀어진 관계를 좀 더 깊숙이 추궁할 만한데 도리어 왜 찌르지 않았냐고 핀잔한다. 민윤기는 애초부터 여주에게 에이 원의 죽음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렇다면,


“민윤기. 혹시….”

“혹시 뭐.”

“에이 원이 나에 대해 뭐 아는 거 있어?”







여주가 굳이 인사팀장을 자극했던 건, 자기가 패를 쥐고 있으니 나대지 말고 몸을 사리라는 뜻이었다. 악의를 드러내는 순간 공격의 화살이 다시 자신에게 올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자긴 털어 봐야 나올 게 없으니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여주는 몇 년 전 제 사건을 빼앗아 다른 팀에게 배정한 부장의 비리를 밝혀 쫓아낸 적이 있다. 보복성이 다분해 징계와 함께 6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각오하고 한 일이라 별 타격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사건건 시비 걸고 남의 팀원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교묘하게 약점 잡아 자꾸만 브레이크를 밟게 하는 인사팀장에게, 너 자꾸 그러면 네가 한 짓 상부에 까발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한 각오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

‘딱히 없었는데. 뭐가 됐든 지가 한 짓이 더 구리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그래서 민윤기의 말이 의외였다. 그깟 일로 자신이 없느니 겁을 먹었느니 하다니. 민윤기가 한 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여주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아, 인사팀장이 나한테 지보다 더 구린 게 있나 뒷조사했구나. 민윤기는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구나. 그리고, 그거 때문에 결국 골로 갔구나.’

여주가 후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풀썩 몸을 뉘었다. 그 순간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온 정국이 옆에 자리 잡으며 불쾌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여주를 내려다봤다. 여주는 물어볼 기력조차 없어 누운 자세 그대로 그저 멀뚱멀뚱 정국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너 민윤기랑 무슨 사이야?”

“그건 갑자기 왜.”

“이유는 됐고. 무슨 사이냐고.”

“동기. 입사 동기 말고 대학 동기.”

“겨우 그거?”

“왜?”

“이상하게 저 새끼가 자꾸 네 편 드는 거 같아서.”


깜짝 놀란 여주가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정국을 빤히 봤다. 편을 드는 것 같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싸우는 거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뭘 알고 하는 말인가 싶어 잔뜩 긴장한 채 다음 말을 기다리면, 정국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여주를 바라보며 혀끝으로 볼 안쪽을 쓸었다.


“인사팀장이 네 뒷조사했다고 대놓고 힌트 주잖아.”

“자기도 눈치챘구나.”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하는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않나? 굳이 여기까지 왜 기어들어 왔나 했더니 몸 사리라고 충고해 주러 왔나 보다.”

“….”

“겨우 대학 동기일 뿐인데 말이야.”


여주는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무슨 뜻인진 알겠지만, 겨우 대학 동기라는 말에는 공감을 못 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교 같은 과 같은 학번이 나란히 국정원까지 들어오는 희박한 확률을 뚫었다. 게다가 특수 과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민윤기 면접 볼 때 여주가 이미 입사해 있어서 안 뽑으려고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회사에서 처음 민윤기를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랐던 과거가 떠올라 살며시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아차 하며 정국의 눈치를 봤다. 웃음의 의미를 몰라 표정이 굳을 대로 굳은 정국이 여주를 빤히 보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많이 친했나 봐?”

“별로 친하진 않았어. 그때도 지금처럼 자주 싸웠어.”

“….”

“진짜야.”

“….”

“쟤 나랑 완전히 상극이야. 맨날 개처럼 싸웠다니까?”

“….”

“진짠데. 진짜 안 친했는데.”


왜 변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술술 말을 뱉는 여주를 정국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점점 더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언가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은 여주가 살짝 시선을 피했지만, 정국이 여주의 볼을 살며시 감싸 다시금 자신을 보게 했다. 여주는 떨리는 눈빛으로 정국의 빤한 시선을 무방비하게 받아 냈다. 고개를 꺾으며 미간을 구기는 정국을 보는 순간, 여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단지….”

“….”

“한 2주 사귀었을 뿐.”


여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국은 몸을 돌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다 했다. 여주는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를 때 잠깐 만났다가 헤어진 거라고 다급하게 덧붙였지만 정국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이래서 말을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정국은 처음부터 작정한 게 아닌가 싶은 정도로 이 말만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곧장 나가려는 정국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여주가 지친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진짜 자기까지 왜 그래. 그러지 마라. 응?”

“내가 뭘.”

“말하라니까 말했을 뿐이야. 거짓말하기 싫었단 말이야. 내가 거짓말하길 바라는 거야?”

“쟤가 너 아직 좋아하나 봐.”

“무슨 소리야. 스무 살 때 일이라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지.”


허리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든 여주가 무슨 뜻이냐는 의문을 가득 담아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정국은 짙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여주의 볼을 살며시 쓸었다. 스무 살 멋모를 때 겨우 2주 만났다고 이렇게 화낼 리 없었다. 정국은 단지 윤기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감사팀이, 그것도 팀장이라는 사람이, 요원이 살해당했는데 다른 데 한눈팔고 있는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의 이유가 여주인 것 같아서 심기가 불편했다. 민윤기는 툭툭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그게 모두 여주에게 힌트를 주는 것이었다. 

인사팀장이 네 뒤를 캐다가 살해당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 모르니 몸을 사려라.

차라리 그렇게 대놓고 말을 해 줬으면 그냥 충고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정국은 민윤기가 살살 돌려서 힌트를 주는 게 더 기분 나빴다. 직접적인 내용 발설은 원칙을 어기는 것이니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표현한 것일 텐데, 도대체 민윤기에게 여주가 어떤 존재이길래 그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거 완전히 그거 아니냐고. 전 여친한테 미련 남은, 미련 남은….’


“쟤가 지금 에이 원 현장에 안 가고 왜 여길 와.”

“…쟤 원래 좀 그래. 현장에 다른 사람 보냈을걸.”

“민윤기에 대해 잘 안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니야. 감사팀 각개 전투 유명한 거 자기도 알잖아.”

“A팀 대가리가 날아갔는데 무슨 소리야. 각개 전투를 하려면 제대로나 하든가. 이건 그냥 주객이 전도됐다고 하는 거야.”


다른 팀 수장이 없어져서 혼란한 와중에 감사팀장이 여길 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각개 전투를 할 거면 팀원을 여기 보내고 민윤기가 그 현장에 갔어야 한다는 게 정국의 판단이었다. 정국은 여주의 손을 살며시 떼어 내고 다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깜짝 놀란 여주가 감정을 숨길 생각도 않고 곧장 물었다.


“자기 지금 설마 나한테 화내는 거야? 9년 전 일 때문에?”


정국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구기는 여주를 흘깃 보았다가, 이내 여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였다.


“화가 나도 민윤기한테 나.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는데.”

“….”

“우리 팀 애들 좀 보려고.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민윤기가 뭐래?

“뭘 뭐래. 이것저것 묻고 갔지.”

-그 미친놈은 현장 안 가고 왜 거길 들어갔대?

“내가 알아?”

-왜 또 반말이냐.

“몰라. 빡치니까 끊어.”

-빡치니까 끊어? 김여주 너, 내 말 잘 듣겠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삐딱선이야?


화가 난 부장의 격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주는 휴대폰을 귀에서 조금 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원래 학연, 지연, 혈연만 있으면 세상 좀 편하게 살 수 있다던데, 그놈의 지긋지긋한 학연 때문에 넌더리가 났다.

‘학교 것들은 학교에서만 봐야지. 민윤기에 부장이라니. 하필이면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재수 없는 두 명을 뽑았나 몰라.’


“난 우리 학교 사람들이랑 좀 그만 엮이고 싶어.”

-학교 사람? 아주 그냥 신상 정보를 땅에 뿌려라.

“나 혼자 있는데 누가 듣는다고 잔소리야.”

-왜 이리 신경질이야?

“짜증이 나니까!”


짜증이 났다. 여주는 안가에 발이 묶인 것도 신경질 나 죽겠는데 하필이면 좋지 않은 타이밍에 사람까지 죽어 갑갑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자기 뒤를 캐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데 화가 안 나고 배기겠나. 결국 창문을 살짝 열고 담배를 입에 문 여주가 곧장 불붙이며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부장.”

-왜.

“….”

-왜 부르는데.

“….”

-야?

“선배.”


선배라는 말에 상대는 답이 없었다. 그사이 여주가 후 내뿜은 연기가 찬 바람에 섞여 희미해졌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여주는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두어 모금 더 빨았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는 상대를 향해, 여주 또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차곡차곡 생각을 쌓았다. 곧이어 역시나 답을 바라지 않는 말을 나지막이 꺼냈다.


“이 일 하는 내내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 우리 누구나 유서 하나씩은 품고 다니잖아. 유서 말고 사직서를 품어야 하는데….”

-….

“그래서 항상 겁이 났어. 내 팀원이 죽을까 봐, 또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할까 봐. 그만하고 싶은데 너무 먼 길을 와 버려서 그만둘 수가 없었어. 이렇게까지 했는데 마무리 못 하면 억울해서 눈을 못 감을 것 같았어.”

-….

“근데 이상하게, 이번에도 겁이 나야 맞는 건데 화가 난다? 겁이 안 나. 그냥 화만 나.”

-여주야. 내가 말했지. 화가 나도,

“화가 나도 상대에게 절대 들키지 말라고.”


마지막 연기를 내뿜고 담배를 비벼 끈 여주가 손을 휘휘 저으며 미간을 구겼다. 다른 건 잘 숨기면서 유독 화가 났다 하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주를 부장은 항상 불안해했다. 남들이 여주보고 너무 많은 사람과 척진다고 말해도 부장만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며 감쌌다. 그래도 충고는 잊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상대일지라도 패를 숨기고, 화가 나도 들키지 말고, 그리고, 지나치게 정의롭지 말라고.


“자기들은 맨날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서 난 왜 안 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화내면 안 돼?”

-….

“진짜 웃겨. 그럼 처음부터 화나게 하지 말았어야지.”






민윤기가 돌아간 후 안가에는 두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첫 번째는 이건 분명 유제국 짓이라며 지금 당장 나가 봐야겠다 고집부린 지민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뭐 숨기는 게 없느냐 묻는 정국에게 서운함을 느낀 기석의 반발 때문이었다. 여주는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관찰하다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인사팀장 그게 뭐라도 얻어 보려고 내 뒤를 캐다가 그런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여주 역시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자연스레 유제국을 떠올렸다. 유제국은 여주 팀의 타깃이니 인사팀장 또한 그를 1순위로 체크했을 것이다. 여주가 인사팀장처럼 정치판 기웃거리며 줄을 댄 것도 아니고, 높으신 분들한테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정보를 내다 판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한마디로 뭐라도 나올까 싶어 타깃과 여주의 접점을 찾는 일이었다. 그래 봤자 나올 게 없었다. 유제국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여주가 유제국 사건으로 뒤통수 거하게 맞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거야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다 쳐도, 그 외 나머지 것은 죄다 보안이었다. 제아무리 인사팀장이라도 혼자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설마 또 차장이 뭐 알려 준 거 아니야? 내가 그 짓거리 보기 싫어서 공조까지 해 가며 정보를,’


“형! 진짜 그럴 거야? 나 정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갑작스러운 기석의 고함에 생각을 멈춘 여주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렸다. 소파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몸을 일으켜 세운 여주는 큰 눈을 깜빡이며 기석을 바라보았다. 지태가 옆에서 팔을 끌어당기며 큰소리 내지 말라 주의를 주는데도, 기석은 뭐가 그리 분한지 연신 씩씩거리며 정국을 노려봤다.

여주 옆에서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정국이 앉은 자세 그대로 기석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라이터를 손안에 굴리며 장난치던 움직임도 순간 딱 멈췄다.


“뭐가 불만인데.”

“형, 아까 우리 의심한 거지.”

“의심? 내가 네 가방 좀 뒤졌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냐.”

“어. 형이 9년 동안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있어?”


정국은 팀원들의 핸드폰을 비롯한 소지품 하나하나를 죄다 뒤졌다. 팀 애들 좀 봐야겠다던 정국의 말이 바로 그 뜻이었다. 여주의 팀원들이 별 저항 없이 소지품을 내놓은 것과 달리, 정국의 팀원들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른 팀 요원이 죽었다고 작전이 중단된 것 자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누구 하나 범인을 찾아야 끝날 것만 같은 무거운 분위기는 더 별로였다. 그래서였나. 내내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는 정국을 보다 못해 기석이 칼을 빼 들었다. 제 팀장이 왜 그러는지, 생전 보지 못한 행동의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 옆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눈알만 도르르 굴리던 지현이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 보안인데.”

“뭐라고요?”

“네? 아니…. 그거 원래 보안 규칙이라 안가 들어올 때 전부 다 소지품 신고 했잖아요. 한 번 더 보는 게 뭐 그리 화나나 싶어서요.”

“모르면 빠지세요.”

“저도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기석 씨가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잖아요.”

“….”

“전 팀장님이 팀원들 못 믿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기본적인 절차일 뿐인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다들 예민해진 탓이었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자면 저마다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지현은 감정이 상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안 그래도 심란했던 분위기가 더 엉망이 된 이 상황이 불편했다. 여주 역시 말리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하고, 정국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 사이에서 난감해하는 건 지태뿐이었다. 지태가 차마 기석을 말리지도 그렇다고 지현의 편을 들지도 못해 입술만 달싹이는 새, 기석은 기가 찬 듯 실소를 흘렸다.


“기본적인 절차? 그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이에서나 하는 거죠. 그쪽 팀은 그래요?”

“이봐요, 기석 씨. 믿는다는 말은 아무런 힘이 없어요.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속으로 의심하길 바라진 않잖아요?”

“우리가 마음속으로 서로를 의심했다면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9년을 함께하지는 못했겠죠. 서로를 위해 죽어 줄 수도 있는 거. 지현 씨는 그런 거 느껴 본 적 있어요?”

“저희는 살기 위해 노력해요. 누구도 죽어선 안 되니까요. 과연 그게 믿음만으로 가능했을까요? 믿는 건 기본이고, 증명은 필수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한테 증명을 요구한다?”

“아뇨. 됐어요. 기석 씨 하는 거 보니까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네요.”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리는 지현의 모습에 여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끝끝내 참지 못했다. 여주는 열받았으면서 아닌 척하는 지현이 귀여웠다. 뒤늦게 얼굴을 살짝 가려 웃음을 감춰 보았지만, 기석은 이미 표정이 굳을 대로 굳어서 여주를 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헛기침 뒤로 낮게 깔린 여주의 말에 기석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넘겼다.


“기석아. 그만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듯해 지태가 말리려고 하니 기석은 팔을 홱 뿌리치며 여주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앉아 있는 여주를 내려다보는 기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목소리도 못지않게 살벌했다.


“혹시 형수님이 형한테 시켰어요?”

“뭘요?”

“우리 소지품 검사하라고요.”

“내가 왜요. 난 그쪽 소지품 전혀 안 궁금한데. 그리고 형수님이라고 하지 말랬죠.”

“우리가 사람 죽었다고 작전 중단하고 들어온 게 처음이라.”

“그래서요?”

“사건 터졌다고 내부 감찰한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어쨌다고.”


여주는 피식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상기된 기석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여주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고는 소파 등받이에 편히 기대 기석을 올려다봤다. 여유롭다 못해 미소까지 띤 여주의 모습에 지현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팀장이 대체 뭘 하려고 또 저런 표정일까 싶어 불안해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오직 지민만이 여주가 아닌 기석을 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묻는 여주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기석 씨는 그렇게 욱하는 성격으로 어떻게 현장 일을 버텨요?”

“뭐라고요?”

“항상 보면 조금 비효율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 같아요.”

“무슨 뜻이냐고요.”  

화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낸다는 뜻이에요. 이것 봐. 지금도 한 번에 못 알아듣잖아.”

“…내가 화내는 건 비정상이고, 팀장님이 화내는 건 바른 행동이고? 욱하는 거 김 팀장님 특징 아닌가?”

“맞아요. 나도 잘 욱해요. 근데 난 적어도 화를 낼 땐 반드시 뭔가를 얻어요. 기석 씨는 뭘 얻었어요? 팀장의 신뢰를 얻길 했어, 팀원의 동조를 얻길 했어. 그냥 감정 소모만 했잖아요.”

“….”

“아니면 뭘 지키기라도 했나? 난 내 자존심을 지켰고, 내 팀원들의 정신 건강을 지켰고, 우리의 비밀을 지켰어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여주가 기석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화를 낸 결과가 온통 잃는 것뿐이라면, 양심껏 참아야죠. 그게 당연한 이치 아니에요?”


기석은 실소를 터트렸다.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어 어이없었다. 일을 해도 본인이 더 오래 했고, 팀의 색깔에 따라 방식도 다른 법인데, 무조건 자기 말이 맞는다고 우기는 듯한 태도에 감정이 상했다.


“이봐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꼭 문 기석이 여주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재빨리 다가온 지민이 기석의 손목을 홱 낚아채 다소 힘 있게 쥐었다. 기석은 자신을 붙잡은 지민을 어이없는 듯 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네가 먼저 예의 없게 굴었잖아. 여주가 너희 팀장님한테 소지품 검사하라고 시켰다고? 사람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화를 내도 닥치고 있어야 할 판에 좋게 좋게 말해 주면 감사합니다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희 팀장님이 그러더라. 화를 낼 때는 얻는 게 있어야 한다고. 넌 지금 나한테 화를 내서 얻는 게 뭔데?”

“얻는 거 없어. 근데 난 잃을 것도 없어.”

“….”

“네가 생각 없이 뱉은 형수님 소리가 여주가 그동안 쌓아 온 거 한 번에 짓밟는 행동인 건 알고 있냐?”

“….”

“멍청한 새끼.”


멍청한 새끼 한마디에 눈이 돌아 버린 기석이 지민에게 주먹을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 받아치는 지민 덕분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여주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중얼거리고, 여자 팀원들만 어쩔 줄 몰라 지민을 말렸다. 보다 못한 정국이 인상을 팍 쓰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드는 순간, 멈추지 못하고 뻗은 지민의 주먹이 정국의 얼굴에 퍽 닿았다.


“헐, 형!”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지민의 옆으로 기석 역시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을 떡 벌렸다.


“아… 시발.”


터진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훑은 정국이 낮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기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정국은 팀마다 방식이 다르다는 기석의 생각에 동의하면 했지 못 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석이 화난 이유도 충분히 이해했다. 다만 그 말을 꺼낸 때와 장소가 지금 여기여야만 했나 의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이 모든 걸 여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으로 확신하는 기석의 말투였다.


“그니까 지금 내가 가방 좀 뒤졌다고 이 난리를 친 거지?”

“형….”

“그래야만 하는 내 심정은 생각해 봤고?”

“….”

“거기에다가 여주가 시켰느니 어쨌느니 사람 등신 만들고.”

“….”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라서 어딜 어떻게 손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

“그동안 아내까지 속여 가면서 너희 편 들어 준 건 알고 있냐?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데 한순간에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네.”

“….”

“지친다. 너희 때문에 지친다고. 내 말 알아들어?”


눈을 감고 얼굴을 쓸어내린 정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이 보지 못한 정국의 모습에 덜컥 겁을 먹은 기석이 곧장 미안하다 사과하며 가까이 가려 했지만,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나 먼저 잘 테니까 이 분위기 네가 알아서 수습해.”


말을 마친 정국이 휙 몸을 돌렸다. 그렇게 여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얌전히 구경만 하다 갑자기 손이 잡혀 놀란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에 방으로 이끄는 정국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나 기분 괜찮아질 때까지.”


여주가 몸을 조금이라도 달싹일라치면 정국은 여주의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고 가슴께에 얼굴을 비볐다. 여주는 기댄 건지 누운 건지 모를 자세로 너무 오래 있어 몸이 뻐근한데도 놓아주지 않는 정국 때문에 별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정국은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다른 말들은 다 그러려니 했는데, 여주가 시켜서 그리한 거냐는 말이 머릿속에 너무 강하게 꽂혀 버렸다. 이는 정국과 여주를 동시에 무시한 발언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정국은 여주의 옷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고 보드라운 살을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쟤네 왜 저러는지 알아?”

“글쎄.”

“현장에서는 서로 의심하는 순간 바로 머리에 총 들어오는 거거든. 어쨌네 저쨌네 이야기 듣기도 전에 당장이라도 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

“내가 자기한테 총을 들이미는 기분이었겠지.”

“….”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런 눈으로 쳐다보잖아. 어이없게.”


‘의심하는 순간 바로 머리에 총이 들어오는 것…. 나도 언제든 팀원을 내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따지고 보면 같은 거 아닌가.’

여주는 정국이 겉으로는 어이없다 말하면서 마음속 깊이 신경 쓰고 있는 걸 알았다. 팀원을 의심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게 너무 잘 보였다. 물론 여주 역시 그게 쉬운 건 아니지만, 여주 팀은 처음부터 선을 그어 놓고 공유할 부분과 공유하지 않을 부분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정국보다는 좀 더 수월했다. 여주는 의심하면 할수록 믿음은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고, 정국은 팀원을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을 괴로워했다.


“자기 팀원들도 익숙해지겠지.”

“그럴까?”

“응. 자기가 익숙해질지 의문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내부에 문제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바깥을 더 작정하고 팰 수 있으니. 정국은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여주의 손길을 느끼며 미소를 띠었다. 이 상황에 가장 늦게 적응하는 건 정국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 여주 때문에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주는 정국의 터진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현장 경력 9년이면 지민이 주먹 정도는 순발력 있게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헐.”


어이가 없다 못해 정국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여주는 반응이 기대에 부응했는지 웃음 지으며 정국의 볼을 조몰락거렸다.


“그걸 왜 맞고 있어, 바보야. 날렵하게 피했어야지.”


정국은 자기는 죽을상인데 어쩐지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여주를 보며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이내 여주의 입술에 쪽 입맞춤과 동시에 와락 목을 끌어안았다.


“3년 만났으면 내 뽀뽀 정도는 순발력 있게 피해야지.”


정국은 받은 말을 고대로 돌려주며 여주의 어깨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여주 역시 밝은 얼굴로 정국의 등을 토닥이다가 점점 입꼬리가 내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무표정이 되었다. 품에 안겨 있어 그를 알 리 없는 정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에 빠지는 그 순간까지, 한 번 내려간 여주의 입꼬리가 끝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너희 안 자고 뭐 해?”

“아, 잠깐 정리 좀요.”


정국을 눕혀 놓고 거실로 나온 여주가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이끌려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았다. 쉬지 않고 한자리에 모인 여주 팀원들이 칠판에 무언가 끄적이고 있었다. 여주는 구석에 앉아 있는 지민에게 다가가 턱을 살며시 감싼 후 얼굴 상처를 요리조리 살폈다. 그런 여주의 뒤로 여자 팀원들이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우리 팀은 내부 감찰 끝냈으니까 전부 다 옮겨도 되겠지?”

“응. 클린이야.”


여주가 흘깃 고개를 돌려 칠판을 확인하니, 하나하나 적어 넣은 팀원들 이름이 보였다. 여주는 여전히 지민의 얼굴을 감싼 채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고갯짓했다.


“그게 뭐야?”


칠판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팀원 대신 여주에게 시선을 준 지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껌 하나를 까 제 입으로 쏙 넣었다.


“아군 리스트 작성이에요.”

“아군 리스트?”

“네. 보안을 좀 더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확실한 사람들 위주로 정리 중입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번에는 우리가 팀장님보다 먼저 읊었거든요. 자, 그럼 누가 개지?”


장난까지 치는 모습이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짓궂은 표정으로 누가 개인지 묻는 지현의 말에 내내 뚱해 있던 지민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터진 입술이 아파 다시금 울상을 짓긴 했지만 말이다.

사람이 죽었으니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쓰자는 취지였다. 물론 그전에도 충분히 신경 쓰기는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 더더욱 까다롭게 가자는 뜻이었다. 어느새 이름을 다 채우고 정국 팀을 추가할까 말까 고민하던 팀원이, 서로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끝에 가장 먼저 정국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하지만 곧바로 막혀서 펜을 꼭 쥐고 여주를 돌아보았다.


“왜 날 봐. 너희가 알아서 한다며.”

“저쪽 팀은 다 괜찮은데 기석 씨가 좀….”

“좀?”

“좀 이상해요. 아까 화내는 것도 그렇고.”


팀원들은 기석을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공조하는 입장이니 당연히 아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좀 전 여주에게 화내고 지민과 치고받고 하던 모습이 불쑥불쑥 떠올라 발목을 잡았다. 여주는 팀원들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지민의 가장 큰 상처를 살며시 쓸었다.


“가끔 좀 욱하긴 해도 기석 씨는 완벽한 아군이지.”

“정말요?”

“응. 가장 솔직하잖아. 그런 사람이 오히려 탈이 없어. 그냥 자기가 해 오던 방식이랑 달라서 혼란스러운 거야. 악의는 없어 보여.”


고개를 끄덕이며 여주의 말에 연신 공감하던 팀원이 결국 기석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고민할 필요도 못 느끼고 나머지 팀원들까지 쭉쭉 적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또 누가 있지? 차장님은 보류, 부장님은 우리 편, 민 팀장님은? 민 팀장님은 뭐지? 감사팀이니까 반대에 넣는 게 맞겠지?”


여주는 똘똘한 눈으로 토론을 이어 가는 팀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지민에게서 벗어나 팀원들 옆으로 다가간 여주가 아군 쪽에 적어 놓은 이름 하나와 반대쪽에 적어 놓은 이름 하나를 손바닥으로 쓱쓱 지웠다.


“민윤기는 우리 편일걸.”

“네? 왜요?”

“그냥 그래. 걔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근데 팀장님. 은주 씨는 왜 지웠어요?”


은주를 왜 지웠냐. 여주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사실 여주도 은주가 누굴 배신할 위인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찜찜한 게 무언가 하나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팀원들이 서로 핏대 세우고 싸우는 와중에 한마디 말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자꾸만 시선을 피하는 건 더 이상했다. 애초부터 비밀을 모두 털어놓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났다.

참아 주기에는 여주 코가 석 자였다. 사람까지 죽은 마당에 기회를 주고 입을 열길 기다리느니 그냥 계획에서 완전히 빼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주는 살짝 자국이 남아 지워지지 않은 은주의 이름을 한 번 더 손바닥으로 쓱쓱 닦으며 팀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냥. 자꾸 신경 쓰이게 하니까.”

“….”

“짜증 나서.”






여주가 방에서 나온 건 이제 막 12시를 넘긴 무렵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쭉 늘이는 여주 앞으로 어둑어둑한 거실 너머 희미한 빛을 뿜는 주방이 보였다. 곧장 방으로 갈까 하던 여주는 호기심에 이끌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다가가면, 술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정국과 은주가 보였다. 여주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얼떨떨한 나머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우뚝 멈춰서 눈만 깜빡였다. 은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오빠. 기억나? 6년 전에 오갈 데 없는 나 오빠가 거둬 준 거.”

“응. 기억나지.”

“그때 내가 그랬잖아. 데리고 나가 주기만 하면 시키는 거 뭐든지 다 하겠다고.”

“갑자기 그 얘긴 왜 해. 별로 좋지도 않은 과거를.”

“사람이 참 간사한 게, 그때만 해도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

“근데, 먹고살 만하니까 무섭더라. 무서웠어. 무서워서….”

“….”

“그래서 말 못 했어.”


왜인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발이 굳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숨까지 참아 가며 빤히 바라본 은주의 얼굴이 말한 그대로 정말 겁에 질려 있어서 그랬나, 여주는 애써 궁금증을 꾹 누르고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듣지 마. 그냥 듣지 말자. 괜히 엿듣고 마음고생 하느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

그렇게 살금살금 걸어 무사히 방에 도착했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안가의 유선 전화를 툭 건드려 바닥으로 떨어트려 버렸다. 여주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림과 동시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전화 건 사람의 신분을 묻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 삼, 디 원. 잘못 걸었습니다.”


여주는 빠른 속도로 조용히 속삭인 목소리를 끝으로 송수화기를 탁 내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 다가온 기척을 느꼈는데도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연신 아이씨 소리만 내며 입술을 물었다. 기다리다 못해 여주의 몸을 돌려세운 정국이 여기서 뭘 하느냐는 눈빛으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주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지만, 정국의 뒤에 선 은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또 한 번 표정을 굳혔다. 후 깊은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갈까 말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정국을 지나쳐 은주에게 다가갔다.


“은주 씨.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요.”

“…네.”

“난 이제 은주 씨한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요. 이 사람이 또 뭘 숨기고 있나 머리 싸매는 게 좀 지쳤어요. 나도 여유가 없어서요. 그래서 이제 그만할 생각이에요.”

“그게 무슨….”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해요. 은주 씨가 털어놓지 않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근데 난 이유 같은 거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

“그러니 제발 들키지 마세요. 들키고 변명할 생각도 하지 마세요. 숨기려면 끝까지 제대로 숨겨서 우리 팀에 피해 없게 하세요.”

“….”

“은주 씨가 비밀을 얼마나 가지고 있든 상관없는데, 그게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

“그땐 진짜 가만히 안 둘 거예요.”


가만히 안 두겠다. 최후 통보였다. 그를 증명하듯 그동안 거짓으로 겁을 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말투와 표정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은주가 살짝 눈을 내리깔 정도로, 농담이라고는 단 1퍼센트도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진심이었다.

여주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 너머 후련함이 조금 보였다. 이내 한결 가벼워진 발을 떼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 순간, 발목을 콱 움켜쥐는 은주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자리에 멈춰 섰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은주와 정국의 중간쯤에서, 은주에게 등을 보인 채 정국과 눈을 맞추며 얼떨떨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말할게요. 지금 말할 테니까, 처분은 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뭐든 달게 받을게요.”

“….”

“용서는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한테도 쉽지 않은 이야기예요.”

“….” 

“죽어도…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 돼 버렸어요.” 

“….” 

“변명 같겠지만, 팀에 필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하는 거예요. 그거 하나만 믿어 주세요.” 


여주가 뒤늦게 스르륵 몸을 돌리니 손을 떨고 있는 은주가 보였다. 정국은 가까이 다가가서 은주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여주 역시 긴장한 것을 보고는 그대로 멈춰 섰다. 여주는 은주를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구겼다. 은주가 오늘 정국에게 모든 걸 고백하려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여주가, 은주의 타이밍에 의문을 가졌다.

‘내내 말할 마음 없어 보이더니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여주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은주는 말을 뱉기 시작했다.


“6년 전에 오빠가 저를 김선태 사업장에서 구해 줬어요.”

“….”

“여기까지는 우리 팀원들도 다 아는 내용이에요.”


‘김선태 사업장?’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마음이 여주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정국이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몸을 낮춰 여주와 눈을 맞추는 순간, 다시 한번 은주의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렸다.


“그리고 이건 팀장님한테 가장 먼저 말하는 건데요.”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하는 여주의 앞으로, 마찬가지로 극도의 긴장감으로 눈이 시뻘게진 은주가 보였다. 여주는 침을 꼴깍 삼키며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쓱 닦아 냈다.


“저도 그 보육원 출신이에요.”

“….”

“그리고 그 후 20년을 바깥에서 살았어요.”

“….”

“김선태 집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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