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실존했던 나라나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물의 분위기를 내는 정도의 글이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 트위터에서 풀었던 썰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 미리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다음 편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7 왕자님 팔자도 참 사납지."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두통에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야마구치는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응? 왜?"

"그렇잖아. 어머니 잘못 만나 전하의 사랑도 얻지 못했지, 그 탓에 고향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 보내졌지. 이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심지어 혼례 대상이 랑국 황제의 바로 그 동생이라니…."

"하긴…. 먼 곳으로 시집가도 좋은 자리로 간다면 모를까, 랑국의 황제 혹은 황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런 자에게 시집이라니…. 물론 애당초 황제나 황자에게 시집가는 거였다면 7 왕자님이 아니라 다른 공주님을 보냈겠지만 말이야."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그런 자리로 시집가느니 차라리 우리같이 평생 혼자 살 시녀 팔자가 더…."

"쉿, 조용히 못 하겠느냐?"


그러나 이내 들려온 내관의 호통 소리에 시녀들의 속삭임은 곧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 그것도 대군을 두고 하기에는 퍽 무례한 말이었으나 내관은 조용히 하라 주의만 주었을 뿐 딱히 시녀들의 언행을 혼내지는 않았다. 물론 야마구치라고 딱히 그들을 혼낼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끼리 시시덕 나누는 잡담이라도 없으면 이 멀고 고된 혼례 행렬을 버티기 힘들뿐더러, 그들이 한 말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팔자가 참으로 사납다.

혼례가 결정된 직후 야마구치가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야마구치를 보고 딱하다는 얼굴로 혀를 차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저들끼리 야마구치의 팔자가 사납다는 말을 속닥거리곤 했다. 곧 혼례를 올릴 새신부를 두고 사람들이 축복을 빌어주거나 부러워하는 대신, 야마구치를 가엾게 여기고 딱하게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야마구치의 혼인 상대 때문이었다.


군왕 츠키시마 케이. 그는 랑국의 황제인 츠키시마 아키테루로부터 극진한 애정을 받는, 황제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었다. 황제라는 자리를 놓고 형이 아우를, 아우가 형을 죽이는 것이 흔한 일인 황실에서 랑국의 황제는 특이할 정도로 제 동생을 극진히 아꼈다. 황제가 제 동생을 어찌나 사랑하는지 군왕에게 저 먼 나라에서 수입한 귀한 목재로 만든 가구나, 몸에 좋다는 약재와 귀한 음식재료, 혹은 온갖 금은보화 따위를 하사했더라는 소식이 랑국에서 멀리 떨어진 경국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군왕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황제에게서 받는 극진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형제간 우애가 좋다면야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황제의 예쁨을 독차지하는 그의 정체가 너무나도 비밀에 싸여있다는 것이었다.


츠키시마 군왕은 그 탄생부터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츠키시마 군왕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사망했으며, 이 때문인지 그의 아버지인 랑국의 선황은 츠키시마 군왕이 태어난 날 그저 `랑국의 2 황자가 태어났다`라는 짧은 공표를 끝으로 더는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그 누구도 츠키시마 군왕에 대해 미심쩍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달리 금슬이 좋았던 아내의 죽음에 상심한 선황이 자식이 태어난 기쁨을 소란스럽게 표현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황후의 삼년상이 끝나고 나면 황제도 마음을 추스르고 아비 노릇을 다 할 것이며, 어린 2 황자께서도 나이를 먹으면 일국의 황자로서 강건한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삼년상이 끝난 뒤에도 2 황자는 좀처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세간에서는 츠키시마 군왕에 대한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피부가 뱀 비늘로 덮여 있어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모습이 아닌지라 선황이 그를 가둬놓은 것이라거나, 얼굴이 매우 흉측하여 선대 황후가 태어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이라거나, 제 이름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천치라거나, 심지어 툭하면 미친 망나니처럼 칼부림을 부려 궁인을 여럿 죽인 살인자인데, 황제가 차마 친동생을 제 손으로 죽일 수는 없으니 값비싼 선물을 쥐여줘 가며 난폭한 성정을 달래는 것이라거나.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저마다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츠키시마 군왕이 랑국 황실에서 당당히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야마구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랑국 황제로부터 애정과 신임을 받는 유일한 친동생의 정비(正妃) 자리라면 탐내는 자가 많을 터였다. 랑국 내의 귀족들에서부터 주변 국가의 왕실들까지, 누구라도 결코 마다할 자리가 아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가게 된 것은 저였다. 랑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나라의 사랑 받지 못한 채로 버려진 왕자인 저. 그 말인즉슨, 츠키시마 군왕의 정비 자리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자리라는 소리였다. 군왕이 어떤 외모에 어떤 성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가 마다할만한 사람이니 내가 보내지게 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야마구치로서는 차마 그 소문들을 뜬소문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야마구치는 차라리 그가 천치이기를 바랐다. 살아있는다고 반겨줄 이가 없는 목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습게도 누군가의 칼에 찔려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또 싫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멀쩡하되 사람을 죽일 만큼 난폭한 것보다는, 차라리 천치라서 순진무구한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려 애썼다. 삶은 언제나 저의 바람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어머니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싶었지만, 그 소원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 이 소원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야마구치는 그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뱉으며, 길고 긴 혼례길에 눈물을 뿌리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




마차가 멈춰서는 느낌에 깜빡 잠이 들어있던 야마구치는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인지 살피려고 창문을 열려는데, 창문 틈 사이로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찬 바람이 밀려 들어와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품에 껴안은 손화로를 더듬거려 보는데 안에 넣은 탄이 꺼져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한숨을 내쉬며, 야마구치는 손화로를 내려놓고 차게 얼은 손을 이마에 대었다. 머리가 아팠다. 어린 시절부터 야마구치를 괴롭히던 편두통은 혼례가 결정된 직후부터 점점 심해지더니 이따금 구토가 나올 만큼 야마구치를 심하게 괴롭히고는 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야마구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을씨년스레 부는 바람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쉴 곳에 도착했나?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숙소였으면 좋겠는데….`


경국에서 랑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로로 꼬박 두 달을 가야 했다. 경국과 랑국 사이에 놓인 선국을 가로질러야 했고, 랑국의 국경에 들어선 후 황궁이 있는 수도까지 또 보름을 더 가야 했다. 길은 멀고, 혼례행렬에 동참한 사람은 많으니, 여행이 힘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선국을 지나는 일 역시 문제였다. 선국은 대대로 경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로, 불과 선대 왕 때까지만 해도 경국과 전쟁을 치르다 랑국의 중재로 간신히 평화협정을 맺은 나라였다. 평화협정을 맺었다지만 남아있는 감정은 아직 다 해소되지 않았고, 랑국에서 국왕비가 될 선국의 왕자를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내려놓았다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선국에서 야마구치를 위해 마련해준 숙소라는 것은 매우 볼품없어 화로에 불을 때워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고, 침상은 돌처럼 딱딱하여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천한 대접을 받고 자랐다지만 야마구치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 황실의 국왕비가 될 사람이요, 일국의 왕자인 자신을 이리 대접하는 것에 몹시도 마음이 상하긴 했더랬다. 하지만 말 그대로, 랑국 황실의 사람 이래 봤자 다른 이도 아닌 츠키시마 국왕의 비요, 왕자라고 해봤자 아버지에게 사랑도 받지 못해 뒤늦은 나이에나 혼인을 핑계로 겨우 작위를 받은 왕자. 싸움을 걸어보았자 득 될 것도 없고 또 싸움을 걸 용기도 없어 야마구치는 그 차디찬 냉기와 딱딱한 침상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래저래 여행의 말미에 이른 지금은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는 뜻이었다.


그저 푹신한 침상에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쉬고 싶다는 바람을 속으로 외는데, 바람 소리를 뚫고 혼례길에 동행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군마마,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리시지요."

"…잠시 기다려라."


내관에게 대답한 뒤 야마구치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선국의 북쪽 지역으로 넘어간 순간부터, 야마구치는 추위 때문에 꽤 고생하고 있던 참이었다. 선국에서부터 벌써 이 정도인데, 이곳보다 더 춥다는 랑국에서는 어떻게 버텨야 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야마구치는 앞섬을 더 단단히 여미고, 소매의 단추를 풀어 소매를 길게 늘어트렸다. 추위가 강하지 않은 경국의 전통적인 겨울 복식은 이런 식이었다. 소매를 길게 만들어 평상시에는 바깥쪽으로 접고 단추로 고정하였다가, 추위가 심해지거나 외출을 해야 할 때면 단추를 풀어 소매를 늘어뜨린 뒤 차가운 공기로부터 손을 감추었다. 일반 백성들이나 왕실의 하인들은 일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손목 부근에서 소매를 꽁꽁 동여매 차가운 바람이 소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 정도만 해도 경국에서는 충분히 살 만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차가우니 누빔 놓은 천을 길게 늘어트려 손을 아무리 감춘다 한들 차게 얼은 손은 좀처럼 따뜻해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 야마구치는 아쉬운 대로 소매를 최대한 길게 늘어트리려 애쓴 뒤, 내관에게 마차의 문을 열라 명했다.


문이 열리자, 바깥쪽에 서 있던 하인들이 마차 안쪽에 달린 휘장을 걷어 주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저를 붙잡아주는 내관의 손에 의지해 마차에서 내린 순간, 야마구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낮고, 어두웠다. 쌓인 눈은 자그마치 정강이가 푹 잠길 정도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군사, 무장한 군사들이 서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야마구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야마구치의 코앞에서부터 저 멀리 성벽의 위쪽에까지 무장한 군사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물론 무장한 군사들은 혼례길 내내 보아왔으니 야마구치에게도 익숙했으나, 문제는 그들의 의복이었다. 저것은 경국의 의복도, 선국의 의복도 아니었다. 낯선 의복을 입은 군사들이 저마다 칼과 활을 든 채 굳은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압도적인 광경에 불현듯 두려움을 느낀 야마구치가 주춤거리자 옆에서 야마구치를 부축하던 내관이 야마구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대군마마, 고정하시지요."

"…여, 여긴 어디지?"

"랑국의 국경성 안이옵니다."

"…!"

"마마, 드디어 랑국에 도착했습니다."


내관의 말에 야마구치는 멍한 정신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천천히 눈앞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까는 당황스러움에 미처 보지 못했던 깃발이 야마구치의 눈에 들어왔다. 야마구치의 눈앞에 서 있는 군사 중 하나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용 두 마리가 태양을 배경으로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야마구치도 잘 아는 그림이었다. 바로 랑국 황실의 문장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다리에는 힘이 풀렸다. 이제야 실감이, 저가 고향인 경국을 떠나 이 낯선 땅에 홀로 남겨질 운명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




국경 성벽 안쪽의 마을이라면 필시 군사적 요충지일 터였다. 왕자로 태어났으나 음인인 탓에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야마구치는 그래서 이곳에는 필시 군사들만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더랬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오니 마을은 제법 규모가 크고 많은 수의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어 그저 평범한 마을의 모습으로 보였다. 또한 야마구치에게 기꺼이 방을 내어준 지역 군수의 집 또한 매우 크고 호화스러웠다. 군수가 내어준 야마구치의 방은 천장이 높고 방이 넓음에도 방 안이 전체적으로 매우 따뜻하여 언 몸을 녹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을 만끽할 정신이 없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몸을 곧게 편 채로, 야마구치는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리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셋씩 두 줄로 늘어선 이들의 앞자리에 앉은 여인이 꿇어앉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은 오늘부터 마마를 모시게 된 소정궁의 상궁 사나다 야츠이라 합니다.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정적. 어색한 공기가 잠시 흐르고, 야마구치는 퍼뜩 제 실수를 깨달아 붉어진 낯으로 괜스레 헛기침하며 말했다.


"으흠, 일어나라."


경국에서도 왕실의 예법이 엄격했다. 왕실의 윗전을 모시는 하인들은 반드시 무릎을 꿇어 인사를 올려야 했고, 윗전의 명령 없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야마구치의 거처에서만은 예외라, 하인들은 대부분 저들 좋을 데로 행동했고, 괜한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야마구치 역시 딱히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왕비의 명으로 하인들이 바뀐 뒤에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야마구치에게는 이런 지극히 공손한 인사도, 거기에 대고 일어나라 명을 내리는 저 자신의 모습도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와중에 사나다가 일어나라는 야마구치의 허락에 감사하다는 말까지 덧붙여 괜스런 민망함은 배가 되고 말았다.


야마구치의 일어나라는 명이 떨어지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사나다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온화한 인상이지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앉았다 일어날 때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세나, 반듯한 눈썹과 입술의 모양 등이 어딘가 단호하고 강단 있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이미 긴장하고 있었건만, 긴장이 배가 되어 몰려왔다. 성심으로 모시겠다 했지만, 그녀는 랑국의 사람이었고, 랑국의 황실에서 수년간 황실의 웃전들을 모시며 궁녀들을 통솔하는 상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였다. 아마 그녀에게 밉보이면 황실에서의 생활이 순탄치 못할 것이었다. 겉보기로는 야마구치가 그녀의 웃전이었지만, 내실로는 야마구치가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었다. 혹여 새로 오신 국왕비 마마께서는 서 있는 자세조차 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야마구치는 허리가 아플 만치 꼿꼿하게 등을 펴고 선 채 그녀가 한명 한명 소개해주는 여섯 명의 내관과 궁녀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외워두려 애썼다. 사나다의 지시에 따라 여섯 명의 하인들이 모두 인사를 끝마치자, 사나다의 왼편에 서 있던 궁녀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궁녀는 손에 무언가를 공손하게 받쳐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곱게 개킨 의복 같았다.


"마마, 긴 여행에 옷이 많이 상하셨을 테니 옷을 갈아입으시지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그리하게."


야마구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나다와 옷을 든 궁녀를 제외한 다른 하인들이 방을 나갔다. 그리고 사나다가 야마구치의 몸에 손을 대니 눈 깜짝할 사이에 속저고리와 속고의를 제외한 옷들이 모두 벗겨졌다. 사나다와 궁녀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야마구치는 속옷을 입고 있어도 벌거벗은 듯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경국에 있던 시절에는 옷을 갈아입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늘 야마구치 혼자 처리해야 했다. 왕비가 야마구치 거처궁의 하인들을 바꿔버린 후에도 남들 앞에서 옷 갈아입기가 부끄러워 부득불 옷 입는 것만은 혼자 한 야마구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불편한 감정을 내색해서는 안 돼. 눈을 감은 채 이곳에는 지금 저 혼자 있는 거라 마음속으로 되뇌며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견뎌내려 애쓰는데 사나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소인의 손길이 불편하신가요?"

"응? 아니, 아닐세. 그냥…."


그러나 명색이 일국의 왕자로 자란 몸인데 시중받은 적이 없어 불편하다고 말하기에는 야마구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눈을 돌리던 야마구치는 곧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야마구치의 말에 사나다는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츠히토 군수님의 집은 벽이 두터워 찬 바람을 막아주고 온기가 잘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또한, 군왕비 마마께서 긴 여행으로 기력이 쇠하셨을 것을 고려해 최고급 재료들로 만든 요리와 간식거리를 준비하였다고 하니, 금방 피로가 풀리실 것입니다."

"국경성이면 물자가 다 귀할 텐데 감사를 표해야겠군."

"국왕비 마마가 되실 분께서 감사를 표하시면 모츠히토 가문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자, 마마, 다 되셨습니다."


사나다의 말에 야마구치는 고개를 숙여 몸에 걸친 의복을 살펴보았다. 속저고리와 속고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랑국의 의복으로 갈아입혀 진 뒤였다. 얇은 천에 소매가 넓어 통풍이 잘되는 경국의 의복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방한을 위해서인지 속옷을 두 벌씩 껴입었고, 그 위에 통이 넓은 바지와 무릎길이의 저고리를 입었으며, 가장 겉에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연분홍색의 누빔 바느질한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끈을 둘러 고정했다. 껴입는 것이 불편은 했지만, 딱히 싫지만은 않았다. 일단 경국에서 챙겨온다고 챙겨온 겨울옷들이 전혀 제 기능을 못하던 차에 제대로 된 겨울옷을 입으니 따뜻해서 좋았고, 연분홍 바탕에 은사로 꽃을 수놓은 것이 퍽 예뻤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옷을 살펴보는 야마구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나다가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응, 따뜻해서 좋아."

"다행이십니다. 그리고 마마, 이것은 랑국의 황제 폐하께서 마마께 하사하시는 것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셨다는 말에 놀라 바라보니 사나다가 손에 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머니는 검정 비단 원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금박으로 츠키시마 황가의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황제의 성은에 감사의 표시로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한 뒤 주머니를 받아들자 제법 무게감이 느껴졌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세로로 길쭉한 목패(木牌)가 튀어나왔다. 짙은 색의 목재로 만들어진 목패는 네 귀퉁이에 금장식이 들어가 있었고, 앞면과 뒷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츠키시마 황가의 문양과 `군왕비`라는 글자에도 금칠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마구치는 경국에서 랑국의 문화와 예절에 대해 배우던 시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사나다를 보고 말했다.


"이것은 랑국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목패로군."


야마구치의 대답에 사나다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일반 백성들은 색이 밝은 흔한 목재로 만든 목패에 거주지와 이름을 음각하여 사용합니다만, 황실에서는 황가 일원의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없다 하여 신분만 양각합니다. 마마께서는 아직 혼례를 올리시기 전이니 정식으로 군왕비가 되신 것은 아니나, 폐하께서 마마가 랑국에 빨리 적응하시길 바라시며 직접 마마의 명패를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황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감사 인사를 올려야겠네…."


야마구치의 말에 사나다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마, 이것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제 진정으로 랑국의 사람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

"고향을 두고 멀리 떠나오셔서 슬프시겠지만, 이제 경국에서의 일은 모두 잊으셔야 하옵니다."

"…상궁의 말, 내 명심하도록 하지."


야마구가 말하자 사나다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은 채 식사를 준비하겠노라 말하고 방을 나섰다. 사나다와 궁녀 두 사람이 나가자 등잔불이 아른거리는 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야마구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손에 들린 목패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금칠이 되어 있는 츠키시마 황가의 문장도, 군왕비라는 글자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리고 비로소, 야마구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목패가 마치 어머니와 단둘이 힘겹고 궁핍했지만 그래도 서로가 곁에 있기에 행복했던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없노라고 일깨워주는 듯해, 그것이 서럽고 또 서러운 탓이었다.




*




글자를 쓰는데 곧게 써지지 않았다. 궐 내가 소란스러운 탓이었다. 근래 며칠 동안, 소정궁에 새로 오실 예비 군왕비 마마의 처소를 마련한다고 궐내가 시끌벅적하였다. 늘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던 츠키시마의 온강궁에 모처럼 활기가 돌아 하인들은 은근히 즐거워하는 듯했지만, 예민한 성정 탓에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츠키시마는 그렇지가 못했다. 오늘도 무엇을 하는지 시끌벅적한 소리에 결국 글을 쓰던 붓끝이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츠키시마가 인상을 쓰며 잘못 쓰인 글을 가만히 노려보니 먹을 갈던 가네코가 눈치 빠르게도 잽싸게 종이를 치워버렸다.


"마마, 번잡스러우시면 오늘은 이만 하라고 할까요?"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제 형, 이 나라의 황제이며 이 혼례를 추진한 제 형 아키테루 때문이었다. 물론 츠키시마의 성정을 잘 아는 데다 츠키시마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해주는 아키테루는 츠키시마가 하루쯤 소정궁 정리하는 일을 중단시켰다고 해서 츠키시마를 나무라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분명, 내심으로는 실망할 게 뻔했다. 요즘 들어 부쩍 온강궁에 들러 혼례를 앞둔 제 속내를 떠보거나, 소정궁의 정리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수시로 들여다보며 유난을 떨어대는 형의 들뜬 얼굴이 떠올라 츠키시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어라. 어차피 해야 할 거 빨리 끝내는 게 낫겠지."


그리 말하며 츠키시마는 걸음을 옮겨 온강궁의 입구에 멈춰 섰다. 이곳에 서면 소정궁의 처마 윗부분이 보였다. 소정궁은 돌아가신 선황께서 츠키시마를 어여삐 여겨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의 태자에게 선물로 하사한 궁이었다. 첫아들을 얻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부부에게 뒤늦게 생긴 아들. 그 아들을 어찌나 어여쁘게 여겼는지 황후는 아이가 자란 후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고, 황제는 황후의 그 바람을 받아들여 모자가 애틋한 정을 나누라는 뜻에서 츠키시마의 처소 곁에 소정(小情)이라 이름 붙인 작은 별궁을 지어주었더랬다. 소정궁은 작은 궁이었지만 내부는 갖출 것을 다 갖추었으며, 모자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안락하게 지어졌고, 뒤뜰에는 아름다운 연못과 앞뜰에는 꽃이 만발한 화분이 가득 놓여 날이 좋을 때면 모자가 산책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궁이었다. 궁궐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궁인들은 하나같이 소정궁이 처음 완성된 날, 만삭의 몸을 하고 한달음에 달려온 황후가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그러한 꿈같은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츠키시마가 태어나는 날, 황후가 그대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탓이었다. 모자를 위한 궁이었건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소정궁은 급격하게 그 화려한 빛을 잃어갔다. 이따금 유모의 손을 잡은 츠키시마가 뒤뜰의 연못이나 앞뜰의 꽃을 보며 산책을 하곤 하여 관리는 계속되었지만,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니 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츠키시마도 점차 발길을 끊게 되었다. 아버지인 선황께서 승하하신 후 아키테루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고, 아름다운 궁이 버려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소정(小情)궁의 `정`자를 고요할 정(靜)자로 바꿔 예민한 성정의 츠키시마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주었지만, 그때 쯤에는 이미 츠키시마가 더는 소정궁을 찾지 않게 된 뒤였다. 그곳에 걸음 하는 것이 꺼림칙한 탓이었다. 그곳에 가면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어머니가 자꾸 떠올랐고, 저를 보며 죄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하던 아버지가 떠올랐고, 저를 길 잃은 강아지마냥 가엾게 보는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편치 않은데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소정궁은 바로 곁에 있지만 잊힌 장소가 되고 말았다.


`저 기와가 본래 저런 색이었군.`


반질반질하게 닦인 옥색 기와를 바라보며 츠키시마는 생각했다. 햇빛에 바래고 비에 젖고 눈에 젖는 것을 누구도 닦아주지 않아 몰랐건만, 제 빛깔을 찾은 기와를 보니 어린 시절 저 기와가 값비싼 수입 염료로 만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레, 뒤를 이어 아마도 먼 옛날 저 궁을 보며 행복해했을 제 부모님의 모습도 떠올랐다. 츠키시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혼사는 잔인한 일이었다. 제 형이 저를 너무 아끼는 나머지 저질러버린 실수였다.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아들을 낳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어미는 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기도 전에 숨을 거둬야 했다. 아들을 낳아 강건하게 기르고자 했던 아버지는 평생을 죄책감에 허덕이다 죽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 자유를 채 맛보지도 못한 채 평생을 저주에 시달리다 죽어야 할 것이었다. 아들이 죽고 난다면, 그다음은 누구일까.


츠키시마는 옥색 기와를 바라보다 무어라 중얼거리며 등을 돌려 온강궁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가네코는 츠키시마가 돌아서며 `당신 팔자도 참 사납군`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분명 들었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까지는 짐작하지 못한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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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올라온 2편입니다. 여러가지 일로 바쁘고 감기까지 겹쳐서 늦게 올라왔네요ㅠㅠ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ㅠㅠ

그리고 별건 아니지만... 글에 나오는 호칭을 좀 정리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짧은 설정집을 풀어봅니다. 글 시작 부분에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고 썼는데, 그건 사실이지만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나름대로 아래와 같은 설정을 두고 썼습니다. 물론 모르고 읽으셔도 읽으시는데 아무 문제 없답니다:)

야마구치의 나라인 경국은 약소한 나라이지만 왕실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때문에 후궁의 품계도 다양하고, 왕실 내 반란이라던가 하는 문제도 여러 번이었던지라 서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적서 차별이 엄격하고, 양인과 음인에 대한 형질 차별도 엄격합니다. 경국 왕실의 호칭은 왕, 정비는 왕비, 후궁은 각종 품계, 적자˙적녀는 대군과 공주, 서자˙서녀는 왕자와 옹주, 왕의 형제들 중 어머니가 정비인 경우 대군, 그 외에는 그냥 군으로 부릅니다.

반면 츠키시마의 나라인 랑국은 나라는 강대하지만 전쟁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황실이 안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경국에 비해 적서 차별이나 형질 차별이 미미한 편입니다. 호칭은 황제, 정비는 황후, 후궁은 각종 품계, 황제의 자녀들은 적서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황자와 공주로 부릅니다. 다만 황제는 고귀한 자리라고 여겨져 황제의 형제들에게도 차등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황제의 형제들 중 선황의 적자들은 군왕으로, 선황의 서자들은 그냥 군으로 호칭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이제 금요일인데 다들 불금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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