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au, 의식의 흐름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집이 이웃이라든가, 단골 식당이나 술집이 같다거나 하는 이유로 얼굴도 일반인이 아무 연고도 연결도 없는 다른 일반인을 마주치는 빈도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얼굴을 마주친다고 해보자. 게다가 평범하게 인사 정도도 주고받을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누군가에게 향하는 호감이 연애감정에 가까운 것이라면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다. 당장이라도 밥 한번 먹자고, 술 한잔 하자고 권유해보라는 충고가 날아올 것이다. 번호 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약간 어색하긴 하겠지만 몇 번 만나다 보면 얼굴도 익숙한 사람이니 금방 친해질 것이다. 어쩌면 지금껏 몇 줄 채워넣지 못했던 친구라는 목록의 새로운 한 줄이 될지도 모르고,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연인이라는 이름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인식은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밥 한번 먹고 몇 년 지기 친구인 양 굴고, 술 한잔 마셨다고 초면인 사람 앞에서 인생 이야기를 하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다. 특히 성인이라는 이름표를 목에 건 사람들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호감을 품는 상대에게서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그 사람과 우호적인 감정을 기본으로 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이 가진 감정을 되돌려 받고 싶다고 소망한다. 일종의 기대심리다.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람의 감정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예측한 대로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기에 이러한 경우는 사실상 매우 드물다. 여기에 개개인의 성격, 나이를 먹을수록 두꺼워지는 자기방어기제를 감안한다면 타인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인사하는 것, 미소짓는 것, 손이나 어깨에 손을 두르는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녕.”


 입 밖으로 말을 내고 나서야 로우는 자신이 헛수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먼저 와 앉아있던 남자는 로우가 온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시선을 올리지도 않았다. 정돈되지 않은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색의 이어폰줄이 늘어져 있었다. 로우가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야 남자는, 유스타스 키드는 로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폰은 여전히 귀에서 빼지 않은 채였다. 로우는 그다운 인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쪽에 딱딱한 뭔가가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불편함. 그렇게 말해도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불만스러움, 서운함, 짜증스러움? 실망감도 있을지 모른다. 생각해봤자 별 소용은 없는 일이지만. 속으로 중얼거리며 로우는 익숙하게 노트 뒤쪽을 펼쳐 키드가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밀었다. ‘강의 시작했다‘. 키드는 휘갈겨쓴 글씨를 보고 씨익 웃었다. THANK YOU-소리없이 움직이는 입모양과 악동같은 장난스러움이 담긴 얼굴에 로우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릴 뻔했으나 이내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 짐을 챙기던 로우는 휴대폰에 와 있는 새 문자메시지에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다음에 있는 오후 수업이 교수 사정으로 휴강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자유시간이 생겼지만 로우로서는 달갑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통학에만 3시간이 걸렸다. 달랑 수업 하나만 들으러 학교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였고 공강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로우의 시간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오후 수업 모두 빽빽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칼퇴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던 로우는 곤혹스러웠다. 오늘 수업은 세 개. 마지막 수업은 거의 저녁에 가까운 시간에 시작하는지라 공강은 무려 6시간이었다. 중간의 점심시간을 뺀다 해도 5시간. 고민하던 로우는 가장 노멀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도서관. 딱히 대학생의 본분은 공부, 라는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적에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정도 공부를 즐기는 성향도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은 로우에게 있어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다. 점심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로우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린 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키드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너 다음 수업 있는 거 아니었냐?”

“있었는데.....”

“있었는데?”

“문자왔어, 교수사정으로 휴강한다고.”

“아~”


키드는 사정을 파악했는지 동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라, 유스타스야.”

“원래 남의 집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잖냐.”

“네 인간성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줄은 몰랐군.”

“헤, 누가 보면 나한테 큰 기대라도 하고 있는 줄 알겠는데, 트라팔가.”


키드는 비꼬듯이 말했다. 유스타스 키드는 흔히 말하는 인상파였다. 자연색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붉은색을 자랑하는 머리카락, 한 순간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험악하다 못해 폭력적인 눈매는 선 굵은 이목구비와 합쳐져 한번 본 사람은 절대 그를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는 진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로우에게 있어 그 사실은 나쁜 것이기도 했지만 좋은 것이기도 했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별로? 평소엔 제일 먼저 강의실 나가는 녀석이 안 가고 남아있길래 뭔 일 있나 했을 뿐이야.”


산뜻하리만치 깔끔한 대답에 로우는 쓴웃음을 삼켰다. 검은색 잔스포츠 가방을 둘러메고 어깨 아래로 늘어져 있던 이어폰을 귀에 꽂은 그는 여느 때처럼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나가버렸다. 언뜻 보았던 휴대폰 메신저 화면은 새로 온 메시지를 알리는 빨간 알림과 그 속의 하얀 숫자로 가득했다. 유스타스 키드는 호감형의 외모와는 한참 거리가 있음에도 의외로 인기인이었다. 아마도 그의 테스토스테론이 충만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외모, 눈빛만으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배려심이 깊고 상냥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스타스 키드의 모든 행동 동기는 매우 단순했다. 내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극단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분파에 마이페이스였다. 때때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고려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로우는 그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타입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스타스 키드가 스스로 남에게 말을 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걸려오는 말에는 대답해주지만, 그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는 그의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키드는 이따금 로우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었다.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 과제의 폰트크기를 까먹었는데 제한이 있는지, 주말에는 뭘 하면서 지내는지, 시험범위가 바뀌지는 않았는지. 가끔씩 묻지마 살인, 관료 스캔들 등 커다란 사건으로 SNS가 떠들썩할 때면 세상 참 잘 돌아간다며 비웃음이 담뿍 담긴 어조로 비아냥대기도 했다. 실상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조금 과장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대화라 치기도 민망할 정도로 짧았다. 로우는 인간관계를 넓히려는 사람이라기보다 그를 가능한 좁게 유지하려는 사람이었고, 타인의 호감을 쉽게 살 수 있을 정도로 화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키드의 혼잣말에 자신이 멋대로 맞장구를 치거나 대답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급격히 우울해지는 기분을 막지 못해 로우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낸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소록을 열었다. 몇 안 되는 연락처 중에 Eustass kid라는 이름이 당당하게 등록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한 번도 연락을 해본 적이 없는 번호다. 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학생증을 찍는 전자출석부 단말기가 고장나고 교수가 임시출석부를 돌리며 제출하는 김에 이메일과 전화번호도 쓰라고 했을 때, 일부러 가장 뒷줄로 가면서까지 몰래 따온 번호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적당적당히 대답하는 법이 있겠지만, 왜인지 키드의 앞에서는 망설이게 된다. 우물쭈물해도 타인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그는 어떻게 알았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아.....”


답답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어떻게 해도 잘못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까워지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표정도 행동도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후회와 자괴감이 밀려오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관계가 어긋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애초에 관계라고 말할 것도 없어 지금보다 나빠지는 일밖에 생각할 수 없기도 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로우는 종종, 아니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완전한 남은 아니니까. 오랜 소꿉친구들이 지겹게 돌려보는 어느 멜로영화 속 주인공처럼, 키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깨닫고 나니 동성에게 느끼는 호감, 동경심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충격은 있었지만 동요는 길지 않았다. 그저 지금과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감정을 깨달아도 깨닫지 못해도, 자신은 그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다. 타는 목에 문 담배가 썼다.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의외로 쉽다. 일단 들이대면 반은 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상대에게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다가가기보다는 다가오는 것을 기다린다. 그게 편하기도 하고, 관계로 인해 다치는 일도 덜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먼저 다가가는 쪽은 리스크를 진다. 하지만 자기의 마음을 조금 보여주면, 보여주지 않아도 상대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하면 관계의 리스크는 상대도 동등히 지게 된다.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다치고 안 다치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갈등은 발생하고 그 갈등을 푸는 과정에서 서로가 다치는 것은 당연하다. 피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다음은 더 편해진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다친다. 하지만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다간 더 다친다. 결심했다면 손을 뻗으면 그만이다. 사람은 유령이 아니라서 도망치더라도 손에 잡을 수 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는 대신 튼튼한 성 안에 꽁꽁 숨는다. 그 성은 보통 그 사람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성은 안쪽에서든 바깥에서든 부숴버리는 것 외에는 깨뜨릴 방법이 없다. 성을 부순다 해도 그 안의 사람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때때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성에 너무 깊이 틀어박힌 나머지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성이 부서질 때 함께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ㅡ확, 부숴버릴까.”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키드는 스스로 놀란 얼굴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본인의 의지로 바람 잘날 없는 하루만을 보낸 소꿉친구를 바라보던 킬러는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켜만 보았을 뿐이다.


“킬러.”

“왜.”

“그 녀석은 왜 그렇게 답답한지 모르겠다.”


키드는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메신저를 확인하던 손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가방 속에 던져넣고 말았다.


“완고한 것뿐이겠지. 달리 말하면 겁이 많은 거다.”


키드는 몇 달 전 교양수업에서 만난 한 학생의 이야기를 했었다. 키드가 말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자신이 관심있는 것이 아니면 입도 뻥끗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킬러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꽤 흥미롭게 들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눈에 띠는 녀석이 있더라, 정도로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튀는 외모로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았지만, 들어보니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회색 눈에 태닝을 한 것 같은 짙은 피부, 자신보다는 작지만 장신에 셔츠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는 상반신 전반을 덮은 문신들. 키드는 야생의 흑표범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킬러는 그가 꽤 들떠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흑표범을 닮았다는 그 남자는 첫눈에 키드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종종 그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생긴 걸로는 어딘가의 어깨나 악덕 사채업자, 잘 봐줘도 호스트를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의대생, 그것도 신입생 수석으로 들어온 수재라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키드의 모습에 킬러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저 호감이 있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 대해 말하는 정도였던 키드의 어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약 한 달 전부터였다. 킬러는 키드가 그를 달리 보기 시작한 것은 그 날에 일어난 일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키드는 고등학생 때부터 락밴드의 일렉 기타와 보컬을 맡았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인디밴드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다. 킬러는 키드가 카페나 클럽에서 공연을 할 때 구경을 가곤 했고 그 날 역시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그 날 공연이 있었던 클럽은 꽤 유명한 곳이었고 규모도 이전까지 공연했던 곳들보다 월등히 컸었다. 키드의 메이크업은 평소보다 더 진했고 공연 때 입었던 코트 역시 색상도 디자인도 화려했다. 진홍색으로 칠해 더욱 붉게 반짝였던 입술과 눈가의 짙은 아이라인은 키드에게 너무도 잘 어울린 나머지 이전보다 한층 더 진한 메이크업을 제안했던 밴드 멤버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두 번째 공연 시작까지의 자유시간에 멤버들은 근처의 클럽이 모여 있는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한창 다음 공연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밖으로 나갔던 키드가 돌아와 우연히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었다. 그 때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었지만 킬러는 직감적으로 그 때가 일종의 전환점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인생에서 당사자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중요한 순간들은 차고 넘치는 법이다.

그 후 키드가 트라팔가 로우라는 남자에 대해 말하는 빈도수는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문제는 그 중 8할 이상이 불만이었다. 킬러는 그를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키드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사람을 대할 때 꽤나, 아니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인 듯 했다. 키드는 그에게 호감이 있었을 때부터 나름대로 노력을 해보려 한 모양이었지만 자신이 뭐라고 말이라고 할라치면 얼굴이 차갑게 식다 못해 굳어버리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원래 인간 관계가 좁은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투덜대는 키드를 보며 킬러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정말 키드를 거북해하거나 싫어한다면 같은 학부도 아니니 대놓고 피해다닐 것이고 최대한 키드의 눈에 띠지 않으려 들 것이었다. 혹여 재수없게 마주치더라도 인사같은 것은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인사만 하고 곧바로 자리를 피하거나. 하지만 키드가 말한 그의 행적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제외한다면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직감은 때로 어떤 것보다 정확할 수 있었다. 킬러는 야생의 흑표범 같은 외관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섬세하고 상처도 잘 받는 사람일 그 남자가 키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 감정이 키드의 것과 동일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키드 본인도 아직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킬러는 슬쩍 운을 띠웠다.

‘정말 그 트라팔가 로우라는 녀석이 널 싫어할까?’

‘무슨 소리야.’

‘아니, 좀 이상해서.’

‘뭐가?’

‘널 싫어하는 것 치고는......너한테 너무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런 면에서는 둔한 소꿉친구도 마지막에서 뭔가를 깨닫긴 한 것인지 그 후 한동안은 트라팔가 로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아무생각 없이 넘겼던 남자의 행동들을 집중해서 관찰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역시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잡아낸 듯했다. 보통은 이쯤이 해피엔딩의 전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ㅡ


“이해가 안돼.”

“그렇겠지.”

“그 녀석도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게 확실한데 왜 아직도 그 모양인 거야? 씨발, 내가 언제까지......”


키드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해 보였다. 킬러는 하늘을 뜷을 기세의 자신감을 빼면 시체인 소꿉친구가 드물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답을 알려줄까 말까를 아주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연애사정이야 알 바 아니지만 하나뿐인 소꿉친구라면 다르다.


“네가 우물쭈물하니까.”

“우물쭈물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녀석......”

“그럼 넌 더더욱 그러면 안 되지. 고민하는 건 너답지 않다고, 키드.”

“젠장, 나도 알아! 하지만......”

“결심했으면 바로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게 네 신조 아니었냐? 어차피 다칠 거면 우물거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건 네가 한 말이잖아?”


말없이 앉아있던 키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과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던 재킷을 집어들고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킬러는 느긋하게 일어나 리복 운동화에 발을 구겨넣고 있는 소꿉친구를 배웅했다. 방금 전까지 약간 탁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다 때려부수진 마. 깔려 죽어.”

“그딴 건 말 안 해줘도 알아.”


키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해치우고 올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킬러는 키드가 당장 만나러 갈 그 남자를 생각했다. 혹시라도 그 남자가 호감일지언정 키드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 글쎄,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드는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부숴버리고야 마는 남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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