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고 15초 정도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면 그날의 운세를 대충 점칠 수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천장 무늬가 재수 없고 짜증나는 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기는 했는데, 이런 청천벽력에 우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영훈아,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회사로 나와 봐야 될 것 같은데…… 목소리가 평소보다 두톤 정도 낮은 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비보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내밀어지는 아아메나, 평소와 다르게 살가운 태도가 자꾸 입안을 까끌하게 만들더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이거다. 영화 하나 찍자. 쌈빡한 걸로.


 “내가 무슨 심청이도 아니고, 그런 걸 왜 해야 되는데요!”

 “누가 너보고 인당수에 빠지래? 해운대에서 적당히 해수욕 즐기라는 말이잖아!”

 “나한테는 거기가 지옥불구덩이라니까요? 이런 수법으로 뜨기 싫다고 계약서 도장 찍기 전에 말했잖아요. 그런 일 안 시키겠다고 해서 도장 찍은 거고.”

 “영훈아 사람이 어떻게 청렴하게만 사냐. 그래, 걔 소문 안 좋지. 이 바닥에서 그걸 누가 몰라. 근데 어쩌겠어, 대중은 좋아서 미치려고 하는데. 너 아니면 안 하겠다는 걸 봐선 팬인 거 아니야?”

 “이재현 같은 애가 날 왜 좋아해요.”


 그니까, 나보고 이재현이랑 입술 부비고 엉덩이 더듬는, 그런 퀴어영화 찍으라는 말이잖아요. 빙빙 에둘러 말하는 게 답답해 톡 쏘아붙이니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해사하게 풀어진다. 우리 요즘 일도 안 들어오고 오디션 자리도 잘 안 나는데, 일단 감독이랑 밥 한번만 먹어 보자. 영훈아 우리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지. 내가 너 키우겠다고 발품을 얼마나……


 “죽어도 안 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해. 절대 안 해.”


 이건 고집이나 오기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죽도록 싫은데 어떡해.





모노 스케일 스튜디오 1부

이재현 김영훈





 불편해서 죽고 싶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젓가락질이 무색하게 그릇을 반도 비우질 못했다. 감독과 대표가 쿵짝쿵짝 노는 동안 밑반찬으로 나온 동치미 국물만 홀짝였다. 난 일식이 좋다니까 기어코 한식당을 오네. 영문도 모르고 강제로 차에 탑승해 끌려나온 자리는 정말 심청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더러웠다. 맞은편에 앉은 K 감독은 원체 유명한데다가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도 많아서 그런지 충무로 대표 감독으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실험적인 도전을 멈추지 않고, 그 도전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의 영화는 모두 그랬다. 저번엔 시대물이더니 이번엔 퀴어인가. 아무리 마이너틱한 영화라 한들 일단 감독이 K인데 마다할 배우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그의 영화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니까.


 무명 생활이 어느덧 3년 차에 접어들며 슬슬 배우 생활을 포기해나가던 참이었다. K 감독의 영화 출연 제의는 꼭 동아줄 같아서, 눈 꾹 감고 이것만 찍으면 내 길이 열릴 것만 같아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스스로가 비참하고 한심해서 이 자리가 불편했다.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 내 힘으로 따낸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니 막상 이 영화에 뛰어든다 해도 그 배역에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상대역이 나를 원해서 제안하는 배역이라니. 이보다 끔찍한 캐스팅은 없다.


 “이재현이 저 아니면 안 하겠대요?”

 “…… 어, 그니까 그게… 영훈 씨.”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이재현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날 설득하는 거고.”


 올곧은 시선 너머로 당황한 낯빛이 비춰지자 허탈감이 차올랐다. 차라리 공사장 막노동을 뛰지, 이렇게 살기는 싫어.


 “안 해요. 절대 안 찍어요. 다른 배우 찾으세요. 상대역이 이재현이라고 하면 하겠다고 달려들 배우 넘쳐날걸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영훈 씨를 이재현을 위한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 영훈 씨가 좋으니까 같이 하고 싶은 거지.”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죽도록 보기 싫은 얼굴이 비춰졌다. 아무래도 어제 정말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 이는 이 영화의 주연, 그니까, 이재현이었다. 몸이 다섯 개라도 부족할 양반이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걸 보면 아마 감독이든 대표든 미리 수를 써둔 게 분명했다. 나만 빼고 다들 한통속이라는 거지. 소외감보다는 배신감이 차올랐다. 내가 안 찍겠다는데 다들 왜 난리냐고.


 “감독님 말 잘하셨네. 누가 영훈 씨를 수단으로 쓰겠대요? 내가 영훈 씨 연기가 좋아서 같이 영화 찍고 싶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나.”


 저 재수없는 선글라스를 마구 짓밟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 뻔뻔함은 여전하네.


 “그게 그렇게 싫어요.”

 “왜 싫은데.”

 “말로 해야 아나. 싫다면 싫은 거지.”


 시선이 맞붙었다. 사람을 깔보는 것 같은 시선. 사람들은 이재현을 왜 좋아하는 걸까. 잘생겨서? 연기를 잘해서? 누가 이유라도 알려 줬으면 좋겠다. 나는 저 사람이 싫어 죽겠는데.


 “어차피 하게 될 영화, 서로 편하게 갑시다. 네?”

 “처음부터 내 의사는 필요하지도 않았던 거네요.”

 “결정된 사안을 친절하게 통보하는 배려였다고 칩시다.”


 여기서 가장 혐오스러웠던 건 결국 이 운명을 수긍하고 받아들인 나였다.




 /


 초면은 아니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애매한데, 결코 초면은 아니었다. 한참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였나. 시놉시스만 읽고도 가슴이 저릿저릿 울렁이는 게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배역은 처음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어가며 오디션을 준비하는 내내 이미 이 극에 심취해 버릴 정도로 열심히 했건만, 결과는 최종에서 탈락. 그게 뒤늦게 오디션에 합류하게 된 남자애 하나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땐 배가 아팠지만 내 운명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울고 싶을 것 같아서.


 영화가 개봉한 뒤 그 남자애, 그니까 이재현이 모든 브라운관을 장악하는 걸 보며 기분이 이상하긴 했지만 다른 여타의 감정은 없었다. 걔가 나보다 뛰어났던 거고, 나는 부족했던 거니까.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이재현의 아버지가 엔터 계의 큰손이라나 뭐라나.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지만 미워하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야 흔한 일이고, 이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인 거니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단역으로 잠깐 출연하게 된 드라마의 주인공이 하필 이재현이었다. 기억할 리 없다고 생각해 그냥 지나쳤건만 왜 모르는 척하냐며 되려 화를 냈다. 오디션에서 잠깐 마주친 게 다인데.


 ‘우리가 인사할 사이예요?’

 ‘같은 배우끼리 인사 좀 하고 지냅시다.’

 ‘저 오늘 단역 알바로 온 건데.’

 ‘배우는 배우잖아요.’


 이때부터 또라이인 걸 눈치 챘어야 됐는데, 오히려 차별 없이 먼저 다가와 주는 게 고마워서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해 버렸다. 촬영 내내 살갑게 챙겨주고, 촬영이 끝난 뒤에도 따로 연락처를 주길래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다 목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상상 이상으로 불순한 개새끼. 자기랑 만나면 인생이 편해진다니 뭐라니 하는 게 나를 어떤 존재로 보는지 알 것 같아서 뺨을 때리고 도망쳤다. 차라리 목숨을 내주지, 몸은 절대 주기 싫었다. 이후로 오디션마다 줄줄이 나가리. 이상하게 그 작품에는 꼭 이재현이 나오더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해도 이건 내 인생이 좆됐다는 걸로만 느껴졌다. 그러던 새끼랑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모자라서 장르가 청소년 관람 불가 퀴어라니. 어디 산속으로 숨어버릴까 싶다가도 아직 남은 계약을 생각하면 그것도 안 됐다. 위약금은 어떻게 물어.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오싹했다. 이러다 어디 외진 곳에 가서 잡아먹히는 건 아닐지 불안해서 어디를 가든 꼭 누군가와 동행하리라 다짐했다. 이재현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랑 이 영화를 찍겠다고 한 걸까. 앞길 막을 때는 언제고.




 /


 출연이 확정된 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크랭크인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나니 기분이 한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저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모자라서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된다니. 내가 과연 이 배역에 몰입을 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잘해내고 싶은 마음 반, 영화 촬영에 협조하기 싫은 마음 반이 뒤섞였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대강 이러했다. A와 B는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재학 중이나 서로 모르는 사이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사이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고등학교 시절, 둘은 채팅으로 만나 함께 방황하며 몇 번 몸을 섞고, 감정을 나누다가 B의 일방적인 통보로 헤어지게된다. 이후 A는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지만 B는 이 기억을 마음속에 묻어 숨기고 여자를 만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대학에 와 서로를 재회하게 되고, B는 A를 만난 것을 극도로 불안해하며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까 두려워한다. B는 왜 A에게 헤어지자고 했을까. A는 왜 B를 잡지 않았을까. 둘의 재회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시나리오를 건네받고 읽어 내려가면서 극 안으로 점차 빨려 들어갔다. 일단 내용이 좋았고, A와 B의 대비되는 상황이나 그로부터 이어지는 전개가 적당한 속도감으로 흘러가는 게 어느 누가 읽어도 잘 쓴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싫다고 한들 첫 주연에다가 이런 시나리오까지 받게 되니 자꾸만 마음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꼭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대본 리딩 안 들어가요?”


 저 얼굴만 보면 기분이 잡쳐서 문제지만.


 “지금 들어갈 거예요.”

 “말투 봐. 사람 죽이겠다.”


 저 거만한 태도. 피해다닌 게 허무할 정도로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 버렸다. 둘만 있는 자리는 최대한 피하려 노력하다 보니 언제나 감독이나 작가, 스탭들이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니까, 둘만 있는 자리는 처음이라는 뜻. 말이 좀 사납게 나가기는 했다지만 저 장난스런 목소리를 들으니 없던 화도 샘솟을 지경이었다. 오늘은 모든 배우가 모이는 첫 대본 리딩이었다. 다른 배우들에게까지 민폐가 될 수는 없다. 닳을 정도로 읽고 또 읽은 대본으로 이재현의 시선이 머물렀다.


 “연습 많이 했어요?”

 “아마 댁보다는.”

 “아닌데. 내가 더 많이 했을걸요. 상대 배우 생각만 해도 자꾸, 여기 힘이 들어가서 문제였지만.”


 씩 웃으며 시선을 자신의 아래로 가리키는 게 딱 봐도 저, 저 미친…… 명백한 성희롱 의도가 분명한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반응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이재현이 먼저 들어가겠다며 사라졌다. 이재현의 저런 행동은 자꾸 적색 사이렌을 울리게 했다.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의심스러웠다. 공교롭게도 청소년 관람불가인 만큼 선정적인 장면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정말 이재현이 그런 목적으로 날 꽂아넣은 건 아닐지 불안해졌다. 아니, 설마, 설마… 수치심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잘하기로 했으니까. 민폐 끼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대본 리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처음에 한 명씩 일어나 인사를 하는데 꿈에 그리던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함께하는 걸 보며 이 상황이 실감나지 않아 테이블 아래로 손등을 두 번이나 꼬집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게 이질감이 느껴져서 인사할 땐 미약하게 목소리가 떨릴 정도였다. 이재현이 쥐어 준 기회라고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나는 니가 싫어.”

 “알아.”

 “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

 “내가 널 좋아했던 것들이 다 착각이라고, 오해였다고 생각하고 싶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런다고 우리의 시간이 사라져?”

 “……”

 “내가 너를 좋아했고, 니가 나를 좋아했던 그 시간이 사라질 것 같아? 너 지금 존나 꼴같잖고 웃겨. 누가 지금도 너 좋아한대? 혼자 게이 새끼인 거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딱 그 꼴이야. 피차 일반으로 지나간 과거니까 아는 척하지 말자.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아, 하고 뒤늦게 대사를 읽어보려 했지만 감독이 괜찮다며 긴장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려왔다. 이재현의 저 대사가 이상하게 가슴을 푹 찌르는 것 같아서 대사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목소리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간 자신과는 달리 본 촬영처럼 능숙하게 대사를 읽어나가는 이재현을 보며 박탈감에 휩싸였다. 연기 하나는 진짜 잘하네.


 죄송하다고 다시 가겠다고 말하려는 틈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직 영훈 씨가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우리 조금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 건 어때요?”


 이재현이었다. 내 인생에 자꾸만 끼어드는 이재현.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들 이때다 싶었는지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오늘 회식해요, 회식!”

 “말 잘했네. 우리 아직 회식 한 번도 안 했잖아요. 크랭크인 전에 딱 오늘 하면 되겠네.”

 “감독님 오늘 어때요? 원래 이런 건 말 나오면 딱 가야 되는 건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재현을 바라봤건만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게 재수 없어서 바로 시선을 돌렸다. 뭐, 회식이 나쁜 건 아니니까. 이재현이 제안해서 좀 그런 거지.




 /


 회식 자리에서의 이재현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싸가지 없고 말도 잘 안 할 줄 알았는데 나서서 술잔도 돌리고 분위기를 띄웠다. 회식은 뻔하게도 고급 한우집이었다. 난 참치회 먹고 싶은데. 우리 테이블에는 나와 이재현, 감독님, 그리고 작가님이 앉았다. 그러니까 미치게 불편한 자리라는 말이었다.


 “영훈 씨가 우리 영화를 하겠다고 해 줘서 정말 기뻐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지만 난 영훈 씨 진짜 좋았거든. B에 어울리는 배우를 못 찾아서 한참을 끙끙거렸는데 재현 씨가 딱 보여 준 영화가 그거였잖아. 본 투 비 블루. 주연보다 더 눈에 띄어서 내가 그걸 세 번을 돌려봤어, 영훈 씨 때문에.”

 “감사합니다…”


 본 투 비 블루는 두 번째로 찍은 영화였다. 독립영화이기도 했고, 영화 자체가 어설픈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보니 본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걸 이재현이 알고 있다는 것에 잠깐 놀랐다. 본 투 비 블루에서 자신이 연기한 H 역은 누나의 자살로 인해 슬픔이 드리운 집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놓지 않은 인물이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 같은, 그런 배역. 이 영화를 찍으며 스스로가 H가 된 기분에 촬영이 끝나고도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었다. 그걸 이재현이 봤다니. 도대체 어디서 본 걸까.


 “내가 재현 씨한테 이런 배우를 어디서 발견했냐고 물어봤더니 어깨 한번 으쓱 하고 가는데 어찌나 궁금하던지. 둘이 원래 아는 사이였어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는 걸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웃음으로 무마하려는데, 고기만 굽던 이재현이 입을 열었다. 전에 오디션 같이 봤었어요. 그때부터 눈여겨봤거든요. 느낌이 좋아서.


 “이 영화 하겠다는 사람 정말 많았어요. 근데 재현 씨가 전부 느낌이 안 온다고 잘라내는 거야. 정작 시나리오를 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다가 내가 영훈 씨 보고 느꼈잖아요. 아, 내가 영훈 씨한테 B 역을 주려고 이 영화를 썼구나.”


 옆에서 듣기만 하던 작가님이 거들었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따라주시는 술을 얌전히 받았다. 술이 들어가자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이재현이 도대체 왜 날 이 영화에 꽂아 넣은 걸까. 아무리 감독님과 작가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한들 결국 기회의 끈을 쥐어준 것은 이재현이었다. 왜? 민망할 정도로 매정하게 뺨을 때리고 도망친 나를, 굳이 왜? 내가 출연하려는 작품마다 훼방을 놓던 게 누군데.




 /


 초저녁의 쌀쌀한 바람 때문인지 어깨가 시렸다. 회식이 끝나고 차를 가지러 간 매니저를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데 옆으로 이재현이 다가왔다. 온종일 내 시야에서 떠나질 않는, 보기 싫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 요즘 일교차 심한데 저렇게 얇게 입고도 안 추운가?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있는 저와 달리 멀쩡히 서서 앞을 바라보는 게 온전한 맨정신 같았다. 하다하다 술까지 잘 마시네, 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틈으로 비춰지는 얼굴이 시선을 잡아챘다. 까놓고 말하면 잘생기긴 했다. 키도 크고, 비율도 좋고. 깡마른 저와 다르게 상체나 하체가 제법 탄탄해서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난 운동해도 살만 빠지던데... 알코올에 흠뻑 젖은 뇌가 시끄럽게 움직였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데다가 동갑이기까지 한 둘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차이난다니. 헛웃음이 터졌다. 혼자 웃는 게 이상했는지 이재현이 왜 웃냐는 듯 바라봤다. 있잖아요.


 “왜 나랑 이 영화 하겠다고 했어요?”

 “……”

 “나는 이재현 씨가 너무 싫은데, 그리고 무서운데… 왜 나랑 이 영화를 찍고 싶은 걸까 궁금해요.”

 “김영훈 씨 많이 취했어요?”

 “나랑 자고 싶어요?”


 자꾸 눈가에 눈물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나는 연기가 좋은데, 연기하는 게 너무 좋은데……”

 “……”

 “그래서 이 영화도 자꾸 욕심이 생겨요. 잘하고 싶어져.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오기 때문에 진짜 하기 싫었거든요. 내가 잡은 기회가 아니니까. 그랬던 주제에 대본을 읽을수록 더 좋아져서... 내가 온전한 B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매일 고민하고 생각해요. 근데 이거 나 혼자서 하는 거 아니잖아. 이재현 씨랑 같이 하는 영화잖아.”

 “……”

 “나랑 자고 싶어서 이 영화 하는 거라면, 자 줄 테니까 우리 이 영화 잘해 보면 안 돼요? 나는 이 영화 진짜 잘하구 싶은데.”


 대표님에게 영화 캐스팅이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 같은 배우를 쓰고 싶다는 감독이 존재할 줄이야. 그러나 뒤따라 들려오는 말은 나의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이재현이 너랑 찍고 싶다고 했다던데. 아무도 모른다, 이재현과 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속내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워서 도망쳤던 거였다. 그랬던 내가, 이 영화가 죽도록 좋아졌으니 자괴감이 따르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이재현이 싫은데, 그가 내게 선물한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손등까지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았다. 이재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일까. 나는, 나는 완전 꼴사납겠지. 남 앞에서 우는 걸 죽도록 싫어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이 남자 앞에서 울고 있다는 게 쪽팔렸다.


 정적을 헤치고 이재현이 날 안아왔다.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자꾸 눈이 감겨서 잘 들리지 않았다.






열흘나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