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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결에 여자 셋만 남았다. 준희의 부름에 나갔더니 준희와 여림이 눈을 반짝이며 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준희만. 준희는 여진을 끌고 와 소파에 앉히곤 입을 열었다.



준희 여진 씨는 뭐 해요!

여진 ... 어, 저 일 있는데 재택이라.

준희 여림 씨는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했고...



확실히 사람을 좋아하는 스타일 같다. 생긴 건 무슨 사람도 아니다, 닝겐 싫어할 것 같은 고양이 스타일인데... 여진은 가만히 준희를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준희 씨는 뭐 안 해요?



준희 네! 저 오늘은 일 없어요! 내일도 일 없고!

여진 그쵸. 내일은 데이트 해야 해서 스케줄 비워달라고 스태프들이 얘기 해줬으니까.

준희 근데 데이트 어떻게 할까요? 아니... 혼자 있으니까 너무 어색하고.



여림 씨는 누가 봐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둘이 룸메이트네. 영주는 조용한 거 보니 외출한 것 같기도 하고. 여진은 준희를 한번, 여림을 한번 쳐다보다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점심은 먹었어요?



여림 아뇨...

준희 저도 안 먹었어요. 어차피 요리 못 해서...

여진 그럼 떡볶이 시켜 먹을까요? 엽떡?



여림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생각보다 얼굴에서 감정이 티가 많이 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여진은 소파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켰다. 근데... 오늘 해야 할 작업이 있는데. 여진은 제 생각에 핸드폰을 다시 끄고는 준희를 톡톡 건드렸다.



준희 으에?

여진 준희 씨, 정말 미안한데요. 내가 오늘 해야 할 작업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대신 주문해줄 수 있어요? 저는 진짜 너무 맵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진짜.

여림 어, 그러면 저희가 할게요! 떡볶이 오면 부를게요!

여진 고마워요.



여진은 가볍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또 이러네. 여진은 순간 떠오르는 엑스의 말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누나의 계획에 늘 나는 없었지.


고치겠다고 그랬는데, 또 이러고 있다.







🐈‍⬛


준희 여림 씨도 떡볶이 잘 먹어요?



준희의 물음에 여림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괜히 엑스한테 잘 보이겠다고 다이어트를 했더니 떡볶이가 무지 당겼다. 준희가 여림에게 기대며 배달 어플을 쳐다보자 여림은 자연스럽게 준희의 긴 머리카락을 만졌다. 이거 완전 고등학교 다닐 때 심심할 때 하던 짓이네.


그럼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준희는 얌전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여림에게 맡긴 채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튀김도 먹을까요? 중당 추가는? 연애 프로그램은 무슨 영락없는 여고의 모습에 준희는 살짝 여림을 쳐다봤다. 제 머리카락 부드러워요?



여림 어... 아. 그냥 습관적으로.

준희 만져도 돼요! 근데 여림 씨 머리카락도 긴데?

여림 아...... 저, 이거 가짜예요.

준희 으엥? 머리 붙인 거예요?



여림이 조용하게 끄덕였다. 설마 이 사람.



준희 엑스한테 잘 보이려고요?



누가봐도 정곡이 찔린 얼굴이다. 엇... 내가 괜히 말했나? 준희는 주문 버튼을 누르고 여림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렇게 반응하는 거 보면 되게 타격감 있는 사람 같은데... 역시 정재현 씨랑 엑스인 건가...


배달은 시켰어요? 말을 돌리려는 듯한 여림의 말에 준희는 그 수에 넘어가 주기로 결심했다. 오히려 해맑게 주문 내역을 읽으며 여림을 쳐다봤다. 중당 추가에... 치즈 추가, 이거 치즈 만두 짱 맛있어요! 준희의 말에 여림은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여림 그렇게 안 해도 돼요... 여기서 엑스 신경 안 쓸 사람이 어딨어요...

준희 어휴우. 그건 맞죠. 진짜 잔인해, 제작진! 솔직히 좋게 헤어지든 나쁘게 헤어지든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좋아했던 사람인데.

여림 준희 씨는 엑스 많이 좋아했어요?

준희 말도 마요. 좋아하다 못해 따라다녔어요! 나 싫다고, 안 사귄다고 하는 거 졸졸졸. 여림 씨는요?

여림 ... 어, 저희는... 으음.

준희 왜요?

여림 좀...... 이상하게 사귀어서.



이상하게 사귄 게 뭐지? 준희는 제가 예상하는 여림의 엑스인 재현과 여림을 떠올렸다. 들고 튀었나? 딱 그럴만한 키 차이랑 덩치 차이긴 한데... 준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자 여림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림 나중에 다 밝혀지면 알려줄게요.

준희 누군진 몰라도.

여림 응?

준희 나중에 내가 혼내줄게요! 여림 씨 잠도 잘 못 자게 만들고.

여림 ... 어? 알았어요?



모를리가 있냐고, 이 여자야... 준희라고 맘이 편한 게 아니었다. 당장 잠자리는 바뀌었던 것은 물론이고 겨우 이틀 차인데... 물론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건 좋지만. 여림에겐 불행히도 준희는 귀가 밝았다. 그 덕에.



준희 그냥 나가는 소리 들렸어요.

여림 아하...... 다음부턴 조용히 나갈게요.

준희 아뇨아뇨. 저 귀 어두워요!



저와 달리 울음을 삼키는 여림의 목소리도 들렸다. 준희는 여림의 볼을 콕 찌르며 살짝 웃었다. 비밀 지켜줘야지.





🍦


너무 피곤하다. 여림은 피곤함에 어질한 머리에 눈을 끔뻑거렸다. 이렇게 피곤해도 잠을 잘 자지 못하니 더욱 괴로웠다. 저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준희에 결국 여림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아. 머리 아파.

여림은 이어지는 두통에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멀쩡하길 기대한 게 바보 같았다. 게다가 아침부터 이제노가 폭탄을 던져놨으니... 여림은 조용히 제노를 씹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림 어떻게 그러지...



이해가 안됐다. 헤어짐의 원인은 저였으니 미워할 만도 하다.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 8년이다. 여림은 제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군대를 제대하는 것도,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도 전부 봤다. 모르는 게 없었다. 근데 저렇게까지 나쁜 놈이었냐고... 여림은 제가 믿었던 모습까지 거짓말로 느껴져 괴로웠다.


여림은 자신의 얼굴을 물로 닦아냈다. 말끔하게 닦여지는 얼굴과 다르게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개새끼. 진짜 강아지 닮아가지고 진짜 한 번만 세게 때리고 싶네... 여림은 애써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는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했다. 떡볶이를 이제노라고 생각하고 씹어야겠다.






🐈‍⬛


여기서 아무리 봐도 나만 너무 멀쩡하다. 준희는 어색한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근데 우리 데이트는 또 어떻게 하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건가? 아... 보통 연애 프로그램에선 어쩌고저쩌고 하고 정하던데? 준희는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닌데! 괜히 억울해.


게다가 제 룸메이트인 여림이 너무 신경 쓰였다. 아니, 정재현... 맞나? 아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이렇게 궁예 했다가 나중에 틀리면 개쪽인데... 절대 말은 안 해야지. 준희는 순간 딩동, 울리는 소리에 생각을 멈췄다. 30초 지나면 배달원 갈 거고... 그럼 그때 가져와야지.



여림 준희 씨?



...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내려오는 여림과 눈이 마주쳤다. 너무 떡볶이 바란 사람 같지 않나...? 준희는 괜히 머쓱한 맘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웃었다. 왜 거기 어정쩡하게... 애매한 준희의 자세에 여림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준희는 살짝 소리를 내 입을 열었다.



준희 떡볶이 왔는데...! 배달원 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림 아... 혹시 모르니까?



준희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금 편한 차림인데 마주치면 좀 그렇잖아요! 여림이 여진을 부르겠다며 복도 쪽으로 향하자 준희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떡볶이 봉투와 함께 놓인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게다가 떡하니 적혀져 있는 여성 입주자들만 읽으라는 글자. ... 이거이거, 남자들이랑 여자들 따로따로 뭐 하려는 거 아냐? 준희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한 손에 편지 봉투를 쥔 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여진은 준희의 손에 들린 떡볶이 봉투를 들다 준희를 빤히 쳐다봤다.



여진 뭐예요, 그거?

준희 이거 여성 입주자만 읽으래요! 영주 씨 오면 같이 읽음 되겠다.

여진 내일 시간 빼달라고 했으니까 데이트가 유력하겠네요.



누구랑 되어도 재미있긴 하겠네. 일단 먹고 해요! 준희는 여진의 손을 끌어 부엌으로 향했다. 어차피 지금은 남자들도 없고, 뭐. 준희가 먼저 나서 떡볶이 포장을 뜯자 여림과 여진은 각각 물을 가져오고 식기구를 챙겨왔다.


그러고보니 여자들끼리 이렇게 앉는 것도 처음이다. 비록 영주는 없었지만... 준희는 제 앞에서 앞접시를 건네주는 여진에게 웃으면서 받았다. 어쩌면 나한테 경쟁자일 수도 있는 거네... 그냥 물어볼까.



준희 여진 씨!

여진 네?

준희 엑스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여림 푸흡



오히려 여림이 정곡을 맞았다. 엇... 그러면 설마 엑스가 이민형인가? 아니면 그냥 엑스가 신경 쓰여서? 당황한 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림을 쳐다보자 여진은 휴지를 몇 장 뽑아 여림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감사를 표하고 입을 닦는 여림에 준희는 민망한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물어보고 싶었는데...



여진 물어봐도 돼요.



독심술?!



여진 독심술 아니고 눈치.

준희 아항... 근데 티만 안 내면 괜찮지 않아요? 여진 씨는... 어엄, 막상 물어보라니까 뭘 물어봐야 할 지 또 모르겠네.

여진 여기서 제일 잘생겼죠.

준희 재현 씨?!

여진 그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알려줄 순 없는데?



여진이 웃으며 떡볶이를 한 입 먹자 준희는 자신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그치... 이름까지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 어휴, 답답해. 대체 언제 서로의 엑스를 알게 되는지... 아무래도 급한 성격의 준희는 좀처럼 이 상황이 싫었다.


물론 나오겠다고 한 나도 등신이다. 준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묵을 입에 넣었다. 웬만하면 이야기를 주도하기 보다는 듣고 싶었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다. 여진과 여림의 엑스 뿐 아니라 그 둘 자체도 너무너무 궁금했으니까.


준희가 입에 물고 있던 어묵을 씹어 삼키고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현관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기엔.



영주 뭐 먹어요!



궁금증을 일부 해소해줄 수 있는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


영주 이걸 우리끼리만 보라고 했다는 거죠...



영주는 어느새 젓가락을 하나 뜯어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영주가 편지 봉투가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자 여림은 편지 봉투를 가리키며 조곤조곤 설명을 덧붙였다.



여림 우리 아까 늦은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이게 있더라고요. 남자분들은 아직 한 분도 안 오셨고.

영주 제작진들이 우리끼리 고를 시간 주려고 일부러 빼낸 거 아니에요?

준희 헐. 진짜!

여림 근데 더 안 먹어요?

준희 배불러요...

여진 소식좌구나, 준희 씨...



준희의 소식좌 이슈에 영주는 떡볶이를 다시 한 입 먹었다. 맘만 먹으면 이거 한 통도 다 먹는데... 아니, 이 사람들 다 조금 먹는 것 같아. 영주는 맞은 편에 앉은 여림, 준희가 모두 젓가락을 내려놓은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거 언제 열어볼까요? 여진의 말에 영주는 가만히 입 안의 음식물을 씹으며 준희를 한 번, 여림을 한 번 쳐다봤다.



준희 그냥 지금 열죠! 아, 영주 씨... 아직 먹고 있어서 안되나?

영주 아뇨! 괜찮아요!

여림 저도 뭐... 제작진분들 편하게 빨리 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여진 그쵸. 이걸로 인터뷰 따고 이럴 거면 빨리 여는 게 좋죠. 어차피 여자들끼리 보라고 했으니까.

영주 그럼 제가 열어봐도 돼요?!



영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완전 프로그램... 프로그램이 맞긴 하지. 영주는 젓가락을 문 채로 편지 봉투를 살살 뜯었다. ... 으엥. 이게 뭐지. 툭 떨어지는 네 개의 카드에 영주는 떡볶이에 닿지 않게 옆으로 밀었다.


이거 각각 남자들에 대한 키워드인가? 영주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 여진은 영주의 편지 봉투를 흘깃 쳐다보며 언질을 건넸다.



여진 안에 뭐 더 있는 것 같은데요?

영주 맞다. 맞다!



영주는 그제서야 큰 편지를 발견하고는 편지 봉투를 털어 편지를 꺼내 들었다. 엄마야... 이 사람들 무서운 사람이었네. 영주는 편지를 읽고 큰 글자들을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첫 데이트 상대의 키워드입니다. 상의 하에 신중하게 골라주세요 

*최대한 새로운 만남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전 누구보다 새로운 만남에 집중하고 있거든요... 영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떡볶이를 다시 한 입 입에 넣었다. 편지 내용은 한 없이 복잡한 데 입에 닿는 맛은 한없이 단순했다. 달고 짜고 맵고.


영주는 괜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봤다. 사실 영주의 방향은 명확하기 그지없었다. 최대한 제노가 제시했을 법한 키워드를 고르고 싶었다. 이제노... 같이 카풀할 때 언질이라도 주지. 영주는 괜히 키워드가 적힌 카드를 집어 만지작거렸다.


놀이공원

다도카페

향수공방

쿠킹클래스


아... 뭘 고를지 감이 안 잡히네. 영주는 제가 들었던 제노에 대해서 어렴풋이 떠올렸다. 외향형인데 데이트는 둘이서 하는 게 좋다고 했고. 의외로 또 쿠킹클래스... 아니야. 요리 잘 하는 편은 아니랬어.


향수 공방? ... 딱히 뭘 뿌리는 것 같진 않던데. 영주가 여전히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응시를 하고 있자 영주의 맞은 편에 앉은 여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림 저희 가위바위보로 정할까요?

준희 그냥 빨리 정하죠! 어차피 첫 데이트인데.

여진 왜요. 뭐든 처음이 중요한데?

준희 그건 그렇긴 한데... 괜히 생각하는 게 더 복잡하지 않아요? 그냥 빨리 결정하는 게 더 편하고.



그게 맞긴 맞다. 네 손이 식탁 가운데로 모이자 여진은 가위, 바위, 보, 구령을 외치며 손을 바꿨다. 순식간에 반으로 나누어지자 영주는 준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위바위보가 아닌 악수의 손을.



준희 으응?

영주 준희 씨는 뭐 가고 싶어요? 어차피 우리가 이겼으니까!

준희 저는 놀이공원이요!

영주 헐...

준희 왜요?

영주 저도 그거 땡겨가지고. 우리 그냥 가위바위보 해요!



이랬는데 이제노 씨 놀이공원 아니면 어떡하지. 영주는 눈을 꾹 감은 채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그리고.



준희 헉. 졌어.



가볍게 승리를 쟁취했다. 이랬는데 이제노 아니면 서영주 넌 망했다...






🍦


어째 여기서만 일이 안 풀린다... 여림은 마지막 한 장 남은 향수 공방 카드를 집어 들었다. 정작 나는 향수도 안 뿌리는데. 이제노... 가 이런 걸 할 리가 없지. 한 번도 제노가 향수 뿌리는 걸 본 적이 없다. 여림은 괜히 울적한 기분에 의자에 기대 앉았다.



준희 근데 우리 데이트 상대는 어떻게 알아요?

여진 어... 그건 그렇네요. 키워드만 알면 어떡하라는 거지?

여림 잠깐 편지 좀요...



이렇게 키워드만 알려줄 리가 없는데. 여림은 영주가 내려놓았던 편지 봉투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영주 씨... 은근 허당 타입이다. 아래에 작게 적혀 있는 글씨에 여림은 조용히 글자를 읽었다.



여림 데이트 상대는 키워드 카드 하단의 큐알코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준희 그럼 저희 다 같이...!

여림 데이트 상대는 비밀에 부쳐주시길 바랍니다.

준희 에라이.



여림은 준희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저렇게 감정 표현이 뚜렷하면 누구라도 좋아할 수 밖에 없겠다. 너무 귀엽잖아. 여림이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제 손에 쥔 카드의 QR코드를 찍으려 할 때,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여진 거참... 한 번에 보내주지.



여진은 멀지 않은 거리에 현관문으로 향했다. 곧 여진의 손에 같은 색상의 편지 봉투가 들려있자 여자들은 모두 눈을 맞추고 웃었다. 방송이니까 이렇겠죠? 영주의 말에 여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진 내가 읽을게요.

준희 좋아요!

여진 여성 출연자분들은 채팅룸에 입장해주세요. 데이트 상대의 X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채팅룸? 모두의 얼굴에 담겨 있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


제노는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책상 앞에 앉았다. 제 핸드폰으로 온 문자에는 제노의 데이트 상대가 영주인 것과 채팅룸에 입장하라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그러면 제가 지금은 조언을 듣나요? 제노의 질문에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작가 우선 제노 씨의 X에 대해서 조언 해주시면 돼요.



아. 그렇네. 제가 조언을 듣는다고만 생각을 했지 정작 조언을 주어야 하는 입장에도 있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내가 데이트를 하는데 누나가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제노는 곧 채팅창에 무언가 적히는 표시가 뜨자 턱을 괸 채 가만히 화면을 응시했다.



> 여림 씨는 뭘 좋아해요?


구체적으로 물어보셔도 돼요 <


> 먹을 거나 하는 거? 꽃 구경을 좋아한다거나.



제노는 간략하게 답변을 적었다.



먹는 건 떡볶이 안 매운 맛<

바닐라 아이스크림 <

집에 있는 걸 제일 좋아해요 <


> 그건 곤란하긴 한데

> 집 데이트를 많이 했어요?


네 <

거의 같이 살았어서 <


> 되게 오래 사귀었나보다



얼결에 들켰네. 제노는 제 입 안을 씹어냈다.



> 냄새 같은 건 민감해요 여림 씨?


여림이가 향수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전 <

직접 물어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


> 그럼 여림 씨 말고 그쪽한테 물어볼게요



그쪽? 제노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물어보세요 <


> 여림 씨랑 다시 잘 해볼 생각 있어요?

> 여림 씨는 좀 있어 보여서


전 없어요 <


> 생길 일도 없나요?



제노는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다시 잘 해볼 생각. 그러니까 재회...라.


그런 욕심을 가져선 안됐다. 

제노는 굳어있던 손을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없을 것 같습니다 <


> 답변 고마워요

> 여기까지 할게요.


어째 제 생각보다 기분이 더 더러웠다.










대기해달라는 제작진의 말에 제노는 제 차로 돌아가 눈을 감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분명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8년이라고 해도 앞으로 살날도 많고 없었던 세월이 더 길었는데. 왜 이럴까. 채팅 상대의 말투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니 표현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겠지. 당장 제노가 영주에 관해 물었어도 상대를 그쪽이라 칭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공적으로 만난 사이도 아니니까.


제노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하나씩 나열하다 제 입술을 씹었다. 그러니까 이 기분은 주여림을 남에게 넘기는 기분이다. 여림도 바라지 않고, 제노 역시 바라지도 않는 상황.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제겐 그런 권리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 짜증나.


제노는 곧 자신의 차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담당 작가에 차에서 하차했다. 이제 제가 조언 받으러 가나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안내에 따르는 제노에 작가는 채팅룸으로 함께 들어갔다. 아까랑 똑같은 방에 앉자 아까의 기억이 다시 상기됐다. 짜증나.



> 질문 주시겠어요?



제노가 제 감정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제노에게 질문을 독촉했다. 나한테 빨리 보내버리고 싶은 것도 아니고... 왜 그러지. 제노는 화면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며 문자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


> 아 네

> 질문 없으세요?


영주 씨는 밖에서 노는 거 좋아하나요? <

데이트 장소가 야외라서요 <


> 엄청 좋아해요

> 술 사람 이런 거

> 전형적인 외향형 타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보이긴 했는데. 제노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마저 질문을 작성했다.


무서운 건 잘 타세요? <


> 어어 아마 잘 탈거예요



아마?



그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


> 어 안 가려요

> 아니다

> 풀 안 좋아해요 고기파

> 무지 잘 먹어요 그렇게 말랐는데



질문에 엄청 정성이네. 이쪽은 미련이 없나보다.



> 근데 놀이공원엔 고기 이런 거 없으니까

> 간식 많이 사주세요 츄러스 이런 거


영주 씨 액세서리는 좋아하나요? <

끼신 건 많던데 <


> 좋아하긴 하는데

> 자기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어서

> 서프라이즈는 별로고

> 꼭 물어보고 사세요

> 자기 맘에 안 들면 절대 안 써요



생각보다 정말 호의적이다. 제노는 제 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진짜 질문한다고 다 알려주네. 나 같으면 배알 꼴려서 못 알려줄 텐데.



데이트 관련 말고 <

개인적인 거 물어봐도 되나요? <


> 네

> 물어보세요


왜 헤어지셨어요? <



바쁘게 올라오던 채팅이 뚝 끊겼다. 제노는 인내심을 가지고 채팅을 기다렸다. 당연히 예민한 문제니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까의 채팅에 제 헤어짐 사유를 물어봤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았을 거니까.


그런데 제노의 채팅 상대는 너무 친절했다.



> 제가 외로워지는 것 같아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채팅은 제노의 심장을 찔렀다. 제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에 여림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숨도 조절하지 못한 채 나 너무 외로워, 제노야. 며 울먹이던 제 애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미치겠네. 괜히 물어봤다.



죄송해요 <

대답 안 해주실 줄 알았어요 <


> 별거 아니라서요



그래. 별 게 아니었지.

근데 그런 실수를 제노도, 영주도 저질렀다.



채팅 그만할게요 <

감사합니다 <



제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준희 씨... 도영은 책상 앞에 앉아 제 머릿속을 더듬었다. 요리 잘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쿠킹 클래스를 골랐지. 다분히 여림을 생각한 데이트 코스였는데. 도영은 아쉬움에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곧 시작한다는 작가의 말에 도영은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


> 네 ㅎㅎ



이런 거에 능숙한 분인가... 곧바로 올라오는 답변에 도영은 메모장에 적어놓았던 질문 리스트를 응시하며 하나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준희 씨 나이 어떻게 돼요? <


> 빠른 26살이에요

> 원래는 25살


아 그럼 생일이... <


> 엇 이런 거 알려드려도 되나?

> 1월 31일이요


저랑 하루 차이 나네요 <

신기하다 <


> 운명인가봐요ㅋㅋㅋ



도영은 상대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준희 씨랑 할 말이 더 생긴 것 같아서 다행이다. 도영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두 번째 질문을 작성했다.



준희 씨가 제일 좋아하는 <

먹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


> 어 준희가요



준희 씨보다 나이가 많은가?



> 애가 먹는 건 잘 안 가리거든요

> 근데 정말 조금 먹어요 정말 조금

> 몸 관리 차원도 있긴 할 텐데

> 음식 욕심 대비 정말 소식해요

> 정말로



... 뭐, 음식 남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도영은 연거푸 이어지는 채팅에 오히려 상대를 만류했다.



좀 남길 수도 있죠 <


> 근데 정말 진짜 조금 먹어요

> 진짜


네 ㅋㅋㅋ <

준희 씨 평소에 어떤 스타일이에요? <


> 옷 스타일이요?


아뇨 연애요 <


> 어...

> 좋아하면 엄청 쫓아다녀요

> 막무가내로



그렇게 예의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도영은 채 24시간도 못 본 준희를 떠올렸다. 뭐... 점점 알아가면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도영은 채팅 답변을 핸드폰에 정리하곤 마저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 <

뭐라고 부를까요? <

누군지 몰라서 <


> 야라고 하실래요?


네? <


> 장난이요 ㅎㅎㅋㅋ

> 편한 대로 부르세요

> 저기도 괜찮고


저기 씨? <

ㅋㅋㅋㅋ <

준희 씨 디저트는 좋아하나요? <


> 먹는 건 안 가려요 양이 작을 뿐이지


아하 <

그게 다인가요? <


> 어떤 데이트를 하시는 진 모르겠지만

> 준희는 불호가 거의 없는 애라서

> 딱히 싫어하는 걸 알려드리기가 좀 그래요
> 없어서 ㅋㅋㅋ


되게 좋은 여자친구였겠네요 <


> 네 ㅎㅎ

> 행복했어요


그러면 저기 씨는 <


> 네 ㅋㅋㅋㅎㅎ


준희 씨가 다른 사람이랑 잘 되어도 괜찮나요? <



빠르게 올라오던 채팅이 멈췄다. 미련이 있는 쪽인가? 도영은 하우스 내의 남성 출연진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어떤 남자도 미련이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내 판단이 잘못됐나... 도영은 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 안 괜찮을 것 같아요ㅎㅎ


도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안 괜찮다면서 ㅎㅎ 붙이는 건 또 뭐람. 도영은 답변을 정리를 하던 손을 멈추고 대화를 끝마치겠다는 채팅을 전송했다. 누군진 몰라도 내가 준희 씨랑 데이트 하는 걸 보면 기분이 안 좋으려나. 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건 도영도 똑같았다. 제 엑스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랑 데이트 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 김도영... 스스로도 맘에 안 드는 자신의 모습에 도영은 한숨을 내뱉었다. 마음 정리를 빨리해야 할 것 같다. 저와 제 엑스, 그리고 엑스를 좋아할 누군가를 위해서.








🐯


민형은 아이맥을 가만히 쳐다봤다. 제 데이트 상대가 여진인 것은 문자로 확인했다. 그러면 여기 안에 있는 남자들 중 한 명이랑 채팅을 하는 거겠지... 민형은 여진을 잠시 떠올렸다.


어떻게 제 옛 연인이랑 닮은 게 하나도 없었다. 민형은 쓴 웃음을 짓고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


> 안녕하세요

> 편한 대로 물어보세요



민형은 잠시 생각을 했다. 여진과 민형은 아직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여진은 데이트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했을 수도 있고... 민형은 화면을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제 뒤에 앉은 작가에게 말을 걸었다.



민형 나이 물어봐도 돼요?

작가 네! 상대에서 대답 안 해주실 수도 있긴 한데.

민형 그럼 어쩔 수 없죠.



민형은 바로 채팅을 써 내려갔다.



여진 씨 나이 여쭤봐도 될까요? <


> 31살이요


동안이시네요 <


>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동안 같아요ㅋㅋㅋ



그건 또 맞네. 민형은 낮게 중얼거리곤 마저 채팅을 이어 나갔다.



여진 씨 미술관이나 박물관 <

그런 거 좋아하시나요? <


> 네 좋아해요

> 그냥 산책하는 것도 좋아해요

> 저는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요


그럼 같이 안 가셨어요? <


> 네

> 그 분...? 이라고 할게요 ㅋㅋ

> 그 분은 되게 독립적이라

>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혼자 다 해요


그럼 제가 방해가 될 수도 있겠네요? <


> 에이 그렇다고 해도

> 티 안 낼 거예요


여진 씨 먹는 건 뭐 좋아해요? <


> 트렌디한 한식당? 데려가면 좋아할 거예요

> 해외에서 못 먹는 거요


아 <

여진 씨는 커피랑 차 중에 뭘 좋아해요? <


> 커피 더 좋아할걸요?



민형은 탄식을 뱉었다. 하필 제가 선택한 데이트 코스가 다도 카페다. 싫은데 골랐으면 어떡하지. 민형은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 근데 애당초 싫어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

> 괜찮을 거예요



민형을 위로하듯 올라온 채팅에 민형은 살짝 웃으며 채팅을 작성했다.



다정하시네요 <

ㅋㅋㅋㅋㅋ <


> 아이고야

> ㅋㅋㅋㅋㅋ

> 데이트가 뭐예요? 물어봐도 되나?


비밀입니다 <


> 너무하시네요ㅋ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

여기까지 할게요 <


> 네 

좋은 데이트 하세요


채팅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민형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도 잘 해봐야지. 


걔 신경 쓰여서라도 잘해야 한다.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데이트 빌드업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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