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버스

※하단은 소장용 결제창입니다














“진짜 복권을 샀어?”

“응.”

“그리고 진짜 당첨이 됐어?”

“응.”

“……몇 등?”




민형이 옆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아쉽게 1등은 못했고, 3등 했어.”




당첨금이 무려 3,349,220! 민형은 아직 당첨금을 찾지는 않았다며, 센터에 돌아가면 같이 찾으러 가자 말했다. 여주는 황당했다. 복권이 진짜 당첨된 것도 그렇지만…




“너는 왜 그런 얘기를 사람 패면서 해…?”




해맑게 웃고 있는 민형의 손에 얼굴이 다 쥐어 터진 이름 모를 아리가또 한 놈이 붙들려 있는 것도 그랬다.




“이 새끼가 먼저 여주한테 달려들었잖아.”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이 미간을 좁히던 그는 끝내 기절해버린 놈을 뒤로 던져 치웠다. 여주는 힘없이 날아가는 사람을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다 민형을 향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저거 치웠으니까 계속 직진하자.”

“응.”




민형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여주가 워치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헬로, 제이! 지성이랑 제노 위치 알려줘! 그랬더니 파앗- 하고 화면에 푸른빛이 감돌다 초록색의 깜빡이는 점 세 개와 하얀색의 점 하나가 화면에 떴다.


하얀색 바로 옆에 초록색 점 하나가 붙어 있다. 위에 0006이라는 코드 번호가 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건 자신과 민형이었다. 화면상 오른쪽에 멀리 떨어진 점에는 제노의 코드 번호인 0007이, 그리고 그 뒤에 떨어진 초록색 점에 0010이 적혀 있다.




“지성이는 제노랑 가깝다. 곧 만나겠는데?”

“그래? 우리도 거기로 갈까?”

“으음…….”




화면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던 여주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자신에게 이종호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통신도 끊은 지성이었다.


이럴 때 말도 없이 찾아가는 서프라이즈는 좀 그렇지. 그리고 지성이라면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 분명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 올 것이다.




“우리는 계속 직진이나 하자.”

“오케이, 직진.”




여주가 이번엔 민형의 옆구리에 팔을 두르고 찰싹 달라붙었다. 민형은 그런 여주를 보며 기분 좋게 웃다 작은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뒤에서 보면 언뜻 이인삼각 경기를 치르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




아직도 굴에 남아 있는 인원이 꽤 됐다. 안쪽 깊은 곳에 있어서 운 좋게 제노의 능력을 피한 사람도 있고, 작정하고 구석에 숨어있던 사람, 아니면 중간에 기둥이라든가 문짝 같은 장애물 덕에 폭풍처럼 휘날리는 살얼음 파도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개중 이미호는 첫 번째 유형이었다. 구석진 곳에 마련되어 있는 화약 창고에서 탄환이며 폭약들을 챙기느라 정말 운 좋게 제노의 능력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머리는 나쁘지만 눈치는 빨랐다.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못해, 오늘로써 이 집단은 기능을 잃고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는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도망쳐야 해. 이미호는 곧장 제 동생인 이종호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헌데 이 말 안 듣는 동생은 연락을 받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를 맞은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은 채 구석 어딘가에 숨어있던 이미호가 쥐새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있을 이종호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 남매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미호와 이종호는 센티넬을 싫어한다. 이유는 없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이유 없이 싫어해도 되는 사회의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남매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센티넬을 싫어했다. 이유는 남매와 똑같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대한민국 사회에선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싫어해도 되는 집단이었다.


남매의 부모는 간혹 센터나 센티넬·가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뉴스를 보며 세금 잡아먹는 놈들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조금만 찾아보면 센터 운영 자금의 대부분은 본부 지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알아보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남매가 다니던 학교에선 친구들끼리 모이면 어제 저쪽 동네에서 센티넬 하나가 폭주를 했다느니, 저쪽 동네에선 가이드 하나가 납치됐다느니- 하는 근거도 없는 헛소문을 유흥거리로 소비했다.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재미만 있다면.


남매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대다수가 일반인이었다. 애초에 남매가 살던 동네 자체가 센티넬·가이드에게 배타적인 분위기의 동네였다. 그렇다 보니 전교생 중 가이드는 한 명도 없었고, 센티넬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여주는 영웅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너희들이 한 번 생각해 봐라. 이여주가 진짜 혁명을 일으킨 영웅인지,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테러리스트인지.


학교 선생님은 이런 말을 아주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남매의 선생님 역시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센티넬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학급의 센티넬이 따돌림을 당하는 건 남매가 자랐던 동네에선 아주 흔한 일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했다. 언제였더라. 이미호가 한 번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야. 넌 센티넬 주제에 왜 맞고만 사냐? 센티넬은 원래 힘만 무식하게 세다던데.


그 말에 헝클어진 머리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학생이 말했다.


내가 너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

너 죽어.

…….

그래서 안 때리고 맞아주는 거야, 너 죽을까 봐.


어차피 때린다고 별로 아프지도 않다고 말하며 무심한 손길로 머리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학생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이미호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학생은 다음 날 이미호의 신고로 인해 경찰에게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일반인에게 협박을 한 죄로. 선처를 부탁한다며 집까지 찾아와 고개를 숙이는 그 학생과 학생의 부모님을 보며 남매는 깔깔 웃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미호는 선처를 해주지 않았다. 먼저 폭행을 당한 쪽은 학생 쪽이라 그 학생도 이미호를 고소했었지만, 이미호를 포함해 폭행을 한 사람들이 일반인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가해자들은 훈방 조치를 받았고 결국 그 학생만 벌금형 처벌을 받았다.


피해 학생은 도망치듯 다급하게 전학을 갔다. 이미호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비워진 학생의 자리를 보며 친구들과 함께 낄낄거리기 바빴다. 죄책감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게 왜 기어올라, 기어오르길. 손쉽게 사람 죽일 수 있는 괴물이 된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우스웠다. 남매에게 센티넬과 가이드는 그랬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는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들. 국가와 법도 보호해주지 않고 보호해줄 생각도 없는 버려진 것들.


센터에 소속된 센티넬·가이드들도 은퇴를 하는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특혜와 권리가 박탈된다. S급이나 A급 정도 되는 최고 등급을 지닌 이들의 상황은 다른 등급에 비해 조금 낫긴 하지만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정부가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영웅 이여주라는 존재만 특별했다.


남매는 이러한 사회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남매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그래도 되는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도가 다를 뿐이지 주변에 남매와 같은 사상을 지닌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남매에게 차별과 혐오가 잘못이라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다.


길 가던 센티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돌을 던져도 남매는 교도소 문턱에 발 한 번 들이대 본 적이 없었다. 가해자인 그들이 일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전과는 남았으나,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국민 대다수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남매는 나이를 먹고나서 나고 자랐던 동네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센티넬이라서 그랬다고? 너 미쳤어? 같이 일 하는 사람이 센티넬이라고 사람을 패? 됐고, 내일부터 그냥 일 나오지 마. 한달 치 월급 다 줄 테니까.

쟤가 아니라 제가 잘린 거예요, 지금?

그럼 때린 놈이 잘리지 맞은 놈이 잘려야 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요즘 세상에 뭐 이런… 어휴 됐다. 말을 말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만난 센티넬. 그냥 습관처럼 무시하고, 욕하고, 뭐만 하면 손부터 올렸었다. 헌데 남매에게 돌아온 건 해고 통보였다. 가게 사장은 남매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흘기며 문전박대를 했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남매를 보며 수군거리고 손가락질을 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남매가 쌍으로 저래? 야, 야, 여기 본다. 보라고 그래. 별것도 아닌 것들이 유세는.


이상했다. 별세계에 들어온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 남매는 세상에 동떨어진 것만 같은 감각이 두려웠으나, 그 두려움의 화살마저 센티넬에게 돌렸다. 세상에 저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우리 같은 정상인들이 이상해지는 거라 여겼다.


남매를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의 말마따나, 남매는 보고 자란 게 혐오였고, 가정에서 배운 것이 차별이었고, 학교에서 배운 것이 편협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주기 싫다는 욕심과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집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를 등한시했고, 그 때문에 국가 교육이 방치됐으며,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부작용은 고스란히 시민들이 떠안게 됐다.


교육이라는 건 평등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가치여야 한다. 개개인이 돈과 시간을 써가며 따로 어렵사리 찾아보고, 알아보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굳이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공기처럼 주변에 당연하게 있어야 할 것들.


그 당연한 것을 정부에서 손을 놓고 있으니 별 수 있나.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남매는 도태되지 않기 위한 발악 중 하나로 폭력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악수인 줄도 모르고.


넓게 보면 안승재는 물론이고 이미호, 이종호 남매도 모두 병든 사회 시스템에 의해 피해를 받은 이들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면죄부가 쥐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죄책감 하나 없이 이런 짓을 벌이게 된 원인에 어느 정도 정부가 힘을 보탰다는 소리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태 국가의 차별 가득한 법의 보호를 받아오며 살아온 이미호는 센티넬과 일반인 사이에 압도적인 무력 차가 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제대로 실감을 하는 중이었다.


통로에 세워진 얼음벽에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기를 벌써 몇 번째. 건너편이 다 보일 정도로 얇고 투명한 얼음일 뿐인데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심지어 총까지 쏴댔는데도 꿈쩍도 하질 않았다.


센티넬이란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짓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내는구나. 그러니 괴물이라 불리는 거고, 그러니 과거 정부에서 목에 목줄을 달아 괴물을 길들이기 위해 사육을 했던 거였어.


이런 괴물들을 고작해야 가이딩 하나로 발아래에 거느리고 있으니까,


어디 있냐고 안승재 그 새끼.


그래서 그 가이드는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거야. 세상에 무서울 일 하나 없겠지. 자기 하나 구하자고 우리 같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괴물 새끼들 품에서 오냐오냐 자라왔을 테니까!


이미호는 일이 이 지경이 됐음에도 여전히 반성 따윈 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기에 반성하는 법을 몰랐다. 목에 목줄을 찬 이후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건방지기 그지없었던 여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나 박박 갈았다.


군데군데 얼음이 박혀 있는 통로를 빠르게 내달리던 이미호가 천천히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온통 검은색 일색으로 갖춰 입은 남자와 맞닥트린 탓이다.


그는 안승재의 변태 같은 취미를 위해 만들어진 암실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이미호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오라는 새끼는 안 오고.”




쓸데없는 게 왔네.


그리 말하는 그의 손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호는 모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저 손에서 떨어지고 있던 것이 핏방울이었다는 걸. 그게 그토록 찾아다녔던 제 동생의 피라는 것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새빨간 고깃덩어리를 배경으로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지성은 방금까지 일방적인 살육을 벌인 사람처럼은 안 보였다. 그는 건조한 얼굴로 옆에 놓인 이 필름을 어떻게 없애야 할까, 하는 고민이나 했다.


불에 태우거나, 잘라 없애거나, 산에 녹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 필름에 상이 맺히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되지만 필름에 박힌 인물이 여주라는 것이 문제였다.


초커를 찬 여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여주이지 않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얼굴이다.


지성에게 있어 제 손으로 여주의 모습을 없애야 하는 일은 오랫동안 고민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역시 내 능력으로 없애는 편이 제일 낫겠지. 누나의 얼굴에 날붙이는 갖다 대는 건 말도 안 되고, 불을 붙이는 것도, 녹여내는 것도 너무 잔인하니까.


물에 젖은 손을 탈탈 털어낸 그가 옷자락에 손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조심스럽게 필름을 집어 들고 아주 세심하게 파장을 운용했다. 필름에 맺혀 있던 여주의 모습이 점차 흐려졌다. 그는 그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얼마 가지 않아 필름 프레임이 텅 비었다. 손끝으로 여주의 모습이 담겨 있던 프레임 안을 느릿하게 문질러보던 그는 필름을 바닥에 툭 떨궜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 위로 필름이 내려앉았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여주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은 필름은 이제 그에게 있어서 그저 한낱 쓰레기일 뿐이었기에.


그나저나 기다리는 놈이 안 오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그가 뒷주머니에 챙겨 넣어놨었던 초커를 꺼내 보았다.


분명 태일이 GPS와 생체 인식 기능을 살려놓았다고 했다. 그럼 안승재가 보기엔 이 암실에 여주가 들어와 서성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일 텐데, 왜 소식이 없지.


이종호가 이곳에 옮겨지기 전과 같은 자세로 싱크대에 툭 걸터앉은 지성은 물기가 아직 남아 있는 손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안승재가 모를 리가 없는데. 누나를 잡아가려 혈안일 거라 생각했는데. 왤까. 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걸까.


조용히 골몰하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반.”




여주는 이 짧은 시일 동안 야나와 꽤 깊은 유대를 형성했다. 안승재도 그걸 안다. 아니까 그 애를 계속 여주의 옆에 붙여놓고, 그 애가 보는 앞에서 여주의 목에 초커까지 채운 것이 아니겠나.


그런 야나의 약점은 이반이고, 그 이반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그 누구도 본 사람이 없어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안승재가 데리고 갔을 확률이 높다. 안승재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계획하며 이반을 데리고 간 건지 쉬이 예상이 간다.


이반을 잡아 놓으면 야나를 잡을 수 있고, 야나를 붙잡으면 여주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야나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반을 다른 곳으로 데려간 거다.


안승재는 여주가 야나를 위해서라도 본인을 직접 찾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위험하게 모습을 드러내 가며 여주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일 테고.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서 본인이 유리한 입장이라는 거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멍청해서 웃음도 안 나온다. 어쨌든 안 오면 내가 찾으러 가야지.


뻐근해져 오는 목을 꾹꾹 주무르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손에 들린 초커가 걸리적거린다. 안승재를 유인하기 위해 꾸역꾸역 챙겨온 건데, 이쯤 되면 그냥 무용지물이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무심한 손길로 초커를 툭, 내던지고 한 번 더 손에 물을 묻혔다.


더러운 걸 만졌으니 손은 씻어야 하지 않나. 지금쯤이면 여주도 이 땅굴에 들어와 있을 테고, 이제 곧 여주를 만나게 될 텐데. 그때 더러운 손으로 여주를 만질 수는 없으니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대충 털어낸 그가 걸음을 옮겼다. 핏물에 젖은 흙바닥이 걸을 때마다 찐득거리며 밑창에 달라붙었다. 그 느낌이 기분 나빠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암실을 나섰을 때 마주하게 된 인물이 바로 이미호였다.


달려온 건지 뭔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헉헉거리며 서 있는 이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라는 새끼는 안 오고…….”

“…….”


“쓸데없는 게 왔네.”




그러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이미호가 주머니에서 허둥지둥 손전등과 총을 빼 들었다. 문틀에 어깨를 툭 기대고 선 지성은 이미호가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심산이었다.




“우, 우, 움직이면 쏘, 쏠 거야.”




손전등으로 자신을 비춘 채 총구를 겨눈다. 아마 저 손전등은 조명탄과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8지부장이 밤을 새워가며 생산한 호킹 제이를 저마다 홀터에 하나씩 달고 있는 센터 요원들에겐 전혀 안 통할 테지만, 이미호의 행동을 보면 아직 거기까진 모르는 듯했다.


근데 왜 이미호가 여기에 있지? 이종호랑 같이 밖에 있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이종호를 찾으러 왔나?


조용히 생각하던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호는 생포할 인원으로 생각해 놓고 있던 인물이었다. 따지자면 영 쓸데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네 동생 찾으러 왔어?”




지성이 물었다. 눈을 크게 키운 이미호가 총을 든 손을 벌벌 떨어댔다. 지성은 감흥 없다는 눈길로 그런 이미호를 쳐다보다 몸을 비스듬히 돌려 길을 터주었다.




“안에 있어.”




그 말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컴컴한 암실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이미호가 악 소리를 내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지성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능력을 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뭐야, 이건.”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제노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미호가 쏜 총구에서 발사된 총탄은 지성의 앞을 순식간에 감싼 얇은 얼음벽에 가로막혔다.


몸을 들썩이며 이번에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지성과 제노를 번갈아 살피던 이미호는 제 입술을 터트릴 듯이 깨물다 다급히 암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종호를 만나면 이 불리한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지성이 픽 웃으며 곁으로 다가온 제노를 향해 고맙다는 의미로 눈짓을 해 보였다.




“안에 이종호 있다고?”

“응.”

“살려놨어?”


“설마.”




아아아악─!!!!!


짧은 대화 다음으로 들려온 건 안에서 들리는 이미호의 새된 비명이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귓불을 매만지던 지성이 빼놓았던 이어폰을 다시 끼며 물었다.




“누나는?”

“아까 안에 들어왔어. 민형이 형이 그러는데 아직 안에 숨어있는 놈들이 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둘러보던 중이야.”

“보니까 대부분은 다 밖으로 내보낸 것 같은데.”

“그치, 대부분은. 위에서 그러더라. 어림잡아 300은 튀어나왔다고.”




어림잡아 대략 300명. 대부분 센티넬·가이드로 구성되어 있었던 반정부와 비교하면 체급이 턱없이 작아 그냥 오합지졸 단체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일반인들이 오로지 센티넬·가이드의 학살을 도모하며 모인 집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수가 많은 편이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안승재가 한국에 입국한 건 고작해야 한 달 전이다. 그 전부터 알게 모르게 서로 교류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 땅에 발을 들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일반인이 300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건 심각하게 다룰 만한 사안이다.


안승재에게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이 집단의 몸집은 어디까지 불어났을까.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인간들의 역겨운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표정이 구겨지는 지성이었다.


쯧. 짧게 혀를 찬 그가 무전기 전원을 켰다.




[─건 맞아. 진짜 매운 것도 먹고 싶긴 해.]




무전기를 다시 작동시키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여주의 목소리다. 언제 그렇게 기분이 나빴냐는 듯 배시시 웃던 그가 마이크 버튼을 꾹 눌렀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맨밥에 엄청 매운 김치 하나 쫙 찢어 올려서 먹고 싶어.]

“매운 김치?”

[어, 뭐야.]




당황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눈을 접어가며 웃던 그가 답했다.




“뭐야, 가 아니라 저 누나 지성이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나…….]




이번엔 황당하다는 어투가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제노는 낄낄거리며 팔짱을 낀 채로 지성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너 인마, 어?! 너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연락을 뚝 끊어버리는 버릇은 누구한테 배웠어?!! 끊을 거면 적어도 내 말은 다 듣고…!]

“선생님한테 배웠는데요.”

[지금도 말 끊는 거 봐!]

“이것도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이래서 내가 너나 걔나 하나 같이 다 재수 없다고 하는 거야! 이 재수 없는 것들아!!!]




이어폰에선 이딴 걸 가르치는 놈도 문제고, 이딴 걸 배운 놈도 문제라며 투덜거리는 여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정우의 [맞아요.] 라든가, [재수 없는 센티넬 양반들.] 하는 추임새도 끼어들었다.




“미안해요. 반성 중이에요.”

[씨…… 그래서 그, 그, 뭐냐. 그 종팔이였나? 아무튼 걔는?]

“걔는 뭐…….”




힐끗 암실 안에 시선을 던진 지성은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미호와 그 앞에 놓인 이종호였던 것을 느른한 눈길로 살피다 답했다.




“잘 처리했어요.”

[흐응… 그래?]

“네.”

[안승재는?]

“아직 못 찾았어요. 이제 다른 곳으로 가보려고.”

[보니까 제노랑 만난 것 같은데, 같이 있지?]

“네.”

[같이 움직일 거야?]

“아뇨. 안에 아직 숨어있는 놈들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제노 형은 수색으로 보낼 거예요.”

[아하, 글쿤.]

“일단 누나 좌표 좀 보내줘요. 얼굴 보고 가게.”

[어엉. 잠깐만. -헬로, 제이! 지성이한테 내 좌표 보내줘!]




푸스스 웃던 그는 워치로 송신된 좌표를 확인하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여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응. 뛰어와.]

“네. 그 전에 잠깐만… 도영이 형.”


[…어? 나?]




뜬금없는 부름에 도영이 한 박지 느리게 대꾸를 해왔다.




“아까 내가 보내준 좌표 기억해?”

[아, 그거? 어. 왜?]


“이미호 잡아놨어. 와서 데려가.”

[이미호… 이종호 누나?]

“응. 생포해 놓으면 나중에 잘 써먹을 수 있을 거야.”

[걔를?]


[어, 이건 지성이 말이 맞아. 이미호는 내부 사정도 잘 알고 있을 거고, 따지면 여기선 간부급이니까 쓸데가 많지.]




지성을 대신해 설명을 덧붙인 영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여주가 있으니까 드디어 지성이가 부팀장다운 일을 하는구나.]




장난기 가득한 그 말에 지성은 인상을 찌푸렸고, 제노는 큭큭거리며 웃기 바빴다. 웃지 말라는 듯 제노의 어깨를 손등으로 툭 친 그가 문틀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세웠다. 버튼을 눌러 잠시 마이크를 끈 그가 말했다.




“우린 여기서 흩어지자. 형은 수색 다 끝나면 민형이 형이랑 같이 누나랑 있다가 태일이 형 오면 태일이 형 옆에 붙어.”

“알았어.”




그때 암실 안에서 “어…!” 짧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성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도영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본 시뻘건 고깃덩어리에 깜짝 놀라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이종호가 이따위로 변해 있으면 미리 말을 해줘야지 이걸 왜 말을 안 해? 너 보고 수칙 다 까먹었어? 나 잘 놀라는 거 뻔히 알면서, 어? 형한테 네가 어떻게 이래.”




우다다다 쏟아지는 잔소리에도 덤덤한 얼굴로 눈이나 끔뻑이던 지성이 입을 열었다.




“누나가 듣고 있는데 저걸 어떻게 설명을 해.”

“…….”

“…….”


“그래. 그건 그러네.”




싱겁게 수긍한 도영은 “으, 징그러.” 중얼거리며 핏물이 고인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미호의 팔뚝을 잡아 들었다. 가볍게 들어 올려진 이미호는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몸의 절반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도영이 제노를 쳐다봤다.




“이거 얼음으로 대충 어떻게 못 닦나?”


“으음…….”




목덜미를 긁적이던 제노가 손가락을 한 번 가볍게 튕겼다. 이미호의 머리 위에서 사락사락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새하얀 눈송이가 이미호의 몸을 두껍게 덮었다. 잠시 후 눈송이가 사라지자 어느 정도 피가 씻겨나간 모습이 드러났다.




“이 정도면 됐어?”

“어, 됐어. 난 다시 가볼게.”

“형 수고해.”

“너네도.”




한 팔에 이미호를 짊어 든 도영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손을 탁탁 털어낸 제노가 지성을 돌아봤다.




“수색 중에 찾아낸 놈들 처리는?”




이미 지상에 올라간 놈들만 삼 백이다. 쥐새끼처럼 굴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놈들은 생포할 가치가 없다. 이미호처럼 이 집단 내부에 깊게 연관된 놈들이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미호 한 명 생포한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빠르게 계산을 끝마친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사살해.”




간결히 임무만을 고지하곤 그대로 등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는 지성이었다. 여주를 만나러 가느라 저렇게 바쁘게 가는 거겠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살 내젓던 제노 역시 몸을 틀었다.


몇 명이나 남아 있으려나. 어쨌든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그리 생각하는 제노도 걸음을 빨리했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걸음엔 각자의 성마름이 묻어나 있었다.
































한편 민형과 함께 이반과 은미의 일기장을 찾으려다 발견한 무기고를 점검하고 있던 여주는,




“왜 말 안 했어요?”




지성의 두 팔 안에 갇힌 채로 심문 아닌 심문을 겪는 중이다. 보내준 좌표로 지성이 찾아왔길래, 보고 싶어서 달려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더니 돌아온 건 따스한 포옹이 아닌 피드백 감옥이었다.


난… 난 이런 포옹을 원하지 않았어. 난 포대기처럼 날 감싸주는 박지성을 원했던 거지 두 팔로 날 움직이지 못하게 가둬놓고 물음표를 던져대는 박지성은 원하지 않았어…….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여주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지금도 무기고를 수색하고 있을 민형을 찾았다.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총기를 하나하나 분해해 다시는 쓸 수 없게 부러트리거나 구부리기를 반복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민형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림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말똥…! 나 구해줘…!


여주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민형이 머릿속으로 지성이 무기고에 들어오자마자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누나, 제가 뭘 봤는지 알아요? 필름이었어요. 누나가 찍혀 있는.


유추는 쉬웠다. 야나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필름 카메라. 웃고는 있었지만, 화가 났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었던 지성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여주의 목에 걸려 있었던 초커까지.


그는 두 동강이 난 개머리판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여주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여주가 알아서 해! 이건 숨긴 여주 잘못이니까!


여주는 정말 울고 싶었다. 믿었던 음이온 베이비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 눈을 질끈 감고 울상을 짓고 있던 여주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여주의 등과 허리를 단단히 감싼 채 서 있던 지성이 손가락으로 톡톡, 여주의 등을 두드렸다. 입으로 쩝 소리를 내던 여주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니,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응. 아니라.”

“그냥… 그냥 좀… 깜빡한 거지…….”

“……깜빡?”

“…….”

“……깜빡.”


“잠깐 자리 피해줄게. 얘기 나눠.”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형이 후다닥 무기고를 빠져나갔다. 친절히 문까지 닫아주었다. 이어폰에선 [형, 형, 여주가 글쎄-] 하는 민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악! 미쳤나 봐!!”

“…….”

“나, 나 마이크! 마이크 켜줘! 나 마이크 켜줘!!”




몸을 바둥거리며 외치는 여주에 삐뚜름하게 웃던 지성은 손을 들어 여주의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빼주었다.




“아니! 마이크를 켜달라니까?!”

“싫어요.”

“왜!!”

“마이크 켜주면 뭐라고 할 건데.”

“그거야…!”


“깜빡했다고?”

“…….”

“그래서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라고 할 거예요?”

“…….”

“나도 안 믿는 얘기를 형들이라고 믿어줄 것 같아?”




여주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던 시선은 지성을 향했다가 다시 밑으로 푹 가라앉았다. 단정했던 그의 얼굴에 점차 그늘이 졌다. 작은 어깨 위로 제 얼굴을 떨군 그가 억눌린 숨을 내뱉었다.




“이걸 왜 말을 안 해.”

“…….”

“누나. 그거 내가 발견했어. 내가 찾았어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찾았다고.”

“…….”

“내가 그거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몸을 옭아매고 있던 두 팔에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너른 어깨에 볼을 기대고 안긴 여주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어. 진짜야. 아깐 타이밍도 그렇고 상황이… 변명이 아니라, 진짜 나중에 말할 생각이었어.”

“…….”

“야나도 야난데… 야나보다 네 걱정 더 많이 했어. 그래서 안 했던 거야. 필름 그거는… 솔직히 그건 발견할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

“미안해. 속 많이 상했어?”

“…아, 진짜…….”




끙끙 앓던 지성은 여주의 목덜미에 뺨을 꾹 눌러 붙이고는 마구 비비적거렸다. 창백한 피부는 짧은 마찰에도 쉽게 붉어졌다. 그것이 내심 만족스러워 소리 없이 미소 지은 그가 붉어진 살결 위에 꾸욱 입술 도장을 눌러 찍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요. 누나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닌데.”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던 여주가 “…이미 다 했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퉁명한 음성엔 섭섭함이 대놓고 묻어나 있었다.


내가 미쳤지. 누나 얼굴 한 번 봤다고 감정 조절도 못 하고, 누나 잘못도 아닌데 괜히 몰아붙이고. 쓰게 웃으며 이제는 습관과도 같은 자책을 하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누나.”

“……왜.”


“그 애랑 거리 좀 둬요. 이거 질투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야나도 안승재가 시켜서 찍은 건데.”

“그건 나도 알지. 아는데…….”




말끝을 흐리던 지성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주의 볼을 살살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걔랑 같이 있으면 누나만 일방적으로 계속 희생을 하게 되잖아. 이거 건강한 관계 아니에요.”

“…….”

“걔한테는 누나가 구원이라 누나를 잘 따르겠죠. 계속 붙어 있고 싶어 할 거예요.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

“앞으로 걔도 다른 사람이랑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하고, 세상에 뒤섞여서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돼요. 언제까지 누나가 옆에서 하나하나 챙겨줄 수는 없어. 이거 누나한테만 안 좋은 게 아냐, 걔한테도 안 좋아.”

“…….”

“그리고 걔도 이제 센티넬이잖아. 누나도 아까 봤잖아요, 걔가 나 경계하는 거. 아예 만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누나한테 집착하기 전에 거리를 두라는 거야.”




나긋나긋하게 설득하는 지성의 말에는 틀린 얘기가 하나도 없었다. 여주도 어렴풋이 걱정하고 있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말했잖아요. 걘 누나가 아니라고.”

“…….”

“누나도 이연주가 아니에요. 누난 누나만의 인생을 살아야 해.”




왜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해요. 누나 인생이잖아. 누나 삶인데. 나는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속상해. 이어지는 지성의 말에 입술을 달싹이던 여주는 끝내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그럼 센터 적응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도와줄래. 이건 괜찮지?”

“네. 대신 딱 거기까지만 해요. 그 이상은 안 돼요. 누나가 저 애한테 휘둘리는 꼴 더는 못 봐.”

“…응, 알았어.”




눈을 깜빡이던 여주가 스윽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다 소심하게 입술을 쭉 내민다. 아, 누나는 진짜…….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리던 지성은 제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손길에 허겁지겁 여주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귀여워지는 연인 때문에 지성은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어딘가에 숨겨두고 자신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이제 일상이다. 그는 오늘도 밑 빠진 독처럼 속절없이 사랑을 쏟아냈다.





❊❊❊




지성은 죽여도 시원치 않을 새끼를 찾으러 가기 위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민형은 터덜터덜, 힘없이 멀어지는 지성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차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있던 여주를 보며 물었다.




“여주, 이어폰 왜 뺐어?”




그 물음에 여주가 “왜겠냐.” 하고 대꾸하며 민형을 흘겨봤다. 새초롬한 시선에 동그란 눈을 꿈뻑이던 그는 “아핰!”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 필름 얘긴 안 했어.”

“에엥?”




시간을 살짝 뒤로 돌려보자면, 여주가 들었던 ‘여주가 글쎄-’ 뒤에 붙었던 문장은 이러하다.


형, 형, 여주가 글쎄- 내 앞에서 지성이랑 껴안더니 날 내쫓았어!


그 얘기를 들은 여주가 얼빠진 표정으로 민형을 쳐다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주가 말 안 한 건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말 안 했어. 그리고 왠지 여주는 나중에라도 말 해줄 것 같았거든. 그치?”




허억.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려 막은 여주는 감동으로 물든 눈망울을 장착하고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민형을 올려다 봤다.


역시 나의 음이온 베이비…! 난 널 믿고 있었어…! 감격에 차 말하는 여주에 또 한 번 깔깔 웃던 그가 “아.” 소리를 내며 그랬다.




“도영이 형은 하라는 임무는 안 하고 꼴값 떤다고 뭐라고 하긴 했다.”

“아잇, 하여튼 그 잔소리쟁이.”




실실 웃는 낯으로 투덜거리던 여주는 다시 빠르게 이어폰을 꼈다. 얘들앙. 여주가 동그란 받침을 덧붙인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자 이어폰 너머에선 [민형이 내쫓아놓고 이제야 나온 거야?] 하는 도영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나온 건 아까 나왔는데 너네 잔소리 듣기 싫어서 여태 이어폰 빼고 있었어.”


[잔소리 듣기 싫다고 현장에서 이어폰을 빼고 있으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어폰 뺀 사람 되는 거지.”

[선배!]

“아이, 알았어어-. 미안해애-.”




민형은 입술을 삐죽이는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다 작은 어깨 위로 팔을 툭 걸쳤다. 여주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발을 내디뎠다.


여주의 보폭에 맞춰 함께 다음 장소를 향해 이동하던 그는 통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있던 사람을 하나 발견하곤 곧장 발을 휘둘렀다. 바람개비처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던 사람이 퍽 소리를 내며 막다른 벽에 부딪힌다.


음, 벽에 붉은 꽃이 피었군. 처참한 풍경을 보며 꽤 낭만적인 감상을 남긴 여주는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리는 사람을 심드렁한 눈길로 바라보다 얼마 안 있어 숨통이 끊긴 사람에게서 시선을 뗐다.




“숨어있는 놈들이 가끔씩 나온다. 그치?”


“그러게. 여주, 떨어지지 말고 더 붙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민형의 허리에 두 팔을 착 감았다. 눈꼴 시릴 정도로 딱 달라붙어서 뒤뚱뒤뚱 걸어가던 두 사람이 또 다른 검은색의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여주를 벽에 붙여 세워놓은 민형이 문을 통통 두드려보다 손에 힘을 줘 문을 그대로 후려갈겼다. 정말 무식한 힘이구나……. 벽에 붙은 채로 멍하니 생각하던 여주는 다시 민형이 챙겼다.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여주가 중얼거리며 민형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서재라기엔 책장에 들어가 있는 책들의 수가 빈약하다. 기다란 책상 위에는 뒤통수가 툭 튀어나온 유물 급의 컴퓨터 세 대가 나란히 설치되어있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필름 카메라부터 시작해서 이런 뚱땡이 컴퓨터까지 쓰다니. 안승재는 70년 전, 즉 202X년대를 무슨 7080 시대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짱구의 어른 제국의 역습도 아니고, 안승재의 7080 제국의 역습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조합이람.


처음으로 되돌아갈 거라느니, 뭐라느니- 속 빈 강정 같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더니, 대체 사전 조사를 어떻게 했길래 이딴 괴상한 짓을…




“여주, 여주.”

“어엉?”




속으로 쉴 새 없이 투덜거리고 있던 여주가 민형의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컴퓨터 아냐?”

“어, 맞아. 컴퓨터.”


“근데 왜 전원 버튼이 없어? 이거 전원 버튼 아니야?”




민형이 뚱뚱한 컴퓨터 모니터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여주는 볼을 긁적이다 책상 밑에 설치된 컴퓨터 본체의 버튼을 발끝으로 꾸욱 하고 눌렀다. 그러자 위잉- 소리를 내며 모니터가 켜졌다.




“오옹, 신기하다.”

“신기할 것도 많다.”

“여주도 과거에선 이런 컴퓨터 썼어?”

“이게 뭔 소리야… 아니거든? 나도 뒤통수 납작한 올인원 컴퓨터 쓰고 노트북도 썼어! 졸라 얇고 납작한 거!”

“아, 그래?”

“나 때도 스마트폰 있고 태블릿도 있고 다 있었어!”

“오옹… 알았어, 진정해…….”

“나 때는 스마트폰이 접히기도 했다고!”

“오옹…….”

“나 때는 말이야!”




민형은 고래고래 소리치는 여주를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그는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개꼰대 여주에게 “나 때는!” 소리만 오조오억번 들었다.
































“─네. 네. 아, 옛날에 쓰던 PC 말하는 거죠? 뒤에 볼록하고, 본체 따로 있는. …네, 괜찮아요. 다룰 수 있어요. 네. 네? 뭐요? 라떼요?”




야나는 이어폰에 대고 뭐라 말하고 있는 태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중간중간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연락하는 상대가 여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일과 함께 있으면서 그가 여주를 선생님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덕이다.


작은 손을 꼬물꼬물 움직이던 야나는 품에 안고 있던 쇼핑백 안에서 자신이 챙겼던 가방을 꺼내 들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빵빵한 가방은 다시 지퍼를 여는 것도 힘들었다. 낑낑거리며 지퍼를 열고 가방 안에 들어가 있던 물건을 하나씩 꺼냈다.


잔뜩 구겨진 채 가방에 쑤셔 넣어놨던 옷은 팡팡 펴서 다시 접어 쇼핑백 안으로 집어넣었고, 어렵사리 가방에 넣어놨었던 액자는 옷으로 꼼꼼히 문질러 닦은 뒤 마찬가지로 다시 쇼핑백 안에 쏙 집어넣었다.


가방 안에 남은 물건은 이제 여주와 함께 만들었던 동그란 실링 왁스 조각들뿐이다. 야나는 가지각색의 무늬가 찍힌 색색의 실링 왁스를 하나하나 꺼내 침대 위에 일렬로 쪼르륵 올려놓았다.




“이거는 백조고, 이게 독수리… 이건 월계관이래요.”

“…….”

“이건 장미고, 이건 돌고래, 이건 소나무. 나비는 언니가 신선나비? 같다고 했어요. 무늬가 똑같대요.”

“…….”

“이거 전부 선물 받은 거랬는데…….”




가방에 넣어놨던 탓에 조금씩 구부러진 실링 왁스들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평평하게 펼친 야나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가 준 거죠?”




그 물음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여닫던 이가 말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야나가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슥슥 비볐다.




“언니가 그랬어요. 언니가 올 때까지 오빠 옆에 있어 주라고.”

“…….”

“이제 일어났으니까, 언니한테 갈 거예요?”




두 번째 질문이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래.” 하고 아까와 똑같은 대답을 건넸다.


별것도 없는 아주 짧은 대답이었지만, 야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여주를 무사히 데리고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음, 음. 중요한 떡밥 하나 넣어놨구용.

그게 뭔지는 안 알려드릴거예용

후훗😎


그리고 공교육의 부재.. 이게, 글에서도 몇 번 나왔지만...

정부의 역할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승재도 그렇고, 이종호나 이미호나.. 뭐 여태 나왔던 빌런들도 전부 크게 보면 국가가 만들어낸 가해자들이라고 볼 수 있지요..!


물론 면죄부는 절대 될 수 없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안 그러는 보통의 선한 사람들(글 자체가 센터 위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주제가 되다 보니 생략이 되어서 그렇지, 차별 안 하는 사람들이 훨 많아요!)이 훨씬 더 많으니까!


다만 저런 소수의 사상범들 같은 경우에는 국가가 빌미 정도는 제공 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 의도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됐으면 어쩌나 싶어 구구절절 사담으로 남깁니다..ㅜ

이어지는 내용이 궁금하세요? 포스트를 구매하고 이어지는 내용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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