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에릭 렌셔(매그니토)/찰스 자비에(프로페서 x)

Rating: R



상류층으로 태어났다는 특권은 때로 그에 대한 의무를 요구하곤 한다.

찰스의 어머니는 사교계의 명망있는 귀부인이자 유력한 자선사업가였다. 그녀는 찰스가 홀로 집에 남겨져 있던 어린시절 내내 주로 바자회행사나 자선파티로 요약할 수 있는 사회활동에 몰두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빈민가의 바짝 마른 고아들이나 교육받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 가엾은 미혼모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상류층의 귀부인으로서 행해야 할 바른 몸가짐을 우아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지켜나갔을 뿐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상류층이 그랬다. 그들에게 자선사업이란 일종의 에티켓에 가까웠다. 그들은 그것을 품위있는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상한 의무쯤으로 여겼고, 몇몇 의식있는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실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실상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찰스 자비에가 상류층의 자선행사에 별다른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쓸모없는 행사에 참석해 돈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명망있는 사회재단이나 일선구호기관에 직접 기부 하는 편을 선호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때로는 주위를 둘러싼 사회적 압력에 굴복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안녕하세요. 매들린 부인.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찰스는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무대 뒤에서 행사를 감독하고 있는 매들린 부인을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구이며, 현재는 그녀의 이름을 딴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우아한 귀부인 헬렌 매들린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찰스. 오랫만이구나. 너는 어쩌면 이렇게 점점 더 미남이 되어가니?"

몸을 돌린 매들린 부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한 찰스와 시선을 마주치곤 흠칫 놀랐다. 휠체어에 앉은 그가 서 있는 그녀보다 시선이 낮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굳이 텔레파시스트가 아니라도,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스쳐지나간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았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혀 찰스의 양쪽 뺨에 입맞춤을 했다. 익숙한 오드 뚜왈렛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머니가 즐겨쓰시던 낯익은 장미향이었다.

"별 말씀을요. 행사가 아주 멋진데요, 부인." 

"그러니? 그렇게 봐주니 기쁘구나. 하지만 나 혼자선 아무리 노력해도 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만큼 근사한 파티를 열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녀가 여는 파티들은 정말 특별했지..... 넌 요즘 어떻게 지내니? 영국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학위를 땄다면서?"

"예. 고향으로 돌아가 특수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어요. 아무래도 가르치는 일이 제 적성에 맞나봐요."

"그렇겠지. 넌 언제나 똑똑했으니까."

학위를 딴 건 소위말하는 '사고'를 당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위험할 수도 있는 화제는 피해가며 말하기 쉬운 소재로만 그를 유도했다. 찰스는 내심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그녀와의 대화에 동참했다. 만약 이 행사가 그의 어머니 이름으로 치뤄지는 것만 아니었다면, 혹은 이 행사의 주체가 가족의 오랜 친구인 매들린 부인만 아니었다면 그는 이번에도 초대장을 무시한채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 행사는 무시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초대 중에 하나였고 자신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사교계에 어떤 소문이 돌게 될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터라 참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본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계속해서 은둔한다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될 게 뻔했다. 그는 젊고 부유한데다 어마어마한 명망을 가진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다. 찰스는 자신을 제 2의 하워드 휴즈쯤으로 부풀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을 경계했다. 세상 전체에 자신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가면을 유지하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었다.

"참. 찰스. 네가 오면 부탁할 게 있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깜빡하고 말았구나. 오늘 기획했던 중요 이벤트에 갑작스러운 결원이 생겼어. 정해진 인원이 꼭 필요한데 초대되셨던 신사분들 중 한 분이 급한 사업상의 볼 일 때문에 오늘 아침 유럽으로 가셨다는구나. 네가 그 분의 빈 자리를 채워줬으면 하는데 어떠니. 날 좀 도와주겠니?"

찰스는 매들린 부인과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의 시간만 그녀에게 할애한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물러날 방법을 궁리하며 휠체어 바퀴에 손을 얹었다. 허나 그보다 먼저 매들린 부인이 말을 던져왔다. 다소 느닷없다고까지 여겨지는 난데없는 부탁에 대충 얼굴만 비추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던 찰스는 곤란한 기색을 감춘채 미소를 지었다.

"제가요? 글쎄요.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란다. 그냥 5분쯤, 무대에 서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

"무대에요?"

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매들린 부인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잠시 멈칫했던 찰스는 그녀의 의도를 읽고나서 자기도 모르게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오 맙소사. 안돼요 부인. 저에게 대체 뭘 시키시려는 겁니까? 

"잠깐만요, 부인. 저는-."

"독신자 경매에 나가주렴, 찰스. 잔뜩 기대하고 온 죄없는 아가씨들을 실망시켜선 안돼잖니."

매들린 부인은 온화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찰스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다. 찰스는 자기 머리 위에 리틀 보이와 팻맨이 동시에 떨어진 것같은 충격을 느끼며 입을 딱 벌렸다.



찰스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대단히 노력했다. 

그는 그녀가 나름대로는 좋은 의도로 그런 일을 꾸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펼쳐진 책처럼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찰스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엾게도. 이렇게 좋은 청년이 사고 이후 은둔하다시피하고 있다니. 이 애 어머니가 이 꼴을 봤으면 그냥 놔두진 않았을거야.'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 대해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찰스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찰스를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하반신을 마비시킨 사고로 인해 마음이 위축된 채 세상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가엾은 청년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찰스는 그녀가 자신에게 집안 좋은 사교계 아가씨와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이번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류층의 귀부인다운 고상한 음모였지만 찰스는 골치가 아팠다. 그녀는 상냥하지만 순진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에릭, 이것봐. 자네가 나를 놀리던 순진한 낙천주의에 이젠 내가 당하는군? 찰스는 어떤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본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매들린 부인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정신 조작에 대한 충동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평생동안 그를 알아온 사람에게 할 만한 짓은 아니다. 곤란하게 미간을 문지르고 있던 찰스는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이 착한 부인에게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잠시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이후의 간섭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요. 큰 도움은 못드리겠지만 무대에 서는 것까지는 해드리겠습니다."

찰스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처럼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하지만 매들린 부인은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얼른 반색했다.

"고집을 꺾어줘서 다행이구나. 네가 끝까지 거절하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단다. 남자들이란 이런 일에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는지. 네 이름이 적힌 카드를 진행자에게 전해주고 올테니 기다리렴. 독신자 경매는 십분 후부터 시작될 거야."

그녀는 기쁨에 찬 얼굴로 찰스의 뺨에 키스를 하곤 무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작은 클러치 백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던 네임카드가 나왔다는 사실도 찰스에겐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다가 근처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방금 전에 찰스와 매들린 부인이 벌인 실랑이를 고스란히 구경했는지 동정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신자 경매는 금세 시작되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찰스와 가볍게 인사를 하며 안면을 트게 된 남자들이 차례차례 밖으로 불려나가 값을 매겨졌다. 독신자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그와 같은 대학을 나온 테니스 선수도 있었고 장래를 촉망받는 웨스트 포인트 출신도 있었으며 각각 다른 주의 면허를 가진 변호사들도 있었다.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독신자는 나사에서 우주비행훈련을 하고 있다는 젊은 공군장교였다. 그는 무려 천오백달러나 되는 돈에 팔려나갔다. 아가씨들은 열광적으로 경매에 동참했고 분위기는 순조롭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찰스는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대 밖에서 흥분에 찬 목소리들이 소근소근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마지막 무대는 그날의 클라이막스였다. 일반적인 경매가 그러하듯, 독신자 경매도 마지막 순간에 가장 값어치 있는 물건이 등장한다. 이번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과 경우가 달랐지만 바깥의 참여자들이 그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찰스는 휠체어를 밀고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 머리 위로 핀 포인트 조명이 따갑게 쏟아졌다. 웅성거리던 아가씨들의 시선이 하나 둘 그에게로 모였다. 사회자는 미리 건네받은 네임카드를 보고 그를 소개했다.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전공학에 대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촉망받는 젊은 학자입니다. 자비에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고, 자비에-매들린 재단의 최대 기부자이기도 하시죠. 경매는 50달러부터 시작합니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사그러들었다. 분위기는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당황한 아가씨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대로였다. 매들린 여사는 자비에 가문의 상속인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단점을 커버해주리라고 믿는 눈치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행사는 가벼운 이벤트였고 참석자들이 경매에서 원하는 것은 멋진 남성과의 즐거운 데이트지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아니었다. 찰스는 겁먹은 그녀들에게 가벼운 동정심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에게 내려질 처분을 기다렸다. 잠시 동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후, 양심과의 싸움에서 지고 만 한 얌전한 아가씨가 소심하게 손을 들어 입찰 의사를 밝혔다. 

"55달러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착한 아가씨였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듯 앳되보이는 얼굴은 고작 레이븐 또래로 보였다. 조금 뒤 방의 반대편에서 또다른 아가씨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그 후 여기 저기에서 그들과 비슷한 양상을 띈 아가씨들이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세상엔 선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찰스는 그에게 예의바르게 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가씨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감사한 동시에 곤란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입찰가가 올라가다가 액수가 번듯해지면 매들린 부인의 착각을 정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105달러 부를께요." 

"110달러요."

점점 올라가는 액수를 듣고 있던 찰스는 웃는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지금이라도 정신조작을 발휘해볼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고려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절반 정도에 달하는 가격이라면 매들린 부인을 설득하기에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500달러."

헌데 그때 갑자기 방 한구석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찰스는 뜻하지 않은 목소리을 알아듣고 크게 놀라 그 쪽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조명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빛에 눈이 적응되기가 무섭게, 그의 눈은 파티 홀 뒤쪽의기둥에 몸을 기댄 남자의 모습을 찾아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익숙한 미소가 상대의 입가에 어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쓰리피스 정장에 질 좋은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는 벌써 몇달이나 보지 못했던 그의 옛 친구다. 보기 흉한 헬멧이나 끔찍하게 싫어하는 망토도 없이 전형적인 상류층의 신사처럼 차려입은 그는 믿을 수 없을만큼 섹시하고 근사해보였다. 찰스는 이 자리에 나타난 그의 존재 자체를 믿을 수 없어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뭐하는 거야, 에릭. 여긴 어떻게 왔어?

-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길래 소문 듣고 왔지. 

뭐라고?! 찰스는 그에게 대꾸하기도 전에, 에릭의 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레이븐을 발견하곤 이마를 짚었다. 잠깐. 레이븐은 또 어떻게 온거야? 너희들 여기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데? 그는 다급히 텔레파시로 질문을 던졌지만 에릭은 대답하지 않고 싱긋 웃을 뿐이었다.

난데없이 남자가, 그것도 에릭처럼 근사한 남자가 500달러나 되는 금액으로 입찰가를 올려버리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에릭은 뻔뻔하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들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사회자는 갑작스럽게 다섯배로 뛰어버린 입찰가에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진행을 계속해갔다.

"저 멋진 신사분이 500달러를 부르셨군요. 재밌게도 이 경매는 여성분들에게만 한정된다는 조항이 없습니다. 그럼 510달러 가겠습니다. 510. 510달러 없으십니까?"

더이상 입찰가가 오르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사회자는 대강 그 정도로 경매를 마무리 지으려는 듯 마무리 멘트를 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처음 입찰을 시작했던 아가씨가 어딘지 초조한 태도로 급하게 입을 열었다. 

"520이요. 520."

"520 나왔습니다."

"700."

"7..700 나왔습니다."

"750!"

이번엔 또다른 아가씨가 소리쳤다. 그 아가씨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새빨갰고, 용기 있게 움켜쥔 주먹은 무슨 결의 같은 걸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찰스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1000."

"1100!"

"1500."

"1..1600!!"

"2000."

중간 중간, 다른 아가씨들이 참전을 시도했지만 돈의 단위를 터무니없이 올려버리는 무심한 에릭의 입찰에 처절히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입찰가가 2000달러에 이르자 더이상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아가씨들은 무슨 필생의 적을 보는 것처럼 에릭을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왜들 그러는 거야? 잠깐, 2000이라고?? 본인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결과에 아연해져있던 찰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파악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에릭이 자기를 구해주기 위해, 혹은 체면을 세워주려고 큰돈을 쓰는 건 이해못할 바가 아니지만 문제는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아가씨들이다. 찰스는 저 아가씨들이 어째서 저렇게 경매에 필사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을 읽어보면 간단히 알게 되겠지만, 이런 사소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은 지나친 일 같아서 찰스는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그저 속으로 눌러 삼키기만 할 뿐이었다. 

"찰스 프랜시스 자비에님. 역대 최고가인 2000달러에 낙찰되셨습니다!"

사회자가 신나게 낙찰 선언을 했다. 마지못한 박수소리를 들으며 에릭은 성큼성큼 걸어와 무대 아래에 섰다. 빙둘러선 내리막을 따라 무대 아래로 내려간 찰스는 눈쌀을 찌푸리며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에릭은 팔짱을 끼고 웃으며 찰스에게 말했다.

"2000달러라고? 생각보다 싸게 먹혔는 걸."

그의 태도는 마치 헤어지기 전처럼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몇 달 전, 그의 병실을 찾아와 말없이 뜨거운 눈물만 쏟아내다 떠난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천연덕스러움이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휠체어에 손을 대자, 찰스는 그 손을 쳐냈다. 하지만 에릭은 능력을 사용해 찰스의 휠체어가 자신의 앞으로 오도록 휙 돌려버렸고 태연하게 손잡이를 잡은 후 사람들을 피해 정원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찰스는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화들짝 놀라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장난치지 마, 에릭.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사람들의 무리가 점점 줄어들고 공들여 꾸민 매들린 부인의 온실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꾸민듯한 웃음소리와 관현악단의 연주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에릭은 잘 닦여진 대리석 길위로 휠체어를 밀고 나가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자넬 스토킹 한 건 아니니 안심해. 사업상의 일로 초대받아 온 거야."

"사업이라고?" 

그가 못미덥다는 듯 되묻자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업. 왜? 이상해? 뮤턴트도 먹어야 살지. 정부와는 등졌고 자네 신세를 질 수도 없으니 누군가는 일을 해야할 거 아냐."

"합법적인 일인가?"

"아니라면? 막을 건가?"

에릭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찰스는 그 물음에 선뜻 대답 하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이후 에릭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에겐 합법적인 신분도 없었고, 제도권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든 살아남은 것 자체를 비난하기엔 그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달랐다.

"걱정하지 마. 지금같은 상황에 섣부른 짓으로 정부의 주목을 살 생각은 없어. 내 사업은 대부분 합법적이야. 작은 편법을 사용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기업가의 수준에서 본다면 꽤나 양심적인 수준일걸." 

찰스는 위선보단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잠시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에릭은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며 사정을 설명하더니 물을 뿜어내고 있는 분수가로 다가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찰스는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해안에서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병실에서 그렇게 재회했었는데.... 그 후 처음 만난 에릭과 자신이 이토록 평온하게 마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이상할 정도로 동요가 없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표면처럼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에릭은 찰스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찰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못내 궁금했지만 그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헬멧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에릭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단 잘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군." 

찰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잠깐 확인한 것에 불과하지만 레이븐도 괜찮아 보였다. 찰스는 자신의 꼬마 여동생이 근처에 있을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습을 감췄는지 주위는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레이븐은?"

"그 앤 아직 마음 정리가 덜되서 자네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봐. 날 따라오긴 했지만 방황을 많이 하는 것 같더군."

찰스는 말없이 웃었다. 그의 조용한 웃음결에는 말못할 그리움과 서운함이 넌지시 배어있었다.

"헌데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된 거야?"

찰스가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에릭이 불쑥 엉뚱한 것을 물었다. 그가 뭐에 대해 질문하는지를 알아차린 찰스는 당황스레 눈쌀을 찌푸리며 변명처럼 말했다.

"참견하길 좋아하는 상냥한 아주머님과 엮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재난이라고 보면 돼. 자네 아니었으면 죄없는 아가씨 하나가 희생양이 됐을거야. 그 점에 대해선 자네에게 감사해야겠군. 어찌되었든 자네 덕분에 나뿐만 아니라 이름모를 아가씨 하나도 봉변을 모면했으니까."

"글쎄. 과연 그럴까?"

"뭐라고?"

찰스가 의미를 모르고 되물었지만 에릭은 대답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그의 찰스. 언제나 상냥하고 배려심 깊으며, 인간의 도덕률을 형상화시킨 것만 같은 그의 친구에게도 한가지 단점이 존재했다. 그는 겉보기완 다르게 은근히 눈치가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이나 태도에 상대적으로 무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건지도 모른다.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에게 수면 위의 움직임이 별달리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찰스가 어떤 착각을 하든 에릭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미스틱에게서 찰스가 경매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홀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단체로 수줍어하는 기백명의 아가씨들이 치열한 눈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웃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녀들은 드세다던가 혹은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내숭을 떨면서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적당한 시간을 두고 끈질기게 올라가는 소액의 액수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에릭은 무대 위에 상품처럼 올려진 찰스를 보고 그녀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무슨 낭만주의 시대의 폐병걸린 시인 나부랭이처럼 보이는군.' 

온화하면서도 고독한, 수심어린 찰스의 모습은 꿈많은 처녀들에게 확실히 어필되고 있는 듯 했다. 병약해진 낯색이 오히려 이지적인 분위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미소짓고 있지만 어딘가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눈동자는 마치 꿈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릭은 몇 몇 여자들-여자라고 하기보단 소녀에 가까운 어린 것들이 그 모습을 보고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는 광경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방금 한 말 무슨 뜻이야?"

"고마워 할 것 전혀 없다는 이야기야. 어차피 공짜로 해주는 일도 아니니까."

딱히 그녀들을 위해 찰스의 오해를 정정해줄 의무를 느끼지 못한 에릭은 대충 얼버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간에 생긴 골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낀 찰스는 에릭을 미심쩍게 노려보았다. 

"경매비용을 갚아달라는 뜻이라면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네만......내가 보기에 자네가 바라는 건 그런게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바로 맞췄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데이트."

"데.......뭐?!"

무심결에 에릭이 했던 말을 따라하던 찰스는 뒤늦게 그가 내뱉은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는 어이없는 눈초리로 에릭을 바라보았지만 에릭은 그저 미소짓기만 할 뿐 자신의 제안을 철회할 마음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전혀."

"자네랑, 내가 데이트라고?"

"그래."

"어째서?"

"방금 전에 내가 2000달러짜리 수표를 어떤 재단에 기부했더니 그 재단에서 자네와 데이트할 권리를 나에게 양도했거든. 여기 보증서라는 것도 주던데 한번 읽어보겠나?"

에릭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비에-매들린 재단의 스탬프가 찍힌 황금색 봉투를 슬쩍 보여주며 말했다. 찰스는 그 봉투가 소위 말하는 '데이트 교환권'이 들어있는 봉투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기가 보증서의 대상이 된 적은 없지만, 어머니를 대신해 보증서를 대필한 적이 몇번이나 있기에 그 내용이 어떻다는 것도 모르진 않았다. 손도 빠르지. 언제 저것까지 챙겨왔을까? 찰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에릭을 바라보았다. 에릭은 다시 주머니 깊숙히 봉투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묻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이래? 난 자네가 내게 이러는 의도가 뭔지 궁금하다는 거야."

"자네가 진짜로 알고 싶었다면 벌써 내 속내를 읽었겠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내 입으로 말하길 기다리겠다는 건데, 이왕 기다리는 김에 좀 더 인내심을 가져보는 건 어때? 내일 아침 9시까지 자네가 거처로 찾아가지. 자네가 지금 묵고 있는 곳이 어딘지 내게 가르쳐 주겠나?"

"에릭!"

"가르쳐 주기 싫어? 그럼 내가 수고를 좀 하는 수 밖에 없겠군. 그럼 내일 아침에 봐. 난 십분 후에 중요한 고객과의 미팅이 있어.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위해 형편없는 솜씨를 가진 그 댁 아드님의 그림을 사줘야하거든."

일방적으로 자기가 할 말만을 마친 에릭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떠나버렸다. 찰스는 분통이 터졌다. 사업을 한다더니 어디서 저런 뻔뻔함만 배워온 모양이다. 정신조작은안돼정신조작은안돼아무리그래도친구에게정신조작은안돼. 주문처럼 같은 말을 되뇌며 치밀어 오르는 욕구를 간신히 참아낸 찰스는 한숨을 쉬며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 모든 게 매들린 부인의 참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 상냥한 부인이 참을 수 없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



다음날, 아침 아홉시가 되자 찰스가 묵고 있는 객실엔 정말로 방문자가 찾아왔다. 

그는 혹시나 하고 문을 열었다 예상 그대로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공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여행길을 수행하겠다던 학생들을 만류했던게 이제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애들이 지금 이 꼴을 봤으면 변명할 말이 없었을 거다. 아침부터 꽃을 들고 찾아온 에릭에 대해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그가 가져온 꽃은 부끄러울 정도로 새빨간 장미꽃이었다.

"장미꽃이라고?"

찰스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선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회의적인 물음에 에릭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고전적인게 좋잖아. 아름답기도 하고."

그 대답에 찰스는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에릭의 선물이 거대한 꽃다발이 아니라 딱 한송이 뿐이라는 점이었다. 마지못해 감사의 인사를 건넨 찰스는 장미꽃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에릭이 그의 무드없는 행동을 막아섰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장미꽃을 들어 거추장스러운 꽃잎 몇 개와 가시를 제거하고는 자기 손으로 직접 찰스의 옷깃에 꽂아 주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가슴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요하다면 날아가는 비행기를 추락시킬수도. 혹은 거대한 항공모함을 침몰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손이지만, 조심스럽게 장미꽃을 다루는 모습은 그보다 더 어울렸다. '고전적인게 좋아. 아름답기도 하고.' 찰스는 방금 전 에릭이 했던 말과 똑같은 감상을 품으며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라도 챈 것처럼 에릭이 찰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황금빛 속눈썹에 둘러쌓인 신비한 눈동자에 똑바로 응시당한 찰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말을 대신했다. 

그들은 플라자 호텔의 1층으로 내려가 로비로 나섰다. 어차피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찰스는 에릭에게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헌데 에릭은 그를 롤스로이스 리무진 앞으로 데려갔다. 운전사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소용돌이 능력을 사용하는 뮤턴트-제길. 찰스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였지만, 여느 상류층 집안의 운전사들처럼 번듯한 제복을 차려입고 있어 첫눈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밖에서도 근사했지만 차 안은 더욱 화려했다. 어려서부터 사치품에 길들여진 찰스의 안목으로 보기에도 모든 것이 최고급품이었다. 

".......어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자네가 하고 있다는 '사업'이라는 게 정확히 뭐야?"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의 처지를 빤히 알고 있는 찰스는 다시금 머리를 드는 불안감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용히 물었다. 팔걸이 아래 마련된 아이스박스에서 샴페인을 꺼내 잔에 따를 준비를 하고 있던 에릭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자네에게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 있던가?"

"아니."

"내 아버지는 금세공인이셨어. 한시적이나마 가업을 이었지."

"금세공인?"

"금세공, 보석거래, 감정.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지. 귀금속은 언제나 돈이 되니까."

굳이 읽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다. 찰스는 순간적으로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광경들에 미간을 찌푸렸다. 철십자 문장을 단 나치 금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게 보였다. 고풍스러운 세공의 옛 보석들이 가득 차 있는 상자도 보인다. 창고에 차곡차곡 겹쳐진 몇 몇 그림들은 나치에 의해 도난당했다고 일컬어졌던 문화적 유산들이다. 지끈 두통이 인 찰스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맙소사. 세바스찬 쇼어가 나치 보물선이라도 남겼던 거야?"

"이런, 찰스. 내 신뢰를 배신하지 마. 내 머릿속을 함부로 읽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어."

"일부러 읽으라는 듯 펼쳐보였던 건 자네잖아!"

"자네가 어디까지 호기심을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본 것 뿐이야. 내 사업수단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아서 안심도 시켜주고 싶었고."

그는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찰스에게 권했다. 샴페인?



리무진이 도착한 곳은 뉴욕항 외곽에 위치한 한 개인 항구였다. 일반적인 요트 클럽들에 비해 한적하지만 훨씬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개인항구는 기이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찰스는 에릭의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린 후 앞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그의 머릿속에 온갓 복잡한 상념이 휘몰아쳤다. 따뜻한 바닷바람이 기껏 손질한 앞머리를 헝크러트리고 지나간다. 찰스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가능한 온건한 어투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혹을 토로하려고 애썼다. 

"......내게 원하는게 정확히 뭐야, 에릭? 내가 자네를 어느 정도로 신뢰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어? 아니면 그냥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가 궁금한거야?"

"자네의 조그만 머릿속에 이토록 큰 의심과 불신을 심어준 자가 누군지 엄청나게 궁금해지는군. 두 개 다 한 번 알아보고 싶긴 한데 섭섭하게도 오늘 일정엔 포함이 안돼."

에릭은 부둣가로 찰스의 휠체어를 밀어 옮기며 가볍게 대꾸했다. 화이트 퀸 호. 누군가가 명백히 떠오르는 이름을 가진 요트는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를 내보이며 선착장 끄트머리에 정박돼 있었다.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배의 측면엔 쇠로 된 디딤판이 놓여 있다. 찰스를 그곳으로 데려간 에릭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휠체어를 굴려 갑판 위으로 밀어 올렸다. 동의조차 구하지 않는 그 태도에 찰스가 불만스럽게 그를 돌아 보자, 그는 가만히 웃으며 찰스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무작정 겁먹지 말고 스캔이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 이 안엔 자네를 제외하곤 정신능력자가 아무도 없어. 원한다면 언제든 배를 돌려 돌아올 수 있으니 안심해도 돼."

"날 불안하게 만드는 건 육체적인 고립이 아니라 자네의 의도야. 자네를 믿기 때문에 여기까지 같이 오긴 했지만, 에릭. 이건 너무 심하잖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자네의 행동에 특정한 목적성이 느껴져. 난 그게 뭔지 알아야겠어."

"알고 싶다면 나를 읽어. 그게 자네 특기인 걸로 아는데."

"이제껏 내가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춰왔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난 지금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니야."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읽어 찰스."

"자네..."

에릭이 미소짓는 얼굴로 강압하자,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찰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즉시 에릭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가 찰스의 머릿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새하얀 요트의 갑판 위, 폭신한 타월을 깔아놓은 선배드 위에 몸을 누이고 있는 자신의 영상이 보였다. 에릭은 그의 벌어진 다리사이에 앉아 허벅지에 걸린 수영복 위로 진지하게 블로우 잡을 해주고 있었다. 놀란 찰스가 눈을 깜빡거렸을 때 장면은 다시 바뀌었다. 그들은 햇살로 따듯하게 달궈진 바닷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은밀한 곳에 느껴지는 찰랑거리는 물결의 느낌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적나라할 정도로 딱딱해진 에릭의 성기가 찰스의 물건에 맞닿아 있었다. 뜨겁게 고동치는 그것이 쿡쿡 찌르듯 자신을 자극해 오는게 너무나도 선명해서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올 뻔한 신음을 힘겹게 눌러참았다.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흘러내리기 직전의 수영복 팬티를 움켜쥐고 깔깔 웃으며 요트의 좁은 복도 위를 내달리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에릭은 그 뒤를 웃으면서 쫓아오고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쫓기다 요트 중앙에 마련된 침실로 몰려 짐짓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에릭은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그런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점프하듯 뛰어올라 찰스를 낚아채 침대 위로 뒹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십대들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투닥대다 서로에게 진한 흔적을 남기며 발가락으로 젖은 시트를 밀어 내기 시작했다. 적나라한 자신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찰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런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홍당무처럼 볼이 붉어진 찰스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화들짝 연결을 끊었다. 그러는 동안 무사히 갑판 위로 그의 휠체어를 끌어 올린 에릭은 기다리고 있던 아자젤에게 신호해 배를 출항시켰다. 눈가가 불그스레하게 물든 찰스는 시선을 바로하지 못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다 에릭을 불렀다. 에릭은 그를 그늘진 파라솔 아래로 데려가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에릭."

"왜?"

"내게 그, 그런 걸 바라는 거라면... 세상에, 이 친구야. 우리가 그랬던 건, 그것도 한번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술 때문이었어."

"그건 자네 입장이었지. 이제와 이야기 하는 거지만 그때 내 의견은 자네완 상당히 달랐네.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는 힘을 사용해 찰스의 휠체어가 배의 요동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켜주고는 그의 맞은편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처음 보는 낯선 청년 하나가 그들에게 간단한 카르파쵸와 백포도주 따위를 서빙해주고 배 뒤편으로 사라졌다. 찰스는 그도 뮤턴트란 사실을 깨달았다. 브라더 후드를 성립한 이후 에릭은 주변에 인간을 전혀 배제한 채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올바르다곤 할 수 없지만 불행히도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삶 역시 에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 앞의 술잔만 만지작 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건 없어. 자넬 뭘 어찌해보고자 여기까지 데려온 건 절대 아니니까."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를 돌려넣은 후 별다른 힘을 쓰지 않고 간단하게 마개를 뽑은 에릭은 찰스의 잔에 백포도주를 따라주며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예전과는 달리 이런 일상적인 일에도 능숙하게 힘을 사용하는 에릭의 모습은 더할나위없이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자잘한 힘의 조절이 그의 숙련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러지 말고 우리 다시 대화나 하는 것은 어떨까? 에릭은 뻣뻣하게 굳은 찰스를 풀어주려는 듯, 민망할 정도로 의례적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어떨거 같은가? 자네도, 레이븐도, 심지어 모이라마저 없는 내 삶이라는 게? 딱히 감정적인 부분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대답은 그런 것이다. 찰스는 열없이 웃으며 그의 노력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자네가 있을 때와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새로운 교수안을 작성하고. 아이들 간의 특성이 워낙에 판이하다보니 체계적인 교수법을 정립하기가 쉽지 않더군. 서재 안에 교육학 서가가 따로 생길 판이야."

"그것 말고."

자비에 스쿨의 학과과정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에릭이 매정한 반응을 보였다. 당혹스레 그를 보던 찰스는 곧 에릭이 무엇에 대해 묻고 있는지를 깨닫고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회복에 대해 묻는 거라면, 아니. 그렇진 못해. 영구적인 손상이라고 판정 받았다는 거 자네도 알잖아. 물리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근손실률을 줄이는 게 목적이지 치료 자체가 목적은 아니야."

그의 대답을 들은 에릭은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적으로 더이상의 치료를 포기했다는 데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그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의료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찰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는 생각 안해봤나? 현대의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난 유전학자야, 에릭. 행크는 유전학자인 동시에 의사이기도 하지. 우리 둘 다 찾을 수 있는 방법들은 다 찾아봤어. 심지어는 아직 신뢰성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의학실험의 보고서들까지 입수해봤지. 자네 말대로 현대 의학이 발전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치료가 될 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근 십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닐거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어."

"그래서 그냥 그렇게 관둘건가? 휠체어에 묶인 채로 평생을 살겠다고?"

"난 기약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좀 더 유용한 일을 하는데 내 인생을 투자하고 싶어. 그게 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화내지마...제발. 에릭. 화 내지마. 이건 자네가 화를 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나라고 고민없이 이런 결정을 내렸을리 없잖아. 최대한 고민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해 결정을 내린거야.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결정을 존중해주면 안되겠나?"

찰스는 말을 하다말고 지진이라도 나듯 주변이 떨리는 걸 느끼며 휠체어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에릭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자 주변의 금속들이 그에 반응해 제멋대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찰스는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붙잡으며 침착하게 달랬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에릭이 얼마나 큰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만큼이나 절박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할 유일한 존재다. 찰스는 방금 전 에릭의 머릿속에서 읽어냈던 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예전처럼 뛰고 달리고, 그를 위해 벌어지던 건강하던 자신의 두 다리를. 성적 환상 이상으로 그 이미지엔 에릭이 바라는 바가 담겨 있었다. 그 진심을 알기 때문에 찰스는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타인의 내면을 제것처럼 읽는 텔레파시스트란 이게 문제였다. 타인의 아픔조차 제것이나 다름없어서, 자신의 아픔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상대로군.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직접 들으니 짐작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엿 같은 걸."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찰스의 손밑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흔들리게 만들었던 그의 힘도 사라졌다. 잠시 심호흡하던 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날카롭게 웃었다. 

"현대의학으로 안된다면 뮤턴트는 찾아봤나? 세상엔 수없이 많은 종류의 능력을 가진 뮤턴트들이 존재해. 그들 중 누군가는 치료능력을 갖고 있을 수도 있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글쎄. 치료능력자라고?"

에릭의 조언을 들은 찰스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뮤턴트였고, 경이로운 일을 할 줄 아는 수많은 뮤턴트들을 만났지만 치료능력을 가진 뮤턴트란 발상은 무척 색다르게 느껴졌다.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아도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온 그의 뇌리엔 치료능력이란 신성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웃지? 찾긴 어렵겠지만 확률이 제로일 리는 없잖아. 더군다나 자네에겐 세레브로가 있어."

찰스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자 에릭은 다시 한번 의견을 강조했다.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그의 태도에 뒤늦게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찰스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맙소사, 에릭. 자네 혹시 치료능력자를 찾고 있는 중이야?"

에릭은 차갑게 웃으며 찰스의 질문을 정정했다.

"아니. 찾고 있는 중은 아니야. 이미 찾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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