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무언가에 떠밀리듯 돌아간 집이었다. 보쿠토는 도착한 그 순간부터 새벽이 깊어질 때 까지 내내 방문을 잠그고 누워 내내 숨만 쉬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다. 우주처럼 아득한 혼돈이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발끝은 낭떠러지다. 바닥이 보이지 않은 새카만 암흑. 밥도 먹지 않고 내내 누워만 있던 보쿠토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후쿠로다니 고등부 3학년. 등번호 4번. 절대적 에이스. 행복과 충만으로 가득한 이 방엔 아직 어렸던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 했다. 18살의 자신이 24살의 보쿠토를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어.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까. 망망대해에 던져진 듯 시간에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없다. 복귀는 할 수 있을까. 다시 배구가 즐거워질까. 그렇게 짜릿한 스파이크를 다시 칠 수 있을까. 보쿠토는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이쯤 되니 쥐가 날 것 같다. 게임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울까. 오래되어 낡은 컴퓨터지만 게임 하나쯤은 할 수 있을 거다. 보쿠토는 전원 버튼을 켰다. 삑, 가벼운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다.

“….”

곧바로 게임을 클릭하려던 손이 멈칫했다. 아름다운 벚꽃 사진으로 물든 화면엔 추억이 어지러이 산재되어 있었다. 이 사진을 기억한다. 고등부로 막 진학 했을 때, 그쪽 건물에서만 볼 수 있다던 커다란 벚나무를 찍은 거였다. 그 날 이후 졸업 할 때 까지 화면의 사진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그 당시 했던 학교 숙제. 독후감. 일기. 학교 신문을 만들기 위해 찾았던 자료.
커서가 폴더 하나 위를 내내 맴돈다. 클릭하면 무언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후쿠로다니 5회 여름 합숙!’ 그 안에 든 게 무언지 보지 않았으나 알 듯 했다. 저 안엔 빛나는 것들이 가득 있다. 눈이 부실 만큼 반짝거리는 게 가득하겠지. 보쿠토는 마른 침을 삼켰다. 갈증이 났다. 괜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열고 처박아둔 물을 마셨다. 미지근하고 비린내가 났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캄캄한 방에 화면만 분홍빛으로 밝았다. 보쿠토는 눈을 질끈 감고 클릭을 두 번 했다. 위잉, 기기가 돌아간다. 눈을 살며시 떴다. 깨알같은 사진들이 화면에 콕콕 박혀 있다. 보쿠토는 그 중 한장을 클릭했다. 사진이 화면 가득 찼다. 그 곳엔 그가 있었다.

열일곱의 아카아시 케이지가.

햇빛 아래에 서서 가볍게 웃기도 했고,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간식으로 나온 주먹밥을 먹느라 두 볼을 햄스터처럼 부풀리고 있었고 연습이 끝나고 난 뒤 더위를 식히겠다며 수돗가에서 벌어진 물총싸움에 휘말려 흠뻑 젖은 채로 어이가 없단 표정을 하고 있기도 했다. 어색한 브이를 그리기도 했고, 쿠로오와 어깨동무를 하기도 했고, 짧은 반바지를 입은 채로 코즈메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수박 껍질에 달라붙은 개미를 정신없이 보기도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보쿠토 코타로 역시 같이 있었다. 기분 탓인가. 열여덟의 저는 그의 옆에서 유독 더 밝았다.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의 저는 상상도 못 할 만큼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열여덟의 너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보쿠토의 탁한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옆을 향한다. 굵직한 팔에 거의 안기다 시피 한, 아카아시가 있었다. 귀 끝을, 조금 붉힌 채.

“어….”

모두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딱 한 장만 크기가 달랐다. 화질도 다른 걸 보니 휴대폰인 듯 했다. 사진 속 아카아시는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시간과 호흡 모두 그 안에 박제된 듯 살아 움직일 듯 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저를 보며 뭐 하십니까 보쿠토 선배? 하고 물어볼 것만 같았다.
속눈썹이 길다. 그는 참으로 잠이 많아서, 어딘가 머리가 닿으면 기절이라도 하듯 까무룩 잠에 빠지곤 했다. 그게 참 신기했다. 묻어두었던 또 다른 추억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잠깐 쉬자며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아카아시는 나무에 머리를 기대더니 눈을 감고 이내 짧고 달콤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랬다. 정말 신기해서. 그래서. 긴 속눈썹 위에 여름의 햇살이 내려앉은 게 너무도. …너무도.
홀린 듯 그 사진을 다운받아 지금 휴대폰 속에 저장했다. 저도 모르게 한 짓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시끄러울 정도로 쿵쾅거리는 소리에 보쿠토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도망치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컴퓨터가 괴물처럼 느껴졌다. 제 앞에 바싹 다가온 검고 어두운 무언가에게 지지 않겠다고 외치기라도 하듯 방의 전등을 켜고 책상과 서랍을 마구 뒤졌다. 열여덟의 보쿠토가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낙서를 잔뜩 한 교과서,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문제집, 한 귀퉁이가 다 낡은 노트. 쓰지도 않은 볼펜. 망가진 샤프.
숨을 거칠게 쉬었다. 손이 떨렸다. 여러 노트 중 가장 낡은 녀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건 기억에 남아 있다. 수학노트다. 저절로 아카아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낙제하면 곤란하다고요. 단정하고 까만 눈썹을 사붓이 찡그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함께 여기서 공부를 했었다. 앉은뱅이책상을 펴 놓고 머리를 맞댔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좀이 쑤신다며 노트에 끼적끼적 낙서를 하곤 했다. 아카아시는 언제나 가지런하게 수학 공식을 노트에 옮겼고, 보쿠토는 제 멋대로 노트에 계산식을 썼다. 처음엔 좀 반듯하게 공부를 하나 싶더니 조금 지나자 또 숫자가 엉망진창 춤을 추고 있다.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마구 휘갈겨 쓴 수학 풀이 사이에 적혀 있는 자그마한 낙서들.

‘아, 배구 하고 싶다.’
‘아카아시는 열심히 문제 풀고 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케이지.’

목이 멨다. 입술을 깨물었다. 바작, 소리를 내며 손에서 노트가 구겨졌다.

‘내 세터. 우리 세터. 후쿠로다니 넘버 원 세터.’
‘아, 케이지라고 불러보고 싶다.’

그리고 그게 못내 부끄러웠는지 그 옆에 뱅글뱅글 검은색 펜으로 직직 그어두듯 의미 없는 낙서를 한참이나 했다. 손이 노트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한참동안 수학 공식 풀이가 이어진다. 낙서하며 딴 짓 하는 걸 아카아시에게 들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2~3페이지 정도 더 공부한 흔적이 보였다. 보쿠토의 시선이 멈췄다. 정갈하고 깔끔하며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귀퉁이에 적혀 있었다. 그것도, 반대로. 보쿠토는 한참동안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시선이 위로 이동했다. 아예 노트를 뒤집어서 적었는지 이번엔 투박하고 각진 글씨체가 한참동안 이어진다. 집요하게, 이름만 적었다.

‘케이지.’
‘케이지.’

보쿠토가 황급히 노트를 덮었다. 손을 덜덜 떨며 눈을 덮었다. 미칠 것 같았다. 정말로 막다른 길이었다. 스멀스멀. 감정이 문을 두드렸다. 아니, 쾅쾅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렸다. 감정이 말을 한다. 너 다 알고 있잖아. 내가 누군지. 정체를 알면서 외면하고 있었잖아. 여태, 내내, 줄곧. 결국 보쿠토는 문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앞엔 열여덟 보쿠토 코타로가 서럽게 울며 서있었다. 네가 외면만 하지 않았어도. 네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으면. 네가 좀 더 강했다면. 아카아시 케이지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보쿠토는 두 손을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마음이 아프다고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가 좋았다. 그가 정말 좋았다. 그래서 그 감정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평소처럼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가도 문득,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 어떤 누구도 아카아시만큼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마치 비스킷 통 같았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 까진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거다. 아 저 안엔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가득할거야, 같이. 포장을 한다. 이 마음은 그저 후배를 좋아하는 거라고. 세뇌를 한다. 그저, 잘 맞는 후배가 나타나서 기쁠 뿐이라고.
왜였을까. 보쿠토 코타로의 진짜 모습은 겁쟁이이라는 것을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애써 선을 그었다. 억지로 선배와 후배 사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무서웠다. 미지의 감정이었다. 그걸 열어버리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보쿠토는 끝이 없는 두려움과 아득한 공포를 느꼈다. 아카아시라면 이해해줄거야. 아카아시라면 나를 알거야. 당연히 내가 원하는 관계로 남아 줄 거야. 아카아시니까. 아카아시도, 나를. 좋아, 하니까.
그랬던 그가 저를 사랑한다고 말 했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너무도 하찮고 얕은 것이었다. 열여덟의 저는 너무도 어리고 혼란에 빠져 있었고 여리고 약했다. 감정적으론 전혀 자라지 못했다. 그 두렵기 그지없는 감정을 확인하라 종용하는 아카아시 케이지가 미웠다. 왜, 이대로 지내면 안 돼?

왜?

보쿠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 * *







“코타로! 너, 운동 하는 애가 어디서 이렇게 술을…!”

어머니는 속상함이 가득한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고개만 까딱, 움직이곤 터덜터덜 2층 계단을 올랐다. 방문 앞에서 또 다시 열여덟의 보쿠토를 보았다. 원망하는 눈을 하는 그를 지나쳐 방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질질 흘러내린 후회와 미련과 그리움을 주워 담지도 못하고 멍청히 바라만 보았다. 보쿠토는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 앱에 들어가 한참동안 목록을 보았다. 맨 위에 코노하의 메시지가 있었다. 온갖 걱정과 염려와 짜증이 뒤범벅된 문자가 여러 개 와있다. 술 때문에 답장을 잊고 있었다. 보쿠토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오래 간다.

-야! 지금이 몇 시야, 어?! 하라는 답장은 안 하고 이 새끼가!
“…코노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코노하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야. 왜 그래. 어? 배구가 잘 안 돼? 많이 힘드냐? 보쿠토가 히죽 웃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내 친구. …친구야.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아카아시 번호 좀 가르쳐 줘….”
-…뭐?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번호 좀 가르쳐줘. 나 아카아시 번호가 없어. 넋두리처럼 보쿠토가 중얼거렸다. 코노하가 한숨을 쉬었다.

-없어.
“…왜?”

왜 없어? 왜!! 왜 없는데 왜! 보쿠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코노하가 작게 욕을 중얼거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가르쳐 줘, 왜 없다고 하는 건데? 지금 나 힘들다고. 아카아시가 필요하단 말이야. 코노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보쿠토를 달래 주지도 않았다.

-보쿠토, 잘 들어.

그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말을 내뱉을 뿐.

-아카아시가 졸업하면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연락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냐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더라. 하지만 그 애는 내가 알던 아카아시 케이지가 아닌 듯 했어. 그래서 왜 그러냐고 이유를 따져 묻지도 못 했다. 그저, 언젠가는 보쿠토 선배에게 전해질 거라는 듯한 뉘앙스로 말 하며 돌아서는 녀석의 등을 보고 있었을 뿐. 코노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흘렀다.

-그 뒤로 아카아시에게 연락 할 생각을 못 했어. 번호가 있긴 하지만 이제 녀석의 번호가 아닐 수도 있어.

우리들 중, 누구도 그 날 이후 아카아시와 만난 사람이 없으니까. 연락이 닿았다는 사람도 없고 말이지. 코노하가 말했다. 화내지도, 비난하지도 않는 어투였으나 그 어떤 말보다 아프게 보쿠토의 가슴을 후벼 팠다.

-너, 그 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슬럼프 때문에 선수생활 힘들어 하는 거, 우리 중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냐.

코노하의 목소리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없는 애 그만 찾고 이제 그만 자라. 늦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보쿠토는 휴대폰을 들고 한참 동안 눈만 껌벅거렸다. 마지막 친절이었을까. 코노하가 그의 휴대폰 번호를 보내주었다. 이 번호를 안 쓸지도 몰라. 계속 신호음은 가는데 받지는 않는다는 코노하의 말에도 괜찮았다. 희망은 있었으니까. 보쿠토는 그 번호를 소중하게 다시 저장했다. 아카아시 케이지, 라는 이름과 함께.

다음날 짐을 챙겨 다시 자취집으로 향했다. 걱정이 잔뜩 서려 있지만 차마 무어라 더 말 하지 못 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보쿠토는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이, 아카아시와 연락을 하면 다 진정 될 것 같았다. 그를 만나면. 그를….
하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보쿠토는 다시 술에 기댔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빨리 취하지도 않았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취하지 않아 허탈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 심호흡을 했다. 전화번호부를 열고 한참동안 액정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반짝, 그의 이름이 빛났다 사라진다.
그가 받으면 무슨 말 부터 할까. 잘 지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간단한 안부부터 시작할까. 그땐 내가 너무 심했지. 사과도 해야지. 내가 어리석고 바보라서. 그래서…. 보쿠토는 믿고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가 저를 떠났을 리가 없다고. 말은 하다 보면 정리 될 터였다. 언제는 자신이 무언가를 정리하면서 말 하던 사람이었나. 아카아시는 다 이해 해 줄 거다.
드디어 손가락이 번호를 눌렀다. 5년만의 전화였다. 신호음이 간다. 없는 번호라는 말을 한다. 그럴 리가 없다. 3년 동안 휴대폰번호는 커녕 기계조차 바꾸지 않았던 아카아시다. 그럴 리가 없었다. 보쿠토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니야. 계속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이것도 환청이 아닐까. 전부 환상은 아닐까.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너무 취해서 느끼지 못 하는 걸까. 전화를 잘못 건 것은 아닌가. 눌렀다. 누르고 또 눌렀다. 없는 번호였다.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휴대폰만 들고 있었다.

-나, 게이 아니라서. 너, 여태껏 나를 그런 눈으로 봤었던 거냐?

환청처럼, 그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 역시도. 보쿠토는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은 성가시다. 언제나 자기 좋을 대로 멋대로 바꾸어서 저장해버린다. 이제야 제대로 떠올랐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자신의 공포가. 두려움이, 아카아시에게 지우지 못 할 상처를 줬다.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방지고 역겨운 착각이었다.

“…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보쿠토가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쏟아냈다. 이젠, 두 번 다시 아카아시를 만날 수 없다. 모두 자신이 저지른 짓이다. 제 감정을 조금만 더 똑바로 바라봤다면. 무섭다고 피하지 않았다면. 혼란스럽다고 머리아프다고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런 배신감 따위 느끼지 않았다면. 그랬었다면. 보쿠토가 얼굴을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억눌린 흐느낌이 엉망으로 새어나왔다.
이제야 알았다.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늦어버렸다. 전부. 망가트려버리고 난 지금에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흐, 윽, 으아…, 으….”

보쿠토는 엎드려 몸을 웅크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거실 바닥에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아카아시의 전언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열일곱, 열여덟. 그 2년이 행복했던 건 네가 있어서였다. 그를 좋아해서였다. 잘 맞는 후배, 공을 올려 주는 세터,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파트너. 그의 미소에 온 세상이 웃는다 느꼈던 건. 아.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왜. 그를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나. 보쿠토가 꺽꺽 울음을 터트렸다. 쏟아지는 눈물 방울방울에 모두 아카아시의 얼굴이 비췄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아 갈라지고 부서진 아카아시가.

“아카, 아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카아시….”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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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덧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정의 흐름을 위해 지난 편들과 이어서 읽어주세요. 

이번편도 꽉꽉 압축되어 있어서; 스크롤바가 짧네요...ㅠㅠ 곧 7편입니다. 웹연재는 8편에서 마무리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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