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가 캐나다로 가서 해야 했던 촬영들은 끝났지만, 전반적인 영화 촬영은 현재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음날 크리스는 12시간 넘게 촬영장에 있다가 지친 걸음으로 내 아파트로 돌아왔다.


크리스는 이제 완전히 내 아파트에서 지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난 크리스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좋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고된 촬영 때문인지 눈 밑의 다크 서클은 짙어지고, 얼굴빛은 많이 창백해진 채 였다.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운 크리스의 얼굴을 보니 참 불쌍해 보였다. 나는 카우치 위에 널브러진 크리스에게 다가가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면서 말했다.


“일어나 크리스.”

“내버려 둬... 잭. 난 내일 까지 이대로 자버릴 거야.”

“침대에 가자.”

“뭐?”


크리스는 갑자기 머리를 번쩍 들면서 나를 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침대로 가자고.”

“왜.. 왜?!”

“많이 피곤해 보여. 침대에서 편하게 자.”


나는 크리스의 몸을 돌려 일으켜 세워줬다. 크리스는 순순히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나는 크리스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 위에 앉혀 주면서 말했다.


“조금이라도 푹 자둬.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한다며.”

“잠깐만..!”


나가려고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 크리스를 보았다. 크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했다.


“왜?”

“같이 자자.”

“...뭐?”

“네가 불편하지만 않으면 같이 자자고. 거울도 안 봤어? 너도 엄청 창백해. 나 때문에 널 카우치에서 재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다가가는 게 싫진 않다며.”

“...”

“come on. 이리와.”


크리스는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후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침대로 걸어갔다.


나는 반대쪽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크리스는 잠자코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이불을 덮고 서로를 보았다.


얼굴 위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면서 우리는 웃었다.


“와우.. 이거 어색한데?”

“맞아.”


하지만 뭐 어떠랴? 라는 듯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잘 자.”

“잘 자.. 크리스.”


나는 침대 끝으로 바짝 다가가 크리스에게 등을 돌리며 누웠다. 그렇지만 온몸은 이미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긴장을 풀고 싶었지만 내 침대 위에 바로 옆에 크리스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몸이 고단해서 빨리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크리스의 숨소리로 인해 나는 아주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크리스의 기척으로 인해 내 신경은 온통 크리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크리스를 느끼며 점점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크리스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잠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반쯤 잠이 든 상태였다. 몸은 이미 잠든 상태로 내가 어떤 자세로 누워있는지도 인식이 안 되고 있었지만, 머리는 이미 잠에서 깨어 지금이 몇 시쯤 됐을지 가늠 해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트 안에서 느껴지는 낯선 따뜻함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옆으로 누워 있는 내게 바짝 붙어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크리스는 깊게 잠들어 내 허리 위로 팔을 두르고 있었다. 허리에 부드럽게 올려져 있던 크리스의 팔이 느껴졌고 나는 숨을 멈추며 그대로 굳어졌다.


크리스가 너무 편안하면서도 가까이 내게 닿아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평온하게 잠든 크리스의 얼굴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함께 한 침대에 누워서 잠 들어 있는 크리스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숨 쉴 수 있게.. 내가 살 수 있게 크리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또 그에 반대로 크리스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랬다. 사실 여기까지가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크리스를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허리에 닿아있는 크리스의 팔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다시 침대 끝으로 갔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어서 빨리 다시 잠들 수 있길 바랐다.


~


병원에서 영양제를 처방 받아 먹었지만 아직도 몸에 기력은 없었다. 너무나 금방 피로해지고 있었다. 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이 상기될 정도로 올랐다가 겨우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 더욱 지쳐가고 있었다. 이미 바지의 치수가 헐렁해져서 버클을 좀 더 조인 상태로 옷을 입고 있었다.


닥터 그레너가 내 몸의 영양 상태가 굉장히 낮은 수치로 나왔다면서 충분히 먹으라고 얘기했지만 난 무엇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은 샐러드를 포크로 무의미하게 뒤적거리고 있었다.


“너 괜찮은 거야?”


고개를 들며 위를 쳐다보자 조나단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위를 올려보자 눈이 건조하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열이 느껴졌다.


“왜?”

“너 요즘 정말 이상해...”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가 이상해?”

“원래 이상했던 놈이지만, 더 이상해진 거 같아.”


조나단은 장난기 없는 목소리와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런 조나단을 물끄러미 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저... 내가 요즘 좀 지친 것 뿐이야. 난 요즘 말 그대로 번아웃burnout됐어.”


조나단은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매일 느긋하기만 했던 네가 번아웃 될 만한 게 뭐 있었다고?”


많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얽히고 엉켜버렸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먼저 일어날게.”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일어나 나가기 전에 조나단 어깨를 툭 쳐준 다음에 카페를 나섰다. 내 뒤로 조나단의 시선을 계속 느껴졌지만 난 그저 카페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정오의 햇살이 너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빛은 언제나 회색빛으로 가득찬 윌스트리트 조차도 빛나게 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정말 눈부시고 화려한 날씨였고, 그래서 이상하게 슬픈 기분을 느꼈다.


“아직 많이 아파보이네요.”


나는 갑작스러운 말소리에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자 내 앞으로 루크가 서 있었다. 늘쌍 그렇듯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로.


“안녕하세요. 루크.”


언제나 느닷없이 나타나는 루크가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해지고 있기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루크에게 인사했다.


루크는 내게로 다가오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잭이 병원에 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좋아보이진 않네요. 내가 바비의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 하고 있었나 봐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루크의 시선을 피했다가 고개를 들고 인사를 했다.


“음.. 병원에서 진찰 받게 해준 거 정말 고마워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루크가 내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물었다.


“네.”

“아직 아파 보이는데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내 즐거움이에요.”


내가 진심을 담아 말하자 루크도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이미 점심을 먹은 거 같고, 회사로 돌아가야 할 테니. 지금 당장 데이트는 무리겠네요.”

“아..”


데이트라니.. 나는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루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잭이 퇴근 후에 데이트하기로 해요. 6시에 끝나는 거죠?”

“일단 퇴근시간은 그때가 맞는데 어떻게 될지는..”

“좋아요. 그럼 이따 봐요, 잭.”


루크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또다시 자기 할 말만 해두고, 재빨리 걸어갔다.


나는 그런 루크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입도 닫지 못한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오전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서류들을 하나씩 처리하다보니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류를 빠르게 넘기고 있을 때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핸드폰을 받았다.


“yeah.”

- 잭.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핸드폰을 고쳐 잡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기 지어졌다.


“hey.”

- 일 많이 바빠?

“아니. 거의 끝나가고 있어.”

- 퇴근하고 시간 돼?


크리스의 물음에 나는 의아했다. 집에서 볼 게 아닌가?


“아.. 음. 물론이지.”

- 그럼 오늘 이보네하고 같이 저녁 할 수 있을까? 이보네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이보네 앞에서 그 지경이 된 후 그녀에게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맞다. 이보네에게 연락을 해줬어야 했는데.”

- 많이 걱정하더라. 그럼 함께 저녁 할 수 있겠어?

“그렇긴 한데.. 내가 두 사람 방해하는 거 아니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튼 퇴근 후에 이보네 집으로 와.

“아... 알았어.”


나는 핸드폰을 끊고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요즘 아프다는 핑계로 너무 정신없게 행동한 것 같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하다니. 스스로가 나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남들에게 신경 쓰이게 할 만큼 어리석게 구는 짓은 이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루크가 차에 기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루크의 약속을 떠올렸다. 루크는 기대서있던 몸을 일으키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어 루크를 보았다.


루크는 내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거칠게 머리를 뒤로 넘기며 스스로에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위해 노력했다.


“shit..!! 미안해요, 루크. 내가 약속을 잊고 있었어요.”

“오. 이런.”


루크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고 그걸 본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미안해요...”

“그럼 지금 어디 가야하는 거예요?”

“네... 이보네가 집에서 함께 저녁을 하자고 해서요.”


이보네라고 하자 루크는 밝아진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같이 가요.”

“네?”

“이보네가 저녁 초대했으면 분명 음식을 많이 준비했을 걸요?”


나는 이보네의 집에 처음 갔었을 때도 분명 음식이 충분히 많이 남았었던 걸 기억해냈다. 루크는 정말 이보네하고 많이 친한 사이 같았지만, 크리스가 있었기에 나는 망설였다.


“저.. 나만 초대한 게 아닌데요.”

“그래요? 그럼 집주인에게 정식으로 초대해 달라고 해야겠네요. 일단 타요. 가면서 연락 할 테니.”


루크는 문을 열고 내 등을 부드럽게 밀어서 뒷좌석에 날 태웠다. 그리고 루크도 내 옆에 앉았다. 루크는 운전기사에게 이보네의 집 주소를 말했다.


루크는 역시 이보네의 집주소를 알고 있었다.


루크는 핸드폰을 안 주머니에서 꺼내들고 단축번호를 누르는 듯 몇 번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이보네에게 전화를 걸었다.


"hello, beautiful girl~"


이보네가 전화를 받았는지 루크는 매끄럽고도 혀를 굴리는 듯 인사를 했다.



글쟁이가 꿈인 몽상가가 레인이라는 예명으로 적은 소설이 있는 곳입니다. 2차 창작인 팬픽을 많이 썼지만, 창작소설도 업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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