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Opps / 리틀믹스



Medic Travel Log

#1_소떡소떡을_위하여



완벽하게 혼자다. 의심스러워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지만, 진짜 혼자다. 그래, 우리 할배가 지독하긴 해도 내뱉은 말은 지키는 타입이긴 하다.

집사 아저씨, 수행 비서, 운전기사 등 자는 시간을 빼고 내 주위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존재들 뿐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사람도 없다.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정국 25년 인생에 정말로, 완벽하게 타인 속에서 혼자가 됐다.

어깨에 멘 배낭과 목에 걸린 카메라, 손에 들린 캐리어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해외에 갈 때면 왔던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인데 오늘은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배낭 여행객 차림으로 푹신한 소파에 앉아 여행 책자를 휘릭 넘겼다. 글자가 눈에 들어 올 리 없다. 처음 느끼는 흥분에 심장이 전신을 울렸다.

 

*

 

남들이 보면 스물다섯의 건장한 군필 남성이 배낭여행을 가는 게 뭐가 대수겠냐만 내게는 달랐다. 굴지의 기업 3세로 살아가는 삶은 모든 게 순탄했다. 태어날 때 물었던 다이아 수저 덕분에 걱정 없는 삶이었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콩가루 집안에서의 갈등, 재산싸움, 마약, 목숨을 위협받는 협박, 이런 건 해당 사항이 없다.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정정한 할배와 사이 좋은 아빠와 고모. 그리고 지금도 아침마다 입술에 뽀뽀하며 아빠를 배웅하는 엄마, 덩달아 화목한 나와 누나, 큰형. 이 정도 가정사에 불편함이 있다면 그게 또라이 아닌가?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진짜, 정말로 감사하다고. 너무 감사해. 그런데 딱 하나. 정말 딱- 하나. 약간의 불만이 있다면….


사람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물론 불필요한 말을 얹지도, 내게 거슬리는 행동 또한 없지만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내 옆에 붙어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도피하려 급하게 간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할배의 입김인지 뭔지 훈련소에서는 악마로 불리는 조교가 내게만은 천사였고,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도 소령 옆 책상에서 마우스만 딸깍이는 행정병이 되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다. 평일이며 주말이며 가리지 않고 면회 오는 엄마 덕에 나는 군대 면회가 주말에만 된다는 걸 전역 한 달 전에야 알았다.

도련님이라는 오글거리는 호칭도 익숙하고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 것도, 친구를 만날 때 수행원이 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다 익숙한데 좀 답답하긴 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 말고, 그 야경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불빛들이.


충동은 예기치 못하는 곳에서 왔다. 그 맛있다던 휴게소 소떡소떡을 먹고 싶어 엄마에게 말 하니 다음날 상 위에 소떡소떡이 올라왔다. 분명 내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봤던 비주얼은 떡과 소시지를 번갈아 가며 꼬챙이에 끼우고 대충 기름에 구워 케첩이 발라진 허접한 음식이었는데, 상 위에 있는 소떡소떡은 좀 달랐다.

이천 쌀로 만든 쌀떡에 독일식 가공법으로 조리사가 만들어 낸 수제 소시지, 쭉 뿌려진 케첩과 머스타드소스 대신 졸인 토마토 페이스트에 꿀을 넣고 겨자씨를 얹어 트러플 오일로 마무리한…. 요리…랄까….

꼬챙이 대신 놓여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며 낙담했다. 내 마음대로 길거리에 나가 떡볶이 하나 못 사 먹는 스물다섯의 인생은 뭘까.


이번 학기를 취업계로 때우고 대학을 졸업하면 그와 동시에 기업 승계 기자회견이 열린다. 꼭꼭 숨겨왔던 휘문 그룹의 차남 전정국이 세상에 알려짐과 동시에 정식적인 경영 수업을 받고 그룹 계열사 하나의 대표가 되는. 너무나도 완벽한 그림.

기업 승계에 대해선 어렸을 때부터 세뇌하듯 교육이 되어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취미로 하는 사진을 제외하곤 딱히 흥미 있는 일도 없었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꿈은 마음 한편에 있었지만, 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는데 내가 그들을 저버릴 순 없다. 그리고 사진이야 나중에 해도 되는 거고.

안락한 삶이 주는 안정감을 배반할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잘 안다. 하지만 소떡소떡이 준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렇게 살아가다 그 흔한 자판기 커피 한 잔 못 먹으면 어떡하지.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밝혀지고 난 후엔 더하면 더 했지, 덜 할 게 없었다. 당장 9월부터 형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처음으로 할배와의 약속을 깨기로 했다. 할배의 불호령이 무섭긴 한데 나도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먹어봐야겠다고, 소떡소떡을.

 


*


 

“배낭여행? 농담할 시간 없다.”


정정하다 못해 이두박근이 나만 한 할배가 안경을 고쳐 썼다. 시력도 좋으면서 중후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쓰는 안경. 도수 하나 없으면서 연기는.


“농담 아니야 할아버지.”


막둥이의 특권으로 할배에게 유일하게 반말을 트는 나를 향해 수행 비서가 헛기침했다.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뜻이었다.


“농담 아닙니다, 회장님.”


정색하고 말하니 할배가 안경을 코끝에 걸쳐 쓰고 나를 응시한다. 도수도 없으면서 진짜 연기는 끝내준다.


“나는 약속 어기는 사람을 아주 싫어해. 이번 학기엔 뭘 하기로 약속했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아니 없잖아요.”

“무슨 바람이 들어 이래? 차 비서 뭐 좀 아나?”


할배의 물음에 차 비서님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 비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잘 둘러대 주세요. 아까 연습한 대로.


“소떡소떡이 드시고 싶으신가 봅니다.”

“소떡소떡?”


씹, 망했다. 견문을 넓히고 다양한 인간사를 경험한 기업인이 인류에게 도움 되는 훌륭한 기업을 이끌 수 있다고 대본까지 써서 줬건만 망할. 차 비서도 결국 할아버지 사람인 걸 잊었다.


“할아버, 아니 회장님. 휘문 그룹이 어떤 그룹입니까? 통신, 공산품, 요식업, 건설 등 서민들 삶 깊숙이 스며들어 나라의 발전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기업입니다. 그런 기업을 훗날 물려받을 제가, 서민의 삶을 모른 채 경영에 뛰어드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따발총을 쏘아대듯 말을 내뱉으니 할배가 실소를 터뜨린다. 안 통할 거 같은데.


“그런 건 체험이 아닌 공부로 습득할 수 있다. 반론 있나?”


반론, 반론…. 말빨로 할배를 이길 수 없지만,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닙니까? 경험은 곧 통찰이 되는 것. 우리 기업의 소비층이 서민인데, 서민의 삶을 모른다면 진정성 있는 경영이 힘듭니다.”


나름 괜찮았다. 팔짱을 낀 할배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다. 최대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려고?”

“미국.”


된 건가. 제발. 제발.


“진정성은 무슨, 우리 서민 삶을 안다면서 한국도 아닌 미국? 안 된다. 나가 봐.”

“잠깐!”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논리론 이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협박이다.


“회장님과 딜을 할게요.”

“딜?”

“딱 한 달. 미국 여행. 아무도 없이 저 혼자요. 동선 공유 당연히 하고 숙박도 하라는 곳에서 할게요. 대신 혼자. 수행원, 경호원 없이 혼자. 한 달 다녀오고 나면 모든 건 할아버지, 아니 회장님 뜻대로 해요. 경영 수업도 정략결혼도 오케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정략결혼은 연애 결혼보다 흔했다. 이쯤은 큰 딜이 아니다.


“진정성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너 진짜 가려는 이유가 뭔데?”

“궁금해서요. 그냥 혼자 있는 기분이.”

“….”

“굳이 미국을 가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선 어떻게든 사람 붙이실 거잖아요. 미국도 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안 그러실 거 알아요.”

“….”

“할아버지 저 믿잖아요.”


할배가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적막에 차 비서가 눈치를 본다.


“보고서 삼십 장.”

“엉?”

“네가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를 보고서 서른 페이지로 정리해 와. 여행 일정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사업 제안서라고 생각하고 나를 페이퍼로 납득 시켜.”

“진짜? 진짜야 할아버, 아니 회장님?”

“진정성 있는 눈빛 연기 많이 좋아졌다.”


연기인 게 들켰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기필코 간다. 여행. 나 혼자.

 


*

 


페이퍼 서른 장을 채우기 위해 나의 성장사부터 앞으로의 비전을 도표료 만들었다. 여행 일정까지 완벽하게 첨부된 보고서는 서른 장을 훌쩍 넘어 소논문 수준의 두께였다. 보고서를 받아든 할배는 내용을 펼쳐보지도 않고 백달러 짜리 지폐 백 장을 건넸다.


‘배낭여행 흉내만 내.’라는 말과 함께.

 


*

 


“손님 탑승하실 시간입니다.”


전담 승무원이 탑승 시간을 알렸다. 할배 말처럼 흉내만 낸 배낭여행이었다. 일등석에 예약한 숙소는 모두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 그래도 온전한 내 시간이었다. 웰컴 드링크로 나온 샴페인을 연달아 네 잔 마시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른 자고 일어나야 낯선 땅에서 완벽히 혼자가 되니까.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와서야 눈을 떴다. 내리 14시간을 잔 비행이었다. 첫 여행지는 미국의 중심 뉴욕이다.

 


영어야 어려울 게 없지만 혼자 타지에 있어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럽긴 하다. 조기유학이나 원정 출산으로 미국이나 유럽이 익숙한 재벌가 또래들과 다르게 할배의 철칙으로 우리는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외에 나가본 건 부모님 출장을 따라 몇 번, 가족 여행으로 몇 번.

일찌감치 경영 수업에 뛰어든 형, 누나는 해외에서 잠깐이라도 살았지만, 아직 대학생인 나는 이번 기회가 처음이었다. 제대로 해외를 즐기는 것. 그것도 혼자서.


카메라 렌즈를 열어 공항의 모습 찍었다. 들떠있는 표정과 분주한 모습들. 저들에게 나도 수많은 여행객 중 한 명이 된 기분이 낯설다. 특별대우 같은 거 없는 행인 1. 물론 평범한 배낭 여행객치곤 주머니가 두둑하지만.


지금부터 시작이다. 남들처럼 자유롭게 소떡소떡을 먹을 시간이.

 


*

 

록펠러센터 근처의 힐튼 호텔에 체크인했다. 며칠 단위로 짐을 풀어야 하기에 최대한 간략하게 가져온 터라 정리할 짐도 별로 없었다. 시차 적응은 저녁에 술로 하면 될 것 같으니 일단 나가고자 거울로 매무새를 확인했다. 가진 옷이 명품밖에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S/S 컬렉션이었지만 최대한 무난해 보이는 티셔츠와 반바지 착장이라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인다.


카메라를 목에 메고 뒷주머니에 지갑을, 손엔 핸드폰을 달랑이며 들고 호텔을 나섰다. 기내식도 먹지 않고 풀로 잠을 잤던 터라 허기지려던 참이었다. 호텔 근처에 유명하다는 길거리 음식을 미리 검색해놔 그걸 먹을 생각이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소떡소떡을 먹을 순 없으나 길거리 떡볶이만큼이나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할랄 푸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노란 바탕에 ‘할랄 가이즈’라고 쓰인 티를 입은 직원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에게 은박 접시에 담긴 음식을 나눠준다. 관광지에 있는 푸드 트럭이기도 하고, 이곳이 제일 유명한 것 같은데 늘어선 대열에 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원하는 건 길거리 음식이 맞지만, 관광객 틈바구니에 껴 있는 게 아니었다. 로컬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면 더 좋겠는데. 할랄 푸드는 어딜 가나 제일 쉽게 보이는 음식이라고 하니 미련을 두지 않고 줄에서 빠져나왔다.


여행 책자에 나오는 관광지는 앞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출장으로도, 또 가족이나 결혼해서 신혼여행으로도. 할배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는 안전한 관광지 위주로 플랜이 짜여있었지만, 내 진짜 계획은 달랐다. 그냥 이 도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었다. 이 정도 일탈은 할배가 절대 모르겠지 싶다. 내 핸드폰에 위치 추적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전철을 타고 아무 역이나 내렸다. 스프링 스트릿이란 표지판을 지나쳐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저 앞에 푸드 트럭 한 대가 보인다. 스타벅스라도 가서 샌드위치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빨간 깃발에 ‘HALAL’이라 쓰여있는 걸 보곤 망설임 없이 트럭으로 향했다.

아랍에서 온 듯한 남자 한 명이 철판 위 가득 깔린 양고기를 볶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위생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인다. 미간을 절로 찌푸렸지만, 객기와도 같은 오기가 생겼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이거니와 손님 하나 없는 낡은 푸드 트럭에서의 첫 식사라니. 음식을 카메라에 담고 메뉴판을 살펴봤다.


“Can I get chicken over rice? (치킨 오버 라이스 주세요.)”

“Sure. (네.)”


한쪽에 쌓여있던 고기를 가져와 철판에서 볶기 시작하자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보기엔 그래도 냄새는 좋은데. 은박 접시에 흩날리는 밥알을 대충 담고 양상추와 데워진 고기를 올린 남자가 소스를 뿌리다 빨간 통을 들어 흔든다.


“Hot sauce? (핫 소스 괜찮아요?)”

“Yes, please. (네.)”


기껏해야 고추장 정도로 보이는 색깔에 웃으며 대답하니 하얀 소스 위로 붉은 소스가 뿌려진다. 뚜껑을 덮고 포크와 휴지까지 챙겨준 남자가 음식이 담긴 비닐을 건넸다. 10불이라 쓰인 메뉴판을 보고 지갑을 꺼내 지폐를 살피니 온통 100불짜리다. 할배가 준 돈으로 현금은 충분할 것 같아 생각 없이 가져왔는데 잔돈을 안 챙겨오다니. 철저히 혼자 계획한 여행이랍시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안 받은 결과가 이거다. 젠장.

9천 원짜리 음식을 사 먹고 10만 원을 건넨 꼴이니 남자가 난감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제 허리춤에 찬 돈 가방을 열곤 1불, 5불로 가득한 걸 보여준다. 거스름돈으로 천 원짜리 90장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다. 100불을 건네고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니 남자가 놀라며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이내 비닐 하나를 더 건넨다.


“Oh, Thanks. (고마워요.)”


동그랗게 생긴 양고기 미트볼과 음료수를 덤으로 준 남자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배고팠는데 잘 됐다. 다 먹을 심산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 작은 공원이 있어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기분이 한껏 오른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까고 소스가 잔뜩 뿌려진 치킨을 한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케-풉, 아 존나 매워.”


입에 넣자마자 퍼지는 매운맛에 바로 음료수를 까서 마셨다. 빨간 소스가 뭔진 몰라도 고추장보다 몇 배는 맵다. 혀를 식히고 음식을 뒤적거리며 흩어지는 밥알과 양상추를 깨작였다. 어디서 먹어본 적 없는 맛이다. 쓴맛도 나고, 좀 시큼하기도 하고. 반도 못 먹고 내 입맛이 아닌 것 같아 뚜껑을 덮었다. 여전히 주린 배에 서비스로 준 양고기 미트볼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건 적어도 맵지는 않을 테니….


“우읍- 아, 씨….”


씹자마자 코를 찌르는 듣도 보도 못한 냄새에 침까지 흘려가며 고기를 뱉었다. 툭- 하며 씹다 만 고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찍찍-”

“어억!!”


팔뚝만 한 쥐새끼가 나타나 내가 먹다 뱉은 고기를 채간다. 실험용 쥐도 아니고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야생 쥐. 존나 크고 새까만 쥐새끼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기졌던 속이 메스꺼움으로 바뀌었다. 당장 핸드폰을 검색해 미쉐린 레스토랑을 가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예약만 하면 되는 레스토랑을 놔두고 길거리 음식을 먹겠다며 나댄 결과는 헛구역질에 쥐새끼 먹이다.


당장 핸드폰을 꺼내 차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낭여행은 말 그대로 흉내만 낼 테니 괜찮은 레스토랑을 끼니별로 예약하고 주소를 보내놓으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한국은 분명 늦은 밤일 텐데 시차 따위는 무시하기로 했다.


-네, 도련님. 잘 도착하셨습니까?


웃음 띤 어조로 말하는 차 비서가 여유로워 보였다. 내 오기 덕에 예상치 못한 휴가를 맞이했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네. 덕분에요.

-호텔 체크인은 잘하셨습니까?

-네, 지금 거리에 나와 있어요.

-다행입니다. 모두 걱정했습니다. 체크인도 못 하실까 봐.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 호텔 체크인이 뭐라고 내가 이걸 못해?


-그게 뭐라고요. 쉽던데요.

-아, 늘 수행원이 따로 있었으니… 다른 뜻은 없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런 건 걱정 말고요.

-혼자서 여행하시는 게 불편하거나 어렵진 않으시고요? 혹시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사람을 붙일 테니 말씀하세요.


어라, 지금 혼자서 밥 한 끼 해결하지 못해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한 건데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마치 물가에 아이를 내 논 것처럼 걱정하는 말투. 당연히 혼자 여행은 무리일 줄 알았는데 잘 도착했다니 의외라는 저… 나를… 애 취급하는 말투는 뭐지. 게다가 혼자 생활하는 게 어렵냐니. 차 비서가 나를 배웅 한 게 고작 24시간이 안 됐는데 나를 너무 얕본다. 무시당하는 거 같잖아. 스물다섯 먹고.


-불편하긴요, 잘 지낸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한 겁니다.

-회장님이 한시름 놓으시겠습니다. 혹시 가셔서 밥도 못 먹는 거 아니냐고 걱정 많이 하셨거든요.

-밥이요? 지금 완전 맛있는 거 사 먹었는데요? 그거 자랑하려고 전화한 건데.


차 비서에게 레스토랑 예약을 부탁한다면 할배 귀에 들어갈 게 뻔하다. 황급히 노선을 바꿨다. 레스토랑 예약은 없던 일로.


-네.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네. 절대 걱정 마시라고. 잘 전해주세요. 그럼.


차 비서에겐 들리지 않을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벤치 위에 덩그러니 놓인 포크에 찍힌 미트볼을 바라봤다. 웁- 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얼른 음료수로 입을 막았다.


망했네, 영락없이 한 달은 고생 좀 하게 생겼다. 뉴욕 땅을 밟은 지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후회와 함께 시작하는 여행이다.

 


*

 


“Do you know where restroom is…? (화장실이 어디죠?)”

“Over there. (저쪽이요.)”


아침에 먹은 할랄이 문제였는지, 그 뒤에 허기를 못 참고 사 먹은 길거리 핫도그가 문제였는지 갑자기 마시던 물이 바뀌어서 그런 건지 요동치는 뱃속에 화장실을 드나들길 다섯 번이 넘었다. 딱히 먹은 것도 많이 없는데 낮이 되니 더워진 날씨에 식은땀인지 내 땀인지 모를 걸 뚝뚝 흘리며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섰다.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거의 없어 걷고 걸어 들어간 빌딩에선 가드에게 제지당하기 일쑤다. 빌딩 화장실이 아니라, 건물 자체를 살 수 있는 돈이 있는데 지금은 영락없는 여행자 행색이니 이런 취급은 당연한 건가….


결국 근처 쇼핑몰로 뛰어가 급한 불을 껐다. 배만 아프면 좋으련만 자꾸 미식거리는 속 덕분에 별로 먹은 것도 없는 음식마저 게워냈다. 이대로 야외에 있다간 더위에 죽거나, 배고파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 오늘 일정은 접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몇 번이고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차 비서에게 전화할까 망설였지만 ‘혼자서 여행하시는 게 불편하거나 어렵진 않으시고요? 혹시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사람을 붙일 테니 말씀하세요.’ 하는 말이 맴돌아 그만뒀다.


이번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평생 자립적인 삶은 꿈도 못 꿀 게 뻔하다.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두고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쉽게 잡히지 않는 옐로캡에 우버를 부를까, 내가 우버 앱을 깔았었나? 싶은데 머리가 어지럽다. 배앓이는 끝났지만, 헛구역질이 또 시작될 것 같다. 다시 화장실을 가야겠다. 하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멀리서 노란 택시가 오는 게 보였다. 손을 번쩍 들었다. 일단 숙소로 가자. 숙소로 가서, 숙소로 가서….

.

.

.

.

“Are you okay sir? (괜찮습니까?)”


나를 향해 달려오는 옐로캡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무슨 정신인지 몰라도. 어떻게든 호텔로 가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던 것 같은데. 

다행인 건 사지 멀쩡히 눈을 떴다는 것, 불행인 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I’ll call the doctor. (의사 선생님을 모셔올게요.)”


병원이구나. 의사라는 말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 개의 병상을 두고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이 보인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머리맡의 핸드폰이 울렸다. ‘울 할배’

어쩜 타이밍 한 번 빌어먹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이폰은 주변 소음 차단이 잘 되니

까. 괜찮을 거다. 병원인걸 눈치채진 못할 거다.


-어, 할아버지.

-내일 오전 비행기 예약해뒀다.

-어?

-차 비서가 잘 있다고 해서 한시름 놓았더니 아침에 눈 뜨자마자 다시 보고 받은 게 병원이라더구나.


병원인 걸 어떻게 알았지? 급히 통화 목록을 확인하니 차 비서에게 여러 통 전화가 걸려온 목록이 보인다. 병원 직원 중 누군가 받은 모양인데 입 싼 차 비서가 바로 보고한 모양이다. 에라이.


-아, 할아버지. 그게 오해가 있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쓰러져 엠뷸런스에 실린 위치를 들어보니 내게 준 여행 루트로 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약속을 어겼으니 반박도 없겠지. 내일 아침 비행기. 잔말 말고 와.

-안 가요.


배짱부릴 위치는 아닌데 어차피 내가 안 가면 그만이다. 사람을 시켜 나를 잡으러 온다면 다른 도시로 도망가면 그만이고. 비행 내역은 걸릴 테니 자동차라도 렌트해서 미국 땅덩어리 횡단하면 그만이라고.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그깟 배탈에 다시 한국을 갈 순 없다.


-배탈이야. 그냥 아무것도 아닌 배탈이라고. 못 가. 안 가. 안 가요.

-사람 보내서 시끄러워지기 전에 와.

-조건에 없었잖아요.

-뭐?

-이런 위급 상황에 대한 건 제시한 딜에 없었지. 우리가 한 딜은 한 달의 자유 여행과 그 후 할아버지 말에 대한 절대복종 딱, 이거라고. 할아버지 말대로 그냥 돌아가면 내가 앞으로 할아버지 뜻대로 움직일 필요 없어요. 안 해. 다 안 해. 대학 졸업? 안 해요, 결혼? 절대 안 하지. 경영도 안 해, 내가 하는 건 마약, 유흥 뭐 그런 거. 원해, 할아버지?


협박보다 생떼에 가까웠다.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조건을 걸지.

-조건? 무슨 조건?

-사람 하나 보낸다. 같이 다녀.

-최악이야. 할아버지 내가 드린 보고서 17페이지에 보면 왜 혼자 여행해야 하는 가에 대해 정리해놨으니 그거 읽어보세요.

-너에 대해 최대한 모르는 사람으로 구해보마. 위급 상황에 대비한 것뿐이니 네 여행에 일절 터치 없는 사람으로. 이 정도 딜은 나쁘지 않을 거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내 손자 새끼하나 한국으로 끌어오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걸 알 텐데.

-….


이번엔 내가 도리어 협박을 받는다. 그래, 할배 말처럼 말 한마디면 이 병원에서 나를 기절시키고 눈 떴을 때 한국일 수 있게도 만들 수 있는 게 우리 할배다.


-오케이, 딜. 근데 당장 어디서 어떻게 구하게?

-그건 신경 쓸 거 없고 수액 맞으면서 기다려, 두 시간 내로 알아보마.

-두 시간? 와 실행력 소름이다.


이틀도 아닌 두 시간. 진짜 소름이다. 아직도 할배 바짓가랑이를 못 벗어난 파파보이가 된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할배의 추진력이나 추진한다고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상황이나, 전부 소름돋을 걸 안다. 전정국은 배낭 여행객을 빙자한 재벌 3세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부디 나와 함께 한 달을 보내게 될 사람이 휘문 그룹 쪽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안하무인으로 굴 생각은 없지만, 최대한 없는 사람 취급할 마음이다. 할배가 제시한 금액의 배를 줄 테니 나에 대한 보고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매수할 요량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그나저나 위급 상황에 대비할 인력이면 경호원이려나. 경호든 뭐든 별로긴 하네. 기껏 마련한 자유에 누가 함께한다니. 그래도 평소 매일 보던 사람이 아닌 것을 위안 삼는다. 완전한 타인이니 무시도 쉽겠지.

나를 살피러 온다고 한 의사는 오지도 않는다. 뚝뚝 아래로 떨어지는 링거와 팔뚝에 꽂힌 바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

 


“Mr. JungKook Jeon? (전정국씨?)”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니 하얀 가운을 입은 백인 의사가 눈앞에 서 있다. 간호사가 내 팔을 가져가곤 팔에 꽂힌 링거를 빼냈다. 침대 사방으로 미색 커튼이 쳐져 밖이 보이지 않았다. 낮인지, 밤인지. 얼마나 잔 건지.


“Yes sir. (네.)”

“Where is a carer? (보호자는 어딨죠?)”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할배와 통화를 끝낸 지 정확히 2시간 10분이 지났다. 그래, 이 짧은 시간에 사람을 구하기란 아무리 할배라고 해도 무리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 나를 최대한 모르는 사람을 구하는 게 쉽나.


“I am alone…(저는 보호자가 없는…)”


보호자 같은 건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병상 커튼이 확 열렸다. 여전히 바쁜 응급실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뛰어온 듯 숨 가쁘게 서 있는 동양인 소년이 보인다. 급히 의사를 찾는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숨을 고른다. 아무리 그래도 진료 중인데 경우 없이 커튼을 젖히는 사람이 누군가 싶은데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귀엽네. 귀엽다. 어릴 때 좋아하는 애를 보면 괜히 짓궂게 대하곤 했는데. 그런 유치한 마음이 스물다섯에 다시 들 만큼 귀여운 외모였다.

나와 같은 동양인이다. 부모님이 편찮으신 건지 저가 아픈 건지 급하게도 왔다. 숨이 턱까지 차 헉헉대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의사를 보고 입만 뻥끗 거리다 진정하라는 간호사의 말에 심호흡 한다. 들숨과 날숨을 몇 번 번갈아 쉰 까만 머리의 소년이 겨우 입을 뗐다.


“Hi sir. Sorry I’m late.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늦어서 죄송하단 말을 내뱉은 남자가 침대에 붙은 내 이름이 적힌 명패와 나를 보곤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I am the carer of Mr. Jeon sir. (제가 전정국씨 보호자입니다.)”


자신을 보호자라고 소개하는 그 소년을 다시금 자세히 뜯어 봤다. 나보다 작아 보이는 키, 경호한다기엔 근육이 붙지 않은 얇은 팔, 내 보호자라고 하기에도 앳된 얼굴. 아무리 봐도 내가 보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의심쩍은 비주얼과는 다르게 정말 할배가 보낸 사람이 맞는 건지 부들거리는 한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여행 캐리어가 보인다.

동시에 내 손에 쥔 핸드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할배에게 온 문자였다.


[사람 보냈다. 더도 덜도 말고 네 건강만 책임질 사람이니 돈으로 매수할 생각은 마라. 헛수고다.]


한 통의 메시지와 더불어 내 ‘보호자’가 된 남자의 심플한 이력도 함께다.



라일리. 이름만큼 중성적인 외모의 남자, 보기와 다르게 나보다 두 살 위면서 경호원이 아닌 의학 전문 대학원생.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일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왔다 갔다 하는 미성. 긴장한 듯한 눈빛.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기에 말 없이 오래 눈을 마주쳤다. 화려하면서 단정하게 생긴 남자. 예쁜 듯 잘생긴 남자.


라일리, 라일리. 속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내 자유에 불쑥 끼어든 게 썩 나쁘지 않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 할배가 내 취향을 알고 있었던가, 내가 할배랑 취향을 공유할 만큼 가까웠나 싶을 만큼, 

벌써 보람찬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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