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찬 X 신해든



신해든은 스스로의 회복력에 조금 감탄했다. 맞은 직후 느끼기엔 최소 며칠은 고생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이 제법 괜찮았다. 다른 팀과 대련을 하는 정도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해든은 자연스럽게 11팀과 대련을 하던 중 싸움이 붙어 감금실에 갇혔던 일을 떠올렸다. 하루 조금 넘게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끔찍했다. 그리고 예찬에 의해 그곳에서 나온 후에는……. 몇 대를 맞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해든의 미간이 저도 모르는 사이 좁혀졌다. 

또 이건 조금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싸움이 붙었던 11팀의 소위들은 모종의 이유로 윗선에 제대로 밉보였다 한다. 인과응보라니까. 7팀 동기들은 그런 말을 했다. 신해든은 그게 인과응보 따위가 아니라 자업자득에 가깝다는 걸 알았지만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주 화요일에는 종일 앉아 군사학 교육을 받는다. 어제 몇 대 맞겠냐는 질문에 신해든이 백 대의 숫자를 지른 것에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없으니 엉덩이가 좀 터진 상태여도 상관 없겠다 싶었던 거다.

해든의 걸음걸이에서는 절뚝이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의자에 앉을 때 밀려드는 통증이 상당해 해든은 조심조심 엉덩이를 붙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최석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든. 치질이야?"


조심성 없는 커다란 목소리에 해든이 있는 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그중에는 먹잇감을 문 하이에나의 얼굴을 한 7팀 동기들도 몇몇 있었다. 해든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뒤질래? 그딴 거 아니거든."

"야. 치질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감기 같은 건데 뭘 또 숨기냐. 방석 구해다 줘? 도넛 모양으로?"

"씨발. 석호야."

"왜. 해든아."


최석호는 어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기껏 걱정해줬더니 닥치라는 소리나 들었던 그 일을. 방긋방긋 웃는 낯의 최석호는 교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해든을 놀렸다. 

군사학 교육은 일곱 개 팀이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다. 강의실에는 이미 볼 꼴 못 볼 꼴을 다 공유한 7팀 말고도 다른 팀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들으며 해든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 



군사학은 패논패로 성적에 합산되지만 패스의 기준이 높아 결코 만만한 과목은 아니었다. 특히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해든에게는 더욱 그랬다. 담당 교수는 빠른 속도로 진도를 나갔다. 해든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교수의 말을 모두 받아 적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얻은 지혜였다. 집에서 찬찬히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교재와 필기를 여러 번 비교해 봐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때면 신해든은 박예찬의 방문을 두드렸다. 예찬은 귀찮은 기색 없이 해든이 들고 온 교재를 받아 들고 그를 옆에 앉혔으니 가끔 신해든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두고도 질문을 했다.

예찬이 시간을 내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만약 군사학에서 낙제점을 받게 된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해든은 기를 쓰고 수업에 집중했다. 저만 알아볼 수 있는 날림체로 필기를 하던 해든은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한발 늦게 고개를 들었다. 강의실 앞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우선 수업 중인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신해든 소위."


그리고 들린 저의 이름에 해든의 몸이 움찔 떨렸다.


"따라오게. 1사단장님께서 찾으신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꽤 최근에 겪어본 적 있는. 합동훈련 날 3사단 소속 대위가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신해든은 예찬이 군에서 저를 찾았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면서도 에스퍼군의 1사단장이나 2사단장이 저를 찾는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보다야 이 편이 덜 놀랍다는 생각을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금 일어났다. 해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단장님과 관련된 일로 협박을 당하는 걸까. 머릿속에선 어느새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해든은 군의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알력다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1사단장인 윤형근은 예찬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 여기엔 1사단과 3사단 간의 사이가 아주 옛날부터 좋지 않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여러 개인적인 이유가 얽혀 있었다. 

차기 에스퍼군 수장 자리를 차지할 인물로 윤형근보다는 박예찬이 점쳐진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사람의 정치 성향이 전혀 달라 지지하는 정당 또한 반대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야당의 유력 인사를 부친으로 둔 박예찬은 그 존재만으로도 야당에 힘을 실어줬으니 여당에 몸을 담고 있는 입장이라면 1사단장인 윤형근 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박예찬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1사단장이 저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떤 험한 꼴을 당하더라도 입을 닫아야지. 굳은 다짐을 하며 해든이 1사단의 군용차량에 몸을 실었다.



1사단은 수도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고, 소위교육대와의 거리도 멀지 않았다. 이십 분 정도 차를 타고 간 후 1사단에서 내린 해든은 1사단장 윤형근을 만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대기해야 했다. 오랜 대기 끝에 그의 집무실로 들어간 해든이 우선 커다란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외치며 경례했다. 윤형근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해든의 얼굴을 훑어봤다. 꽤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래. 자네가 신해든 소위인가? 영상보다 실물이 낫구먼."

"감사합니다."


꽁으로 1사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닌지 윤형근은 그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갑작스러운 외모 칭찬이 나왔다. 진심인지 으레 하는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해든은 우선 감사 인사를 했다.


"자네를 부른 건 뭐 다른 이유는 아니고. 내가 조카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남자애고, 올해 스물셋이니 소위보다는 세 살이 많은가?"


그 뒤에 이어진 본론은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해든은 뒷짐을 진 자세로 묵묵히 상관의 말을 경청했다. 


"그 애가 에스퍼군 합동훈련 영상을 봤나봐."


에스퍼군 소위의 합동훈련은 민간에서도 크게 화제가 되곤 한다. 에스퍼들이 이능을 써가며 구현된 괴수를 처치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니 시민들의 흥미를 끌 법도 했다. 군은 이 점을 십분 활용했다.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는 뻔하지만 효과를 보였다. 군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군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건설해가며 영상을 송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합동훈련이 있는 날이면 각종 언론사들은 하이라이트 영상을 편집해 대대적인 보도를 한다. 올해 스물세살이라는 1사단장의 조카가 합동훈련 영상을 본 것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짐작이 가 해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영상을 보고 자네가 마음에 든다 하더라고.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예상 그대로의 말을 듣고 해든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었다. 동성애가 차별받던 건 아주 옛날의 이야기였다. 해든은 그의 조카가 내비친 호감이 단순히 우정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눈치챘다.


"다음 주 중에 하루 훈련 빼줄 테니 만나봐."

"……."

"명령일세."


까마득한 상관이 명령을 운운하는 지금 상황에서, 해든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해든은 속 편한 생각을 했다. 앉아서 밥이나 먹고 고개나 대충 끄덕이다 오면 재미가 없다며 다음 만남은 없을 거라고. 일면식도 없는 1사단장의 조카와 하는 데이트야 썩 내키진 않지만 못할 건 없었다.

다만 이 일이 예찬이 말한 특이사항에 해당하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해든은 이 일을 보고해야 하나 고민했다. 부대로 복귀해 오후 강의를 듣는 내내 해든은 생각에 잠겼다. 해든의 손에서 볼펜이 바쁘게 돌아갔다. 강의 내용을 죄 놓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결심이 섰다. 보고하지 않는 쪽으로. 해든은 예찬이 저를 아낀다는 걸 잘 알았다. 협박 비슷한 걸 받아 그런 자리에 나가야 하는 걸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해든은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두 사단장 간의 관계가 저 때문에 악화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1사단장이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는 예찬보다 훨씬 오래 군에 몸을 담았다. 군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어떤 형태로든 예찬에게 피해가 가는 걸 원하지 않았던 신해든은 대충 마음을 굳혔다. 조용히 만나서 거절하고 오자. 안 걸리면 되겠지.

마음은 굳혔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해든은 동의 혹은 공감을 바라며 최석호에게 이 얘기를 했다. 치질에 걸렸냐며 해든을 놀릴 때와는 달리 최석호는 진지하게 해든의 말을 들었다. 


"해든. 내 생각에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려."


최석호의 의견이 퍽 냉정했다. 신해든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하는 동안 한 주가 지나갔다. 그 사이 여러 번 예찬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지만 해든은 고민 끝에 입을 닫는 쪽을 선택했다. 

해든은 1사단장이 이 일을 잊었기를, 혹은 1사단장의 조카라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구체적인 일자와 시간을 전해 듣고 해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약속의 날, 오전 훈련을 마친 해든은 1사단장의 허락하에 합법적인 조퇴를 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대신 도심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탄 해든은 꼭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사실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애써 지워내며 해든은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만남은 널찍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어쩌다 보니 약속 시각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한 해든이 허브티를 하나 주문하고 상대를 기다렸다. 1사단장의 조카라는 남자는 시간에 맞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부를 한 번 휘 둘러보더니 해든을 발견하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와. 진짜로 실물이 더 낫네요. 윤수원입니다. 한 번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나와줘서 고마워요."

"신해든입니다."


애초에 해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걸 윤수원 또한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우선 나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해든은 다소 딱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말한 게 고작인 짧은 자기소개에도 윤수원은 굴하지 않았다. 


"합동훈련 영상 잘 봤어요. 처음엔 그냥 얼굴이 너무 제 취향이라 봤던 건데 능력도 대단하더라고요. 기사 나온 거 봤어요? 제 2의 박예찬이라는 말도 돌던데."


윤수원의 입에서 나온 예찬의 이름에 해든은 사레가 들릴 뻔 했다. 아닙니다, 하는 말이 조금 늦게 나왔다.

해든은 나름 계획을 세우고 이 자리에 나왔다. 단답으로 일관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만든 후, 그 속에서 차나 한잔 마시고 부대로 복귀할 원대한 계획을. 물론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해든은 예찬도 그렇고, 여기 나와 있는 1사단장의 조카도 그렇고 수도 출신 사람들은 따로 화법 교육을 받는 건지 궁금해졌다. 예찬에게는 대화를 주도하는 능력이 있었고, 윤수원 또한 그랬다. 윤수원은 능숙하게 대화를 주도했다. 질문을 하는데 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수원은 해든의 대답 사이에서 또 다른 질문을 뽑아냈다. 대화가 꽤 길게 이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고 느낄 정도로.

목이 탔던 해든이 벌컥벌컥 들이킨 탓에 허브티는 비워진 지 오래였고,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 윤수원의 라떼를 담은 컵 역시 바닥을 보였다.


"다 마셨으면 자리 옮길까요? 양식 괜찮아요? 예약한 곳 있긴 한데, 별로면 다른 데 가도 되니까 편하게 말해줘요."

"...예. 괜찮습니다."


차만 마시고 복귀하겠단 계획은 어그러졌다. 해든이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윤수원의 차까지 얻어 타고 레스토랑에 도착한 해든은 별수 없이 제 앞 그릇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었다. 윤수원은 나이프를 쥔 해든의 손을 유심히 봤다.


"10구역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그렇습니다."

"좀 의외네요."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랄까, 좀 더 양아치 같을 줄 알았거든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칭찬 맞아요. 짧게 짧게 대답하는 건 그냥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 같고. 남자랑은 연애 안 한다 이런 주의에요?"


해든은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10구역에서 여러 번 끔찍한 경험을 했던 신해든은 남자고 여자고 다 싫었다.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윤수원을 거절하려면 지금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든은 남자와 연애한다는 가정을 함과 동시에 떠오른 예찬의 얼굴을 최선을 다해 지워냈다. 조금 급하게 물을 들이키는 해든을 보며 빙긋 웃은 윤수원은 "그건 또 아닌가 보네." 하는 소리를 했다.

윤수원이 화제를 바꿨다. 에스퍼군의 1사단장을 큰아버지로 둔 그는 군대 내부 사정에 제법 빠삭했다. 그가 적절히 자기 얘기를 섞어가며 해든의 대답을 유도했기 때문에 해든은 또 어쩔 수 없이 길게 말을 해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윤수원은 자연스럽게 카드를 내밀어 계산을 했다. 메뉴판을 보지 못해 정확한 가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얻어먹기엔 과분한 가격이란 것쯤은 알았다. 해든이 윤수원의 계좌를 물었다. 가만히 그 말을 곱씹던 윤수원의 표정이 묘했다. 어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계좌를 알려달라고요? 지금 저랑 더치페이 하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에스퍼군 소위 봉급이 얼마나 되는데요?"

"이곳에서 한 끼 먹을 정도로는 받습니다."

"뭐가 됐든 제 용돈보단 적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같이 밥 먹자고 한 것도 맞고. 뭐…. 정 신경이 쓰이신다면 보고 싶었던 영화 있는데 지금 저랑 같이 봐주시면 되겠네요."


윤수원이 씩 웃었다. 어쩐지 또 말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함께 영화를 보자고. 이만 돌아가 봐야 한다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해든은 이번에도 윤수원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야 했다.

윤수원이 고른 영화는 하필 로맨스 장르였다. 또한 그는 아슬아슬했던 입장 시간에도 불구하고 굳이 줄을 서가며 팝콘을 구매했다. 에스퍼군 소위의 봉급보다 많은 용돈을 받는다는 그는 팝콘에 한해서는 돈을 아꼈다. 팝콘 한 개. 의도가 뻔히 읽히는 행동이었다. 해든은 공허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하며 팝콘에는 손 한번 가져가지 않았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꽉 채운 후 영화가 끝이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던 해든과는 달리 윤수원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화 괜찮았죠? 특히 주인공 둘이 차 한 대 훔쳐서 새벽에 도망갈 때."

"예."

"로맨스 장르라고 해서 꼭 애절하고 슬퍼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도 연애하게 된다면 그러고 싶어요. 좀 편안하고 유쾌하게."

"예..."

"소위님은 어떠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오늘 재밌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 …저도 그랬습니다."

"와. 소위님 거짓말 진짜 못하시네요."

"……."

"이제 더 붙잡아 둘 핑계도 없고. 이만 보내드려야 할 거 같네요. 데려다 드릴게요."

"집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윤수원은 여러 번 반복해 해든에게 차에 탈 것을 권유했으나 해든은 단호했다. 혹시라도 그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예찬이 보게 된다면 그 뒤에 일어날 일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윤수원은 결국 해든을 데려다 주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아직 방심하기는 일렀다. 그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온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에 A 호텔에서 파티가 하나 있어요. 파티라곤 하지만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깔끔한 옷 입고 가서 맛있는 거 먹다 오면 돼요."


해든의 눈이 일렁였다. 신해든은 몇몇 상황을 제외하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윤수원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해든이 급히 말을 꺼내려 했지만 윤수원이 한발 빨랐다.


"소위님이랑 파트너로 가고 싶습니다."


윤수원은 태연하게 폭탄을 던졌다. 대답하는 해든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저는 지금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친구를 만들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는 건 곤란합니다. 불편하기도 하고요.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름 직구로 던진 거절의 말이었다. 표정변화 없이 그 말을 모두 듣던 윤수원이 예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소위님.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

"저 지금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명령일세, 하고 말하던 1사단장의 얼굴과 지금 윤수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해든은 일이 커지고 있음을 느꼈다.





신해든 유죄......


JUNE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