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원호] 아침





 무섭도록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창문이 흔들렸다. 오래된 나무는 늦겨울 바람을 쉬이 견뎌내지 못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무(無)의 세상이 눈부셨다. 그 밝음은 종국엔 온기와 어둠까지도 모두 집어삼켰다. 태양이 저물지 않았고 밝음은 사라질 줄 몰랐다. 계속해서 눈이 휘날렸고 살아있는 것의 온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오르는 그들의 집을 제외하고는.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던 날이었다. 뿌연 연기들이 진한 고동색의 오두막집 안을 떠다녔다. 바람의 날카로운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미약하게 떨리길 반복하는 회색 커튼이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양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컵의 딱딱한 바닥이 테이블의 표면을 긁어내리는 소리가 퍽 조용했다. 창문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손가락들이 회색 커튼을 헤집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들을 모아 쥐고 매듭을 지어 묶었다. 그의 불투명한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그때, 끝에 다다른 음반이 턴테이블 안에서 덜그럭거렸다. 두터운 이부자리에 파묻혀 지금은 모습을 들어내지 않는 또 다른 이가 넣어둔 것이었다. 남자는 으레 이런 일을 겪어왔던 듯, 익숙하게 음반을 갈았다. 테이블 위 머그잔에서 새어나오던 연기가 점차 멎어갔다. 


 뭉특한 남자의 손가락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미건조했다. 남자는 안에서 별다른 답이 흘러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잠깐 동안 멈춰서 있었다. 아침마다 행하는 그의 인사법이었다. 이제는 알맞게 식었을 두 머그잔 속 커피 냄새가 제일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질러진 베개들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들이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커피향이 온 방안을 헤집고 나서야 두꺼운 이불이 움직였다. 커다란 애벌레가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 … 락."

 "일어나셨어요?"

 "벌써 아침, 인가."


 두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로 몸을 일으킨 남자는 익숙하게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완벽하게 미지근해진 검은 액체가 밤새 마른 그의 입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여전히 잠에 물들어있는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깬 남자가 수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도 락은 그의 옆에 서있었다. 땅에 깊숙이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올곧고 흔들림 하나 없는 모양새였다. 서서히 깨어나는 자신의 연인을 내려다보던 락은 그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눈보라가 오려나 봐요."

 "밤새 창밖이 시끄럽던데, 이미 시작된 게 아니었어?"

 "이번에는 유독 더 심하려나 봐요."

 " 큰일이네, 오랜만에 마트에 가려고 했는데…."


 이리저리 짓눌린 뒷머리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로 마트 걱정부터 하는 제 연인에게 락이 말했다. 며칠 전에 남매가 시내에 나갔다 오는 길에 생필품들을 다 사놔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에도 원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이에 무언가를 눈치챈 락이 천천히 제 손가락을 접어가며 읊조렸다.


 "기름도 있고, 생수랑, 말려둔 고기도 있는데요?"

 "… 그, 인마, 나도 알아!"

 "그럼 왜 그러시는데요?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 …."

 "팀장님?"

 "… 곧 있으면, 일 년,이니까. 뭐라도 해볼까, 싶어서."


 침대가에 서있던 락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여전히 창밖으로는 굵은 눈들이 휘날렸고, 향긋한 커피 냄새가 그들의 침실을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붉어진 목덜미를 숨기지도 못한 채 서있는 제 연인만 바라보는 원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것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락이 결국 무너져내렸다. 살짝 열린 방문 이로 새로운 음악소리가 번져들어왔다. 완연한 겨울의 어느 날의 아침이었다. 

마음 가는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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